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4화 (4/230)

〈 4화 〉 쌌으니까 샀다(4)

* * *

3시간이나 커마에 투자한 보람이 있네.

홀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자니, 옆에서 떨리는 카를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그 모습은 대체?”

외견이 변한 덕분인가. 약간 편해진 카를라의 목소리에 어깨를 으쓱였다.

“폴리모프 포션은 알지? 가끔 던전에서 발견된다는 그거.”

“…그거 엄청 비싸지 않나요?”

“내가 돈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여?”

“…….”

빨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보던 카를라는 이내 자신의 몸값을 떠올렸는지,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저어…하지만 폴리모프 포션은 입학시험 때 들통 나지 않을까요…?”

“뭐?”

“히익! 아뇨, 그게, 주인님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제가 입학할 때는 위장 입학일 수 있다며, 전부 확인했거든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가며 변명하는 카를라.

조금 더 편하게 여기는 건 맞지만, 자기 처지를 완전히 잊은 건 아닌가 보네.

“…일단 말해두겠는데, 이게 내 원래 모습이야. 아까까지의 대머리가 변장이고.”

“네? 어…그럼. 저기. 그게….”

“편히 말해. 괜히 우물쭈물 대는 거 답답하니까.”

“네엡! 그럼 주인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 건가요!”

“20살. 딱 아카데미 입학하기 좋은 나이지?”

사실 이 몸뚱이의 정확한 나이는 모른다. 이 세상에 주민등록증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언제나 게임 시작 시에 주인공의 나이는 아카데미 입학 최소 연령인 20살이었고, 올해는 원작이 시작하는 해다.

갑자기 이상한 설정이 추가된 게 아니라면, 20살이 맞겠지.

요 3년간 몇 번이나 죽을 뻔하기도 하고, 2만 골드씩이나 들여서 한다는 게 겨우 아카데미 입학인 건 좀 어이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H&A…히어로 앤 아카데미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세상의 중심은 결국 아카데미다.

앞으로 닥쳐올 재앙을 생각하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인 아카데미에서 힘을 기르는 건 필수고.

“스무 살…아카데미 입학….”

혼란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카를라.

설정상 카를라는 아카데미 최고 학년인 4학년 때, 가문이 몰락해 노예 신세가 됐었던가.

자신보다 4살이나 연하가, 그것도 본인은 끝내 졸업하지 못한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사람이 자기 주인이라니 심경이 복잡할 수밖에.

다만 지금은 감상에 빠져있어서는 안 된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으니까.

짝짝.

가볍게 박수를 치며, 카를라의 주의를 돌렸다.

“아무튼 린트블룸 호흡법을 안다는 거지? 잘 됐네. 오늘 자기 전에 기초 정도는 떼고 자자고.”

“앗. 네! 그럼 우선 공기 중의 마나를 끌어모아 심장에 고리를 만드셔야 하는데…아, 그냥 고리가 아니라 3중 나선으로 꼬아둔 형태의 고리여야 해요. 그리고 또…전신을 가득 채운 마나를 진동시켜 신체와 외부의 마나가 공명하는 상태로 만들어야….”

화들짝 놀란 카를라가 반사적으로 린트블룸 호흡법의 요체를 읊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나는 자력으로 주변의 마나를 느끼지도, 흡수하지도 못한다. 마나 감응 불능 체질이니까.

물론 괜찮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카를라를 샀을 리가 없잖은가.

“그만.”

“흡!”

내 명령에 설명하다 말고, 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카를라.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약간의 불안함마저 느껴진다.

“괜찮아. 네가 뭘 실수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거든. 다만, 입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잖아?”

“더 좋은 방법이라면…혹시 전수 말인가요?”

“그래 그거.”

전수.

게임에서는 특정 스킬의 숙련자가, 다른 이에게 입문 수준까지 그 스킬을 습득하게 해주는 시스템이었지.

여기서도 비슷한 느낌이다.

마법사라면 스승이 제자에게 마나 코어를 대신 만들어주고, 기사라면 오러 코어를 대신 만들어주는 형태.

물론, 어디까지나 코어만 만들어줄 뿐이고, 기운을 옮겨준다거나, 성취를 높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코어에 마나와 오러를 쌓고, 해당 호흡법의 진의를 깨닫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니까.

하지만 강제로 호흡법을 몸에 때려 박을 수 있는데다, 가장 위험하면서도 복잡한 코어 생성 단계를 안전하게 넘길 수 있기에 사제지간에는 제법 흔한 일이라고 한다.

“저…주인님? 제가 주인님께 전수 해드리려면, 주인님께서 아무런 호흡법도 익히지 않은 상태여야 하는데요?”

“응?”

아, 내가 다른 호흡법을 이미 익히고 있다고 착각한 건가?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네.

어떤 종류의 스탯이건, 통상적인 인간의 한계 스탯은 30이다.

뭐어…이런저런 특성이나 장비의 보조를 받으면 더 올라가긴 하기에, 어디까지나 순수 스탯의 한계가 그렇다는 소리.

그리고 내 마력 스탯은 18이다.

단순히 타고났다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긴 하지.

