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2권) (3/6)

퍼스트 바이트 2권

03.

입술은 곧바로 맞닿지 않았다. 고개에 조금이라도 힘을 푼다면 입술이 포개질 거리에서 록시아스는 일순 멈췄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목덜미에 두른 팔에 힘을 실었다. 독촉하는 듯이. 그러자 이미 붙은 코끝이 구부러졌다. 록시아스가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였다. 콧대가 제 모습을 되찾았다.

핏방울이 대롱대롱 맺힌 입술이 열렸다. 카밀 또한 입술을 뗐다. 혀끝을 내밀었다. 그 순간 툭, 핏물이 떨어져 혀끝에 발렸다. 피 한 방울을 머금은 혀가 장밋빛 입술 안으로 사라졌다.

그토록 염원하던 변화의 시작, 카밀의 표정은….

록시아스는 물었다.

“맛이 어때?”

“더….”

카밀은 울 것 같은 얼굴로, 목소리로 애원했다.

“더 주세요.”

“응, 더 줄게.”

잠투정 부리는 아이를 어르는 양 노곤한 어조로 속삭인 록시아스는 이어 제 입술을 또다시 물어 찢었다. 방울방울 맺히기만 하던 피가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터진 아랫입술을 타고 내려간 핏줄기가 카밀의 입가와 턱으로 투둑, 툭, 낙하했다.

강렬한 피 냄새. 카밀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고, 록시아스의 목덜미에서 뒷머리로 손바닥을 쓸어 올리고는 손가락을 구부렸다. 흑발을 쥐어 제게로 눌렀다. 고개를 틀었다. 숨보다 혈액이 먼저 와 닿았다. 다음에는 입술이었다. 드디어 포개졌다. 틈도 없이.

카밀은 피를 훔치기 위함인 듯 록시아스의 아랫입술을 핥았으나, 이어 본래 목적을 향해 혀를 미끄러트렸다. 록시아스의 안쪽으로…. 가만히 멎어 있는 혓바닥 위를 쓸었고 혀끝을 혀끝으로 감았다. 록시아스의 손가락이 관자놀이를 지나 금발에 파묻혔다.

“그렇게….”

그렇게 시원치 않게 먹어서야 종일이 걸려도 흡혈귀가 되지 못할 터였다. 그러나 조언이자 꾸중은 카밀의 입 속으로 말려들어 갔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본디 알고 있다는 양 록시아스의 아랫입술을 살포시 물어 빨았다.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고개를 반대편으로 튼 카밀은 록시아스의 턱을 붙잡고서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핥았다.

록시아스의 피 맛은 달았다. 비린 향도 나지 않았다. 흡혈귀 피라 특별한 걸까…. 꽃을 쥐어짜 즙을 내 마신다면 이런 맛이며 향일 것이다.

하지만 록시아스는 시간 낭비를 즐기지 않으므로 향유享有는 거기까지였다. 록시아스의 살갗에서 입술을 물린 카밀이 읊조렸다.

“더 마시게 해 주세요, 록시… 더 필요해요.”

단순히 음심과 소유욕에서 비롯된 애걸이 아니었다. 카밀은 갈수록 폭발적으로 요동치는 제 심장을 느꼈다. 록시아스의 붉은 눈보다 입술에 더 시선이 갔다. 그곳에 먹음직한 피가 있기 때문이었다. 변화는 이미 물꼬를 텄다.

“…….”

칭얼거림이 끝나자마자 록시아스는 제 혀를 깨물었다. 단번에 입 안으로 혈액이 차올랐다. 입술을 찢었을 때와 비교하지 못할 만큼 많은 양의 피가 입가로 넘쳐흘렀다. 반듯한 턱밑으로 미끄러져 카밀의 뺨을 적셨다.

핏방울이 떨어진 오른쪽 눈을 찡그린 카밀이 입꼬리를 시원하게 당기며 동시에 입을 열었다. 록시아스의 뒤통수를 재차 눌러 제게 가까워지도록 한 뒤 핏물이 넘치는 입술을 머금었다. 다디단 혈액이 혓바닥을 타고 목구멍으로 밀려 들어왔다. 카밀의 불거진 목울대가 반복적으로 울컥거렸다.

