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6)

The First Chapter

카밀 마리아 힐렌브란트는 XXXX년도쯤에 출생하였다. 정확한 출생일과 나이는 미지수였다. 이름은 고아원장이 지어 주었다. 성은 고아원 명칭이었다. 그의 부모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갓난아기였던 그를 고아원으로 데리고 온 이는 가난한 노동자였다. 벌목 일을 맡아 방문한 숲에서 카밀을 발견했다고 그랬다.

머리를 맞댄 고아원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어떤 사람일지, 진짜 생일이 크리스마스쯤일지, 원래 나이는 몇 살일지, 고향은 추운 곳일지, 따뜻한 곳일지 따위 상상을 공유했다. 그 화제는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보통 아이들과는 다소 달랐던 한 아이만을 제외하고.

생일이며 나이, 고향이나 부모. 카밀은 그런 것들을 한 번도 궁금해해 본 적이 없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고, 은연중에 짐작했기 때문일까.

카밀은 애초 되찾아야 할 이름이 없었다. 나이는 세는 것이 무의미했다. 출생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카밀이 후에 알게 된 그의 과거이자 진실이었다.

잊힌 기억을 발굴한 날은 여느 때보다 훨씬 특별했던 생일이었다. 록시아스에 의해 새로이 탄생한 날이었다. 완전한 남자로 성장하기까지 매일같이 기다려 온, 바로 그날이었다.

카밀은 몸을 늘어트리며 눈을 깜빡였다.

세상 모든 빛이 집 안으로 모인 양 시야가 번쩍였다. 눈이 시렸다. 각막을 찌르는 광파를 물리치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고 재차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흰 천에 덮인 듯한 시야가 천천히 회복되었다. 눈앞에 놓인 물체가 서서히 선을 이루더니 색을 덧입기 시작했다. 하얀 종이에 그림이 그려지는 광경을 보았다.

완성된 그림은 새까맸다.

카밀은 어둠을 더듬었다. 그러자 그저 까맣게만 보이던 그림이 세밀하게 읽혔다.

칠흑에 먹혀들고 있는 군청색 하늘. 허공에 걸린 거뭇한 잎사귀들과 역시 새카만 앙상한 나뭇가지. 그림자가 구분되지 않도록 거무칙칙한 땅.

검은 숲이었다.

망각처럼 어스름한 풍경에서 카밀은 옛적에 분실했던 과거의 파편을 찾았다. 한 조각을 주웠다. 또 한 조각을 주웠다. 잘게 깨진 조각은 아주 많았다. 줍고 또 주웠다.

파편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카밀은 조각들을 끼워 맞췄다. 조각들이 모이고 모여 본모습으로 돌아갈수록 속에서 피눈물이 터지도록 괴로웠으나 멈출 수는 없었다. 잊힌 것이 놀라운 기억이었으니까, 완성해야만 했다.

어떻게 잊었을까….

복원된 기억 속, 검은 숲은 여전히 어두웠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그 시절엔 낮이 없었다. 매일, 종일 밤중이었다. 카밀이 살던 숲뿐만이 아니었다. 태곳적엔 지구 전체가 그랬다. 빛이라고는 춥고 습한 날에 일순간만 번쩍였다가 사라지는 번개나 별안간 떨어진 별에 맞은 나무나 들판에서 피어난 불꽃뿐이었다.

빛을 배우지 못하고 색을 구분하지 못해도 짐승들은 불편을 겪지 않았다. 도리어 자연 발생한 불덩이나 번개가 불편하면 불편했지. 그것들은 눈을 시리게 하고 피부를 따갑게 했다.

그 당시 존재하던 짐승들은 시력이 뛰어났다. 어둠에서 태어났으니 어둠에 익숙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별이라도 정확히 발견해 셀 수 있었고, 지표 없이 응달만 내려앉은 대지를 거닐어도 길을 잃지 않았다. 현대인들이 ‘공룡’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짐승, 지금은 사라진 짐승, 아직 현존하는 짐승,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강인한 짐승, 가장 하층에서 빌빌대는 나약한 짐승까지. 전부가 어둠에는 지지 않았다. 카밀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유일한 동족 또한.

네 다리의 역할이 각각 다르며 손이 다섯 갈래로 정확히 갈라진 모양새의 짐승은 카밀과 또 하나의 동족이 유일했다.

단둘이어도 외롭지 않았다. 최초부터 둘이었으니 고독을 학습할 틈이 없었다. 날 때부터 함께였던 둘은 가장 먼저 동질감을 익혔고, 동질감은 애정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가족이자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언어는 불필요했다. 눈빛과 약간의 손짓이면 생각이 전달되었다. 잠깐의 포옹만으로도 마음이 통했다. 깊은 접촉으로는 영혼까지 나눴다. 그러니 말이란 도구가 개발되지 않을 법도 했다.

언어가 없으니 이름도 없었다. 카밀도, 그의 동족도 이름이 없었다. 네 발로 걷거나, 땅에 배를 붙이고 기어 다니고, 혹은 하늘을 날고, 물속에서 숨 쉬는 짐승들도 이름이 없었다. 곤충이나 식물들도 이름이 없었다. 그 세상에서는 전부 공평하게 이름이 없었다.

그 많은 존재에 이름이 붙은 때는 한참 후였다. 각각의 존재들이 생김새에 따라 분류되었고 명칭을 부여받았다.

카밀은 ‘카밀 마리아 힐렌브란트’, 그의 동족은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라고 불리게 되었다.

회상 속 록시아스는 고스란히 아름다웠다.

카밀은 자신의 가슴팍에 뺨을 붙인 채 안겨 있는 록시아스의 흑발을 어루만졌다. 이어 등을 감싸 더욱 깊숙이 품에 넣었다.

머지않아 록시아스가 몸을 비틀며 품에서 벗어났다. 얼굴을 올려 쳐다본다.

그렇게 꽉 안지 마. 답답해.

세밀하게 변화하는 표정에서 속내가 자연스레 읽혔다. 카밀은 그를 향해 웃었다.

미안. 좋아서 그랬어.

그러자 록시아스가 웃음을 되돌렸다.

괜찮아.

다시금 품에 뛰어들었다. 허리에 팔을 감고, 가슴에 옆얼굴을 붙인다. 록시아스는 이렇게,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듣기를 즐겼다. 일부러 떨어트리지 않고 놔두었더니 온종일 듣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당시 불공평하다고 여겼던 점이 바로 그것이다.

록시아스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그는 록시아스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맨가슴에 아무리 귀를 깊숙이 파묻고 아무리 집중해도 록시아스의 가슴 속은 조용했다.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호흡 소리와 끌어안은 허리를 간지럽힐 때마다 나는 청량한 웃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록시아스가 속눈썹만 팔랑거려도 가슴이 동동 울렸다. 자신의 안에는 록시아스만이 울릴 수 있는 종이 있었다. 하지만 록시아스의 안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가슴까지 깊숙이는 아니어도 입 안과 배 속을 만져 보았으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아쉽기야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자신의 기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록시아스의 속이 고요해서 생긴 문제는 따로 있었다.

록시아스는 약했다. 걸핏하면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지기 일쑤였다. 다행이라면 치료법이 비교적 간단했다는 것이다. 원래부터 비어 있는 가슴 속 대신 배를 채워 주면 됐다. 혈액으로.

자신의 피건 짐승의 피건 상관없었다.

대개는 사냥을 해서 짐승의 피를 먹였다. 록시아스가 예고도 없이 실신했을 때는 사냥할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니 자신의 피를 먹였다. 피로 배를 채운 록시아스는 혈색을 되찾았고 언제 아팠냐는 듯 벌떡 일어나 웃었다.

고마워.

생기 가득한 붉은 눈동자로 사랑스러운 마음을 전해 주었다.

고맙기는.

함께 살아만 준다면 살점을 떼고 팔다리를 잘라 먹일 수 있었다. 마음뿐인 오기가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은 상처가 나도 눈 깜짝할 새 나았고, 팔이든 다리든 잘려 나가도 거짓말처럼 말끔히 재생됐다. 현재의 록시아스가 그렇듯이.

병약한 록시아스를 돌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항은 또 있었다. 바로 빛이었다. 당시 뭇 짐승들과 같이 록시아스는 빛에 속수무책이었다. 지금처럼 전기를 사용하지도 않고 인공적인 불도 없던 시절에는 자연만 조심하면 되었다. 번갯불, 운석이나 이외 자연 현상에 의한 화염 따위만 가까이하지 않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혹시, 하는 걱정에 별을 올려다보지 않게 말리기는 했다. 그만큼 빛은 위험했다. 빛이란 눈을 시리게 하고 급기야는 멀게 하며, 피부를 태우고 녹이며 종래에 재로 변하도록 했으니까. 자신만 제외하고.

록시아스를 보살피며 단 한 번도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어렵지도 않았다. 자신은 무적이었다. 산처럼 몸집이 큰 짐승도, 피부가 돌처럼 단단한 짐승도, 하늘을 날쌔게 가르는 짐승도, 독을 품은 짐승도, 전부 자신에게 패배했다.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록시아스 한 명 지키는 일은 호흡처럼 쉽고, 당연했다.

심지어 자신은 늙지도 않았다. 피만 제때 마시면, 록시아스 역시 건강과 젊음을 유지했다.

날짜나 시간의 개념을 몰랐어도 영원을 확신했다. 록시아스와 자신은 영원히 함께 행복할 것이다, 사랑할 것이다… 그럴 줄 알았다.

확신은 세상이 두 갈래로 갈라졌을 때 깨졌다.

밤.

낮.

평소와 똑같은 날이었다. 불을 실은 돌덩이들이 비처럼 내리기 전까지 말이다.

화마가 세상을 침략했다.

록시아스와 자신이 몸을 누이던 자리가 불탔다. 등을 기대던 나무가 쓰러졌다. 날짐승들이 돌덩이들에 맞고 추락하며 비명을 질러 댔다. 육중한 짐승들이라고 무사하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짐승의 사체가 사방에 널렸다. 지반이 흔들렸다. 땅이 갈라졌다. 바다가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물속을 헤엄치던 짐승들이 튀어 올라와 뭍에서 팔딱거리다가 벼랑을 굴렀다.

지옥 속에서, 카밀은 록시아스를 껴안았다.

불덩이가 쏟아지는 하늘을 보았다.

세상은 더 이상 까맣지 않았다.

해가 뜨고 있었다.

턱밑에서 하늘거리는 검은 머리칼이 짧아지고 있었다. 자신의 품에 채 담기지 못한 피부가 그을리고 있었다. 작열감 탓인지 록시아스는 비명을 질렀다. 괴로워하는 그를 안고서, 빛이 닿지 않는 곳을 향해 도망쳤다. 하지만 빛은 어디로든 쫓아왔다.

하늘의 반절이 주홍빛으로 변색되었다.

지평선 너머로 동그란 것이 올라오고 있었다. 달과 비슷했으나 달이 아니었다. 태양이었다.

아늑하기만 했던 지상에는 피신할 장소가 한 군데도 없었다. 절망, 아니, 좌절하면 안 됐다. 록시아스를 지켜야 하니까. 카밀은 포기할 줄 모르고 달리고 또 달렸다. 품 안의 록시아스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얼마나 뛰었을까. 록시아스가 아니면 울리지 않던 가슴 안이 심하게 요란했다. 목구멍이 조였다. 다물어지지 않은 입에서 차분하지 않은 호흡 소리가 불규칙하게 반복되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더웠다. 태양이 공기를 데워 기온이 올라간 탓이었다.

색채를 입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몸을 숨길 장소를 드디어 발견했다. 바다와 맞닿은 동굴이었다. 입을 벌린 석벽 안은 새카맸다. 저곳으로 가야 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어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록시아스는 점점 더 가벼워졌다.

모래사장을 지나, 발목을 휘감는 파도를 헤쳤다. 다신 없을 위협적인 순간에 육체는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해졌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튀는 물방울의 개수를 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매초 상승하는 기온을 민감하게 감지했다. 아, 갓 피어난 꽃잎보다 보드랍던 록시아스의 살결이 버석했다. 안 돼, 록시아스의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

목전에서 굉음이 터졌다. 지긋지긋한 불덩이였다. 정수리가 쭈뼛 일어섰다. 피난처를 품은 석벽이 쩍쩍 갈라지고, 무너졌다. 울퉁불퉁한 돌덩이가 날아왔다. 그것을 피해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뾰족하게 깎여 나온 거대한 돌조각에 등을 찔렸다. 등뼈가 부서졌다. 경고음처럼 울림을 지속하던 심장이 관통당했다. 입 밖으로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아파하면 안 됐다. 록시아스를 지켜야… 록시아스는.

‘…….’

카밀은 고장 난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그처럼 세상은 어느새 잠잠했다.

바다의 색깔은 처음 봤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잔잔한 수면에 깃든 자신이 일렁거렸다. 자신, 혼자만 일렁거렸다.

태양에게 정복된 시간이 왔다. 낮이었다.

하늘의 색깔도 처음 봤다. 바다의 색깔은 이어 두 번째로 보는 것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잔잔한 수면에 깃든 자신이 일렁거렸다. 자신, 혼자만 일렁거렸다. 자신의 품에 든 것은 검은색이었다.

처음 본 록시아스의 색은 까맣기만 했다.

…돌아가자.

제 기능을 상실한 머리로 굼뜨게 판단했다.

록시아스와 나의 안식처로.

카밀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돌렸다.

몸통이 허벅지만 한 돌조각에 관통당한 채였다. 뛰어난 회복력이 힘을 못 썼다. 작살난 뼈가 삐걱거렸다. 붙지 못하는 살점이 너덜거렸다. 몇 걸음마다 피를 토했다. 정신없이 달아날 때는 몰랐다. 아주 멀리까지 왔었다. 카밀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시야를 다잡으려 눈살을 찌그러트렸다. 휘청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기 위해, 쓰러지지 않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까만 록시아스는 전보다도 훨씬 연약해졌다. 손끝에 조금만 힘을 실으면 버석하게 바스러졌다. 머리카락 한 올만 빠져도 아까운 록시아스인데, 어루만질수록 형태가 깎였다. 부피가 덜어지고 무게가 줄어든다. 록시아스였던 재가 공중으로 휘날렸다. 그를 전부 붙잡아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그러나 손안에 남은 덩어리를 잃지 않으려면 흘러가는 가루들은 보내 줘야 했다. 록시아스를 보내 준다… 삶에 전혀 없었던 선택지였다.

고행과 같은 귀가는 목적지에 다다르기 전 끝났다.

평생 암흑만 거닐던 카밀이었다. 갖가지 색채에 물든 세상은 올바른 길도 혼란스럽게 꼬아 놓았다. 눈을 감고도 지날 수 있던 경로가 초행길로 변했다. 퇴화한 방향 감각이 발을 디디는 족족 미로로 이끌었다. 결국 카밀은 보금자리가 아닌 장소에 록시아스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쳤고, 록시아스도 지쳤을 것이다.

이토록 방황해 본 경험이 없기에 너무나도 피곤해서, 그래서 눈빛으로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 것이다.

쉬어. 내일은 꼭 집으로 가자.

카밀은 바닥으로 조심스레 누인 재 덩이에 속삭였다.

놀랐지. 내가 지켜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록시아스가 휴식하는 동안, 제 몸을 돌봐야 한다. 건강과 힘을 되찾아야 내일 집으로 가는 길에 록시아스가 편안할 터였다. 록시아스에게 짐이 되는 자신이란 용납되지 않았다. 자신의 역할은 버팀목이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 기둥이었다. 무자비한 빛을 차단하는 지붕이었다. 그러고 싶었다….

꿇어앉았다. 무능한 자신을 외면하는 듯 대답 없는 록시아스 앞에. 석벽으로 갈린 가슴팍에서부터 흐른 핏물이 허벅지를 타고 내려가 록시아스와 섞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오늘 식사를 챙겨 주지 못했다. 짐승들은 죄 멸종한 것 같았으므로 이제부터 록시아스는 오로지 자신의 피만 섭취할 수 있었다. 무력한 자신의 목숨이나마 끈질겨 다행이었다.

크게 다친 만큼 출혈이 상당했다. 머지않아 바닥에는 잿더미보다 핏물이 더 넓은 면적을 차지했다. 널찍하게 고인 피 웅덩이 위로 재 가루가 유유히 떠다녔다. 그를 응시하며 카밀은 아릿하게 미소 지었다.

얼마든지 줄 수 있어. 배가 잔뜩 부를 때까지 마셔.

속내로 중얼거리며, 흉부 밖으로 길쭉하게 삐져나온 돌부리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돌은 가슴 중앙에서 조금 비켜 왼쪽에 박혔다. 록시아스가 듣기 좋아하는 소리를 더는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돌덩이를 빼내면 가슴이 뻥 뚫릴 테니까.

그래도 삶이 먼저였다. 록시아스를 위한.

‘…….’

팔뚝 위로 불거진 핏줄이 꿈틀거리도록 모든 악력을 상박에 끌어다 썼다. 흉곽을 꿰뚫고 나온 돌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돌에 엉긴 살갗 틈새를 비집고 흐르던 핏물이 곡선으로 퐁퐁 튀었다. 사냥당하는 짐승들이 내던 괴성이 자신의 목청에서 터져 나왔다. 어쩌면 그보다 더 끔찍한 소음이었다.

잘게 금이 간 채로 겨우 모양을 유지하고 있던 등골이 산산이 조각났다. 뼈의 세편이 찢어진 근육에 박혔다. 빠져나가는 돌이 쓸고 지나간 살점이 갈리고 뭉개졌다. 해안가를 벗어난 지 한참이었으나, 폭포처럼 창류하는 핏물 탓에 물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산란한 시야를 사로잡은 검은 잿더미가 카밀을 죽지 못하게 했다.

‘아…!’

마지막 비명이 입술을 통과해 메아리쳤다. 카밀은 가슴팍에서 꺼낸 돌덩이를 떨어트리듯이 내려놓았다. 붉은 웅덩이에서 핏방울이 요란하게 튀었다.

‘하아, 하아.’

휑해진 가슴을 부풀리며 헐떡거렸다. 참혹한 통증에 허리가 저절로 굽어졌다. 흙바닥인지 연못인지 모를 저변에 얼굴을 비비며 신음했다.

‘아아….’

뻘건색으로 너저분해진 낯을 들어 올리며, 록시아스를 찾았다. 바닥을 더듬었다. 찰랑거리는 혈액 위를 둥둥 떠다니는 잿가루를 모았다. 흘린 보석을 줍는 이처럼 손짓이 다급했다.

만면에 덕지덕지한 피가 눈물에 씻겼다. 록시아스를 봐야 하는데, 눈앞이 흐렸다. 맑아질 기미가 없다. 아무 곳이나 짚으며 허우적거렸다. 그러던 통이었다.

‘…….’

어떤 것이 손아귀에 잡혔다. 제 가슴에서 꺼낸 돌덩이는 아니었다. 말캉했다. 카밀은 빨간 물이 엉겨 붙어 끈적거리는 속눈썹을 힘겹게 올렸다. 눈물을 치우기 위해 눈꺼풀을 비볐다.

생물에서나 느낄 법한 감촉이었다. 록시아스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밝아지면서부터 카밀의 기대는 싹트는 족족 밟혔다.

손에 잡힌 물체는, 돌덩이와 함께 뽑힌 자신의 심장이었다.

심장은 본체에서 절단되었어도 여전히 뛰고 있었다. 쿵, 쿵, 쿵….

카밀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숙였다.

굶주린 육식 동물의 아가리처럼 한껏 벌어져 있었던 공혈이 어느새 아물어 작아져 있었다. 으그러진 살가죽이 미끈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 안에 자리한 뼈와 근육, 다양한 굵기의 혈관 또한 제 모습으로 복원되고 있을 터였다. 망설이지 않고, 카밀은 회복되고 있는 신체를 마구 쥐어뜯었다.

이윽고 명확히 들여다본 가슴 속에 심장이 있었다.

어떤 부위든 재생되니 심장이라고 새로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카밀을 몰입시킨 문제는 심장의 유무가 아니었다. 심장의 개수였다. 갈비뼈 뒤에서 박동하는 심장은, 두 개였다.

벌려 놓은 가슴에서 손을 뗀 카밀은 시선을 도로 석괴에 꽂힌 심장으로 옮겼다. 그것은 이제 미약하게만 박동했다. 피를 받지 못하고 버려졌으니 식어 가는 것이다.

‘아….’

하지만 카밀은 죽어 가는 심장을 보면서.

‘하… 하하.’

웃었다.

몸부림치며 쓸어 모아도 결국에는 흩어지던 록시아스가, 고깃덩이로 변해 썩어 가는 심장 주변으로 알아서 몰려들고 있었다. 마치 고유한 의지를 갖춘 생명처럼.

그렇다.

새카만 가루들은 살아 있는 록시아스다.

자신의 피를 마시고 생기를 찾는 록시아스였다.

정지했던 이성이 도로 작동한다. 모든 사고가 록시아스에게 집중되었다. 록시아스를 되돌리는 방법에 특화되었다.

별안간 쇄도한 빛에 의해 괴사한 세상이라도 희망은 존재했다.