괜히 특성에 끝없는 마나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마력량도 상당한데, 호흡법은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하나밖에 익히지 못한다.

만약 다른 호흡법을 익히려면, 기존의 호흡법으로 쌓은 마나를 전부 날려보내야 하고.

그러니 카를라 입장에서는 당연히 내가 뭔가 익혔을 거라 착각하고, 의아해할 수밖에.

물론, 전부 착각이지만.

“괜찮아 이건 그냥 타고난 마력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해봐.”

“네? 이게 태생 마력이라구요…?”

“이번에도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아, 아뇨! 저는 한번도 주인님을 의심한 적 없어요! 하지만 이건 정말….”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끔대는 카를라.

그 모습에 낄낄 웃으며, 상의를 벗고 등을 내밀었다.

노예 각인에는 기본적으로 노예가 주인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이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명령도 한번 내려주는 게 좋으려나.

“더 걸리는 거 없지? 그럼 이제 [린트블룸 호흡법을 안전하게 전수해 줘.]”

“엇…네!”

카를라는 잠시 망설였으나, 금세 의욕적인 목소리로 내 등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한 감촉.

쏴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온기를 기점으로 차가운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큭!”

누군가 몸 안쪽에 냉수라도 틀어놓은 것 같은 기묘한 감각.

등에서부터 퍼져 나간 카를라의 마나는 호수에 파문이 퍼지듯, 잔잔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내 몸을 가득 채워나갔다.

몸의 중심부를 채우고, 손끝 발끝 같은 말단을 채우고, 하지만 머리만은 피해서 차오르는 마나.

그렇게 카를라가 내 몸에 자신의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하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 순간부터 카를라의 마나가 주입되려다 말고,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내 몸이 카를라의 마나로 꽉 찼다는 의미.

마치 어깨까지 냉탕에 담근 것 같은 느낌에 나도 모르게 파르르 떠는 순간.

웅­

전신을 가득 채운 카를라의 마나가 빠르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벌새의 날개짓…혹은 두드린 소리굽쇠와도 같은 느낌.

우웅­

진동은 점점 심해지더니, 이제는 아예 내 육체와 공명하기 시작했다.

웅웅웅­

심장에, 횡격막에, 그리고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는 무언가.

의식하지 않아도 내 호흡은 조금씩 특정한 규칙을 따르기 시작했으며, 심장 박동 또한 일정한 주기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분명 머리를 제외한 전신을 가득 채웠을 냉기는 점점 수축하더니, 이내 심장 부근에 베베 꼬인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원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고리를 완성하자.

두근.

호흡과, 심장 박동, 그리고 마나의 고리가 하나로 이어졌다.

동시에 가슴의 중심부에서부터 뻗어 나가는 마나의 선.

그 차가운 선은 내가 적응할 틈조차 주지 않고 체내를 구석구석 돌기 시작했다. 마치 혈관처럼.

이게 그 마나 회로인가. 그렇다면 심장에 생긴 고리는 아마 마나 코어겠지.

내 몸뚱이를 도화지 삼아, 복잡한 도형을 그려내던 마나 회로는 다시 코어로 돌아오는 것으로 한 폭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그 순간.

“허업!”

확 하고 전신을 가득 채우는 청량함과, 알 수 없는 고양감.

이에 몸을 맡기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우우웅….

카를라가 직접 움직일 때보다는 미약하지만, 그 대신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마나.

지금까지는 단순한 냉기처럼 느껴졌던 것이, 이제는 입자 하나하나까지 살아있는 생물처럼 느껴진다.

이를 어르고 달래, 심장의 코어를 지나 구불구불한 마나회로를 통과하도록 유도한다.

느리지만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렇게 기어이 마나회로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코어로 돌아오는 순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카를라가 주입한 마나가 오롯이 내 것이 되었다는 것을.

“하아….”

잠시 참았던 숨을 내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알림.

띠링!

【당신은 마나 감응 불능 체질을 앓았던 천재의 마나 호흡법을 익혔습니다.】

【특별한 경험 충족!】

【부정적인 특성 ‘마나 감응 불능(S)’ 이 사라집니다.】

그래! 이거지!

린트블룸 마나 호흡법을 익히면, 마나 감응 불능이 사라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마나 감응 불능을 타고난 린델하이트 가문의 시조가 자신의 체질을 치료하기 위해 만든 호흡법이 바로 린트블룸이기 때문.

원래는 중간보스화한 카를라를 쓰러뜨리고, 스킬북 형태로 얻을 수 있는 호흡법이지만.

카를라 본인이 멀쩡한 상태라면, 그냥 전수받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자꾸만 들뜨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지막 확인을 위해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

이름: 얀델

칭호: 길 잃은 이방인

기초 능력

근력: 11

내구: 10

민첩: 12

재주: 14

마력: 18

특성

끝없는 마나(A)

원소 친화(B)

뛰어난 기억력(B)

조잡한 무기술(E)

린트블룸 마나 코어(C)

====================

“오오….”

마나 감응 불능은 확실히 사라졌다.

…그리고 카를라의 용도가 하나 줄어들었다.

이제 남은 건 마법에 관한 지식과.

한 번도 안 썼다는 저 몸뚱이뿐이려나.

* *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