흑발을 거머쥔 하얀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돋아났다. 록시아스의 피를 삼키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록시아스는 금빛 속눈썹 길이를 잴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카밀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은 카밀은 기도하는 교역자처럼 단정한 기색을 입고 있었다. 그런 얼굴로 피를 게걸스럽게 취하고 있었다. 이내 입술을 떨어트리자 카밀의 만면이 시야에 담겼다. 카밀은 코 아래로는 피범벅이었다. 교역자가 아니라 육식자였다.

멀어진 먹잇감을 감지한 카밀은 즉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디 가요….”

피로 목청을 한껏 적셨을 터인데 가라앉은 음성이 갈라져 있었다. 볕 받은 해안처럼 푸르던 눈동자는 보랏빛을 띠었다.

동류 생성을 질리도록 해 보았으나, 카밀을 흡혈귀로 만드는 일에 대한 감상은 특별했다. 록시아스는 붉은 눈동자를 가지기 전인 카밀을 관찰하듯 훑었다. 가지런하던 치아는 송곳니가 삐죽하게 자랐다. 카밀은 인간과 흡혈귀의 경계선을 밟고 있었다. 곧이어 선을 넘겠지….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도 잦아들 것이다. 흡혈귀는 동족의 박동 소리를 자연스레 걸러 듣는다.

아직도 록시아스는 카밀의 맥박에 유혹당하고 있었다. 혓바닥 아래로 차오르는 제 피를 꿀꺽, 넘긴 록시아스가 빠르게 아물어 가는 혀를 다시금 깨물려던 한순간이었다. 카밀이 이전에 없었던 거센 힘으로 록시아스의 어깨를 쥐었다.

“록시.”

록시아스는 자신을 눌러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타는 카밀을 두고 보았다. 카밀의 무릎이 허벅지 사이를 헤치고 자리 잡았다. 코끝을 뺨으로 바짝 붙여 왔다.

“아직 덜 됐어요.”

더는 사람이 아니지만 흡혈귀도 아닌 카밀의 달아오른 호흡이 귓가에 닿았다. 어찌할 셈인가. 여태껏 흡혈귀로 변모한 인간들은 자신이 주는 피나 빨아 마실 뿐이었다. 능동을 자처한 것은 카밀이 최초였다. 지켜보기로 했다. 다만 말미를 길게 주지는 못한다. 카밀의 맥박으로 인한 갈증이 여전한 탓이었다.

일일이 가르쳐 주지 않는 양육자 탓에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데 익숙해져야만 했던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목을 잡아 올렸다. 동맥이 지나는 자리로 콧날을 붙이고 읊조렸다.

“제가 록시랑 똑같아질 때까지 줘야 하잖아요….”

원망을 해소하기 위한 혼잣말 같기도 하였고, 록시아스를 향해 보채기 위함인 듯도 했다. 여하튼 목적이 모호한 말을 마친 카밀은 입을 다물지 않고 도리어 더욱 벌렸다. 완전히 자라지 못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선단이 푸른 핏줄이 불거진 손목에 닿는다. 찔렀다.

덜 성숙하였으나 얇은 가죽을 뚫기에는 모자라지 않았다. 송곳니가 박힌 창백한 살결에서 핏방울이 비어졌다. 카밀이 록시아스를 향해 눈동자를 올렸다. 실컷 마시기 전에 허락이라도 구하려는지.

흡혈귀로 변하는 과정에서 인간들은 목숨이 위협당하는 듯 심한 갈급증을 느낀다고 했다. 그 탓인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하여 손목을 놓지 않으려 했다. 동족을 만드는 과정 중에 번거롭다면 번거로운 일이 바로 막 탄생한 흡혈귀를 제게서 떨어트리는 것이었다. 카밀이라고 별다르지 않을 터였다. 카밀은 지금 불가항력적인 본성을 거스르며 목이 타는 고통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가엾고도 기특한 아이였다.

록시아스는 인류에도 동류에도 속하지 못한 카밀의 이마를 엄지로 쓸며 말했다.

“나랑 똑같아질 때까지 마셔야지.”