얼마나 으크러지든 다시 뼈가 붙고 근육이 짜이며 살이 돋는 자신처럼, 록시아스 또한 회복될 수 있었다. 무기력에 잡아먹히고 있었던 방금까지의 시간이 아까웠다. 카밀은 서둘러 채비했다. 록시아스와 재회하기 위한 준비였다. 필요한 것들은 진작 갖췄다. 절대 피가 동나지 않는 자신이었다. 무한한 자신의 심장이었다.

한 줌 염원에 말미암은 행동은 무섭도록 끈질겼다.

고통을 감내하는 억눌린 비명이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사이를 헤쳤다. 카밀은 자신을 상처 냈다.

너에게 내 심장을 줄게.

피가 혈관을 채 돌기도 전에 광활한 들판으로 흘렀다. 카밀은 계속해서 상처 냈다.

너에게 심장을 줄게.

바람이 살랑거리며 피 냄새를 실어다 날랐다. 카밀은 쉬지 않고 상처 냈다.

심장을 줄게.

뼈가 붙기 전에 으깼다. 근육이 짜이기 전에 찢었다. 살이 돋기 전에 뭉갰다.

줄게.

두 개의 심장 중, 록시아스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뜀박질하는 심장만을 골라 떼어 냈다. 과실을 수확하는 양 쉽사리 거둬 연인에게 바쳤다.

카밀의 안에서 생기자마자 떼어진 심장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를 향해 모여드는 재 덩이들은 점점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카밀의 바람처럼, 록시아스의 형태로.

형태는 커질수록 기저에 고인 핏물을 빠르게 흡수했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원하는 것을 주었다. 계속… 계속.

평화를 휩쓸고 지나간 낮이 고개를 숙이고, 또다시 밤이 깨어났다. 카밀은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밤이 반갑지 않았고, 낮은 위협적이지 않았다.

밤이 저물면 낮이 돌아왔다.

언제라도 숨 쉬는 자신의 심장을 가지고, 자신의 피를 마시고 태어난 록시아스는 빛에 다치지 않을 것이다. 걱정 따위는 없었다. 카밀은 그저 자신을 찢어발기며 고통을 지속했다.

두 갈래로 갈라진 세상이 어느새 익숙했다.

번갈아 다른 색을 입는 하늘과 땅이 새롭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무의미한 질문은 떠올리지 않았다. 영생을 소유한 카밀은 시간을 세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모습으로 완성되어 가는 잿더미의 크기를 잴 뿐이었다.

밤과 낮이 수없이 엎치락뒤치락 바뀌었다.

이제 잿더미는 거의 록시아스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얼굴 윤곽이 뚜렷했고 팔다리가 길쭉하게 뻗었다. 손가락 발가락이 생길 차례이다.

그때까지 카밀은 먹지도 않고 록시아스를 먹였다. 자신을 챙기면 록시아스를 보살피지 못한다…. 그래서 자학했다. 굶고, 상처 냈다. 록시아스가 본모습을 갖출수록 자신이 작아지는 줄도 모르고.

연인을 살리기 위해 흘린 피는, 햇빛에 불타 죽어 버린 땅에게도 삶을 새로이 주었다. 말라붙은 흙이 촉촉하게 부풀었다. 버석한 풀들이 싱그럽게 일어섰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통통하게 자랐다. 새 생명들은 거름의 색에 물들어 전부 붉었다.

수년간 피를 흘리고 심장을 뽑았다.

아무리 육체가 너덜너덜해져도, 욕심은 록시아스가 완성될 때까지 채워지지 않았다.

죽지 않는 몸, 그러나 한계는 있었다.

이어지는 고통에 지속해서 위협당한 육체는 카밀을 쉬게 하도록 힘을 숨기기 시작했다. 상처가 낫는 속도가 더뎌졌다. 구멍 뚫린 가슴팍이 전보다 널찍하지 않았다. 속을 파내는 손이 원래보다 아담했다. 꺼낸 심장 또한 크기가 작았다. 비명을 지르고 울음을 토하고, 위태롭게 흩날리는 웃음소리를 내는 목소리가 앳됐다. 카밀은 아이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록시아스는 형태가 완성되었다. 이제는 까만 재가 아니었다. 군데군데 하얀 살갗이 돋아 있었다. 손끝과 발끝에 가지런한 손톱이 덧붙었다. 윤기를 입은 머리카락이 자랐다. 감은 눈꺼풀을 따라 속눈썹이 매달렸다.

멸망한 세상에 홀로 남겨졌던 카밀은 록시아스를 되살리고, 땅을 새로 세웠다. 그의 주변은 이제 생명력이 넘쳤다. 풀숲이 우거졌다. 이른 아침에는 새가 지저귀고, 오후에는 풀벌레가 울었다. 밤에는 굶주린 짐승들이 유유히 지나다니고, 새벽에는 청량한 이슬이 맺혔다.

오랜 기간에 걸쳐 카밀이 뿌린 피를 흡수하여 재생된 생태계는 검붉었다.

검은 숲이었다.

***

이제 태양은 록시아스를 해치지 못했다. 파란 하늘을 가르고 육지로 내려앉는 햇살은 더 이상 화마가 아니었다. 따스한 온도를 품은 하찮은 광선일 뿐이다. 완연히 본모습으로 돌아간 록시아스의 육체는 빛에 화상을 입지 않았고, 바스러지지도 않았다. 완성된 그는 눈을 감은 채 유유히 햇빛을 거두며 찬연하게 빛나고만 있었다.

카밀은 스스로 되찾은 선물을 쓸어 만졌다. 연인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손은 아주 작았다. 다섯 손가락을 쫙 펼쳐도 록시아스의 뺨을 다 덮지 못할 만큼.

한참 록시아스를 쓰다듬던 카밀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짤막해졌음을 알아차렸다.

가슴을 하도 후벼 파서, 닳았을까.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자신의 몸이 낯설도록 아담했다. 게다가 무참하게 헤집어진 가슴팍이 회복되면서 더더욱 작아지고 있었다. 괴력을 과시하던 근육은 진작 감쪽같이 사라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록시아스를 만지기는커녕 스스로 몸을 지탱하여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바닥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얼핏 새카만 색을 입은 검붉은 잔디가 폭신하게 카밀을 감쌌다.

록시아스가 재탄생되기까지 수 세기란 시간이 소요되었다. 숲을 검붉게 물들일 양의 피가 소비되었다. 언덕처럼 쌓일 정도로 많은 심장이 사용되었다. 그동안 카밀은 쉬지도, 먹지도 않았다. 죽지 않는 육체라고 하여도 언제나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 지긋지긋하도록 오래, 비명을 외울 만큼 고통스럽게, 혹사당했다. 카밀의 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퇴화했다. 스스로 상처 낼 수 없도록 연약해졌다.

다행이다.

그래도 카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라고. 잿더미로 변해 부서졌던 연인이 도로 아름답고 건강해져서.

정말… 다행이야.

사고할 기력조차 남지 않은 머리로 되뇐 유언이었다.

안심과 동시였다. 여태껏 피로 대신 흘렸던 눈물이 눈가를 적셨다. 터진 실핏줄이 낫지 않도록 내내 뜨고 있었던 눈을 드디어 감았다. 록시아스만을 위해 작동했던 정신이 이제야 휴식을 갈구한다. 기나긴 고난의 흔적이 지워질 때까지.

‘잠’이 쏟아졌다.

아기는 쌔근쌔근, 처음으로 오랜 잠을 청했다.

미세 혈관 한 갈래 한 갈래까지 복원된 록시아스는 깨어났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속이었다. 숲은 칠흑 일색이었다. 흑색 토양에서 자라난 식물들은 녹음이 짙다 못해 새카맸다.

그것이 재회한 삶과의 첫 기억이었다.

갓 난 록시아스는 비척비척 일어나, 곧 눈 깜짝할 새에 그가 태어난 자리를 벗어났다. 배가 고팠다.

우거진 풀밭이 감춘 아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

새까만 그림에서 벗어난다. 새하얀 빛에 잡아먹혔다가, 뱉어졌다.

광원에 먹힌 세상이 본체를 되찾은 뒤, 카밀이 마주한 것은 콧대를 누르는 하얀 베개와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침대 헤드였다. 이어 카밀은 등허리를 누르는 무게를 느꼈다. 일순 진공 포장된 듯하였던 청력은 생체에서 퍼져 나오는 소음들을 도로 경청했다. 뒤통수부터 엉겨 오는 호흡 소리와 맥박 소리였다.

‘록….’

‘카밀아.’

‘…….’

‘정신 차렸어?’

***

록시, 내 피를 줄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마셔 주세요. 제발, 제가 죽을 때까지 마셔 주세요. 어차피 이제는 안 죽겠지만….

록시가 저를 만들었으니까, 저는 다 록시 거예요.

마음대로 가지세요.

내가… 만든 록시아스.

나는… 죽게 못 놔둬.

당신은 화를 내겠지만. 화내도, 어떡할 거야.

당신은 다 내 건데.

카밀은 언제나 정답을 말했지만, 록시아스가 진실을 알지 못해 다행이라고 여겼다. 떠올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가슴 여린 록시아스는 몰라도 되었다. 악몽은 자신 혼자 꾸면 되었다. 록시아스는 순수한 채로 지금을 살면 된다. 결핍된 과거는 자신이 현재로 채워 주면 된다. 시간, 애정, 그리고 록시아스를 먹일 피는 무한했다.

Till The Last

재로 변한 휴고,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카밀은 이슬이 증발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보금자리를 벗어났다. 록시아스가 자신의 박동을 듣지 못하는 곳까지 다다르는 동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록시아스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의 뜻을 거스를 수밖에 없었다.

미움받겠지.

원망의 대상이 되어도 좋다. 록시아스를 살아가게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저주의 말을 듣게 될지라도 황홀했다. 그런데 기쁨의 눈물도 아닌 것이 계속 뺨으로 내렸다. 예전 그때처럼 가슴이 뻥 뚫린 것도 아닌데 속이 휑했다. 추웠다. 고독했다. 당장 방향을 틀어 록시아스에게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발을 멈추지는 않았다. 자신을 미워하게 될 록시아스의 입으로 가 버리라는 말을 들을까 봐 두려웠다.

인간들은 멀리서부터 피하는 악취 나는 굴다리 밑에서 걸음을 멈췄다. 록시아스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손톱만큼 작게 보였다. 심지어는 록시아스와 자신이 머물던 동네도 아니었다. 도망친 시간은 체감상 짧았으나, 거리가 아주 많이 벌어졌다. 록시아스의 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또한 록시아스에게도 카밀의 소리가 전해지지 않으리라.

지저분한 어둠 아래에 자리 잡은 카밀은 스프레이 낙서가 가득한 벽에 등을 기댔다. 미끄러져 내렸다. 기분 탓이겠지만, 기운이 동났다. 우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록시아스가 보고 싶었다. 팔다리를 떼어 내는 것보다 록시아스와 떨어지는 것이 더 아팠다.

돌아가면 록시아스를 이해시켜야 할 터였다. 어째서 휴고처럼 죽지 않았는지. 어떻게 잿더미가 되지 않을 수 있었는지 말이다. 록시아스는 거짓말을 싫어했다. 죽음에 실패해 낙담했을 록시아스를 달래고만 싶었다. 그를 부정적인 감정에 빠트리는 것은 할 줄 모른다. 그럴듯한 변명을 찾아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변명을 가장한 거짓말. 칼날 같은 진실. 록시아스가 싫어하는 짓을 벌일지, 록시아스에게 솔직하기 위해 무기를 쥘지 골라야 했다. 카밀은 머리를 감싸며 신음했고… 고민은 길지 않았다. 록시아스를 울게 할 바에야 그에게 미움받겠다.

자신이 록시아스를 살리기 위해 보낸 나날들. 과거를 듣게 된 록시아스는 그 시간보다 길게 아파하며 자책할 것이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낮에도 괜찮았어요…. 록시아스를 닮아서 그런가 봐요.”

카밀은 떠올린 변명을 연습했다.

그런데 록시아스가 ‘어디 갔다가 늦게 왔냐’고 물으면?

“미안… 해요.”

아니. 그의 계획을 무산시킨 자신이 어디를 갔다 온들 록시아스는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돌아가자마자 록시아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다. 물론 죽지 않겠지만…. 혹시 록시아스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한다면, 죽어 줘야 할까?

그렇지만 죽는 체하면, 다신 록시아스 곁에 있을 수 없다. 숨어서 그의 주변을 배회하며 훔쳐보는 것밖에는 못 하겠지.

그러다가 휴고 같은 놈이 또 나타나면?

“아니야.”

더 알맞은 변명이 필요했다. 록시아스가 보고 싶었다. 어서 할 말을 찾아 연습한 뒤에 록시아스에게 돌아가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하고 싶다. 록시아스와 포옹할 수 없을 테니, 록시아스에게 뺨이라도 맞고 싶다. 사랑 고백 대신에 욕이라도 듣고 싶다. 록시아스의 목소리가 그립다.

숨지 않고서 록시아스의 곁에 당당히 머무르기 위해서는 록시아스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녹일 만한 변명을 골라내야 했다. 아, 하지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눈앞을 가리는 눈물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것 같다. 눈물이 아니라, 록시아스를 눈 안에 담고 싶다.

어엿한 어른인 카밀은 아기처럼 울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를 울리는 것은 록시아스뿐이었다.

흡혈귀가 되던 날, 기억을 되찾았을 때. 그동안 록시아스를 떠올리지 못하고 살았던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록시아스를 잊지 않고 조금이라도 빨리 록시아스를 찾아서, 그를 보듬어 줬어야 했다. 그러면 록시아스가 죽음을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감히 본분을 망각했고, 기어이 록시아스가 죽기 위해 자신을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몇 년이나 백치였다. 록시아스를 돌보지 못했다. 나약해 빠진 자신이 도리어 록시아스에게 보살핌받았다. 부끄럽게도.

전부 무의미해서 죽고 싶다던 록시아스의 음성이 귀청에 박혔다. 하마터면 그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살렸는데!

…누구를 탓할까. 록시아스에게 잊히지 않도록 의미를 속삭여 주지 못한 자신의 불찰이었다. 록시아스가 지긋지긋해 하도록 그의 곁에 머물며 되새겨 줬어야 했다. 당신은 그저 숨만 쉬어도 의미가 있다, 고.

그리고 당신에게 ‘나’라는 의미를 새기고 싶었다.

어떠한 결과라도 결국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 겨우 재회한 록시아스에게 예전처럼 사랑받지 못하는 서글픔도, 더 미움받을 준비를 해야만 하는 지금 상황도, 모두.

카밀은 눈물을 닦았다. 자신에게 울 자격을 주지 않았다.

록시아스에게 버림받지 않을 방법 강구에 집중하려 애썼다. 록시아스가 좋아하는 것으로 그의 마음을 돌려야 했다. 오래 혹사당했던 몸이 도로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도 사로잡지 못한 록시아스의 마음이었다. 노력하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록시아스가 좋아하는 것… 그를 기쁘게 할 만한….

‘심장을 꺼내서 보여 줄게요.’

그것으로 록시아스를 되살렸다.

그러니 굳은 마음도 녹일 수 있지 않을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집는 기적. 카밀이 아는 기적이란, 자신을 깎아서 만든 기적뿐이었다.

잠시간은 망설였다. 인간과 같이 나약해진 자신을 록시아스가 완벽히 재생시켜 주었다. 감히 록시아스의 피를 마시고 완전해진 육체를 함부로 갈라도 될까, 고민됐다. 사소한 생채기라면 금세 나으니 문제가 안 됐다. 하지만 심장을 꺼내는 것은 정도가 달랐다.

겉모습은 예전과 똑같지만, 속까지 그대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막상 가슴을 가르고 났는데 심장이 하나뿐일 수도 있었다.

하나 남은 심장을 꺼내면 죽을까? 그러면 록시아스에게 갈 수 없을 텐데….

일단은 갈라 보자.

카밀은 셔츠를 양쪽으로 당겼다. 툭, 투두둑,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드러난 맨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갈라서 보고, 심장이 하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돼.

세운 손가락을 가슴팍에 갖다 댔다. 안쪽에서부터 퍼지는 울림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숨을 들이마셨다.

***

저택이 시야로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눈으로 보일 듯 짙은 피 냄새가 카밀을 먼저 맞이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피 냄새는 분명 록시아스의 것이었다. 이토록 짙지 않고 희미했어도 확신할 수 있었을 터다. 그런데… 왜?

눈살을 찌푸린 카밀은 귀가하는 발을 더욱 빨리 움직였다.

피 냄새가 이렇게 멀리까지 퍼질 정도라면 그만큼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다. 카밀은 가장 먼저, 자신을 대신할 흡혈귀를 만드는 록시아스를 상상했다. 록시아스가 피를 흘릴 만한 일이라면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흡혈귀를 만들 때라도 그렇게 많은 피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시체를 되살리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 저택이 가까웠다. 피 냄새는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더욱 강렬해졌다. 카밀은 두 번째 가능성을 셈했다. 휴고는 확실히 죽었으니, 휴고와 같이 오래된 흡혈귀가 또다시 나타나 록시아스를 상처 냈을 경우였다. 만약 그렇다면….

순식간에 저택에 당도했다. 대문을 젖힐 여유도 없다.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느껴지는 기척이란 록시아스의 것뿐이었다. 다른 흡혈귀는 없었다. 그래야만 하듯이, 이 보금자리에는 오로지 록시아스와 자신. 단둘뿐이었다.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네모에 갇힌 실내는 깜깜했다. 불안한 마음이 급격히 안정되었다. 암흑은 자신을, 록시아스를 편안하게 했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리고 찰랑… 발부리에 치인 바닥이 물소리를 냈다. 아니, 도처에 깔린 핏물이 낸 소리였다.

“카밀… 카밀아.”

목소리가 내려왔다.

피 웅덩이를 가로지르던 발걸음이 뜀박질로 바뀌었다. 피바다가 철퍽거리느라 소란스러웠다.

핏물이 폭포처럼 흐르는 계단을 뛰어넘어 위층에 도달했다. 2층 복도는 붉은, 혹은 검은 카펫이 깔린 것 같았다. 익숙한 색채였다. 자신이 록시아스를 살려 냈던 숲도 동일한 빛깔이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심장 소리를 따라갔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건강해야 할 록시아스의 박동이 흐트러져 있었다. 고요하게 느껴질 만큼 미약했다. 암흑에 안정을 되찾았던 마음이 다시금 불안으로 요동쳤다.

이윽고 록시아스를 찾아냈다.

“아….”

드디어 록시아스에게 돌아온 카밀은, 악취 풍기는 굴다리 아래서 록시아스를 그리워할 때보다 굵은 눈물을 터뜨렸다.

“카밀아.”

록시아스가 절룩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온다. 그와 동시 자신에게 뻗어지는 팔은 너덜너덜했다.

내가 만든 록시아스….

“어서 와.”

내가 살린 록시아스가 망가져 있었다.

***

거짓말처럼 무너진 록시아스는 자신을 함부로 만지지 않았다. 굽어진 손끝이 살갗 근처를 배회하기만 했다. 조심스레 피워 낸 커다란 비눗방울을 대하는 아이의 행동처럼.

카밀은 자신의 가슴팍을 빈손으로 쥐었다. 왈칵 구긴 눈꺼풀에서 떨어진 굵다란 눈물방울이 록시아스의 발치로 추락했다.

자신이 부재한 동안 록시아스는 자신을 대체할 이를 찾지 않았다. 휴고 같은 놈이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록시아스는 온 저택 바닥을 채울 만큼 피를 쏟아 냈다. 록시아스를 저토록 다치게 할 수 있는 존재는 단 두 명뿐이었다. 자신과 록시아스.

왜… 그렇게 당신을 망가트렸어?

카밀아.

록시아스가 입술을 뻐끔거려 카밀의 이름을 조용히 만들어 냈다. 카밀은 목청이 틀어막혀 록시아스를 도로 불러 주지 못했다.

왜 그런 모습으로 나를 불러?

어떡, 어떡하지….

록시아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중얼거렸다.

카밀이 가면 어떡하지….

이윽고 록시아스는 무언가 막중하고 충격적인 일을 떠올린 듯이 어깨를 튕기더니 다급하게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사랑해.”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맞춰 온다.

길게 뻗은 록시아스의 목 중앙에 깊게 그인 상처가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세차게 목을 흔들면 얼굴이 툭 떨어져 나갈 것처럼 너덜거렸다.

그러나 카밀을 먹고 자란 몸은 마법처럼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웃지도, 통곡하지도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리는 카밀에게 록시아스는 이어 고백했다.

“보고 싶었어.”

저 말을 꺼내기 위해 저 지경으로 몸을 찢어 헤집었나.

밑바닥까지 깡그리 긁어 전한 마음에 카밀은 그저 기뻐하지 못했다. 과거를 모르던 때부터 공기처럼 갈구했던 마음인데, 결국 제 앞으로 내밀어지니 선뜻 받을 수 없었다. 동시에 느낄 수 없는 감정이 한 자리에서 자라나 카밀을 쥐고 위아래로 잡아당겼다. 육신이며 정신이 조각난 연인을 담은 눈과 환청 같은 고백을 머금은 귀가 완벽히 상반된 쇼크로 어지러웠다.

‘사랑해, 보고 싶었어.’

