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팝니다. 몰락영애. 한 번도 안 쓴-1화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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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 〉 쌌으니까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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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없습니까? 무려 마도명가 린델하이트 가문의 영애입니다! 그것도 처녀!”

우스꽝스런 가면의 사내가 과장스런 몸짓으로 무대의 중앙을 가리켰다.

맹수라도 가둬둘 법한 투박한 철창. 하지만 그 안에 든 것은 동물이 아닌 사람이었다.

아니, 이제 사람이었던 것이라고 해야 하나?

노예에게 인권은 없으니 말이다.

주변의 비릿한 시선을 느낀 것일까. 철창 안의 여인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움츠러들었다.

백금색 머리카락은 조명을 받아 반짝였으며, 뽀얀 피부는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몸에 걸친 드레스는 면적이 적어 가리지 못한 곳이 더 많았지만, 신기하게도 천박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고귀함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섬세한 세공품을 닮은 위태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자태에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으나….

단 한 가지 요소로 인상이 확 달라졌다.

바로 눈.

진짜 루비보다도 아름답게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눈물에 젖은 적안은 겁먹은 토끼처럼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겨우 그것 하나만으로 그녀는 손댈 수 없는 세공품에서,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는 약자의 위치까지 내려오고 만다.

남자의 본능적인 소유욕을 자극하는 모습.

이에 홀린 손님들이 열성적으로 번호판을 들어 올리기 시작한다.

“1,000골드!”

“이쪽은 1,500골드요!”

“겨우 그 정도로 어딜! 3,000골드 가겠소!”

천정부지로 치솟는 금액.

그리고 이에 호응하듯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욕망.

하지만 무제한적인 욕망과 달리, 그들의 자본에는 한계가 있다.

“10,000골드! 10,000골드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겠습니다! 저 가여운 영애를 ‘돌봐’주실 신사분은 더 안 계십니까?”

진행자의 경쟁심을 긁는 재촉에도 객석은 더 이상 답하지 못했다.

하기야. 1만 골드면 제도 한복판에 거대한 저택을 짓고도 남는 돈이다.

시골 마을이라면 통째로 사들일 수 있을 것이며, 잘 만들어진 미스릴 무기를 하나 구할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다.

아무리 음심이 동한다 해도, 섣불리 쏟아붓기에는 망설여지는 거겠지.

“카운트를 세는 동안 더 없으시다면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하나! 둘!”

끝까지 아무도 나서지 않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내 앞에 놓인 번호판을 들어 올렸다.

“오오! 한 분 더 나오셨군요! 규정에 따라 현재 입찰 금액의 10분의 1 이상을 추가하셔야….”

“20,000골드.”

“…예?”

“20,000골드라고 했다. 물론 현찰로.”

조용했던 경매장이 이번에는 시끄럽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2만? 세상에 방금 2만이라고 한 건가?”

“맞네. 내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나 보군.”

“대체 누구기에 이런 거금을….”

아무리 미색과 재능을 겸비한 최고급 매물이라도 과한 액수에 당황한 사람들.

이는 본래 구매할 예정이었던 후덕한 손님…키프로스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허어…허어어….”

그저 허탈한 듯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와, 철창. 그리고 내 쪽을 번갈아 바라볼 뿐, 따라붙지는 못했다.

다행히 잘 된 것 같네.

어설프게 따라붙으면 모욕당했다 생각하여 암살자를 보내던데, 그러면 굉장히 곤란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입찰 금액의 2배 이상을 부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땐 재력의 차이를 인정하고 깔끔하게 포기했었지.

적어도 게임에서는 그랬다.

“아무도 없으시군요! 그렇다면 이걸로 오늘의 마지막 상품 카를라 린델하이트의 경매를 마치겠습니다!”

땅! 땅! 땅!

경매 종료를 알리는 소리에 히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카를라의 몸값이 2만 골드라.

이 정도면 싸게 잘 샀네.

***

“좋은 거래 감사드립니다. 이미 아시고 계시겠지만, 손님께서 구입하신 노예는 재능있는 마법사입니다. 그러니 마나 코어를 부수도록 명령하시는 게 앞으로 다루기에 편하실 겁니다.”

“알고 있다. 그보다 적당한 외투를 하나 받을 수 있겠나? 이대로 가기에는 너무 눈에 띄는군.”

“얼마든지 드려야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리 말하고는 주변의 시종…아니, 목에 그려진 가시덩굴 문양을 보아 노예인가.

아무튼 지배인이 주변 사람에게 외투를 가져오게 시키는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오늘의 수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카를라.

키는 내 가슴께 정도 될까. 하지만 움츠린 어깨 때문에 조금 더 작아 보인다.

길게 드리운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목덜미에는, 조금 전에 보았던 가시덩굴 문양이 얼핏 보였는데.

저게 바로 노예 각인이다.

이젠 카를라가 정식으로 내 노예가 됐으니, 당연히 새겨져 있겠지.

그나저나 신기하네. 이때의 카를라는 이런 느낌이었나.

항상 악신의 성녀로 거듭난 뒤의 미친년 같은 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지금 모습은 뭐랄까.

잔뜩 겁먹은 소동물이라도 보는 것 같아 무척이나 귀여웠다.

“확 잡아먹고 싶을 정도로.”

“읏…!”

나도 모르게 본심이 살짝 흘러나온 탓일까. 카를라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뭐어…지금 상황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 나 같았어도 쫄았을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혼자 머쓱해하고 있던 것도 잠시. 지배인의 노예가 큼직한 검은색 외투를 가져왔다.

이거라면 반나체에 가까운 카를라의 복장을 가릴 수 있겠지.