승낙을 받아 낸 카밀은 보랏빛 눈동자를 내리깔았다. 송곳니가 살갗을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치 양을 몰아넣은 울타리 안으로 굶주린 야생 짐승을 밀어 넣은 꼴이었다. 카밀은 본디 흡혈귀인 양 피를 꿀꺽꿀꺽 잘도 넘겼다.

반복하여 록시아스의 핏줄에 꽂히는 송곳니가 점점 더 길고 뾰족해졌다. 록시아스는 차갑게 식어 가는 장밋빛 뺨을 응시했다. 카밀의 목덜미로 손가락을 올렸다. 본래 활기 넘치던 체온이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졌다. 냉랭했다. 거의 다 됐다… 그런데.

왜 아직도 심장 소리가 들리지?

체온을 잃을 정도로 흡혈귀에 가까워졌다면 맥박 소리가 전해지지 않아야 했다. 한데 카밀이 먹잇감으로서 무용해진 지금까지도 그의 박동은 끊이지 않고 록시아스의 귀청을 울리고 있었다.

혹시 환청은 아닐까, 하고 록시아스는 의심했다.

흡혈귀로의 재탄생에 대한 기념비처럼 따라오는 갈증은 카밀뿐만 아니라 록시아스에게도 해당하였다. 굳이 카밀을 앞에 두고 있지 않더라도, 새로 태어난 흡혈귀가 록시아스의 혈액을 훔치고 있었으므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실지 록시아스는 동류를 만드는 날 평소보다 배로 식사했다.

예상대로라면 오늘 계획은 이러했다.

첫째, 카밀을 흡혈귀로 만든다.

둘째, 흡혈귀가 된 카밀에 대한 갈구가 사라질 터였다. 하면 카밀과 함께 사냥을 나가, 포식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카밀에 관한 계획이라면 틀어지기 일쑤였다. 허망하도록… 아니, 아직 속단하여 좌절하기에 일렀다. 현재 카밀은 인간에 멀어졌다뿐이지 완벽히 흡혈귀가 된 것은 아니었다. 록시아스는 고작 한 시간 전에 자신이 카밀에게 했던 말을 되뇌었다. 참으면, 싫어도 때가 올 거야. 참으면, 싫어도 때가 올 거야. 참으면 싫어도 때가 올 거야. 참으면 싫어도… 때가….

탈출구라고 확신했던 길이 실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록시아스는 이제 체온이라고는 전부 날아간 목덜미를 손끝으로 눌렀다. 팽팽한 감촉만이 남아 있는 살갗은 가짜 같았다. 자신의 피부도 꼭 그러한 촉감일 터였다.

“아….”

상처가 아물지 않도록 손목을 물어뜯는 송곳니는 위협적일 만큼 첨예하게 조각되었다. 혈류에 몰두한 눈동자는 이제 푸른빛 한 점 없이 새빨갛기만 했다. 그를 확인한 록시아스는 한숨이기도 하며 탄성이기도 한 음절을 내뱉었다.

“…….”

드디어 카밀은 자신과 똑같아졌다. 자신과 동종이 되었다. 흡혈귀로 재창조되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말이다.

하나 이루어진 것은 목적의 단편일 뿐이었다. 계산한 걸음만큼 걸으면 무얼 하는가. 다다른 곳은 사방이 가로막힌 벽인데. 뒤로 걸음을 물리면, 셀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을 다룬 흡혈귀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허기라는 괴귀가 입을 벌린 채 버티고 서 있었다.

참으면 싫어도 때가 온다. 하나 그때가 기다리던 때인가, 하고 물으면 지금 록시아스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현기증이 이맛전를 흔들었다. 새카만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손끝, 발끝도 떨렸다. 카밀에게 못해도 피 반절은 내어 준 뒤였다. 혈액이 전부 빠져나가도 죽지는 않을 테지만, 정신을 잃을 것이다. 혼절이나 가사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온전한 정신을 저버린다는 뜻이었다.

록시아스는 카밀이 매달려 있는 쪽 팔을 움직였다. 카밀의 앞머리에 손가락을 꽂아 넣었다. 시야가 아득해지는 통에 생각을 정리했다. 비상이었다. 빨리 결론지어야 했다.

절망적이게도 흡혈귀가 된 카밀의 피에 여전히 끌리고 있으므로 이성을 놓자마자 카밀에게 달려들 것이다.