록시아스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 거짓말을 준비했다. 미움받을 각오를 다졌다. 뺨을 맞고 목숨을 위협당하는 둥 죄벌에 대비했다. 그러나 록시아스는 그의 오랜 바람을 무산시키고 뻔뻔한 얼굴로 돌아온 자신에게 믿기 힘든 진실을 꺼내 보였다. 거짓말, 미움, 죄벌 따위는 마침내 당도한 현실에는 없었다. 등줄기가 쭈뼛 일어섰다.

또한.

“후회해. 이제야 말해서 미안해….”

스스로 삶을 중단할 수도 없도록 강인해진 록시아스가 저토록 허물어지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책을 세워 놓았던 시나리오에 이런 모습인 록시아스는 없었다. 자신은 언제나 록시아스의 벽을 허물길 원했다. 그가 예전처럼 제 품으로 달려들길 원했다. 그러나 그 자체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언젠가. 멀지 않은 과거였다. 그 언젠가, 록시아스가 자신을 뇌리에 새기길 바라서 그가 보는 앞에서 죽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흡혈귀가 되기 전 백치였던 시절에는 실지 록시아스가 떠난 줄로만 오해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가증스러운 자신은 스스로 삶과 죽음을 선택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나, 록시아스에게는 그러한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죽음에 가까운 고통에 빠졌어도 실제 죽음으로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의 목숨을 좌우할 방아쇠는 자신이 쥐고 있었으므로.

뒤늦게 깨달은 사랑에 눈물짓고, 다신 오지 않을 듯한 만남에 좌절한 록시아스가 고를 수 있는 답이라고는 후회뿐이었다.

내가 준 목숨을 저주할까…?

“하….”

부디 그가 죽여 달라고 자신에게 빌지 않길 바라며, 카밀은 후회로 난도질당한 록시아스에게로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러자 록시아스가 휘청거렸다.

“가지 마, 카밀아.”

어느새 록시아스의 육체는 회복되었고 샘처럼 끊이지 않던 핏물도 멎은 채였다. 록시아스를 적시는 것은 이제 눈물뿐이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해 눈물짓고 있었다.

그리고 록시아스는 가슴에 손톱을 꽂아 넣었다. 카밀은 마치 제 가슴팍이 뚫린 양 통증을 느꼈다.

“조금만 더 있어 줘, 기다려… 선물을 주고 싶어.”

늘 건조했던, 건조해야만 하는 눈망울에 물기를 잔뜩 매단 록시아스가 더듬거리며 읊조렸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금방 꺼내니까, 조금만 참아 줘….”

록시아스는 기뻐 보이기도 했고, 서러워 보이기도 했다. 카밀과 똑같이, 함께하면 안 되는 감정이 록시아스를 지배하고 있었다.

“심장을 줄게.”

피가 겨우 말라붙고 있었던 가슴 안으로 손끝을 밀어 넣었다.

“아.”

록시아스가 심장을 주려고 한다.

아니야… 그런 건, 희생으로 애걸하는 법은 가르치지 않았다. 그것은 록시아스가 아닌 자신의 역할이었다.

록시아스가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린다.

아냐, 그러면 안 돼.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목을 휘감았다.

“그만해요, 록시.”

주는 사람은 자신, 그리고 록시아스는 받는 사람이다. 그것이 태곳적부터 결정된 각자의 몫이었다.

“늦게 와서 미안해요….”

붙든 손목을 끌어당겼다. 손끝이 박혔던 가슴팍에 구멍 다섯 개가 남았다. 그곳에서 피가 왈칵 터졌다.

잘못됐다. 속을 열어서 보이고, 선물을 주는 것은 록시아스가 아닌 자신이 맡은 임무였다.

“록시가 이렇게….”

자신이 역할을 망각하고,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임무를 내던졌기에 록시아스가 대신 아파하게 됐다.

“미안해요. 용서해 주세요… 용서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안 그랬어.”

영원한 시간 속에서 록시아스는 단 1초라도 아파해서는 안 됐다. 자신은 그것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울지 마세요, 록시, 내가 왔어요. 카밀이에요.”

록시아스가 제멋대로 아파할 줄 알았더라면, 이곳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리라. 록시아스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버리지 말아 달라며 입술이 닳도록 애원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록시가 만든, 록시를 사랑하는 카밀이에요.”

평생 그에게 외면당하더라도. 죽을 시도를 결코 멈추지 않을 록시아스를 함부로 말리며 그의 증오로 배를 채우게 되더라도.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록시….

사과 말고는 다른 말을 할 수 없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랬더라면 록시아스가 이토록 애처롭게 울 일도 없었을 테고, 그의 눈물을 닦아 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리고, 그런데….”

두 손으로 록시아스를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 손에 든 선물을 록시아스에게 건네야 했다. 벌써 식어 버렸지만, 록시아스에게 아무런 소리도 들려주지 못하지만…. 록시아스가 기뻐했으면 좋겠다. 웃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더는 울지 않길 바란다. 무표정한 얼굴과 무심한 손길로 그저 자신을 받아 주기만 하면.

“심장은 내가 주기로 했잖아요.”

굴다리 아래.

오랜만에 들여다본 가슴속에는 여전히 두 개의 심장이 있었다. 록시아스에게 또다시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뻐서, 떼어 내는 동안 아픈 줄도 몰랐다.

“받아… 주세요.”

록시아스에게 박동 소리를 들려주지 못해서 아쉽다.

한번 과소비 되었던 심장은 전보다 느리게 재생됐다. 어차피 끊어지지 않을 목숨인데도 육체는 끈질기게 자신을 보호하려 들었다. 뻐근한 갈비뼈 뒤로 어렴풋이 느껴졌다. 빈자리에 새로이 자라고 있는 심장은 아직 작았다. 박동은 다 자라고 나서야 시작될 터다.

그가 좋아하는 소리를 들려주지 못해서… 그래서일까. 록시아스는 기뻐하지 않았다. 화를 내지는 않았다. 무표정도 아니었다. 그는 방금까지보다 더 처절하게 울었다. 심장을 받아 주긴커녕 손으로 밀어내 멀리 치운다. 그리고 미친 듯이 중얼거렸다.

“아냐, 돌아와, 이건 아니잖아. 돌아와. 응? 돌아와, 카밀….”

아.

심장을 내던진 카밀은 즉시 두 팔로 록시아스를 감쌌다. 마치 예전으로 회귀한 듯 연약해진 록시아스가 부서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팔뚝에 온 힘을 실었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품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카밀을 찾아 애걸했다.

“카밀아, 내가, 내가 잘못했어… 돌아와… 가지 마, 나한테 와.”

틀렸다.

멍청한 놈. 카밀은 자신을 비하했다. 할 수만 있다면 목을 매달아 놓고 흠씬 패 주고 싶었다. 록시아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주어야 록시아스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 록시아스를 웃게, 아니, 울지 않게 할 수 있는지. 자신은 틀린 답만 내놓았다.

“다 줄 테니까. 해 달라는 건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돌아와. 가지 마. 나랑 있자….”

록시아스가 좋아하는 것. 록시아스의 눈물을 거두고 웃음을 끌어낼 수 있는 것.

“응…? 카밀아, 제발….”

바로 자신이었다.

심장 따위가 아니라.

“록시.”

카밀은 록시아스를 품에서 약간 떨어트려 자신을 보게 했다.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록시아스는 울음을 더욱 크게 터뜨렸다. 미아가 된 아이처럼 울었다.

“없어지지 마, 제발, 제발.”

“안 없어져요, 록시, 나를 잘 봐요. 록시…!”

분명 눈길을 마주 대고 있는데, 록시아스는 자꾸 멀리에 있는 무언가만 보았다. 카밀은 록시아스를 흔들었다, 꽉 품에 안았다, 흔들었다, 안았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기척과 체온과 손길을 실감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믿지 못했다. 심지어는 점차 들려오는 카밀의 심장 소리를 환청이라 여겼다. 어쩔 수 없었다. 카밀과 달리 록시아스는 기적을 직접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기적의 한가운데에 있었을 뿐이다. 혹은 그 자체가 기적이었을 뿐이다.

살갗을 미끄러지던 피가 버석하게 말라붙을 때까지도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떠나지 말라며 애원했다. 그러면 카밀은, 영원히 곁에 있겠노라 단언하며 록시아스를 흡수할 것처럼 강하게 품에 넣었다.

발에 채는 피 웅덩이가 낮게 가라앉기 시작했음에도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사랑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 카밀은, 자신도 꼭 같은 마음이라고 대답하며 록시아스의 머리를 살며시 눌러 제 가슴 속 소리를 듣게 했다. 새로운 심장 역시 록시아스를 향해 박동하고 있었다.

이윽고 달이 기울며 밤이 잠들었다. 한때는 두 사람에게 악몽이었던 햇살이 창가를 노크했다. 이제는 태양이 들이친들 아무렇지 않았다. 깨진 유리창이 빛을 머금으며 오색으로 반짝였다. 날카로운 절단면이 번쩍였다. 바닥에 깔린 웅덩이가 칠흑에서 검붉게, 이윽고 온전히 붉게 색을 바꾸었다. 록시아스는 어느새 조용히 카밀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이고만 있었다. 카밀은 흑발이 드리운 하얀 이마에 연신 입술을 내렸다.

낮이 싣고 온 산들바람이 커튼을 가지고 장난쳤다. 머지않아 그것도 질렸는지 한 몸인 듯 붙어 있는 두 사람에게로 다가간다. 록시아스의 등 뒤를 배회하며 흑발을 살랑살랑 건드렸다. 흑발을 감싼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술이 난 미풍은 금발 위를 세차게 가로질렀다. 내려온 앞머리가 흔들려도 카밀은 눈썹 한 올 흩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화석처럼 굳건했다. 종래 바람은 휘이잉, 궂은 소리를 지르며 복도로 빠져나갔다.

빛도, 바람도, 심지어는 시간조차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못한다.

고요했다.

그러나 고백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직 단둘이서만 공유할 수 있는 울림으로.

***

자신의 안위보다 상대의 불안을 삼키는 것이 먼저였다. 카밀과 록시아스가 맞붙은 몸을 떨어트렸을 때는 상대의 울림이 일상적으로 돌아온 순간이었다.

록시아스가 고개를 올려 카밀을 쳐다보았다. 아래를 향한 카밀의 눈동자는 전과 같이 생기가 만연했고, 다정했다. 또한 그대로 맹목적이었다.

이런 눈을 하고 어떻게 나를 떠날 수 있었는지.

질문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이란 록시아스에게는 부족한 덕목이었다.

“카밀.”

고작 이름이 불렸을 뿐인데 카밀은 대단한 고백을 받은 양 활짝 웃었다. 미소가 찬란했다. 카밀의 얼굴에 묻은 햇살이 그의 미소로 인해 반짝이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네, 록시.”

카밀은 대꾸하며 록시아스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더는 허락이 필요하지 않음을 안다. 이마에 입을 맞췄다. 록시아스가 어깨를 움츠렸다. 거부로 움츠린 것이 아니라, 등줄기로 전율이 일어 움츠러들었다.

“너….”

일순 굽어졌던 허리를 꼿꼿이 편 록시아스는 카밀의 뺨에 손을 올렸다. 부드럽게 쓸어내려 보았다. 진짜 같은 촉감. 현실 같은 온도. 카밀은 환상이 아니었다.

“어디 갔었어.”

잠긴 목소리는 록시아스가 다시 터지려는 울음을 참고 있다는 증거였다.

“어떻게… 말도 없이….”

돌아온 이를 추궁하자니 덜컥 겁이 났다. 반가운 마음을 심술궂게 표현하는 자신에게 카밀이 질리면 어떡할까 걱정됐다. 입술까지 빠져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카밀은 꾸욱, 록시아스를 깊숙이 안아 준 뒤 말했다.

“목욕해요.”

영겁처럼 길었던 짧은 이별을 겪고 난 모습은 엉망이었다. 뚫리고 찢긴 피부는 진작 나았으나 피딱지는 닦지 않으면 그대로였다.

“같이 씻어요.”

록시아스는 아랫입술을 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를 카밀이 가뿐히 안아 들었다.

말라 가는 핏물이 걸음을 디디는 신발 밑창에 들러붙어 끈적거렸다. 욕실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타일 바닥 틈새 구석구석까지 핏물이 고여 있었다.

록시아스를 조심스레 내린 카밀은 욕조로 성큼성큼 걸었다. 가장 뜨거운 물이 나오도록 조절한 수도꼭지를 열었다. 한기가 떠다니는 욕실에 훈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물소리를 등진 카밀은 록시아스에게로 돌아가 그의 셔츠 단추에 손을 댔다. 록시아스는 카밀이 하는 대로 놔두었다. 옷을 벗기는 손길이 차분했다.

“록시도 내 옷, 벗겨 줘요.”

하얀 셔츠를 록시아스의 팔에서 끌어 내린 카밀이 말했다.

“내가 벗는 동안 기다리면 추우니까요.”

알몸으로 혹한 속을 거닐어도 추위에 고통 받지 않는 육체였다. 그러나 록시아스는 동의하듯 고개를 간단히 끄덕였고, 카밀의 셔츠 단추에 손가락을 올렸다. 툭… 툭. 단추 하나가 풀어질 때마다 카밀이 가슴을 부풀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옷은 불그죽죽한 웅덩이에 스미며 흐물흐물해졌다. 욕조에 물이 반쯤 찼다. 수면 아래로 잠수하는 물은 욕조 바닥에 곧장 곤두박질칠 때보다 잠잠한 소리를 냈다. 카밀과 록시아스는 나체가 되었다. 부끄럽지 않았다. 숨길 것이 전혀 없었다.

씻지 않은 몸을 욕조에 담그면 목욕물이 핏물이 될 터였다. 우선 샤워 부스로 향했다.

샤워 부스는 탄탄한 두 남자가 들어서자 여유 공간이 없다시피 했다. 그에 아무도 불만 품지 않았다.

카밀은 높게 꽂힌 샤워기를 뽑아 헤드를 손바닥 쪽으로 내렸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적절한 수온을 찾았고, 록시아스의 발치로 물을 흘려보냈다.

“뜨겁거나 차가우면 말해요.”

차분하게 이른 카밀이 샤워기를 천천히 올렸다. 곡선을 이루며 하향하는 물줄기가 록시아스의 허벅지를 지나 가슴께에 멈췄다. 가슴팍에 얼룩진 피딱지가 물살에 녹더니 쓸려 내려갔다. 카밀은 활짝 편 손으로 록시아스의 구석구석을 부드럽게 닦았다. 흰 피부를 가린 붉은색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사이 끝까지 찬 욕조가 왈칵왈칵 물을 토해 내고 있었다. 카밀과 록시아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를 씻겼다. 타일 바닥이 욕조에서 흘러넘치는 물로 인해 저절로 청소되고 있었다.

샤워 부스를 나올 때,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을 잡았다. 욕실이 아무리 넓은들 욕조까지는 멀지도 않은데, 록시아스가 걷다가 미끄러운 바닥에 미끄러질까 걱정되어서.

그렇게 카밀은 거리낌 없이 록시아스를 아꼈다, 예전처럼. 록시아스는 과거를 잊었어도 카밀의 배려와 애정에 익숙한 양 굴었다. 핀잔하거나 내치지 않았다. 어색해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서로에게 닿는 모든 손길과 함께 내디디는 발걸음이 전부 자연스러웠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손을 쥔 채로 욕조에 한 발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두 발. 몸을 내렸다. 이어 카밀이 맞은편 남은 자리로 들어섰다. 그동안에도 붙잡힌 손은 떨어질 줄 몰랐다. 수도꼭지는 뒤늦게야 잠겼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수면이 살랑거리고 물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카밀은 자유로운 손을 뻗어 목욕 스펀지를 가져와 물에 적셨다. 그러자 록시아스가 얽힌 손을 천천히 떨어트렸다.

보디워시를 머금은 스펀지를 주무르자 금방 거품이 일었다. 카밀은 상체를 앞으로 빼 록시아스의 팔을 가져왔다. 손등부터, 기다란 팔을 간지럽도록 살근살근 문질렀다.

록시아스는 뻗은 팔에 시선을 고정한 카밀을 빤히 바라보았다. 끄트머리에 물방울이 맺힌 속눈썹 한 올 한 올까지 자세히 보았다. 단정한 이마에서 신경질적일 만큼 날카로운 콧날로 이어지는 선을 각도 재듯이 진득하게 훑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내리깔린 눈꺼풀이 들린다. 루비를 닮은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했다. 원래는 하늘을 반사한 다이아몬드 같았던….

“아가야.”

그렇게 불렀던 시절에.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 뜻밖이었다. 카밀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네, 록시.”

그리고 곧장 잘도 대답하고는 록시아스의 팔을 놓은 뒤, 반대편 팔을 물속에서 꺼내 닦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애 같네.”

꼼꼼히 씻긴 팔로 수면을 통통 튕긴 록시아스가 읊조렸다.

“그치, 카밀아.”

“…….”

카밀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홱, 록시아스가 카밀에게 붙들린 팔을 물렀다. 비누 거품이 묻은 살갗은 카밀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지듯 쉽게 벗어났다.

살짝 굽혔던 허리를 바로 세운 카밀이 물었고, 동시에 록시아스도 물었다.

“어디 불편했어요?”

“어디 갔었어?”

카밀은 입술을 아주 미세하게 벌렸다가, 꾹 다물었고, 답답할 만큼 느릿하게 목소리를 꺼냈다.

“…멀리요.”

즉시 록시아스가 질문을 다시 했다.

“얼마큼 멀리?”

“잘… 모르겠어요.”

‘흡혈귀’인 몸으로 몇 시간이나 뛰었다. 도시와 도시를 넘었을 것이다.

이어 록시아스가 또 물었다.

“왜 그랬어.”

질문과 책망이 함께였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눈빛을 피하지는 않았으나 턱을 약간 내렸다. 입술은 다물려 있었다.

“…….”

“대답해.”

“…무서워서요.”

“뭐가.”

“다 무서웠어요.”

카밀은 록시아스의 팔을 도로 가져오며, 대답 혹은 변명을 시작했다.

“제가, 록시 소원을 망쳤으니까. 록시가 저를 버릴까 봐 무서웠어요.”

“그래서.”

“그래서….”

“말도 없이 떠나려고 했어? 죽은 척을 하고?”

“아니요, 록시.”

스펀지로 록시아스의 팔등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카밀은 애써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어떻게 록시 없이 살아요… 그렇게는 못 살아요.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래도 시간이 좀 필요했어요. 록시가 많이 화났을 테니까, 용서받고 싶었어요. 난….”

일순 말을 끊은 카밀이 스펀지를 놓았다. 대신 양손을 록시아스의 손을 붙잡는 데 사용했다. 기도하는 듯이 모은 손에 록시아스의 손을 끼워 붙들었다.

“록시가 슬퍼할 줄 모르고… 미안해요. 록시, 내가 했던 말들….”

록시아스에게 눈을 떼고 싶지 않았지만, 고개가 저절로 숙어졌다. 목이 멨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록시가 아니라 나였는데….”

잠시간 입을 닫고 울음을 삼키는데, 정수리 위로 가벼운 무게가 실렸다.

“사과하지 마.”

금발에 이마를 내린 록시아스가 말했다. 물기 어린 카밀의 음성과 다르게 담백한 투였다.

“사과하라고 한 적 없어.”

그러고는 카밀의 앞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카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표정은 아직도 형벌이 내려지길 기다리는 죄인 같았다. 록시아스는 그의 양 볼을 붙잡아 입술에 쪽, 짧은 키스를 내렸다.

“안 죽고 왔으니까 됐어.”

“…….”

“미안하다는 말 말고,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거기까지 말을 마친 뒤 록시아스는 카밀을 놓았다.

카밀이 붉게 열 오른 입술을 움직였다.

“록시.”

“응.”

“사랑해요.”

거봐.

똑똑한 카밀은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늘 알아서 깨우치지 않았는가. 사랑에 대해서도, 자신에 대해서도.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든, 뭐든, 모두.

“죽을 때까지요.”

“누가 죽을 때까진데?”

“영원히, 라는 의미였어요.”

카밀이 손목을 감아 온다. 얼굴을 가까이 했다. 고개를 기울이며, 천천히 눈을 감고….

“우리 둘 다 안 죽을 거니까.”

약속을 속삭인다.

“그렇게 사랑해요, 록시.”

지켜질 수밖에 없는 기약이었다.

***

깨끗이 씻은 뒤였으나 욕실 바깥은 여태 청소되지 않은 채였으므로 발바닥이 더러워졌다. 샤워 가운만 걸친 두 사람은 사뿐하게 걸었으나 피 웅덩이는 신경질적으로 흔들렸다. 맑은 물방울이 흐르는 맨다리에 핏방울이 튀었다.

드레스 룸으로 먼저 들어선 록시아스가 덜렁 놓인 의자를 두드렸다. 앉으라는 뜻이었다. 그에 카밀이 자리를 잡았다. 록시아스는 헤어드라이어를 꺼냈다. 오랜만에 젖은 금발을 말려 주기 위함이었다.

헤어드라이어가 작동하며 기계음을 질렀다. 홧홧한 바람이 공기 중을 갈랐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꽂아 넣으며 드라이어 입구를 조금 더 머리칼 가까이 가져갔다. 금빛 머리칼이 공중으로 가볍게 휘날리며 아무렇게나 얽혔다.

손길은 머리카락을 헤치는데, 가슴 안쪽이 간지러워졌다. 카밀은 기분 좋은 미소를 입술에 걸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마음속에서 대번 노랫말이 재생된다. 언젠가 록시아스가 들려준 자장가였다.