적당히 던져주자, 허겁지겁 자신의 몸을 외투로 덮는 카를라를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그럼 물건도 확실히 받았으니, 가보도록 하지.”

“예. 다음에 또 방문해주시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그래야지. 앞으로 이 경매장에서 나올 물건 중에 사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니까.

일단 몸을 가리고 나니 조금 진정된 걸까. 이쪽의 눈치를 보긴 해도 떨림은 줄어든 카를라를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조금 더 정확히는 카를라와 나 사이를 연결하고 있을 보이지 않는 사슬을 향해서.

카를라를 정확히 인지하고, 의지를 담아 말했다.

“[따라와라.]”

“넷, 네엡….”

고분고분하게 내 말에 따르는 카를라.

다만, 자기도 자기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느낌인가.

사전에 들었던 노예 계약에 관한 설명을 머릿속에서 되새겼다.

본능을 강하게 거스르는 명령…예를 들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 같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행동을 강제할 수 있다고 했던가.

정확히는 반드시 따라야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게 한다는 거지만,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

각인 하나 새겼다고, 사람을 도구나 다름없는 신세로 만들 수 있다니.

이렇게만 들으면, 노예 계약 마법이 정말 어마무시한 마법 같네. 사실 그리 편리한 마법은 아니다.

정신계 마법이 으레 그러하듯 새기기는 힘들지만, 반대로 해제하는 건 쉬우니까.

그래서 능력 있는 마법사가 노예가 되면 가끔 스스로 각인을 해제하고 탈출하기도 한다나?

지배인이 말했던 가장 먼저 마나 코어를 부수도록 명령하라는 게 그래서겠지.

나는 그럴 생각 없지만.

히어로 앤 아카데미. 혹은 H&A라고도 부르는 게임 속에 떨어진 지 어느덧 3년.

그동안 얼마나 이 순간만큼을 기다려왔던가.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상태창’

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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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얀델

칭호: 길 잃은 이방인

기초 능력

근력: 11

내구: 10

민첩: 12

재주: 14

마력: 18(잠김)

특성

끝없는 마나(A)(잠김)

원소 친화(B)

뛰어난 기억력(B)

조잡한 무기술(E)

마나 감응 불능(S)

※일부 스탯과 특성이 ‘특성: 마나 감응 불능’에 의해 봉인되어있습니다.

부정적인 특성을 삭제, 혹은 완화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경험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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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마법사 하라고 만든 것만 같은 스탯과 특성들.

실제로 마법사로 키우기 위해 만든 부캐긴 했지.

처음 시작할 때 주어지는 랜덤 패널티로 마나 감응 불능이 붙을 줄은 몰랐지만.

거기에 어째서인지 원작 시점보다 몇 년 이른 시간대의 H&A 세상에 떨어지기까지 했다.

내가 뭐 게임사에 항의 메일을 보낸 것도 아니고, H&A가 희대의 똥겜이거나, 갓겜이었던 것도 아니다.

…고인물 소리 들을 정도로 오래 하긴 했지만, 나보다 더 많이 한 썩은물도 제법 있었다고.

아무튼 별다른 전조도 없이, 그냥 자고 일어났더니 게임 속 부캐가 되어버린 상황.

처음에는 많이 놀랐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대략 3일 정도는 멍하니 거리에 앉아있었을 정도로.

뭐, 배가 고파지니까 정신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상태창의 정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나는 내가 플레이하던 캐릭터의 몸에 들어왔다는 거다.

하필이면 본캐가 아닌 부캐였고, 시작 시 주어지는 랜덤 패널티도 엿 같다는 문제가 있었으나…그럼에도 지금까지의 오랜 플레이가 헛되지는 않았더라.

H&A에는 골드에 한해서 같은 계정의 모든 캐릭터가 인벤토리를 공유한다는 특이한 시스템이 있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계정 창고나 만들어 줄 것이지, 쪼잔하게 골드만 공유가 뭔가 대체.

게임 플레이 당시에는 그리 투덜댔지만, 지금은 골드라도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H&A의 배경이 되는 세상…에우렐리아 대륙은 기본적으로 판타지지만, 이런저런 기술과 상업이 근대에 가깝게 발전한 동네다.

즉, 돈은 여기서도 옳다.

거기에 운영자가 유통 골드량을 조절하는 온라인 게임과 달리, H&A는 멀티 요소가 있을 뿐인 패키지 게임.

후반의 골드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나 마찬가지인데, 플레이 타임이 무려 7,000시간을 넘어가기까지 한다.

그 동안 쌓인 골드가 얼마나 많겠는가.

카를라를 사기 위해 쓴 2만 골드조차, 내게는 그리 큰 금액이 아닐 정도니 말 다했지.

하지만, 어찌 됐든 이곳은 판타지.

개인의 무력이 지구보다 훨씬 중요한 세상이다.

마법 못 쓰는 마법사로서, 얼마나 고통받았던가.

뜬금없이 붙어있는 조잡한 무기술이라는 특성은 나름의 발버둥이 남긴 흔적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마도명가 린델하이트의 마나 호흡법이라면, 마나 감응 불능을 치료할 수 있을 테니까.

카를라의 마나 코어가 있을 가슴께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흘러나온다.

어휴. 저 마나통 좀 봐.

저만한 마나를 다루려면 당연히 마나 호흡법도 제대로 익혔겠지.

“흐이익!”

내 시선을 무어라 착각한 걸까.

식겁한 카를라가 양팔을 끌어안듯,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려 들었다.

그런다고 가려질 사이즈는 아니지만.

에헤이. 안 잡아먹는다니까?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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