과거, 한 달 하고 이 주 동안 굶은 결과로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인파를 먹어 치웠다. 현재, 자신은 그때와 비슷하게 허기진 상태였다.

카밀은 한 명이었다. 분명 죽을 것이다. 아니, 흡혈귀가 되었으니 살아는 있겠다만…. 피를 다 빼앗긴 흡혈귀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그도 자신처럼 의식을 놓치고 포식하게 될까? 그렇다면 예전의 자신처럼 밖으로 뛰쳐나가 닥치는 대로 인간들을 흡혈할까? 아니면 눈앞에 놓인 나부터…. 오늘로써 흡혈귀가 동류의 피에 끌릴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가능성 있는 가정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카밀을 흡혈하고, 카밀이 나를 흡혈하고, 서로 먹고 먹히며 상대를 갈취하고 동시에 배를 채워 주는 기묘한 공생이….

록시아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되던 생각을 잘랐다. 일단 면전의 화마부터 진압해야 하므로.

…차라리 제정신일 때 카밀을 흡혈하자. 안전하게.

록시아스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붉은 눈동자가 막 태어난 흡혈귀를 향해 굴렀다.

지금 카밀은 마치 검은 숲에서 막 생겨났을 적 록시아스와 흡사했다. 붉은 눈동자가 야성과 탐식으로 번뜩거렸다. 입술은 포만을 모르고 창조자의 혈액을 끊임없이 빨아 삼켰다.

붙들리지 않은 쪽 팔을 든 록시아스는 금발을 어루만지며, 아기 혹은 애완동물을 어르는 듯 상냥한 어조로 명령했다.

“카밀아. 이제 그만.”

“…….”

물론 카밀은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록시아스는 알고 있었다.

카밀을 뿌리칠 시간이었다. 좋은 날이니 더 마시게 두고 싶었으나, 카밀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감격스러운 순간은 이만 끝내야 했다. 눈꺼풀이 허기로 인한 현기증 탓에 자꾸만 감겼다. 한계였다. 단단히 엉겨 있는 카밀을 떼어 냈다.

“너랑 나랑 똑같아졌으니까.”

제가 흡혈귀가 되었는지 아닌지 인지할 수도 없을 상태인 카밀은 먹이를 빼앗긴 뒤에야 록시아스에게 시선을 주었다. 말은 없다. 그야 현재 그는 천치나 마찬가지이므로 언어도 잊었을 터였다.

카밀은 그저 록시아스, 먹잇감에게 달려들었다. 방금까지 목구멍으로 넘기던 피 맛이 아직 혓바닥에 남아 있었다. 너무 맛있었다. 향기로웠다. 더 필요했다. 계속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사냥감이 하필 록시아스이므로 카밀의 탐욕은 허무하게 저지당했다.

록시아스는 카밀을 뒤집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자신에게서 벗어나려, 아니, 자신을 흡혈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카밀의 두 팔을 포박하며 뇌까렸다.

“아… 죽겠어.”

카밀이 붉은 눈동자로 록시아스를 노려보았다. 날 선 눈빛을 기꺼이 받아 낸 록시아스는 입꼬리를 당겼다. 만들어진 조소 너머로는 타는 듯한 갈증이 은둔하고 있었다. 록시아스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말했다.

“파란 눈이 예뻤는데, 아쉽다.”

등을 숙인 록시아스의 콧대가 카밀의 목덜미를 스쳤다. 엎드린 채로 결박당한 카밀은 덫에 걸린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사지는 숫제 록시아스를 피식자로 전복시키기 위하여 버둥거렸다.

새로 탄생한 지 오래되지 않은 흡혈귀는 거대한 식욕과 더불어 파괴적인 힘을 가졌다. 록시아스는 카밀을 속박하는 데 평소 사냥할 때보다 훨씬 많은 악력을 사용해야 했다. 당장 흡혈이 시급한 통에 짜증이 났다.

“얌전히 좀 있어.”

목덜미에 붙였던 입술을 끌어 올려 귓가에 속삭이자, 카밀이 찰나 반항을 그만두었다.

“옳지.”

허기가 위험 수위였으므로 록시아스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곧장 살갗을 송곳니로 뚫었다.

“하….”