안녕, 잘 자렴… 아기 천사의 보호를 받으며… 평화롭고 달콤하게 잠들렴… 꿈속의 낙원을 보며….

반복되는 멜로디가 끊겼을 때, 동시에 헤어드라이어의 소음도 멈췄다. 카밀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득한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듯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물기 마른 금발 속에는 아직도 다섯 손가락이 숨어 있었다.

카밀은 묘연해진 감상에서 빠져나오려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같은 때 록시아스는 노오란 머리카락이 살짝 드리운, 하얗고 기다란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목울대를 들썩거렸다. 다섯 손가락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굼뜨게, 목덜미를 집요하게 훑어내렸다.

“록시.”

목덜미를 휘감은 손이 카밀에게 붙잡혔다.

“…….”

록시아스는 대답하지 않고 갑갑하게 조여드는 목구멍을 가다듬었다. 카밀이 록시아스의 손등을 나긋하게 문질렀고, 도로 손을 거두며 말했다.

“마셔요.”

자신이 부재한 동안 록시아스는 내내 굶었을 터였다. 목이 말라도 한참 전부터 말랐을 것이다. 미리 생각하지 못한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목욕할 때 마시라고 할걸. 아니, 만나자마자….

“많이, 많이 마셔 주세요.”

“…….”

기다렸다는 듯이 록시아스는 허리를 숙였다. 카밀의 뒤통수에 코를 묻었고, 귓가 가까이 옮겼다. 숨을 폐부 저변까지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카밀의 목덜미를 세게 움켰다.

“잘 마실게.”

거절은 사치였다.

위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입술이 열리자 형형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뾰족한 그림자가 하얀 목덜미를 뒤덮었다.

카밀의 맥박은 언제나 록시아스에게 제 위치를 알리는 양 선명하게 울렸다. 송곳니가 정확한 곳을 파고들었다. 카밀이 턱을 젖혔다. 그의 머리칼이 록시아스의 뺨에 닿아 유연하게 구부러졌다.

목덜미를 감싼 입술이 살짝 오므라지며 살갗을 당겼다. 피가 뽑혔다. 선명한 통증에 카밀은 안도했다. 록시아스가 자신으로 마른 목을 적시고 주린 배를 채운다. 행복했다.

먹는 이도, 먹히는 이도 만족시키던 흡혈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록시아스가 고개를 물렀다. 송곳니가 살갗에서 떨어졌다. 동그랗게 뚫린 상흔이 혈액을 퐁, 퐁, 몇 방울 토해 냈다. 그 위로 새살이 돋았다.

카밀은 뒤를 향해 정면을 돌렸다.

“록시, 더 안 마셔요?”

사랑스러운 카밀. 조르는 얼굴이었다. 입 안이 핏물을 머금었을 때보다 달았다. 록시아스는 방금 흡혈한 티도 나지 않게 말끔한 입가를 괜스레 손등으로 닦고는 말했다.

“너도 마셔야지.”

“아.”

“배고프잖아.”

배려한 다음에는, 찰나 의심했다.

혹시 바깥에 있는 동안 나 말고 다른 것의 피를 마시지는 않았을까. 폐광에서, 냄새도 지독하며 맛도 형편없을 것이 분명한 피를 꿀꺽꿀꺽 넘기던 어느 날의 카밀이 불현듯 떠올랐다. 속이 울렁거렸다. 시기 탓이리라.

목덜미에 닿은 손이 전과 같이 금발 속으로 들이쳤다. 하나 전처럼 상냥한 손길은 못 됐다.

카밀의 머리채를 쥐어 당긴 록시아스가 물었다.

“아니야?”

연인의 피를 맛보기도 전에 사탕을 굴리고 있었던 듯하다. 카밀 또한 텅 빈 입 안으로 퍼지는 단맛을 느꼈다.

“맞아요, 배고파요. 목마르고. 너무….”

허기지다고 단언한 것치고는 미소 지은 얼굴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카밀은 아름다운 탓에 록시아스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다. 잡힌 머리채가 더욱 당겨졌다. 위에서 얼굴을 내린 록시아스가 허리를 더욱 굽혀 가까이 다가왔다. 록시아스의 그림자가 카밀의 이목구비를 덮었다.

“정말?”

“네, 그러니까 빨리 주세요…. 록시 피.”

반전된 시야 안으로 가득 담긴 서로를 고집스레 응시했다. 이윽고 카밀이 입술을 열었다. 록시아스가 그에게 입술을 겹쳤다.

등 뒤에 섰던 록시아스가 점점 자리를 옮겨 왔다. 위를 향해, 아래를 향해 꺾인 고개가 머지않아 바로 세워졌다. 상대와 입술을 틈새 없이 물리기 위해 턱을 약간씩만 비틀 뿐이었다.

입 안으로 혀가 오가며 공유되는 것은 타액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밀은 더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았다. 아니, 실은, 키스가 길어질수록 허기와 갈증이 난동을 부렸다.

록시아스의 샤워 가운 매듭에 손가락을 걸었다. 동시에 카밀은 맞물린 입술을 떨어트렸다.

“목욕, 다시 해도 괜찮아요?”

매듭을 당기며 물었다.

록시아스는 대답 대신 카밀의 위에 올라앉았다.

입술을 포개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터뜨린 웃음을 서로에게 먹였다.

***

“이사하자.”

어차피 다시 목욕할 거니까, 라는 속셈으로 피바다를 실컷 뒹군 후였다. 천장을 보고 나란히 누워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록시아스가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 한쪽 팔을 베개 삼으라고 내어 준 채였던 카밀이 홱 고개를 돌리고는 물었다.

“이사요?”

“이 집, 버리게.”

“왜요?”

“그럼 이거 다 네가 닦을래?”

록시아스가 바닥을 두드렸다. 본래 둔탁한 소리가 나야 할 바닥에서 철퍽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눈썹을 꿈틀, 거린 카밀은 고개를 원래처럼 돌려 천장을 면하고는 읊조렸다.

“역시 록시는 현명해요.”

“그럼.”

푸흐흐. 실없이 웃은 카밀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록시아스의 눈동자가 그를 향해 굴렀다.

“어디로 가요? 이사.”

자신에게 눈을 떼지 않는 록시아스에게 연속으로 세 번 키스한 뒤에야 카밀은 물었다. 이어 카밀의 목덜미에 팔을 걸고 제게로 끌어당긴 록시아스가 또다시 카밀에게 입을 맞춘 후에 자신만만한 투로 일렀다.

“걱정 마, 나 집 많아.”

“얼마나 많아요?”

록시아스 또한 상체를 세웠다. 기력이 없는 이처럼 카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흐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세기 힘들 만큼.”

록시아스의 허리에 팔을 두른 카밀이 거듭 질문했다.

“집을 왜 그렇게 많이 모았어요?”

“돈 쓸 데가 없어서.”

“그렇구나….”

말꼬리를 흐린 카밀은 곧 “아.” 무언가 떠오른 듯 눈동자를 올렸다가 내리고는 말했다.

“이사하기 전에 우리 여행할까요?”

“여행?”

어깨에 기댄 얼굴을 들어 올린 록시아스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웃음을 숨 쉬듯이 내뱉는 카밀이 그에 록시아스의 허리춤에서 손을 떼고는 흑발로 가져가 쓸어내리며 답했다.

“네. 가고 싶은 데가 있어요.”

“어디.”

카밀은 바로 알려 주지 않고 그저 입꼬리만 둥글게 올렸다. 그리고 록시아스의 관자놀이께에 뺨을 한참이나 비비적거리기만 했다.

“가고 싶은 데가 어딘데.”

록시아스는 어리광부리는 카밀의 등을 토닥거리며 재차 물었다.

까만 머리칼에 비비대던 콧대와 뺨을 록시아스의 광대 부근으로 내리며, 카밀은 은밀하게 속삭였다.

“비밀이에요.”

비밀. 용납할 수 없는 단어에 록시아스는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카밀을 밀쳐 버렸다.

“비밀?”

“네, 비밀.”

“혀를 뽑아 버린다.”

섬뜩한 협박이었으나, 그저 천진하게 웃은 카밀은 록시아스의 허리를 휘감아 도로 제게 끌어당겼다. 생글거리는 얼굴에 일순 넋이 빠진 록시아스는 카밀을 다시 내칠 생각도 못 했다. 정신을 앗아 간 얼굴이 코앞으로 확 다가와서야 번뜩 이성이 돌아왔다.

“…비밀 따위를 만들고.”

“록시.”

“혼날래?”

모진 문장을 이루는 음성은 보드랍게 녹아 있었다. 카밀이 코끝에 코끝을 비볐다.

“혀를 뽑아 주세요.”

그만큼 입술이 가까이에 있었다.

“록시 입술로 빨아서.”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알아내야… 데려가 주는데.

비밀을 캐고자 했던 다짐은 입술이 핥아지자마자 스러진다.

록시아스의 등을 받쳐 서서히 눕히며, 카밀은 시야를 물들인 새카만 머리카락 위로 선들을 덧그렸다. 나뭇잎. 나뭇가지. 험상궂거나 둥그런 바위들, 돌멩이들. 고운 흙바닥. 그 위를 디딘 모양 예쁜 발. 길쭉하게 뻗은 다리. 늘씬한 허리.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의 가운데 솟은 목. 록시아스의 얼굴. 섬세하게 변화하는 표정.

가고 싶은 곳은 언제나 같았고, 이미 당도해 있었다. 록시아스의 곁이었다.

그러나 여행의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그곳은, 애초 색채를 입은 적이 없어 빛바래지도 않는 오랜 기억의 터전이었다.

‘우리’가 뿌리를 두고 떠난 요람.

영겁의 시작점이었다.

***

외출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구두 앞코에 튄 핏방울만 제외하면 강박적으로 느껴질 만큼 말끔한 모습인 록시아스는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록시.”

미동하지 않는 등 뒤로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두른 카밀이 록시아스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록시아스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그의 턱 끝에 입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여전히 적막을 고수하며, 어깨에 걸린 카밀의 손을 찾아 잡을 뿐이었다.

“무슨 걱정 해요?”

카밀은 깨진 유리에 언뜻 비친 표정을 읽고 나서 질문했다. 록시아스의 미간에 검지를 갖다 대고 부드럽게 문질렀고, 이어 눈썹 결을 따라 손끝을 미끄러트렸다. 록시아스는 그 손까지 덥석 잡아 왔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시선이 줄곧 머무르는 창가로 눈길을 돌렸다.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새빨간 태양이 지평선에 걸리기 직전이었다. 키가 큰 나무들 머리 꼭대기가 붉었다.

이윽고 해가 나무들보다 낮게 내려왔을 때, 빛이 뾰족하게 번졌다가 작아졌다. 나뭇잎들 틈새가 반짝거렸다. 땅만이 불그죽죽했고, 위로는 어두운 청색이었다. 곧 세상은 암전될 것이다.

“카밀아.”

록시아스는 진득하니 감상하던 풍경을 등졌다. 태양이 자세를 낮출 때마다 실내에 드리운 그림자가 시시각각 방향을 바꿨다.

“네, 록시.”

일몰에서 눈을 뗀 카밀은 록시아스에게로 눈동자를 내렸다. 록시아스가 뺨을 감싸 왔다. 그 손을 덮었다.

창틀을 기어 넘어오던 빛살이 록시아스에 의해 가려졌다. 실내의 채도가 한층 낮아졌다. 마치 록시아스가 어둠을 불러들인 것만 같다.

코앞에 있는 록시아스는 마치 흑백 사진 속 행인처럼 불명확해 보였다. 자신에게 손길을 주고, 그 손길을 쥐고 있는데도 록시아스의 존재는 신비로웠다. 동작이 크지 않는 록시아스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느리게 다가왔다.

깜빡, 깜빡. 끄트머리가 말려 올라간 검은 속눈썹이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두 번 반복했다. 그 뒤에 숨은 듯이 놓인 눈동자는 바닥을 향해 있었는데, 머지않아 카밀에게로 끌려 왔다. 새빨간 홍채 속에는 희끄무레하게 자리 잡은 자신이 있었다.

“이제 밤이지만.”

록시아스가 조용조용하게 읊조렸다.

“낮이 또 올 거야.”

카밀은 바깥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록시아스가 속으로 끓이고 있던 고민거리를 알아차렸다.

“맞아요, 또 올 거예요.”

“바깥은 안전하지 않아.”

“…….”

“햇빛이 있으니까.”

“네, 그렇죠.”

“넌, 정말로 괜찮아?”

괜찮지 않다면 앞서 노을빛에 이미 피부가 검게 그을렸을 터다. 아니, 벌써 휴고와 함께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겠지. 록시아스는 정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안해했다.

“정말 괜찮아요.”

“어떻게 확신해.”

“록시가 그랬잖아요, 흡혈귀가 되면 능력 한둘쯤 가진다고.”

하지만 얼마큼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들, 햇빛에 멀쩡한 흡혈귀는 보지 못했다. 수많았던 동류 중 단 한 번도.

록시아스가 입술을 달싹였을 때 카밀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낮에도 괜찮아요. 록시가 그런 능력을 준 거예요, 나한테.”

“…그래.”

“록시가 나를 살린 거예요.”

“…….”

“알겠어요?”

록시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카밀은 그의 턱을 올려 자신을 보게 했다.

“봐요, 록시. 내 얼굴이 이상해요?”

이상할 리가. 그런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였다. 완벽했고, 언제나 그대로였다. 록시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타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았죠?”

“그래, 그러네.”

“그쵸, 괜찮아요.”

록시아스는 확신을 위해서 카밀의 얼굴을 몇 번이나 어루만졌다. 카밀은 그렇게 하도록 놔두었고, 얼마든지 기다려 줄 의향이 있었다. 뺨을 감싼 엄지가 눈썹을 쓸고, 약지가 콧대를 덧그리고, 검지가 입술을 눌러 문질렀다. 그 손끝에 카밀이 키스했다.

“이제 나가요.”

약간 뒤늦게, 록시아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나가자.”

손을 잡았다. 칠흑으로 칠해진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다시는 흘리지 않을 피가 깔린 바닥에 발자국을 남겼다. 둘만의 밤으로 몸을 던졌다.

***

카밀은 구태여 행선지를 감췄지만.

급할 이유가 없으니 뛰지 않고, 오래 걸었다. 잡은 손은 한 차례도 떨어트리지 않았다.

밤이 시작될 때 집을 나섰고, 꽤 길게 머물렀던 폐광 도시를 벗어났다. 풀밭을 누르고 이어지는 아스팔트를 산책했고, 거리의 조명만 촘촘하지 주택은 드문드문한 시골 동네도 지났다. 이어서는 다시 도시였다. 그곳을 넘자 또 한 번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한 여정을 반복했다.

비밀에 부쳤던 목적지에 발을 디디기도 전에 록시아스는 알아차렸다. 모른 체도 할 수 없는 장소였다. 그곳은 카밀을 데려온 고아원에서 멀지 않은.

“…내가 말했었나.”

꾸준히 옮겨지던 걸음이 멎었다.

카밀은 자칫 록시아스보다 앞설 뻔했던 발을 멈췄다. 두어 발자국 물러 록시아스의 옆에 섰다.

“카밀아.”

고아원은 이미 지나쳤다.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어?”

여행의 목표는 뚜렷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두 번의 질문이 던져질 동안 카밀은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않았으나 록시아스는 확신을 기반으로 추궁했다.

그들이 멈춰 선 지점은 휑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건물이 즐비했다. 사람의 손길이며 걸음이 끊긴 지 오래라 외벽이 갈라지고 창살은 녹슬어 있었다. 그 밑으로 잡초가 콘크리트를 뚫은 채 자라고 있었다. 록시아스는 그곳의 본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콘크리트가 깔리기 전 이곳 땅은 이름 모를 식물들이 지금 눈앞의 잡초보다 무성했다. 몸통이 두껍고 키가 큰 나무도 무수했다. 야생 짐승들이 거닐었다. 그리고 전부 검었다.

자신이 눈을 뜬, 고향.

여태껏 누구에게도 이곳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추억으로도 여기지 않았으니 홀로라도 떠올리지 않았다. 검은 숲은 기억 아래에 매장해 두었었다. 그러니 카밀이 알 리 없는데….

올려다본 카밀이 낯설었다. 그는 본 적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풍경을 훑었다. 역사를 모르는 이에게는 그저 낡은, 버려진 촌락이었다.

“카밀.”

늘 제게는 투명했던 카밀이 희끄무레한 색으로 변해 갔다. 무표정 뒤에 숨은 눈동자가 가로등 하나 없는 곳에서 화염을 피우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났다.

“카밀아.”

카밀을 붙들고, 그의 뺨을 툭툭 건드려 이목을 끌었다.

“…아.”

다른 영혼에 삼켜진 듯했던 카밀이 눈을 깜빡이며 음절을 뱉었다.

“미안해요.”

다시, 록시아스에게 익숙한 카밀이었다.

“힐렌브란트 고아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길을 잘못 들었어요.”

록시아스는 카밀이 변명하거나, 거짓말하고 있다고 대번 눈치챘다. 그의 심장 소리가 빨랐다.

“그래?”

“네…. 오랜만이라서.”

카밀은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록시아스만이 기억하는 풍경을 훑는 눈은 이전처럼 집요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안 왔으니까요.”

붙든 손에 악력이 실린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손등을 엄지로 문질렀다.

“괜찮아.”

카밀이 덥석 안겨 왔다. 커다란 몸이 갑자기 달려드니 다리가 휘청거렸다. 자세를 바로 세우고 카밀의 등을 감싸 주었다. 카밀이 어깨에 얼굴을 묻고는 비비적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록시아스는 비밀에 대해 변명하고 거짓말한 카밀을 위로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채로. 반사적으로.

“올 때 고아원을 봤어.”

본능적으로.

록시아스는 자신이 아는 바를 말하며 카밀을 안정시켰다. 상체에 둘린 카밀의 팔이 점점 더 조여 온다. 카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다시 가면 돼.”

카밀의 무게를 견디고, 카밀의 머리칼을 쓸어 내며, 록시아스는 카밀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이렇게 변했네.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건물의 흔적만 나부끼는 황무지였다. 인간들은 숲을 밀고 마을을 지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부쉈다. 이후로는 와 보지 않았는데, 재건되다가 중단된 지 한참인 모양이다.

카밀은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점점 더 엉겨 붙는다. 그의 등허리를 나긋나긋하게 다독여 주었다. 아울러 눈으로는, 케케묵은 풍광을 쉬지 않고 응망했다. 감상에 빠지는 편이 아닌데,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록시.”

카밀이 록시아스의 어깨에 파묻은 입술로 불렀다. 목소리가 뭉개져 있었다.

“…응.”

“괜찮아져서 다행이에요.”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거야.”

록시아스는 슬쩍 고개를 내려 자신도 카밀의 어깨에 코끝을 묻었다.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카밀의 향기가 추억을 더듬던 머릿속으로 침범한다. 하지만 한 번 떠올린 추억은 쉽사리 흩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선명해졌다. 카밀의 향기가 익숙해서… 당연히 익숙하겠지만… 그러니까.

“내가 널 지킬 거야.”

“…록시가요?”

“응.”

숲의 생김새는 그리라면 똑같이 그릴 수도 있을 만큼 명확하다.

그런데 숲 냄새가 어땠더라.

“네, 좋아요. 꼭 지켜 주세요….”

당장 후각을 지배한 카밀의 향기밖에는.

“꼭 그럴게, 귀여운 아가야.”

모르겠다.

카밀이 천천히 몸을 물렸다. 카밀의 품이 서서히 멀어졌다. 안개처럼 사방에 드리운 향기가 얼핏 옅어졌다. 카밀에게 부분이 잘린 경치는 그대로다.

“돌아가요, 록시.”

반갑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한데 미련이 남는다. 록시아스는 카밀이 내민 손을 맞잡으면서도 쉴 새 없이 저 너머를 훑어보았다. 이제는 검지 않은 땅, 카밀, 땅, 카밀, 땅… 카밀.

어디를 보아도 중간중간 시야로 카밀이 걸렸다.

이런 감상에 취해 있어도 되나.

그런 의문이 번뜩 들었다.

록시아스는 땅으로 자꾸만 이끌리는 시선을 당겼다.

이제는 카밀만 보았다.

“가자.”

“네, 가요.”

마음껏 더듬을 수 있는 자취조차 사라진 터전에 미련을 낭비한 마음이 울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머리가 어질했다. 잠시 방문했을 뿐인 풍경이 걸음을 집요하게 부여잡는다. 그럴수록 카밀의 손을, 록시아스의 손을 끈질기게 움켰다.

고아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시골길이었다. 발에 밟힌 자갈이 잘게 부서졌다. 엉뚱한 곳에 자리를 잡은 잡초가 꺾였다. 두 행인은 등 뒤를 따라붙는 과거를 그렇게 밟고, 꺾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XXXX년, 시간을 통과하는 무수한 날 중 하루였다.

이름이 지어지기 전부터 시작된 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한 삶을 꽉 쥔 채로.

<외전에서 계속>

외전_Once Upon A Time

저가 상품만 취급하는 마트 카탈로그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새 거처를 정했다.

“이름을 이야기해 봐.”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므로 카밀은 되물어야만 했다.

“이름이요?”

대낮, 카페였다. 유리 벽과 붙은 자리에 앉아 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록시아스는 커피 잔에 입술을 댔다. 마시는 시늉만 한 것이다. 그러고는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누구 이름이요?”

“누가 아니라.”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손을 뻗었다.

“장소.”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분홍색 보풀을 금발에게서 떼어 내며 록시아스가 말을 이었다.

“새집 말이야.”

“아.”

이제야 ‘이름’이 가리키는 바를 알아차린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끝이 다녀간 머리칼을 괜스레 매만졌다.

어디든 좋았다.

“록시가 좋은 곳이요.”

“어디든 똑같아.”

어디든 좋다는 이야기였다.

말이 짧고 표현이 서툰 록시아스를 헤아리는 데 이제는 능숙한 카밀이었다.

음. 카밀은 짐짓 고민하고 나서 금방 답을 내놓았다.

“기차역으로 가요.”

“기차역?”

“네. 그래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기차 목적지로, 가요.”

카밀과 록시아스가 역에 도착하고 6분 후 출발하는 기차의 목적지는 뮌헨이었다. 그들은 뛰어들다시피 기차에 올라타 바로 보이는 빈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창가 자리에 앉은 록시아스의 오른쪽 허벅지와 복도 자리에 앉은 카밀의 왼쪽 허벅지가 맞닿았다.

기차가 레일을 미끄러지며 출발했다. 경유지와 목적지를 안내하는 방송이 독일어와 영어로 연이어 흘러나왔다. 도시 풍경이 잠깐 스쳐 간 창밖으로 자연 풍경이 계속 펼쳐졌다. 녹다 만 눈이 드문드문 하얗게 빛나는 들판이 이어졌다.

카밀은 지루한 창가보다 시시각각 다른 감상을 안겨 주는 록시아스를 구경하는 편이 훨씬 즐거웠다. 록시아스가 창밖을 잠시간 응시했다가, 카밀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뮌헨에는 집이 두 채야.”

카밀의 눈동자에 바깥 풍경이 가로로 스쳤다. 붉은 홍채에 그림자가 졌다가 빛이 번쩍였다.

“네, 록시.”

“조용한 데가 좋은지 시끄러운 데가 좋은지 말해 봐.”

카밀은 자신의 윤곽이 언뜻 비치는 상대의 눈동자를 향해 깊이 있는 미소를 전하며 대답했다.

“록시의 소리가 더 잘 들리는 곳이요.”

“조용한 곳.”

대답에 즉시 꼬리를 붙인 록시아스가 정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카밀은 고개를 기울여 록시아스의 귓바퀴에 입 맞췄다. 입술에 찰나 머무른 온도가 홧홧했다. 허벅지에 올린 손 위로 록시아스의 손이 살며시 겹쳐 왔다. 카밀은 손바닥을 뒤집어 록시아스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록시아스가 어깨에 기댔다. 달가운 무게다.

***

뮌헨은 조용하다고 해도 이전에 살았던 폐광 도시보다 시끌벅적했다. 생기가 넘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폐광 도시에서는 대기에 음울함이 떠다녔다. 아이들이 울거나 웃어도, 새가 지저귀고 음악이 흘러도 빛바랜 느낌은 좀처럼 물러나지 않았었다.

하나 새 보금자리가 있는 도시는 빛이 짧게 머무는 낮에도 색채가 온온했다. 행인이 드문드문하며 낙엽과 담배꽁초만 굴러다니는 거리에도 생명력이 감돌았다.

혹 실제 그렇지 않더라도, 두 이방인의 마음은 그랬다.

록시아스가 데려간 뮌헨 거처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머물렀던 베를린 저택과 엇비슷한 모습이었으며 오래 비워 두었음에도 깔끔했다. 록시아스는 사람을 고용해 관리하는 집 중 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전원주택이 드문드문한 주변 풍경도 베를린의 거처와 흡사했다. 초행인 장소였으나 카밀은 향수에 젖었다. 발부리를 힘껏 세우고 팔을 최대로 뻗어야지만 지문 인식 기계에 손이 겨우 닿을 만큼 키가 작았던 자신과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록시아스의 환영이 정원을 앞질렀다.

늘씬하고 길쭉한 다리와 그보다 짤막하고 마른 다리가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이윽고 록시아스와 어린 자신의 환영이 문 앞에 도달했고, 카밀은 한 줌에 감싸이는 록시아스의 손을 더욱 깊숙이 잡았다가 놓았다. 록시아스가 고개를 사선으로 올려 자신을 쳐다보더니 손을 뻗어 왔다.

키 좀 크라며 타박했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위해서는 이제 팔을 올려야 했다. 이만큼 커질 줄 알았다면 그때 그리 모질게 굴지 말걸. 여하간 자신은 카밀에게 하염없이 부족했으나 카밀은 너무도 근사하게, 완벽히 자라 주었다. 고맙고, 기특했다.

카밀과 같이 아득한 추억의 한 편을 상기한 록시아스는 금발을 쓰다듬은 뒤, 지문 인식기를 향해 손을 옮겼다.

일일이 열쇠를 챙겨 다닐 수 없는 노릇이니 록시아스는 소유한 대부분 집에 지문 인식 기계를 달아 놓았다. 안전하며 확실하고, 노동에 혹사당하거나 늙으면 지문이 닳는 인간과는 달리 록시아스의 손은 언제나 매끄러우니 탁월한 선택이었다.

록시아스의 지문이 닿고 머지않아 개문을 알리는 전자음이 짧게 퍼졌다. 록시아스는 잠금쇠가 풀린 문에 눈길을 주었다가 카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지문도 등록해.”

록시아스는 이제 무엇 하나 혼자 누리기 싫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카밀도 똑같이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카밀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록시. 어차피 항상 같이 외출할 거니까 록시 것만 해도 돼요.”

생각해 보니 그렇기는 하다. 록시아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열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리석 바닥 위로 검은 구두 네 짝이 닿았다. 카밀은 앞으로 록시아스와 지낼 공간을 둘러보았다. 새집의 첫인상은 정갈했다. 청소부의 손길이 주기적으로 닿은 저택은 구석구석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록시아스의 간략한 취향에 따라 화려한 장식 따위가 없는 탓에 내부가 더 넓어 보였다.

실내를 대충 둘러본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록시, 침실이 어디예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차차 알아가면 된다. 제일 궁금한 장소는 역시나 침실이었다. 잠을 자지 않아도, 록시아스와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할 공간이므로.

“2층.”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밀은 놀이동산에 온 아이처럼 록시아스의 손을 끌어 계단을 향해 뛰었다.

귀여운 카밀.

록시아스는 입가로 옅은 미소를 걸며 카밀의 완력에 순순히 끌려갔다.

좀 더 세게 당겨도 괜찮은데.

휘둘리고 싶은 마음을 서툴게 숨기며.

***

하얀 시트를 망토인 양어깨에 걸친 록시아스는 누인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나자마자 미간을 구겼다. 카밀이 밤새 싸질러 놓은 체액이 배 속에서 나와 허벅지를 타고 미끄러지는 탓이다. 그 느낌이 불쾌하거나 찝찝해서는 아니고, 아까워서 인상을 찡그렸다. 카밀의 것이라면 머리카락 한 올, 체액 한 방울이라도 아쉬웠다. 누군가가 금괴 한 덩이와 카밀의 금빛 머리칼 한 올을 교환하자고 제안한다면 거절할 것이고, 그 어떤 희귀한 보석 한 움큼을 가져다준다고 하여도 카밀의 피 한 방울과도 맞바꾸지 않을 것이었다.

이윽고 종아리까지 흐른 희끄무레한 액체를 내려다본 록시아스는 일순 눈썹을 꿈틀거리다가 홱, 카밀을 돌아보았다. 모로 누워 머리를 받친 채 록시아스를 지켜보던 카밀이 무엇이 그리 기쁜지 히죽거리고 있었다.

록시아스는 그에게 매달리고 싶어졌다. 네가 열심히 뿌려 놓은 것들이 죄 밖으로 쏟아져 나왔으니 다시 채워 달라며 어리광 부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카밀이 제 나이며 정신을 먹고 어른이 되었나 보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토록 미성숙해졌을 리 있나.

“록시, 어디 가요?”

불완전해진 자신이 부끄러워서 몸을 숨기고 싶어졌다.

“…책 읽게.”

록시아스의 표정이며 목소리 전부가 부자연스러웠다. 카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들켰나, 싶었던 순간이다.

“책이 있어요?”

카밀은 록시아스의 수줍음을 알면서도 못 본 채 넘겼다.

“책은 어느 집에나 있어.”

조금 전보다 편안해진 투로 읊조렸다.

시간과 돈이 넘쳐나는 이가 하는 일이라곤 대게 경험을 쌓거나 지식을 탐독하는 것이었다. 안 해 본 경험을 세는 편이 편할 정도로 록시아스는 많은 일을 겪었다. 카밀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곤 모든 일에 관심이 없는 그가 그나마 흥미를 느끼는 취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온갖 미스테리를 수록한 도서를 감상하는 일이었다.

손을 뻗은 카밀이 록시아스가 걸친 시트 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스르륵, 흰 천이 그보다 창백한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나랑 더 있어요.”

집 구경도 다 하지 않고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물고 빨기 시작했으나 록시아스의 나신은 카밀의 흔적이 전혀 없이 말끔했다. 매끄럽고 희다 못해 반질반질하게 빛이 나는 듯 보였다. 카밀은 검지 손끝으로 록시아스의 등줄기를 세로로 훑었다. 눈으로는 전신을 훑고 나서 록시아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음을 들킬라치면 금세 당황스러운 기색이 깃드는 낯은 나체가 드러날 때는 정작 태연했다.

“같이 더 누워 있어요.”

“그래, 그럼.”

전에는 마치 태산 같아서 다루기 어려웠던 록시아스가 이제는 공중에 날리는 깃털처럼 굴었다. 카밀의 입김 한 번이면 팔랑팔랑 가벼이 떠다녔다. 그 사실이 카밀은 극도로 만족스러웠다.

침대로 돌아온 록시아스를 끌어당겨 품에 넣었다. 바스라지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원하는 만큼 억세게 안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소중하면, 도리어 마음을 다하기 곤란했다.

“나는 이게 책 읽는 것보다 재미있어요. 록시는요?”

“나도 그래.”

“그런데 왜 책을 읽는다고 했어요?”

“버릇이야.”

끝도 없이 응석 부리고 싶어져서. 록시아스는 혀에 감기는 진심을 가공하여 내보냈다. 카밀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내내 싱글벙글이다. 콧대를 마주 붙여 비빈다. 이어 이마에 키스한다. 꼬옥 껴안는다.

카밀에게 받는 애정표현 하나하나가 너무 좋아서 참을 수 없어졌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가슴 속에서 꿀이 찰랑거리는 기분이다.

“독서가 버릇이었어요?”

“아마도.”

“록시는 어떻게 버릇까지 똑똑해요.”

카밀은 제 허리에 감긴 록시아스의 허벅지를 쥐고 주물렀다. 피붓결은 실크처럼 보드라운데, 주물러 보면 근육이 꽤 단단하게 잡힌다.

“섹시해요.”

엉큼한 손길이 엉덩이로 옮겨진다. 엉덩이는 보기에 탄력이 대단한데, 허벅지와 또 다르게 주물럭거리면 말캉거린다.

“카밀아.”

“네, 록시.”

“‘섹시’ 같은 단어는 어디서 배웠어.”

그런 말은 가르쳐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매일 가졌던 독서 시간을 통해 책에서 습득했거니 싶었다. 나이도 나이다. 카밀은 어린애가 아니다. 하나 록시아스는 종종 카밀이 외설적인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괜스레 궁금해졌다.

“글쎄… 아마도….”

실은 카밀에 대한 일이라면 뭐든 궁금했다. 자그마할 때부터 곁에 뒀는데도, 자신이 모르는 카밀이 존재할까 봐 신경 쓰였다. 카밀의 머리카락 개수까지 세고 싶을 지경이었다.

“록시를 보고 배웠나 봐요.”

“단어를?”

“네. 저절로 알게 된 거예요. 록시가 너무 섹시하니까.”

록시아스가 카밀의 머리카락 개수를 궁금해할 때, 카밀은 흑발을 만지작거리며 실제로 수를 셌다. 물론 다 세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손아귀에 쥔 가닥들만이라도.

“그러면 록시는, ‘섹시’라는 단어를 언제 어떻게 알게 됐어요?”

카밀은 알고자 하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성미를 소유했다.

“기억 안 나.”

아무리 록시아스라도 어떤 단어를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 기억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궁금해요.”

카밀은 몹시 아쉬워했다.

자신이 검은 땅에 매장되어 있는 동안.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고아원으로 넘겨지는 동안. 아기에서 어린이로 겨우 성장할 동안…. 록시아스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까지.

록시아스를 떠올리지 못했던 그 한심한 공란은 영생을 허전하거나 치욕스럽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카밀은 과거로 돌아가는 능력 따위를 가지지 못해 무척 한탄스러웠다. 어떨 때는 분노까지 치밀어 올랐다.

록시아스로 채우지 못한 제 시간. 자신이 지키지 못한 록시아스의 시간.

그 시간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조리 알고 싶었다. 듣길 원했다.

흑발 세는 것을 관둔 카밀은 록시아스의 뺨을 살포시 감쌌다.

“록시에 대해 얘기해 주세요.”

“어떤 얘기가 듣고 싶어?”

그런 와중에 그나마 환상적인 사실은 록시아스가 어떤 질문이든 대답해 준다는 것이다.

“록시가 사랑한 사람.”

“카밀.”

“그전에는?”

“없어.”

“앞으로는?”

“카밀.”

“또요?”

“또, 가 어디 있어. 없어.”

무엇이든 해 보았으며 뭐든지 가졌던 삶이었으나 동시에 무료하고 영양가 없는 삶이기도 했다. 록시아스는 그런 제 역사를 파헤치길 원하는 카밀이 달가우면서도 고마웠다. 기억이 닿는 한 모조리 털어놓을 준비가 되어 있다.

“록시를 사랑한 사람은요?”

“카밀.”

“나 말고는요?”

“다 죽었어.”

“어떻게요?”

“그냥 알아서 죽던데, 아니면 내가 죽였어.”

냉랭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입술이 사랑스럽다.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키스했다. 단맛이 나는 혀를 한참이나 빨고 나서도 아쉬움이 남아 그를 힘겹게 놓아주었다. 연인의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다. 시간이 많은데, 할 일 또한 너무 많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광대를 문지르며 물었다.

“록시, 어떻게 나를 찾았어요?”

“저번에 말했잖아.”

록시아스는 카밀의 손목을 쥐었다.

“또 말해 주세요.”

“그냥… 고아원을 돌아다니다가.”

“네.”

“널 봤어.”

“그리고요?”

대꾸하기 전 록시아스는 카밀의 손목을 놓아주고는 잘생긴 얼굴로 손을 옮겼다. 카밀은 자신의 뺨을 덮은 손바닥에 고개를 틀어 짧게 입 맞췄고.

“어떤 애를 봐도 마음에 안 들었거든.”

고아원 한 편에 서서 자신을 발견했을 적에도 이토록 반짝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밝혀 주었을까, 상상을 했다.

“네.”

“그런데 넌 바로 마음에 들었어. 고민도 안 했어.”

“첫눈에 반한 거예요?”

“짐승이나 다름없는 애는 내 취향이 아냐.”

록시아스는 짐짓 모질게 말을 하면서도 카밀의 어깨에 이마를 애교스럽게 문질렀다.

“제가 짐승이었어요?”

“거의 그랬지. 어릴 때는.”

어렸던 자신에 대한 신랄한 평가에 카밀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록시아스도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꼬리를 둥글게 물었다. 카밀이 미소라도 지을 때면 자신은 폭소하고 싶어지는 충동을 억누른다.

“날 찾아 줘서 고마워요, 록시.”

“다 네가 예뻐서 그런 거야.”

지금은 과연 누가 짐승인가. 보이지 않는 목줄이 매인 자신이 짐승이다. 주인에게 완벽히 길들여진…. 행복하면 됐다.

“내가 예뻤어요?”

“어, 그랬어.”

“얼마나 예뻤어요?”

“내가 선택할 만큼.”

그리고 목줄을 쥔 카밀은 록시아스의 우리에 갇혀 있다.

과연 누가 짐승인가. 두 흡혈귀는 스스로를 짐승이라 여겼으며 영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자신을 교요한 상대가 시키면 진흙이라도 핥을 수 있었다. 기꺼이…. 그것이 그들의 행복이었다.

“날 봐 줘요, 록시.”

“보고 있잖아.”

“지금은 어때요? 예뻐요?”

“응… 예뻐.”

“얼마나 예뻐요?”

“내가 선택당하고 싶을 만큼.”

“무슨 소리예요, 그게.”

“뭐가.”

“내 선택지에 록시밖에 없는 거, 알면서.”

록시아스는 콧잔등을 간지럼당하는 이와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콧방울에 입술을 내렸다. 쪽, 소리가 나자 록시아스의 눈이 더욱 휘어졌다.

“간지러워.”

“어디가요?”

“몰라… 그냥.”

카밀 탓에 머리카락 한 올 끄트머리까지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다, 그래.”

“그렇구나.”

제대로 된 설명 없이도 록시아스의 기분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카밀 또한 같은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으므로.

“저도 간지러워요.”

“…아, 어디가?”

“마음이요. 록시를 너무 사랑해서.”

“긁어 줄까.”

“아니요.”

“그럼 어떡할까.”

“평생 간지럽게 놔둬 주세요….”

“그래, 그럼….”

놔둔다고 해 놓고서, 일단은 키스하고 싶어 안달이 나 가려운 입술부터 달랬다.

아무리 아무리 달래도 육체와 영혼은 사랑에게 끝없이 간지럽힘당한다.

***

호기심을 버릴 나이였으나 카밀은 시도 때도 없이 질문했다.

두 흡혈귀의 일상은 제삼자가 보기에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여길 만했다. 본인들은 아주 즐거워하는 듯했지만.

수면을 취하지 않으므로 눈을 떴을 때가 아닌 일출에 맞춰 하루를 시작했다.

일과는 규칙적이지도, 복잡하지도 않았다. 카밀과 록시아스는 배가 고프면 서로를 흡혈했고, 그러다가 입술을 맞췄고, 더해서는 손을 잡고 전신을 더듬으며 욕정을 쏟아 냈다. 그들이 가진 욕정이란 식욕과 성욕뿐이므로 간단히 예정된 순서다.

섹스는 횟수가 몇 번이든, 얼마나 오래하든 질릴 줄 몰랐으나 지켜보는 이도 없는데 두 사람은 중도를 지켰다. 상대를 귀찮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헛된 걱정을 각자, 동시에 품고 있는 탓이었다.

식사하지 않고, 섹스하지도 않으면 대화했다. 이미 서로를 알 만큼 알면서도 상대의 입으로 전해 듣는 이야기는 늘 새로우며 흥미로웠다. 유일한 취미로 여길 만한 독서는 진작 뒷전이 됐다.

대화는 보통 한 쪽이 던진 질문으로 시작됐다. 질문의 내용은 사소했으며 묻는 말투는 무심했다. 하나 맹숭맹숭한 말투와 달리, 대답을 들으리라 확신하면서도 궁금한 바를 꺼낼 때는 늘 가슴을 졸였다. 고백을 처음 입에 담는 아이처럼.

하기야 그들이 서로에게 하는 말의 대부분은 상대에게 보내는 고백이었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전부가.

오늘 대화는 이렇게 시작했다.

“록시는…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어요?”

대화를 처음 이루는 문장의 끝은 대게 그렇듯이 물음표로 끝마쳤다.

록시아스가 되물었다.

“너 없이?”

카밀이 웃었다. 켜 둔 조명 하나 없는데도 주변이 찬란해졌다. 차분한 공기가 발랄하게 뜀박질한다. 록시아스가 음절만 읊조려도 카밀은 웃었다. 헤픈 웃음은 결코 인위적이지 않았다. 늘 진심이 전해졌다. 그래서 록시아스는 일일이 감동받았다.

“네, 내가 없는 동안….”

“시시했지.”

얼마나 시시했는가. 죽음을 소망하게 될 정도였다.

록시아스는 말을 잇기 전 찰나 카밀의 눈빛을 살폈다. 되짚은 과거가 카밀에게 상처가 될까 봐.

다행히 카밀은 웃음이 감도는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다음 이야기를 부추기는 듯이.

걱정을 거둔 록시아스는 입을 뗐다.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어.”

“새로운 것들이요?”

“응. 할 일들.”

록시아스는 자신을 일컬었던 다양한 명칭과 갖가지 직함을 상기했다.

“직업을 자주 바꿨어.”

“얼마나 자주요?”

“몰라, 그냥 자주… 질리면 바꾸고.”

‘자주’라고 해 봐야 록시아스의 기준이었다.

“이것저것 했어.”

록시아스는 이전에 스스로의 이야기를 통 하지 않았다. 카밀은 서재에 가득한 각종 전문 서적으로 록시아스가 대단한 지식인이거나 여러 분야에 종사했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다.

직업을 가져 봤다는 것은 사회에 섞여 보았다는 의미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인간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었는지 매우 궁금해졌다. 어떤 직업인들 록시아스와 매치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호기심이 불어났다.