체온은 시체처럼 식었어도 그 안에 깃든 피는 숫제 따듯하고 싱싱했다. 인내심을 망가트리는 황홀한 향기 또한 고스란했다. 이성이 팽팽하게 당겨지더니 점점 가늘어졌다. 더 늦기 전에, 록시아스는 카밀의 피를 훔쳤다. 첫 모금을 넘기자마자 현기증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포식자로 나고 머지않아 피식자가 된 카밀은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잇새로 고통이 묻어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을 탄생시킨 창조자의 피를 남김없이 빨고 싶어 안달이 났다. 눈을 뜨자마자 맞닥뜨린 최적의 사냥감에게 도리어 흡혈 당하니, 이성을 깔아뭉갠 야성 틈으로 굴욕감이 피었다.

“윽….”

흡혈귀의 섬세한 청력을 지니게 된 카밀은 온갖 유혹적인 소리에 노출되었다. 자신의 살갗 사이로 핏물이 새는 소리와 그것을 삼키는 소리, 포식자이자 피식자인 록시아스의 격양된 숨소리와 심장 박동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제 미각에 적격인 피로 배 속을 적시며 만족감에 취해 가던 록시아스는 욕심을 내려놓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카밀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전 흡혈을 그만둘 요량이었다. 마지막으로 딱 세 모금만 마시자고 다짐했다.

꿀꺽. 한 모금. 꿀꺽. 두 모금. 꿀꺽… 모자랐다.

하지만 욕구에 휘둘리는 꼴을 카밀에게 더 보여서야 좋지 않았다. 록시아스는 송곳니를 거뒀다. 입 안에 남은 혈액을 혀로 샅샅이 훔치는 사이, 카밀의 저항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카밀은 몸을 늘어트리며 눈을 깜빡였다.

세상 모든 빛이 집 안으로 모인 양 시야가 번쩍였다. 눈이 시렸다. 각막을 찌르는 광파를 물리치기 위해 눈살을 찌푸리다가 재차 눈을 감았다가 떴다. 흰 천에 덮인 듯한 시야가 천천히 회복되었다. 눈앞에 놓인 물체가 서서히 선을 이루더니 색을 덧입기 시작했다. 하얀 종이에 그림이 그려지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광원에 먹힌 세상이 본체를 되찾은 뒤, 카밀이 마주한 것은 콧대를 누르는 하얀 베개와 흑단목으로 만들어진 침대 헤드였다. 이어 카밀은 등허리를 누르는 무게를 느꼈다. 일순 진공 포장된 듯하였던 청력은 생체에서 퍼져 나오는 소음들을 도로 경청했다. 뒤통수부터 엉겨 오는 호흡 소리와 맥박 소리였다.

“록….”

카밀은 정신이 들자마자 자연스레 튀어나오는 이름을 반절만 부르고는 입술을 다물어 버렸다. 미간과 함께 콧잔등을 찌푸렸다. 정체불명의 냄새로 비강을 정복당한 탓이었다. 냄새는 불쾌하지 않았다. 싱그러운 꽃향기 같기도 하였으며 달콤한 살 내음 같기도 하였다. 그래, 냄새라기보다 향기가 어울렸다. 머리가 핑핑 돌 만큼 향기로웠다. 그래서 문제였다.

곧 카밀은 강렬한 향기의 출처를 알 수 있었다.

“카밀아.”

쿵, 쿵, 쿵, 울리는 박동 소리를 헤치고 록시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향기가 짙어졌다. 얼마나 진한지 후각으로도 모자라 시각으로 향기의 색채를 감지할 듯한 정도였다.

“정신 차렸어?”

록시아스가 향기를 풍기며 물었다. 눈동자를 눈꼬리로 옮긴 카밀은, 구겨진 미간을 애써 반듯하게 펴며 입술을 뗐다. 네, 록시, 라고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튀어 나간 말은.

“록시 피를 마시고 싶어요.”

이번에는 록시아스가 미간을 좁혔다. 카밀은 이어 중얼거렸다.

“배고파요. 록시 피를 마시고 싶어요.”

입술이 멋대로 벌어졌다. 의식으로 말려 세우기 전에 혀가 먼저 발음을 만들었다. 카밀은 홀린 듯 마저 읊조렸다.