“어떤 직업을 가져 봤어요?”

“여러 가지….”

길게 말하는 버릇이 없는 록시아스는 말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카밀은 고민에 빠진 록시아스를 느긋하게 감상했다. 붉은 눈동자가 여기저기로 구른다. 그 얼굴이 사랑스러워서 괜스레 건드리고 싶었으나, 록시아스의 이야기가 궁금했으므로 충동을 눌렀다.

이윽고 록시아스가 말을 이었다.

“내가 식사를 하고 나면 ‘성직자’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카밀은 턱을 괸 채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저음에 집중했다.

“사람들 피를 빨아 죽인 게 마귀 짓이라면서. 퇴마 의식 같은 걸 했어. 그게 재미있어 보여서.”

록시아스의 입가가 순간 꿈틀거렸다. 웃음을 참은 것이다.

“성직자가 됐어.”

“록시가요?”

카밀이 턱을 받친 손을 물린 후 고개를 곤두세우고 물었다. 록시아스와 성직자라니, 예상 못 한 조합이었다.

“어, 그게 첫 번째 직업일걸.”

“상상이 잘 안 돼요.”

“오래는 못 했어.”

록시아스는 테이블에 놓인 카밀의 손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아득한 과거를 더듬는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이야기가 이어졌다.

“내가 어제 먹은 먹잇감에 성수를 뿌리고… 뭐 그런 걸 했는데, 그게 너무 웃겼거든.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어.”

시체에 성수를 뿌리며 기도문을 외는 록시아스를 상상하자 카밀 또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시트콤의 한 장면 아닌가. 주연이 지나치게 예뻐서 성직자란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것부터.

“그래서 웃었어요?”

“응.”

이후로는 파면당했다. 믿음이 부족하여 악마에게 홀렸다며 손가락질까지 받았다. 물론 그따위 일로 기분이 상하거나 상심하지는 않았다. 록시아스는 또 다른 직업을 찾았다.

“양치기를 한 적도 있었어.”

이어서 나온 직업 역시 록시아스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양몰이를 하는 록시아스라니. 갓 태어난 양을 돌보고… 양털을 깎아 모으고….

“일하다 배가 고프면 양 피를 마셨어. 인간 피보다는 맛이 없지만, 편하긴 했는데. 너무 지루해서 그 짓도 금방 그만뒀어.”

“그랬구나….”

“응, 그리고… 또 뭘 했지.”

록시아스는 카밀의 손등을 검지로 툭, 툭, 두드리다가 이내 말했다.

“연극배우.”

“연극배우요?”

“어, 길을 걷는데 누가 말을 걸었어. 자기가 극단장인데, 내가 무대에 섰으면 좋겠대. 그래서 알겠다고 했어.”

배우라면 앞서 들은 직업보다야 록시아스와 퍽 잘 어울렸다. 그러나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록시아스가 연기를 잘 해냈을지….

“어떤 역할을 맡았어요?”

“왕.”

“왕이요?”

록시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연극이 거의, 옛날옛적에 죽은 왕이나 귀족들을 찬양하는 데 쓰였으니까. 아무튼 난 왕이었어.”

“연기… 어렵지 않았어요?”

“쉽던데.”

그야 왕을 해 본 경험이 있으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쉬웠어요?”

“어, 그냥 예전에 하던 대로 하면 되니까.”

“예전에 하던 대로?”

그렇지. 카밀에게는 왕이었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으니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응, 왕을 해 봤거든.”

나른하게 뜨였던 카밀의 눈이 벌어졌다.

“진짜 왕이요?”

“그래.”

“무슨….”

“카밀아, 그러게 역사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지.”

물론 열심히 공부했다.

카밀은 짐짓 꾸중하며 자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록시아스의 손을 감싸 잡으며, 의문을 확인했다.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에서 록시의 이름을 가져온 게 아니었어요?”

검은 숲에서 자신과 함께였던 시절에는 이름이 없었다. 땅도, 식물도, 짐승도, 자신도. 록시아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그저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인 줄 착각하며 살았던 때는 록시아스가 ‘록시아스’란 이름과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한참 후 흡혈귀가 되며 기억이 돌아온 날 이래로는 누가 록시아스의 이름을 지어 주었을까 궁금해하기도 했었다. 예상했던 바로는, 인간 사회에 스미게 된 록시아스가 대충 역사적 인물의 이름을 가져와 본인에게 붙인 줄 알았다. 그러니까.

“그게 록시아스예요?”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 왕이 진짜 록시아스일 줄은.

“응, 나야.”

“…….”

“왜 그렇게 놀라.”

“그냥….”

성직자. 양치기. 연극배우. 그런 직업 따위보다야 왕은 록시아스에게 완벽히 걸맞았다.

“너무 어울려서요.”

어쩌다 왕이 되었는지, 곧 록시아스에게 비화를 들었다. 흡혈귀를 많이 만들고 나서 빈 땅에 자리 잡고 살다 보니 어느새 왕이 되어 있었다고 했다. 싫증을 잘 내는 록시아스는 놀랍게도 꽤 오랫동안 왕위에 앉아 있었다. 그야 카밀이 알기로도 ‘록시아스 폰 슈바르첸베어그’는 대대로 6세까지 즉위했으니까. 록시아스의 설명으로는 4세까지만 록시아스였고, 5세와 6세는 그를 따르던 흡혈귀였다고 한다. 이후로 해당국은 난역으로 인해 왕좌에 새겨진 이름이 아예 바뀌었다.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야, 왕은.”

인간 역사에 굵직한 자취를 남긴 록시아스는 마치 그게 별일 아니라는 듯 맹숭맹숭한 기색으로 뇌까렸다.

이어 카밀이 읊조렸다.

“서운해요.”

카밀의 입에서 서운하다는 말이 나오자 그제야 록시아스의 눈동자에서 지루함이 걷혔다.

“뭐가.”

“록시아스가 왕 노릇 하는 걸 못 봐서요.”

“그게 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고.”

재미있고말고. 록시아스 본인은 모를 테지만.

“명령하는 록시아스가 얼마나 섹시한데요.”

“…….”

“…….”

찰나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명령을 받은 뒤 방으로 뛰어가 록시아스의 목소리를 되새김질하며 자위하는 몹쓸 군신을 상상했다. 물론 자신이 록시아스의 신하였다면 그저 상상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네가 명령받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고?”

틀린 말은 아니다.

“맞아요.”

다른 이에게 명령받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겪은 바가 없기에 모른다. 앞으로도 겪을 일이 없을 터다.

“나한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록시밖에 없으니까요.”

록시아스는 맹종을 쉽사리 확언하는 카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자신으로 하여금 색채가 뒤바뀐 눈동자가 맑았다. 자신과 똑같이 붉은빛을 띠어도 안광은 푸르렀다. 그의 마음을 대놓고 노출하는 눈빛에 가슴께가 달아오른다.

“그렇게 보지 마.”

용암에 담가도 끄떡없는 육신이 카밀의 눈빛에 속절없이 녹아내린다. 더럭 겁이 났다. 녹아 사라지면 카밀의 곁에 고여 있을 수 없으니까.

“그건.”

명령받는 걸 좋아한다며.

보지 말라고 했더니 카밀의 시선이 더욱 집요해졌다.

“안 되겠어요.”

요망한 카밀이 복종하는 체하며 록시아스를 얽맨 실타래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무지하던 어릴 적부터 그랬다. 그에 목각인형처럼 흔들렸던 자신이 산증인이다. 이것 봐,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카밀이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고 싶다. 카밀과 눈을 마주칠 때면 자유 의지를 포기하고 그저 기대길 원하게 된다. 한심하기 짝이 없도록 의존적인 멍청이가 된다.

“너 때문에 바보가 되는 것 같아.”

“록시만큼 똑똑하면 바보가 될 수 없어요.”

“안 똑똑해.”

록시아스는 카밀의 손을 쳐 냈다.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이제 지겨워.”

읊조리는 언성이 평소보다 위축되어 있었다.

“지겨우면 안 해도 돼요.”

손을 잡지 못하게 피한다면 끌어안아 줄 것이다.

카밀은 벌떡 일어나서 테이블을 돌아 록시아스 앞에 섰다.

책상 위로 뻗은 팔 위에 뺨을 대고 엎어져 있었던 록시아스는 제 옆으로 와 선 카밀을 향해 눈동자를 옮겼다가, 이윽고 허리를 세우고 카밀과 마주 보도록 몸을 돌렸다. 카밀이 어깨에 팔을 둘러 오더니, 뒤통수를 가볍게 눌렀다. 카밀의 따뜻한 가슴팍에 이마가 기대졌다.

“내가 알아서 잘할게요.”

“넌….”

목소리가 카밀의 품에 눌려 뭉개졌다.

“이미 잘하고 있어.”

록시아스는 자신의 변화가 두려웠다. 수 세기에 걸쳐 굳어진 습관과 습성이 카밀로 인해 모조리 뒤바뀐다. 홀로 땅을 디디고 서서 살아가다가 별안간 뒤집힌 세상에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아래에는 카밀이 자신을 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다. 짜릿하다…, 하지만 변화는 무섭다…. 그리고 기쁘다. 어차피 추락은 한순간이다.

“네가 안아 주면….”

“네, 록시.”

“여태까지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

흑발을 감싼 손이 찰나 미세하게 튀었다. 카밀은 제 가슴팍에 묻힌 록시아스를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록시아스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록시아스는 본능적으로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심장을 나누어 가진 ‘우리’가 떨어져 홀로 보내야 했던 시간은, 분명 잘못됐다.

카밀은 한숨을 꾸역꾸역 삼켰다.

우리는 계속 함께여야만 했다.

자책이 이맛전을 두드렸다. 미간이 구겨졌다.

다, 내가 잘못해서.

“…록시는 아무 잘못도 안 했어요.”

“그럴까.”

“그럼요.”

“네가 뭘 알아.”

“록시에 대한 건 다 알아요.”

“아니, 넌 몰라.”

록시아스가 고개를 들춰 올려다본다. 카밀은 그의 이마에 입 맞췄다. 허리를 잔뜩 숙여 콧잔등에도 키스했다. 광대에, 눈꺼풀에도 입술을 내렸다. 록시아스가 일순 감았던 눈을 도로 뜬다. 가까이에서 본 새카만 속눈썹은 무겁지 않을까 궁금해질 만큼 숱이 풍성했다. 아름답지 않은 곳이 대체 어딘지.

“그럼 록시가 알려 주세요.”

“…….”

예전부터 그들은 말보다 행동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알렸다.

록시아스는 그저 카밀에게 키스했다.

숨 쉬는 법을 잊기 직전, 카밀이 입술을 떨어트렸다. 록시아스가 그사이 무거워진 눈꺼풀을 올리는데, 대번 몸이 붕 떴다.

록시아스를 들어 올린 카밀은 소파가 있는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테이블에 마주 앉아서 이야기하는 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편한 자리에 록시아스를 앉히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안고 있기도 편하고.

소파에 당도한 카밀은 자신이 먼저 앉았다. 그리고 제 허벅지 위에 그대로 록시아스를 안착시켰다. 록시아스가 카밀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가 놓으며 상체를 약간 뒤로 물렸다.

“무거워.”

“안 무거운 거 알잖아요.”

그야 그렇지.

록시아스는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불편해요?”

“아니.”

“그럼 이러고 있어요.”

하던 이야기 계속 해 주세요. 카밀은 록시아스의 얼굴을 끌어당겨 뺨에 뽀뽀한 뒤에 귓가로 속삭였다. 록시아스는 아, 어, 음, 같은 음절을 연속으로 흘리다가 카밀의 목덜미를 세게 쥐며 물었다.

“무슨 얘길 하고 있었지?”

“록시가 왕이었던 얘기요.”

“맞아.”

“그리고 또 무슨 직업을 해 봤어요?”

때를 놓친 탓에 록시아스 폐하를 알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안까웠으나 카밀은 지금에 몰입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록시아스의 현재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다. ‘우리’만이 서로를 공유하고 있었다.

“마부.”

“마부?”

왕 다음에는 마부다.

과연 록시아스가 그 성정으로 귀족들을 깍듯이 실어 날랐을까?

그 질문에 카밀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뜬금없이 숲속으로 마차를 몰아 귀족들 피를 마시지만 않았으면.

“록시가 어떻게 마부를 했어요?”

“넌 내가 무슨 직업을 했어도 다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네… 솔직히.”

“맞아.”

록시아스는 말이 잘린 카밀의 입술을 엄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어떻게 했는지 몰라. 그래서 뭘 하든 금방 그만뒀겠지.”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맹숭맹숭한 어조였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엄지에 짧게 키스하고는 물었다.

“마부는 어떻게 그만뒀어요?”

“귀족 피를 마셨어.”

그럼 그렇지.

록시아스의 과거사를 들으면 들을수록 카밀은 결말을 아는 영화를 보는 기분을 느꼈다. 예지력이라도 생겼는가 싶다.

“배고파서 어쩔 수 없었어.”

“잘했어요.”

“그리고 귀족들은 죽어도 싼 돼지들이었거든.”

“맞아요, 책에서 읽었어요.”

“하나같이 버릇이 없었어.”

“록시한테 못되게 굴었어요?”

“당연하지, 난 고작 마부였으니까.”

“어떻게 못되게 굴었어요?”

록시아스가 어디서건 누구에게서건 호락호락 당할 인사는 아니었으나 카밀은 물었다. 록시아스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이야기를 졸랐다는 편이 정확했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여자들은 친절했어. 건방진 건 남자 새끼들이었지.”

그 또한 알 만하다.

“자기들 못생긴 걸 나한테 화풀이했어.”

“못난 놈들이네요.”

“못생긴 애들은 원래 그래.”

“아.”

평이한 어조로 투덜거리는 록시아스가 사랑스러워 그만 웃음이 터졌다. 록시아스는 눈을 휘며 웃는 카밀을 빤히 보았다. 카밀은 어딜 가서도 화풀이할 일은 없겠다, 고 생각했다. 귀족이랍시고 추한 면상을 빳빳이 들고 다니는 놈들을 떠올리다 치밀어 오른 짜증이 금세 잠잠해졌다.

“…아무튼 그랬어.”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귀찮아. 웃긴 얘기도 아니야.”

“못된 애들한테 록시가 어떻게 했는지 알려 주세요.”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그야….

카밀은 오만한 귀족의 목덜미를 물어뜯거나 사지를 비트는 록시아스를 상상했고, 상상으로만 끝냈다.

“잘 모르겠어요.”

“마부 일을 계속하고 싶어서 처음에는 참았어.”

“참았어요?”

록시아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밀은 이어 질문했다.

“걔들을 주인님이나 마님이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그렇지.”

은밀한 미소를 입가에 띤 카밀이 속삭였다.

“들려줘요.”

“뭘?”

“주인님, 마님, 그런 말들요. 내가 못 들은 말들, 듣고 싶어요.”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신하들을 내려다보며 짧은 명령을 툭툭 내뱉은 록시아스는 머릿속으로 그리기 매우 쉬웠으나, 마부는 아니었다.

록시아스는 자신에 대한 열망인지 호기심인지 아무튼 눈부시도록 반짝거리는 카밀의 눈을 뚫어져라 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주인님.”

듣고 싶다는데 못 해 줄 것도 없다.

“아….”

카밀이 탄성인 듯 한숨인 듯한 음절을 흘렸다.

록시아스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마부로서 해야만 했던 말들을 뱉어 냈다.

“주인님, 어디로 모실까요.”

공손한 내용과 다르게 목소리는 숫제 당돌했다. 이러니 귀족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괴롭혔을 법도 했다. 아니, 물론 록시아스를 괴롭히면 안 되지만…. 주인님이라고 불렸다고 착각이라도 하는 양,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못되게 굴고 싶어졌다.

록시아스는 반짝였다가 이내 일렁거리는 카밀의 안광을 알아차렸고, 장난기가 발동했다.

“카밀, 주인님?”

허리춤에 감긴 카밀의 팔뚝에 힘이 실렸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목덜미에 건 손목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카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말씀을 하세요.”

“…록시.”

“어디로 가고 싶으신지.”

침대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침대로 자리를 옮기면, 록시아스의 ‘귀족을 모시는 말투’를 더는 듣지 못할 터였다. 그야 침대에서는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말씀을 주셔야 제가 알 것 아니에요.”

“그게….”

마른 목을 가다듬은 카밀은 잠시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가, 한껏 정돈된 저음을 냈다.

“집으로 가지.”

아. 록시아스는 장난스레 벌어진 입술 밖으로 혀를 꺼내 아랫부분을 핥았다. 귀족 놈들이 카밀처럼만 생겼더라면 보기에도 아까워서 흡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카밀의 가슴팍으로 손을 미끄러트렸다. 힘을 싣지 않았는데도 카밀의 등이 금방 소파에 갖다 박혔다.

“여기가 주인님 집이잖아요.”

록시아스가 예전에 연극배우를 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던 자신을 카밀은 비웃었다. 록시아스는 훌륭한 연기를 펼칠 줄 알았다. 아니, 실제로 마부를 해 봤으니 연기가 아니라 재현이 맞겠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간에….

카밀은 록시아스의 양 허리춤을 강하게 쥐었다.

“마부가 된 지 얼마나 됐지?”

“글쎄요. 왜 그런 질문을 하세요?”

록시아스는 아랫사람답지 않게 느긋하게 읊조리며 카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올라탄 자세가 능숙해서.”

“…….”

“말에.”

카밀 또한 능청스러웠다. 록시아스는 연극배우를 할 적에 동료였던 자들을 어렴풋이 되뇌었다. 그들보다 카밀의 연기가 100배는 낫다. 하지만 직업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눈깔이 사방에 널린 곳에 카밀을 내보일 수야 없으니까.

“마부가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툭, 툭. 단추가 희미한 소리를 내며 천 구멍에서 튕겨져 나온다.

“주인님이 잘 가르쳐 주셔서 그래요.”

단추 풀리는 소리가 우레와 같이 시끄러웠더라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카밀의 심장이 바깥에 나와 있기라도 한 양 시끄러웠다. 록시아스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주인님도 주인님이 되신 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카밀의 넓고 두툼한 가슴팍이 훤히 드러났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주인 노릇이 좀 어설퍼서요.”

“그래?”

“그럼요.”

벌어진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카밀이 호흡을 멈춘다. 훌륭한 비율로 쪼개진 복근이 굳어 있다. 그 위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문지르며 희롱했다.

“아랫것이 좀 만졌다고, 긴장하셨잖아요.”

긴장은 무슨….

미칠 것 같았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상의 밑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나 당찬 마부에게 탁, 손등을 맞고는 살갗에서 떨어져 나갔다.

“어딜 만지세요.”

“만지면 안 돼?”

“안 돼요.”

록시아스의 얼굴이 대번 가까워졌다. 카밀은 닿을 듯 말 듯한 입술을 당장 벌려 혀를 집어넣고 싶어졌다. 록시아스에게 눌린 허벅지 부분이 갑갑해졌다. 이만하고 눕힐까. 놀이를 중단하려던 참이었다.

“주인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세요.”

록시아스가 코끝을 맞붙인 채로 속삭였다.

“제가 알아서 해 드릴게요.”

언제인가 록시아스에게 두 눈이 가려졌을 때가 생각났다.

록시아스는 평소보다 예의 바른 말투를 사용할 뿐이지 평소와 다름없었다. 마부든 부엌데기이든, 어떤 아랫것도 주인을 이토록 당돌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눈썹 결의 각도를 잴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록시아스는 얼굴을 한 치도 물리지 않았다. 두 눈은 무구할 정도로 말똥말똥 뜨고 있다. 아니, 자신의 바지 앞섶을 풀어 헤치면서는 야릇한 상상을 하는지 눈꺼풀을 점점 내리깐다. 아슬아슬하게 벌어진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숨이 일각이 다르게 짙어진다.

이윽고 록시아스가 완전히 열린 앞섶으로 발기한 성기를 꺼내 쥐었을 때, 카밀은 록시아스의 것보다 무거운 숨소리를 흘렸다.

“아… 록시.”

록시아스에게 입술이 물렸다. 맞물린 입술이 호흡으로 젖는다. 촉촉한 소음이 턱끝을 맴돈다. 카밀의 혀끝과 아랫입술을 빨아 당긴 록시아스는 천천히 카밀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왔다. 카밀의 무릎을 잡아 벌려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꿇어앉았다. 동시에 아쉬운 입맞춤을 끝으로 떨어진 입술은 카밀의 턱선을 타고 하향했다. 울컥거리는 울대를 혀로 감싸며 짧게 애무한 뒤, 록시아스는 중얼거렸다.

“주인님을 기쁘게 하고 싶어요.”

말이 공중에서 흩어지자마자 혀를 꺼내 끝을 세운 록시아스는 카밀의 앞가슴이 쪼개진 선을 따라 훑었다. 옆구리와 복부 또한 샅샅이 핥았다. 흉터를 남겨도 금세 지워질 테지만, 살갗을 물고 빨며 새빨간 자국을 새겼다. 일부러 더 짙게.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도록.

한참 그러고 나서는 표정을 만들어 카밀에게 보였다. 카밀이 자신에게 자주 지어 줬던 얼굴이었다.

“열심히 할게요.”

가련해서 연민이 절로 드는 눈빛.

“저를 써 주세요, 주인님.”

창백하게 식히고 싶어지는 달아오른 안색.