“미칠 것 같아요. 록시한테서….”

“카밀아.”

“맛있는 향기가 나요.”

록시아스는 만면에 불쾌한 기색을 띠었다.

“정신 덜 차렸지.”

“아니에요.”

혀를 꺼내 입술을 훑은 카밀이 확신에 찼으나 건방지지 않은 투로 말했다.

“저 멀쩡해요. 그렇지 않으면 록시를 이렇게 또렷하게 볼 수 없었을 거예요.”

“…….”

“록시 심장 소리를 이렇게 크게 들을 수 없었을 거예요.”

심장 소리. 그 단어에 록시아스는 일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가슴팍 아래서부터 몰아쳐 올라오는 한숨을 뿌리기 전, 카밀에게서 떨어져 침대에서 벗어났다.

이전이었다면 카밀은 록시아스가 순간 이동이라도 했다고 착각했겠으나, 이제 카밀은 록시아스가 그저 ‘조금 빠른 속도’로 이동했음을 알았다. 록시아스와 동류가 되었으므로 그의 속도를 따라잡을 만한 시력을 가지게 된 덕이었다.

멀찍한 거리에 자리한 록시아스가 물었다.

“내 심장 소리가 들려?”

카밀은 즉답했다.

“네. 너무 잘 들려요. 그래서 힘들어요.”

“…….”

“미치겠어요, 록시.”

가장 어두운 시각에 암막으로 사소한 불빛조차 차단한 집 안은 암흑이었으나, 어둠은 이제 문제가 못 되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결 고운 눈썹 한 올까지 놓치지 않고 보며, 엎드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새로운 육체는 깃털이 되어 바람에 실릴 것만 같이 가벼웠다.

“왜 이러는 거예요?”

이내 바닥을 디디고 반듯하게 일어선 카밀이 목덜미 부근을 문지르며 질문했다.

“흡혈귀는 동족을 안 먹고 싶어 한다고 그랬잖아요….”

그 물음에 정답을 꺼낼 수 있다면, 방금 카밀의 피를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록시아스는 입을 다문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와 맞은편에 대치하듯 선 카밀은 한 발자국을 옮겼다. 목덜미에서 손을 내리며.

“그런데 왜 록시, 제 피를 또 마셨어요?”

카밀은 두 발자국을 또 내디뎠다.

“그리고 저는 왜 록시 피를 마시고 싶은 거예요?”

이번에는 단번에 열세 걸음을 옮겼다.

“네?”

흡혈귀의 발부리와 또 다른 흡혈귀의 발부리가 한 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알려 주세요, 록시.”

이전보다 빨라진 록시아스의 맥박을 고스란히 느끼며, 카밀은 록시아스가 어떠한 말이라도 꺼내길 기다렸다.

무지한 영역과 반복한 실수에 대해 침묵하던 입술이 아주, 아주 굼뜨게 떨어졌다.

“…다른 피를 마시면 돼.”

기다렸으나, 기대한 말은 아니었다. 카밀은 시선을 사선으로 떨어트렸다가, 도로 록시아스를 응시했다. 내리깔린 록시아스의 눈동자가 이어 카밀의 정면으로 상향했다.

“꼭 마시고 싶은 피를 마실 필요는 없어.”

“꼭 마시고 싶은 피가 옆에 있는데 다른 피를 마실 필요도 없잖아요.”

명백한 말대꾸였다.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보내는 눈빛을 조금 더 뾰족하게 다듬었다. 그러나 호된 안광에도 카밀은 죄를 뉘우치는 기색 한 점 띠지 않았다.

“록시가 다른 사람 피를 마시는 게 싫어요. 제 피만 마셔 줬으면 좋겠어요.”

그렇기에 인간이었던 자신은 몇 해 동안 발작을 연기하여 록시아스를 속이기까지 했었다.

카밀은 반걸음, 발을 미끄러트렸다. 발부리가 맞닿았다.

록시아스는 눈길을 조금 더 위로 올렸다. 흡혈귀가 되어서도 피 맛은 고스란한 카밀이 먹음직한 향기를 흩뿌리며 건방지게 지껄였다.

“록시도 제 피가 가장 맛있다고 했으면서…. 다른 피는 맛없잖아요. 록시랑 똑같아지니까 알겠….”

“카밀아.”

록시아스가 카밀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나 카밀이 말을 지속했다.

“록시랑 똑같아지니까 알겠어요. 다른 피는 정말 맛없을 거야. 냄새도 역겹고. 맞죠?”

청량한 푸른빛을 탈피하고 붉은색만 입은 눈동자가 암막에 가려진 창가를 향해 굴러갔다.

“록시도 들리죠? 밖에… 지금 두 사람이 지나가잖아요.”

두 사냥감의 기척과 맥박이 함께 느껴졌다. 멀리서는 하나가 더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 록시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카밀이 말을 계속했다.

“냄새도 나요. 정말….”

정갈한 금빛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역겨운 냄새.”

카밀은 얼굴 전체에 드리운 혐오를 지우지도 않은 채 록시아스에게로 정면을 되돌렸다.

“안 마셔 봐도 알겠어요. 토할 것 같아요.”

어느 날 발작을 일으킨 카밀의 피를 마신 후부터, 록시아스가 카밀을 제외한 사냥감들에게서 내리 맡아 온 냄새였다. 썩은 개골창에서 피어오르는 악취보다 더 끔찍한 냄새였다. 하나 록시아스는 공감도 동의도 표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록시, 제 피를 마셔 주세요. 계속….”

카밀은 쉬지도 않고 괘씸하게 지껄였다.

“저는 록시 피를 마시고요.”

“아가야.”

“제발요, 록시.”

“말 잘 듣는 착한 흡혈귀가 되어야지.”

“부탁이에요.”

“누가 건방진 개새끼가 되라고 했어.”

“록시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손가락 하나 대기 싫어요.”

“…….”

“그런데 어떻게 입술을 대고 피까지 마셔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수하듯 쓸어내린 카밀은 제 입술을 지난 손가락을 록시아스에게 뻗으며, 짧게 내뱉었다.

“더럽게.”

조금만 얼굴을 들이밀면 콧대가 만날 만큼 근접한 거리였기에 카밀의 길쭉한 손가락은 금세 록시아스의 목에 닿았다. 가지런한 손끝이 정확히 동맥이 지나는 자리를 짚었다. 그를 따라서 미끄러진다.

“록시만 좋아요. 만지는 것도, 만져지는 것도요.”

하향한 손가락이 빗장뼈를 지나 가슴팍에 다다랐을 때, 록시아스는 카밀의 손을 매몰차게 쳐 냈다. 힘이 들어가 있던 카밀의 팔이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서 정지했다. 록시아스가 내려앉은 음성으로 일갈했다.

“만지라고 허락 안 했어.”

대번 카밀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표정을 지었다. 허공에서 멈추었던 팔은 느릿하게 내려갔다.

“죄송해요….”

동시에 금빛 속눈썹을 내리깔며 시선 또한 떨어트린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내 눈길을 한곳에 두고는 조곤조곤 말했다.

“앞으로는 록시가 허락해 줄 때만 만질게요.”

카밀의 눈길이 머무른 곳은 록시아스의 오른쪽 허벅지께였다. 카밀을 흡혈한 뒤에는 꼭 당연하도록 반응하는….

록시아스는 카밀의 노골적인 시선을 눈치챘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걸음을 물리자니 하의가 당겨지며 형상이 더욱 드러날 것 같았고, 아예 도망치자니 이제 카밀 또한 흡혈귀라 따라잡힐 것이 분명한 탓이었다. 하물며 다리를 꼬거나 손으로 가리자니 ‘내가 이러한 상태이다’라고 대놓고 전시하는 꼴이 아닌가.

몇 초. 록시아스가 카밀의 눈길을 받아 낸 것은 단 몇 초였다. 침묵도 꼭 그만큼 둘 사이를 갈랐다.

“록시.”

도로 록시아스의 정면으로 눈동자를 올린 카밀이 말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며 반성하던 방금까지만 해도 물기를 흘리던 음성은 거짓처럼 건조하며 평이했다.

“제가 록시를 만지게 허락해 주세요.”

말을 잘 듣는다고 해야 할지.

“제가… 록시 피를 마실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약삭빠르다고 해야 할지.

“록시를 만지고 싶고, 배도 고파요.”