“주인님 마음에 들게 노력할게요.”

가학심을 정당화시키는 음성과 단어들.

“저는 주인님 거니까, 주인님 마음대로 써요…. 깨끗하게 쓰든 더럽게 쓰든.”

카밀에게 받았던 모든 것을 돌려주고자 결심했었다. 이것 또한 다짐의 일환이다. 그가 자신의 뇌리에 남긴 표정과 말을 되돌려주는 것. 자신을 끓게 한 온도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

여전히 서툰 자신을 은폐하기 위해 카밀이 보여 주었던 모습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나 카밀은 본인이 했던 언행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록시아스를 이루는 낱알들로 매몰되어 있었다. 그러니 록시아스의 행동과 언사를 도발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진동을 선사하는 록시아스가 야릇하게 굴어 자극받은 온 세포가 들고 일어났다.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쳤다.

록시아스는 얼굴을 도로 내렸다. 카밀은 그에게 안정적인 암흑을 선사하는 흑발과 서리밭처럼 새하얀 이마만 볼 수 있었다. 잠시 동안….

관능적인 광경이 연이어 펼쳐졌다.

고개를 기울인 록시아스가 딱딱하게 굳은 복근에 철썩 달라붙은 성기 주변을 입술로 배회했다. 하아…. 무심코 토해 낸 입김이 핏줄 불거진 기둥을 더욱 뜨겁게 데운다. 카밀이 미간을 좁혔다. 록시아스의 어깨 위에 놓인 손이 대뜸 올라가더니 흑발을 거머쥐었다. 같은 때였다. 록시아스가 입술을 한껏 열어 선단을 집어삼켰다.

“아…!”

말캉한 입술에 귀두가 감싸인 카밀은 흉곽을 부풀렸다. 겨우 시작이었으나 한참 시달린 듯이 머리가 핑 돌았다. 고작 감기에 걸렸는데 중병 치료제를 한 움큼 집어삼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은 마부를 자처했으며 한때는 양치기였던 록시아스. 새벽에는 불경을 저질러 놓고 낮에는 십자가를 가슴에 그리며 신성한 기도문을 외우던 록시아스. 또한 권력을 주무르던 왕 록시아스. 자신의 연인이자 지배자이며 신인 록시아스. 그에게 성기를 물렸다.

다소 야만적이었던 과거에도 록시아스에게 구음을 시킨 적이 없었다. 자신이 해 준 적은 있지만 받을 생각은 모래알만큼도 하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무른 입술에 불경한 짓거리를, 어떻게, 감히.

무언가 잘못되었다. 록시아스에게 이러면 안 된다.

불안감과 배덕감이 성감을 극치로 끌어올렸다.

“록, 시… 하지….”

하지 마세요.

말려 세우기 위해 꺼내던 말이 도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그저 손바닥에 닿은 머리칼을 쥘 수밖에 없었다.

동그란 모양으로 넓게 벌어진 입술이 성기의 앞부분을 빨아당겼다. 한데 록시아스는 성기 전체를 삼키는 양 고개를 앞뒤로 크게 움직여야만 했다. 입가가 당겼다. 앞만 빠는 데도 힘겨웠다. 과연 전체를 애무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든다. 몸통과 사지가 골고루 커다랗게 성장한 카밀이었다. 성기라고 다를 바 없었겠지.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나. 당차게 결심한 마음이 무색해졌다.

아니다. 떠올려 보면 자신의 것도 그리 작은 크기는 아닌데 카밀은 눈시울을 적시면서도 목구멍 안까지 삼켰다. 그를 생각하니 견딜 만했다.

“우읍… 읍.”

찢어질 듯 벌어진 입꼬리가 계속되는 마찰로 벌게진다. 흘러나올 틈이 어디에 있다고, 록시아스의 입가로 타액이 흐른다.

“하….”

카밀은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미간을 최대한 좁혔다. 고개를 비스듬히 젖힌 록시아스의 뺨이 볼록 불거졌다가 홀쭉하게 꺼지기를 반복했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냉소적으로 다물려 있는 입술이 지금은 벌어질 만큼 벌어진 채로 난잡한 소음을 퍼트리고 있다. 호흡이 부족한 탓인지 뺨을 중심으로 만면이 점차 선홍빛으로 달아오른다. 밑동을 부여잡은 손이 바쁘게 움직이다가도 위로 혀를 쓸 때면 우뚝 멈추며 손끝만 잘게 떤다.

“훕… 으으.”

입 안이 꽉 막혀 말을 꺼내려다 실패한 것인지, 울음소리를 낸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동시에 록시아스는 눈물을 흘렸다. 괴로운 듯이 눈꺼풀을 꽉 닫았다가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들어 올린다.

“힘들면… 그만, 아….”

입 속이 틀어 막히지도 않았는데 카밀 또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록시아스가 힘이 풀려 툭툭 떨어지는 손으로 기어이 뿌리를 세게 움키더니, 성기를 더욱 깊숙이 밀어 넣은 탓이었다.

미끌미끌한 점막에 귀두가 문질러질 때마다 카밀은 탄성을 지르고 싶었다. 기둥 살갗에 감기는 혓바닥이 뜨겁다. 안쪽에서부터 밀려 나오는 입김은 더 뜨거웠다. 록시아스가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끓어오르는 것이 분명할 안쪽으로 선단이 미끄러졌다.

이윽고 끄트머리가 울렁거리는 벽과 닿았다. 식도가 시작되는 입구일 터였다. 아래도 좁은데, 겨우 피만 넘기던 목구멍은 또 얼마나 좁을까. 카밀은 지금이야말로 록시아스를 만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만요, 록시….”

카밀은 이미 목청이 혹사당한 이처럼 갈라진 저음을 냈다.

록시아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기가 촘촘히 스민 눈망울로 카밀을 올려다보았다. 카밀은 주정뱅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느른하게 풀어진 채로 미간만 겨우 죄고 있는 얼굴을 보자니 등골이 곤두섰다.

아, 이러니까 나한테 그랬구나.

자신에게 고문이 될 법한 힘겨운 행위는 상대에게 버거울 만큼 짜릿한 애무가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그만둘 생각이 말끔히 사라진다. 카밀이 열 오른 얼굴로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록시, 그만, 하세요. 말을 더듬으며 자신의 머리채를 휘어잡도록 만들고 싶다. 곤란해하던 주제에 끝내는 헐떡거리며 좋다고 울부짖을 것이다. 카밀도, 자신도.

구역질이 치밀었다. 입술은 자유자재로 벌릴 수 있으나 목구멍은 아니었다. 혓바닥을 일부러 내리깔지 않아도 묵직한 성기에 눌려 저절로 밑바닥에 달라붙었다. 욱, 욱, 추잡한 신음에 울대가 진동했다.

목구멍이 찢길 듯했으나 실제로 찢어져 봐야 아픔을 실감하기도 전에 낫게 될 터였다.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카밀의 흥분을 저지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지속적인 흥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식도에 정액을 쏟아붓길 바랐다.

고통스럽고, 순조로운 과정이었다. 머리채를 당기는 카밀의 악력은 앞서 상상했던 것보다 강력했다. 턱이 자꾸만 치켜지는 바람에 귀두가 목구멍 입구에 겨우 맞춰졌다 싶으면 미끄러져 엉뚱한 곳을 찔렀다.

카밀의 체액을 원하는 대로 마시기도 전이었으나 입 안은 게걸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처럼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따귀 또한 주륵주륵 내리기 시작한 눈물로 엉망이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시도는 끈질긴 노력 끝에 성공했다.

카밀은 턱을 한껏 젖히고는 스스로 아랫입술을 핥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호흡이 부족했다.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록시아스의 목구멍이 잔인하도록 빠듯했다.

“하, 아….”

“후으….”

얼굴을 찌푸린 록시아스는 뭉개진 신음을 냈다. 대번 고개를 물릴 법도 한데 숫제 눈물을 뽑아내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도리어 울대가 있는 지점까지 성기를 벅차게 밀어 넣었다. 입구로 넣을 때보다는 욕지기가 덜 치밀었다. 이물감은 당연하게도 전에 비해 훨씬 심했다. 식도가 타액조차 삼키지 못할 만큼 가득 찼다. 카밀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내벽이 짓눌렸다. 비명은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다.

카밀은 뒷머리를 얻어맞은 이처럼 해롱거렸다. 술에 취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다. 피부는 화끈화끈하고 관절은 죄 힘이 풀렸다. 시야가 아득한 통에 천장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어지러웠다. 팔목으로 눈자위를 덮었다.

같은 때 물컹한 내벽이 성기 전체를 조여 왔다.

“아…!”

타액으로 끊임없이 젖어 드는 탓인지 아래와 달리 위쪽은 숫제 미끌거렸다. 한데 옥죄는 힘은 아래나 위나 매한가지로 강했다. 음경이 축축하고 미끈둥한 천에 힘껏 감싸인 채로 주물러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식도가 벌어지는 고통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록시아스는 입술을 최대로 오므렸다. 송곳니에 카밀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 썼다. 카밀의 무게감에 눌린 혓바닥을 애써 세워 기둥에 돋아난 핏줄을 핥았다.

타액이 범람한 교접 부위에서 음탕한 소음이 만들어졌다. 여름날에 주르륵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게걸스럽게 빨아 먹으면 비슷한 소리가 날 것이다.

볼이 홀쭉해진 록시아스는 내내 턱을 치켜든 채로 신음하고 있는 카밀을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마음껏 올릴 수 없으므로 눈동자가 노려보는 모양이었다.

“하아, 안 돼… 요, 록시….”

안 되긴 뭐가 안 돼.

록시아스는 하마터면 미소를 짓느라 송곳니로 카밀을 상처 낼 뻔했다. 울대가 수시로 울렁거리는 길쭉한 목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구음에 몰입했다. 밑동을 거머쥔 손가락이 흘러내린 타액으로 질척했다. 입술에 가려진 속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 아, 미칠 것 같, 아요….”

고갯짓을 빨리했다. 카밀이 눈자위를 덮은 손을 물리더니 정면을 내린다. 카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록시아스는 스스로 벨트를 풀며 허벅지를 세웠다. 앞섶을 완전히 풀자 허리춤이 헐렁해진 바지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속옷 안으로 다급히 손을 집어넣었다. 자신의 것은 이미 입 속의 것과 다르지 않게 홧홧하고 딱딱했다. 선액이 비집고 나와 축축하기까지 했다. 농농하게 익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을 응시하는 카밀의 눈빛에 더는 참을 수 없어졌다. 고문이었다. 카밀의 성기를 빨면서 수음했다.

“우읍… 웃…!”

“하아, 아…!”

카밀이 먼저 파정했다. 호흡을 터트리듯 내뱉더니 밭은 숨을 몰아쉰다. 근육 사이사이 길이 선명한 복부가 빠르게 오르내렸다.

점멸했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온다. 카밀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성기가 아직 록시아스의 안에 있었다. 록시아스의 고갯짓은 멈췄다. 하나 생동하는 내벽이 꿈틀거리며 성기를 주물러 탈력감에 빠지지 못하게 했다. 바짝 곤두섰다가 단번에 무너져 내린 신경들이 찌릿찌릿 아팠다.

“후… 읍.”

성기를 가득 문 록시아스는 계속 자위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입술 대신 가랑이 사이에서 음란한 소음이 파다했다. 손길이 꼿꼿한 기둥을 위아래로 다급하게 왕복했다. 전체적으로 창백한 분홍빛인 성기는 끄트머리가 짙게 붉어져 있었다. 벌름거리는 요도에서 선액이 죽죽 넘쳐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으… 흐으….”

한계까지 벌어진 입술을 애써 오므리며 몽그라진 음성으로 신음한다. 자신, 카밀을 응시하고 있는 눈이 어딘가에 홀린 양 해이해져 있었다. 와중에 목울대를 꿀꺽거린다. 끝없이 생성되는 타액과 자신이 쏟아 낸 정액을 마시는 것이다.

록시아스가 기절할 것 같았다. 아직 기절할 때가 아니었다.

카밀은 도로 발기해 가는 자신의 앞섶을 록시아스에게서 빼냈다.

무자비하게 틀어 막힌 목구멍과 입 속이 자유로워지자 록시아스는 기침과 신음을 마구잡이로 섞어 내보내며 허리를 구부렸다.

“…후으, 하아, 아.”

카밀의 낯에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었던 시선이 발치로 내리꽂힌다. 엎드린 자세가 된 록시아스는 바닥으로 뺨을 내렸다. 고개를 지탱하기조차 힘겹다. 하지만.

“흣, 카밀, 주인님….”

상대가 자신을 하찮게 여기게 되어도 좋다, 그렇다, 좋다. 카밀이 자신을 완전히 소유했음을 실감하길 바랐다. 그래서 더욱 낮고 비굴하게 엎드렸다. 자신의 타액이 떨어져 있는 구둣발에 뺨을 비볐다.

눈물이 철철 넘쳤다.

“아, 읏, 흐윽….”

너무 기뻐서.

카밀에게 자진해서 굴욕당하며 욕구를 충족시켰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지만 자신은 카밀과 밀접해질수록 미쳐 가고 있었다.

카밀이 이런 나에게 실망할까? 실망하면, 나를 이렇게 만든 그에게 책임을 묻고 나를 포용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억지를 당당하게 부릴 만큼 난 카밀을 고집한다.

“아아, 하, 으…!”

사정과 동시였다. 카밀의 구둣발이 옮겨졌다. 뺨이 그대로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아무런 상관없었다. 어차피 전신이 바닥에 처박힌 채 흐물거리고 있었다.

볼품없는 꼴인 몸이 둘러업혀졌다.

***

카밀은 록시아스가 사정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하의를 갈무리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채 가쁜 숨을 쌕쌕거리는 록시아스를 들어 올렸다. 그대로 욕실로 가 록시아스를 씻긴 후에는, 자신 차례였다. 록시아스의 발끝 아래 충성스러운 개처럼 수그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카밀과 조우한 뒤로 록시아스의 계획이 무너졌듯이, 카밀의 계획 또한 실현되지 못했다. 먼지처럼 나약한 인내심 탓이었다. 아니면 자신을 먼지처럼 가볍게 만드는 록시아스 탓이든가.

위 층 침실에 붙은 욕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층계의 중간쯤 됐을까, 그동안 정신을 되찾았는지 록시아스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옷매무새나 머리 모양 등은 엉망이었지만. 아무튼 그러고는 표정과 같이 평이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것이다.

“넣어 줄 줄 알았는데….”

소파, 아니면 바닥에 당장 눕혀 놓고 이런저런 짓거리를 록시아스에게 쏟아붓고 싶었으나 소파며 바닥은 록시아스가 불편할 테니 옷과 함께 정신도 애써 갈무리했는데.

더는 사고할 수 없었다. 머리가 멈췄다. 카밀은 과거 기억을 되찾은 이래부터 늘 자신이 인간보다 짐승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나 록시아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으므로 똑똑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록시아스는 자신더러 동물이 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금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카밀은 록시아스를 층계에 내려놓았다. 록시아스를 뒤집어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잡아 끌어내렸다.

엎어진 록시아스는 층계를 붙잡고 신음했다.

“윽, 흑… 읏!”

카펫도 깔리지 않은 나무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교음이 섞여 소란스러웠다. 록시아스의 무릎이 나무 거스러미에 긁혔다. 하나 생채기가 나는지 마는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록시아스의 허리를 붙잡은 카밀은 어금니를 틈새 없이 맞붙이며 다른 손으로 계단 난간을 쥐었다. 삐걱, 삐걱, 삐걱. 소음이 더욱이 시끄러워졌다. 딴딴한 허벅지가 솟아오른 볼기를 치받는 속도에 따라 소음의 간격이 달라졌다. 점점 더 빨라졌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록시아스는 계단을 긁다가, 디딤판에 이마를 붙이고 울었다. 성기가 뒤로 빠져나갔다가 도로 단번에 밀려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때에 맞춰 디딤판에 이마가 쓸렸고 챌판에 정수리가 쿵쿵 부딪혔다. 아픈 줄은 몰랐다.

카밀은 발정기를 맞은 짐승처럼 아랫도리를 놀리면서도 록시아스가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다치는 꼴은 보기 싫었는지, 대번 행위를 멈추고 구멍에서 성기를 빼내고는 록시아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다음부터는 다시 야성만 챙겼다.

“으, 흑!”

뒤에서 박히면서부터 척추가 죄다 부서지거나 녹아내린 줄 알았는데, 아래에서 꽂히는 통에 등줄기가 찌릿찌릿하니 여태 등허리가 남아 있기는 한가 보다. 머리가 저절로 한껏 젖혀졌다.

록시아스를 한쪽 팔로 받쳐 든 카밀은 정면보다 조금 아래 자리한 록시아스의 이목구비를 차례로 핥고 키스했다. 단맛이 도는 피를 가진 록시아스는 살갗도 달았다. 풍성한 속눈썹도 달았다. 오뚝하게 솟은 콧방울도 달았다. 그중에서도 험한 말을 뱉어도 예쁘고 지금처럼 우는 소리를 내도 예쁜 입술이 제일 달았다. 어쨌든 록시아스를 이루는 것들은 생김새는 각자 달라도 맛은 다 똑같이 달콤했다. 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입술을 겹쳐 혀를 훑는 동안 갈증을 느꼈다. 이제는 허락을 받지도 않고 마음껏 핥고 빨 수 있는데 어째 점점 부족했다. 목이 바짝 탔다. 록시아스에게는 대게 유유한 성미가 사나워진다. 카밀은 송곳니를 세웠다. 동시에 그가 쥔 난간이 부서진다. 쳐올려지는 접합부에서 퍼지는 마찰음 사이를 파열음이 갈랐다. 나무 조각이 사방으로 튕겼다. 덧없게 흔들리는 목을 첨예한 치아가 찔렀다.

“흐읏…!”

카밀이 파고든 뒷구멍에 쏠려 있었던 감각이 일부분 쪼개져 목덜미로 향했다. 록시아스는 자신을 흡혈하는 카밀의 머리채를 구겨 잡았다.

날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지.

금발을 휘어잡은 채 손목을 틀었다. 카밀의 송곳니가 떨어져 나갔다. 미처 삼켜지지 않은 핏방울이 각자의 뺨으로 튀었다. 록시아스는 그대로 카밀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고, 동맥을 뚫었다.

“아.”

“훕….”

흡혈을 말려 세웠다고 시위라도 하는지 카밀이 앞서보다 거칠게 박아 올린다. 신음이 연달아 터져 피를 제대로 넘기기 어려웠다. 아까운 피가 입가로 샜다. 입술에 채 닿지도 못한 것들은 카밀의 목선을 따라 흘러 탄탄한 가슴팍까지 미끄러진다. 고개를 기울인 록시아스는 흐느끼다가, 카밀의 피부에 맺힌 핏방울을 핥아 마셨고, 팔다리를 늘어트린 채로 울다가, 카밀의 쇄골에 고인 핏물에 혀끝을 담갔다.

어떤 인간들은 섹스하기 전 성감을 극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마약을 한다. 두 흡혈귀가 서로의 피를 마신 행위는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하아, 아… 아으, 흐….”

삽시간 입 안으로 퍼진 향기가 뇌리까지 지배한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두피가 당긴다. 눈꺼풀이 비정상적으로 파르르 경련한다. 눈동자는 치켜져 까만 시야 속을 헤맨다. 심장과 폐부가 불규칙적으로 작동했다. 고개를 바로 세우고 있는지 얼마나 꺾였는지 자각할 수조차 없다. 상대의 피로 전신이 마비됐다. 음란한 욕구를 흡수하는 감각 기관만이 살아남았다.

“아, 윽, 아, 아아!”

굵은 기둥은 지속적인 마찰로 인해 벌겋게 부어오른 입구를 끊임없이 쑤셔 올렸다. 빳빳했던 내벽은 보드랍게 풀어졌다. 배 속을 몽그라트릴 작정인 것처럼 휘젓는 성기에서 흘러나온 선액으로 마를 새 없이 젖었다. 바깥 피부도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축축한 살갗과 살갗이 맞붙을 때마다 서로 엉기듯 철썩 달라붙었다. 떨어질 때는 억지로 떼어놓는 모양으로 멀어졌다. 아래위에서 비롯된 파찰음이 아주 너저분했다.

팔다리는 본능을 따라 행동하고 어수선한 시야는 록시아스로 꽉 차 있으니 카밀은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으읏… 윽!”

카밀에게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로 떠밀리던 중, 등이 난간에 부닥친 록시아스가 허리를 말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즉시 카밀은 벽이 있는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겨 록시아스를 내려놓았다. 무너지는 몸을 붙잡아 지탱하고는 홱 돌려 자신에게 등을 보이도록 했다.

“록시… 벽, 짚어요.”

상대의 배려에 감동할 여유는 록시아스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흑…!”

카밀은 록시아스의 허리를 붙잡아 곧바로 박아 넣었다. 전부터 쑤셔지고 있었던 구멍은 버거운 크기의 성기를 수월하게 빨아들였다. 교음이 다시금 재생됐다. 두 사람의 청각은 진공 상태에 갇힌 듯 모든 소음을 뭉개진 파동으로 받아들였다. 벽을 짚은 창백한 손이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졌다. 카밀에게 붙들려 고정된 허리가 진동하며 흔들렸다. 선명한 등줄기가 방향을 수시로 바꾸며 구부러졌다.

“아, 너무… 윽, 세…!”

“하, 더… 어떻게, 살살해요….”

길쭉한 목선을 살짝 덮은 흑발을 쓸어 올려 고정한 카밀은 척추뼈가 도드라진 부분을 입술로 감싸 빨았고, 혀로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이어 턱을 내렸다. 투명하고 고운 피부 아래 푸른 핏줄이 지나는 자리를 물었다.

“잠… 깐, 흣!”

목덜미가 깨물리고 머지않아 록시아스가 벽에 이마를 비비며 숨을 먹었다. 잠시 호흡을 멈춘 육체가 잘게 경련했다.

구멍이 전보다도 더 강하게 성기를 옭아 좼다.

벽에 비벼지고 있었던 록시아스의 성기가 정액을 토해 냈다. 뒤가 빠르게 올려쳐지는 탓에 정액이 온 곳곳에 튀었다. 튀지 않은 것은 벽에 발렸고, 벽에 문질러지는 성기에 도로 묻었다.

“흐으, 응, 아…!”

이미 절정에 다다른 몸은 지나치게 예민한 상태가 되었다.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해서 애원했다.

어깨 너머로 카밀의 손이 다가온다. 턱을 밀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입술을 입술로 막는다. 구강에 그나마 남아 있었던 공기가 모조리 카밀에게 훔쳐졌다. 카밀의 혀가 자신의 입천장을 훑었다가 어금니를 쓸고, 혀에 얽혀 온다. 자신의 피 맛이 났으나 곧 카밀의 향기에 뒤덮여 더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

***

장소만 다를 뿐 벌어지는 행위는 같았다.

한창 이루어지는 섹스는 개의 교미와 비슷했다.

늘씬한 몸은 내동댕이쳐지듯이 침대 위로 뉘어지자마자 엎드려 허벅지 사이를 넓혔다. 기골이 훨씬 커다란 몸이 그 위로 포개졌다.

“후… 아.”

“으, 응! 아! 흐윽!”

혈관이 불거진 음경이 배 속을 들쑤시며 뒤집어 놓았다. 딴딴하게 굳은 귀두가 내벽이 오목하게 모인 가장 안쪽을 퍽, 퍽퍽, 불규칙한 간격으로 빠르게 때렸다. 쥘 수 있을 만큼 크게 튀어나온 골반 또한 빨갛게 익은 둔부를 연달아 난타했다. 근육이 알차게 들어차 보기 좋게 솟은 엉덩이가 탄력적으로 흔들렸다.

살 기둥에 들러붙는 점막이 앞서 몇 번이나 내장에 싸질러진 정액과 수시로 쏟아지는 선액으로 인해 미끌거렸다. 주름이 매끈하게 펴진 채 벌어진 구멍 가장자리에는 희끄무레한 거품이 일었다.

“흐으으….”

록시아스는 흐느적거리는 몸을 낮췄다. 축축한 성기가 얇은 시트와 엉기며 비벼졌다. 이미 여러 번 사정을 겪은 뒤였다. 요도에서 흘러나오는 정액이 본래보다 묽었다.

“읏, 응, 으… 아….”

길게 빠졌다가 세차게 박아 넣고는 했던 추삽질이 둔해졌다. 등 뒤에 자리한 카밀의 무게가 이전보다 묵직해졌다. 끝까지 꽂힌 성기가 긴 왕복 운동 대신 내벽 사방을 둔중하게 누르며 넓혔다.

이윽고 접합부가 드세게 쓸리더니 카밀의 허리 짓이 잦아들었다. 느른한 호흡이 귓가와 뒷덜미로 뿌려졌다.

“하아, 아, 아….”

“하….”

홧홧한 속에 또다시 씨물을 한가득 내보낸 성기가 느긋하게 빠져나간다. 부풀어 오른 귀두의 깊은 홈이 예민해진 내벽을 갉았다. 록시아스는 타액으로 축축한 입술을 뻐끔거리며 허리를 비비 꼬았다.

“으응… 으.”

“록시….”

바닥으로 떨어진 허리를 붙잡아 들어 올린 카밀은 록시아스의 볼기 한 짝을 쥐어 바깥으로 밀었다. 혹사당한 듯 빨개진 구멍이 뻐끔거리며 새어 나오던 정액을 뭉텅뭉텅 토해 냈다. 달달 떨리는 허벅지를 타고 길게 흘러간 정액은 무릎께에 머무르다가 시트 위로 고였다.

“혹시 배 아파요?”

잔뜩 가라앉은 저음과 섞여 나온 숨이 엉덩이 골 부근에 닿는다.

카밀이 정사의 흔적으로 엉망인 둔부 사이로 콧대를 가져가더니 혀를 내밀었다.

“아니, 안 아…! 흐, 거기…!”

록시아스가 기겁하며 팔을 허우적거렸다. 카밀에게 떨어질 요량으로 앞으로 기었다. 그런데 발목이 탁 붙잡혀 도로 끌려갔다. 이전보다 카밀과 더욱 가까워져 버렸다. 발이 꿇어앉은 카밀의 종아리에 스쳤다.

“록시 배에 있던 건데… 그냥 흘리기 아까워….”

“하지… 흐, 하지 마!”

록시아스의 허리춤보다 낮게 바짝 엎드린 카밀은 달달 떨리는 허벅지 사이로 디민 고개를 꺾었다. 길쭉한 허벅지에 세로로 남은 정액을 가장 밑부터 혀로 훑었다. 바짝 세워진 혀끝이 살갗을 깊숙이 누르며 핥아 올라갔다. 이어 도로 정면이 둔부께와 맞닿자 카밀은 살성이 탱탱한 볼기 살을 콱 깨물었다. 뒤를 돌아보고 있던 록시아스가 얼굴과 어깨를 시트로 떨어트렸다.

“흐으… 미쳤어….”

“맞아요, 미쳤어요.”

우아하게 뻗은 손이 양 볼가를 우악스럽게 쥐더니 벌린다. 앞서 실컷 싸질러 놓고도 부족했는지 욕망이 그득한 눈길이 체액으로 번들거리는 구멍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찰나 카밀은 아랫입술을 핥았고, 혀를 홀린 듯 구멍으로 가져갔다.

“…이상, 이상해.”

숨 돌릴 여유가 겨우 왔나 싶었더니, 말캉한 살이 뒤로 들이치자 다시금 정신이 아득해진다. 피부가 오소소 일어선다. 손끝 발끝이 찌릿찌릿해졌다. 카밀이 성기로 내장을 들쑤실 때 느끼는 감각과는 또 다른 자극이 일어났다.

“하지 마, 응? 카밀아….”

본 모습으로 좁게 오므라든 입구가 붉은 혀를 말려 세우는 듯이 벌름거렸다. 멈추라며 더듬거리고 세찬 눈빛을 보내도 아랑곳하지 않는 카밀이었다. 난잡하기 그지없는 짓거리는 계속되었다.

동시에 카밀은 록시아스의 허벅다리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싫어하는 척하면서.

단단하게 발기하는 중인 성기를 감싸 부드럽게 흔들어 주기 시작했다.

“아, 하아, 으응…!”

험한 파도를 헤치고 실컷 마음고생을 하며 자랐어도 티끌 하나 없는 귀한 낯짝으로 자란 카밀이 어떤 표정으로 뒷구멍을 핥고 있는지, 구태여 보지 않아도 상상하기 쉬웠다. 앞을 주무르는 손길도 충분히 자극적이었으나 음탕한 감상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상상이었다. 록시아스는 금방 사정했다.

“읏…! 그, 만… 그만….”

손가락 사이사이가 정액으로 젖었음을 알 텐데도 카밀은 손짓을 멈추지 않았다. 내벽을 구석구석 핥는 혀 짓과 입구를 빨아 당기는 입술은 더욱이 노골적으로 변할 뿐이었다. 막 절정을 맞은 몸에 연이어 자극이 전해지니 딱 죽을 것만 같았다. 제 몸과 마음을 빼앗고 마음껏 휘두르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카밀은 이제 정신까지 앗아 가려고 한다. 아니다, 이미 앗아 갔다.

“제발… 으으… 흐, 그만….”

성교가 아니면 쓸 일이 없는 생식기였다.

사정욕과는 또 다른 생소한 욕구가 성기로 몰렸다.

“나… 나 쌌어… 응? 카밀, 아….”

분명 방금 사정했는데… 그 증거로 카밀의 손이 흠뻑 젖어 있었다. 허벅다리 사이에서 퍼지는 질척한 소음으로 알 수 있었다.

록시아스는 자꾸만 고꾸라지는 고개를 애써 들어 올려 뒤를 돌아보았다.

“힘들어, 으응…? 으…!”

애원이 들리지 않은 양 카밀은 손짓을 더욱 거칠게 했다. 탈력감을 허락받지 못한 성기가 껄떡거리다가, 지나친 악력으로 저지된다.

“하아, 아, 아윽!”

더는 목을 바로 세우고 있을 수 없었다. 눈이 뒤집어진다. 천하기 그지없는 신음이 벌어진 입술로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추잡한 꼴일지, 따위를 걱정하다가 그마저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몽그라진 이성이 녹아내렸다. 등줄기를 따라….

시야가 일순 환하게 번쩍였다가 새까맣게 암전된다.

“…아, 하, 하아.”

록시아스의 헐떡거림이 잦아들었을 때 카밀은 축축하게 젖은 구멍 사이에서 혀를 물렸다. 록시아스를 뒤집어 그 위로 곧바로 올라타 성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간 정액이 미끄러져 나오더니, 록시아스가 어깨를 크게 튕겼고, 성기에서 투명한 물이 왈칵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카밀은 정액은 물론이거니와 소변은 결코 아닌 물이 뿜어지는 성기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흐… 응….”

“좋았어요? 록시, 이렇게 많이 싸고.”

“응… 흐으, 하….”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대략 자신을 탓하고, 또, 좋다는 뜻일 것이다.

카밀은 입가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치며 록시아스의 등 아래로 팔뚝을 넣어 안아 올렸다. 뒤로 확 꺾이는 고개를 받쳐 바로 세워 주고, 제대로 뜨이지 않은 눈에 키스했다. 이마에 붙어 있는 까만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밭게 호흡하는 입술에 또 키스했다. 록시아스가 전에 없이 힘겹게 숨을 헐떡거리니 혀를 넣지는 않았다. 못다 한 일은 씻겨 주면서 하면 된다. 청결한 것을 좋아하는 록시아스를 씻기러 욕실로 향했다. 점점 자신에게 힘을 실으며 엉겨오는 몸이 아주 뜨거웠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마자 다가오는 입술 탓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촉촉하게 내려앉았다가 멀어지는 입술에 시선이 빼앗겼다가, 시야를 넓혀 카밀의 얼굴 전체를 담았다.

“그게….”

록시아스가 뱉은 말머리를 끝맺지 않고 우물거렸다. 카밀은 욕실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는 물었다.

“어디 불편해요?”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금방 붙는 몸인데 불편해 봐야 잠깐이므로 어리광부릴 필요가 없었다. 록시아스는 고개를 내저었고, 눈동자를 침대 부근으로 옮겼다. 그를 따라 눈길을 던진 카밀은 흠뻑 젖은 시트를 발견했다.

“아.”

“저게….”

무엇이냐고 차마 묻기 민망했다.

활짝 웃은 카밀이 양 뺨에 연달아 뽀뽀하고는 말했다.

“아까워요, 다시 가서 다 핥아 버리고 싶어요.“

“…….”

“그렇게 할까요?”

뒤이은 질문에 록시아스는 카밀의 가슴팍을 퍽, 때렸다. 카밀이 개구지게 웃으며 다시금 다리를 움직였다. 욕실 문턱을 넘을 때, 록시아스는 재차 눈을 감고 몸을 늘어트렸다. 이후로는 카밀이 알아서 욕조에 집어넣고 몸을 씻겨 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귀찮았다.

‘주인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세요.’

말만 그렇게 해 놓고 또 카밀의 손을 빌린다. 아니, 손만 빌린 게 아니지만…. 모르겠다. 잠이 오는 것 같다. 물론 실지 잠을 취하지는 않을 테니 기분뿐이리라. 우스운 일이다. 영영 게으르고 싶어졌다. 온몸이 노곤하다. 나쁘지 않은 상태다. 마음이 편안했다.

***

상대와 눈이 마주치면 시간이 몇 시든 장소가 어디든 고려하지 않았다. 하고 있었던 일을 집어던지고 해야 할 일을 망각하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었다.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하체를 붙인 채 헐떡거리는 사랑스러운 연인뿐이었다. 그것이 두 사람의 삶이었으며 일상이었고 호흡이었다.

오늘은 책을 읽다가 눈이 맞았다. 읽던 책을 놓고 머릿속을 지나던 활자를 버렸다. 카밀이 먼저 달려들었고 록시아스가 책상에 뉘어졌다. 걸치고 있던 옷이 차례로 바닥에 떨어지고, 흔들리는 책상 위 물건들이 쏟아졌다. 책상과 붙어 있었던 등이 천장을 향했을 때는 책상 위에 놓였던 물건들이 전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한 번으로는 모자랐으며 온종일 해도 부족했다.

책상에서 떨어진 후에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정리하다가 입술을 맞댔고, 손에 쥔 물건들을 놓치며 카펫에 엎어졌다. 책 모서리에 등이 찍히고 허벅지가 긁혀도 괜찮았다. 아프지 않았고 어차피 나을 상처였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상대에게 생채기가 생기는 것은 용납하지 못했다. 상대의 등허리에 난 상처를 확인하자 폭신한 카펫이 가시밭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카밀은 록시아스를 번쩍 안아 들었다. 록시아스가 뒤로 손을 뻗어 책장을 잡았다. 책상과 마찬가지로 흔들리던 책장에서 책이 무너져 내렸다. 책장이 점점 기울었다. 카밀이 자리를 옮겼다. 빈자리에 즉시 책장이 무너졌다.

소란이 지나간 뒤였어도 적막해지지 않고 또 다른 소란이 계속되었다.

정신을 되찾고 나자 보이는 풍경은 더 이상 고풍스러운 서재가 아니라 창고였다. 먼지 쌓인 책들에서 뿜어져 나온 먼지들이 공중을 떠다녔다.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저녁이었는데,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먼지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상대는 더욱이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어쩌면 먼지조차 빛내는 것은 아침 해 따위가 아니라 상대일지도 몰랐다.

책이 기울어진 갈대처럼 바닥에 깔린 서재를 벗어나 일단 목욕을 했다. 똑같은 향기를 입고 서로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머리칼이 스치는 목덜미보다 상대를 담은 가슴속이 더 간지러웠다.

씻은 몸에 깨끗한 옷을 걸치니 다시 태어난 이 같아 보였다. 24시간을 함께하는 상대에 대한 감상이 일 초마다 새로운 울림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또 보며 눈빛으로 칭찬하고 입술로 경외했다.

상대는 자신이 살을 깎고 피를 먹여 만든 걸작이었다. 상대를 음미하고 있노라면 풍부한 감동이 차올라 어떨 때는 눈시울까지 뜨거워졌다.

그들은 자신의 손으로 빚어낸 걸작에 감명받으면서도 자만하지는 못했다. 감히 오만해지기에는 상대가 너무도 귀중했다. 두 번 다시 빚어낼 수 없을 만큼 유일했으므로.

감탄을 거듭하던 카밀과 록시아스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서재를 뒤늦게 떠올렸다. 정리를 하러 서재로 가는 동안에도 약속한 듯 손을 꼭 잡았다. 그러면 휑한 복도가 꽃길로 변했다.

책을 주워 책장에 꽂아 넣는 중이었다. 마침 손에 잡힌 책이 역사서였다. 카밀은 책을 펼쳐 나온 페이지에 잠시간 몰입했다. 눈은 활자에 두고 있었으나 머릿속으로 읽히는 것은.

“록시.”

카밀이 시선을 올리며 록시아스를 불렀다.

책장 아래 칸은 모두 채운 뒤였다. 위 칸에 책을 꽂아 넣은 후 팔을 거둔 록시아스가 카펫에 쭈그리고 앉은 카밀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부족해요.”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인지, 말의 앞뒤가 잘려 있었다.

하나 록시아스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여기에서 말고.”

책장 정리가 대단한 노동도 아니지만은 수고를 두 번 할 생각은 없었다.

“응, 여기에서 말고요.”

역사서를 들어 록시아스에게 넘긴 카밀이 앉은 몸을 일으켰다. 록시아스가 카밀을 향해 몸을 돌렸다. 카밀의 뺨에 손을 올렸다. 그러면, 예상대로 카밀이 자신에게 키스를 해 왔다. 너무 자주 키스를 해서 홀로 호흡하는 시간과 상대와 입술을 맞추고 호흡하는 시간이 비례할 지경이었다.

한참 입술을 나누다가 턱을 물린 카밀이 예쁘게도 웃으며 말했다.

“얘기로만 듣지 말고, 직접 가서 보고 싶어요.”

섹스 이야기가 아니었나.

록시아스가 눈을 평상시보다 조금 더 동그랗게 떴다. 입꼬리를 더욱이 둥글게 말아 올린 카밀이 록시아스의 왼쪽 뺨을 쓸어 냈다.

“내가 모르고, 록시만 아는 장소들이요.”

“아….”

“록시가 살았던 곳들, 지나쳤던 곳들이요.”

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명분은 연인의 한 마디 소원이면 충분했다.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다. 옷 몇 벌과 나란히 몸을 누일 공간을 빌릴 돈, 가짜 신분증, 심심한 공간도 꽃동산으로 만들어 주는 연인으로 완벽했다.

여행 경로는 록시아스의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으므로 카밀은 록시아스가 가는 대로 따르기만 했다.

그들은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기차도 탔고, 버스도 이용했다. 둘만의 산책이 필요할 때쯤에는 걷기도 했다. 그러다가 몸이 동할 때는 호텔 방을 빌려 영영 그곳에 눌러앉을 것처럼 며칠이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카밀은 익숙한 도시여도 지명을 처음 듣는 낯선 시골에 가는 것처럼 록시아스를 따라 이곳저곳 유랑했다. 록시아스는 ‘바로 여기에 내 집이 있었어’라며 아무것도 없는 풀밭을 가리키기도 했고,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고성을 바라보며 ‘저기는 벽난로가 200개가 넘어’ 하고 설명하기도, 고즈넉한 마을의 돌바닥에 발을 디디며 ‘여기는 원래 산이었어’라고 알려 주기도 했다.

입으로만 전해 듣는 것과 그 풍경에 녹아든 록시아스를 직접 보는 것은 차이가 컸다. 다양한 장소에서 카밀은 색다른 록시아스를 선명하게 상상했다. 자신이 모르는 록시아스를 알게 되었고, 록시아스만이 아는 장소는 이제 자신의 추억이 되기도 했다.

종종 록시아스는 이전 마부 흉내를 내었을 때처럼 과거 그가 가졌던 직업을 연기하며 카밀을 웃게 하기도 했다. 반은 그저 카밀이 좋아하는 게 기뻐서, 반은 카밀이 아쉬워하는 자신의 역사를 더 또렷이 공유해 주고 싶어서 그랬다.

끝나지 않을 듯이 길고 긴 발자취를 되밟으니 어느덧 겨울이 지나고 봄꽃이 피었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더운 공기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여행 경로를 따라 시기와 기후가 돕고 있었다. 카밀과 록시아스의 발길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은 로스톡이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카밀이 수영을 하고 싶다고 지나가듯 말하자 록시아스가 로스톡 이야기를 꺼내 마지막 목적지로 정했다.

로스톡에 가까워질수록 소금기 어린 물 냄새가 짙어졌다. 어디를 지나든 느긋하기만 했던 두 사람의 걸음이 조금 다급해졌다.

과거에도 이 길을 나란히 걷곤 했었다. 발소리에 채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안가를 향해 걸었다. 지금처럼.

그러나 과거와 지금은 많이 달랐다. 아슬아슬하게 스치던 길쭉한 손가락을 거머쥐길 바랐던 어린 카밀은 이제 록시아스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늦춰야 할 만큼 커졌다. 자신을 올려다보던 아이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하늘만을 쳐다보았던 록시아스는 이제 따뜻하게 익은 눈빛을 카밀에게 망설임 없이 전할 만큼 솔직해졌다.

해안가에 다다랐다.

노을이 발길을 붙잡았다.

나란히 선 두 사람은 타오르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록시.”

카밀이 록시아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태양을 응시하던 록시아스가 시선을 마주쳐 왔다.

“응, 카밀아.”

자신을 녹이는 한 쌍의 붉은 태양은 밤에 떠밀려 침몰하는 해와 달리 결코 지지 않았다.

바닷바람에 살랑거리는 흑발을 넘긴 카밀이 록시아스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목덜미에 팔을 걸었다. 카밀의 눈동자가 물기로 촉촉했다.

왜 울어.

소리 내어 묻는 대신 록시아스는 카밀을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지평선으로부터 쏟아지는 노을빛이 마주 닿은 콧대 틈새로 반짝거렸다. 오늘의 마지막 햇살이었다.

점차 잦아든 파도 소리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귓가에 닿는 것은 연인의 속삭임뿐이었다.

사랑해.

아무도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끊임없는 고백을 들었다.

옛날 옛적의 그때처럼, 그리고 또 영원히.

<‘퍼스트 바이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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