멍청할 만큼 솔직한 것일지.

“아니면… 록시가 제 피를 마셔 주세요. 저를 만져 주세요.”

이제 겨우 새벽이었다. 생일은 한참 남았다. 록시아스가 침묵을 고수하는 동안, 카밀은 제가 뱉은 소원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실현 가능성이 큰지 셈했다.

일단, 록시아스는 웬만해서 그를 만지도록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예전 ‘그때’만 떠올려도 가늠하기 쉬웠다. 뜨거워진 몸을 가눌 수도 없으면서 기어이 제 손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다. 그를 주무르도록 하느니 흐트러진 모양을 보이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 터다.

그렇다고 자신을 만져 주지도 않을 듯했다. 이전에도 록시아스가 제 몸에 손을 댈 때란 젖은 머리를 말려 주거나 훈련 중에 목숨이 위협받을 때 정도뿐이었으니.

그렇다면 피를 마시도록 허락해 줄까? 아니. 그 또한 회의적이었다. 다른 피를 마시면 된다고 말했다. 토악질 나오는 악취를 그도 느끼고 있으면서, 다른 피를 마시라고, 어떻게….

마지막. 카밀은 단 하나 남은 소원을 곱씹었다.

‘록시가 제 피를 마셔 주세요.’

그새 감쪽같이 사라졌으나, 목덜미에 상처가 있었다. 자신이 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록시아스가 흡혈한 것이 분명했다. 얼마큼 마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허기진 상태는 아닐 테니 구태여 제 피를 마셔 주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특정 피를 원하는 마음이 과연 단순히 허기 탓일까?

흡혈귀로 탄생한 카밀은 다양한 가설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저 먹잇감이기만 하면 식사 후에는 흥미가 증발해야 맞다. 더는 이끌리지 않아야 했다. 배만 부르면 끝이어야 이치에 부합했다. 허기, 식욕이란 그런 것이니까. 하나 록시아스는 제 피를 흡혈한 뒤 흥분했다. 성적으로. 본래 미끈하나 지금은 부푼 허벅지께가 그 증거였다.

어쩌면 록시아스나 제가 서로의 피에 유혹당하며 갈망하는 근원은 식욕이 아니라, 전혀 다른 욕구일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다. 카밀은 느닷없이 두 손바닥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고개를 잔뜩 숙였다. 제가 어떤 계략을 세우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록시아스가 곧장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말려 세우지 못하도록 말이다.

얼굴을 가린 카밀은 입을 벌렸다. 혀로 자신의 치아를 문질러 보았다. 의도적으로 깎인 듯 날카로운 송곳니 첨단이 느껴졌다. 이만하면 실패할 리 없었다. 이전에도 시도했던 짓거리였다. 송곳니가 뭉툭하던 그때도 성공했다. 실없이 웃음이 났다.

손바닥 뒤에 숨어 입꼬리를 올린 카밀은 혀를 입 밖으로 조금 뺐다. 핏줄이 지나는 자리와 송곳니가 맞물리도록 혀를 굴렸고, 깨물었다. 아주 세게, 그리고 짓눌렀다. 혀가 금방 아물지 못하게, 넘치고 넘치는 피에서 퍼지는 냄새를 록시아스가 오랫동안 맡을 수 있게.

그 순간, 록시아스는 졸린 듯이 풀어졌던 눈을 크게 떴다. 카밀의 피 냄새가 별안간 진동했다. 방심했다.

모인 손바닥 안으로 고인 핏물은 곧 틈 사이로 흘러 팔을 적시며 내려갔다. 팔꿈치에 핏방울이 맺히더니 머지않아 후득, 후드득, 카펫에 얼룩으로 스몄다.

내리 귓가를 왕복하는 록시아스의 심박 소리가 몇 배로 시끄러워지며 굉음으로 변해 갔다. 카밀은 고개를 들어 올리기 전, 활짝 핀 미소를 애써 갈무리했다.

더 흥분해요, 록시. 더, 많이, 심할 정도로…. 록시를 유혹하기 위해 몇 번이고 피를 흘릴 거야. 록시가 딱 나만큼만 솔직해질 때까지.

얼음으로 깎아 만든 듯한 이목구비를 새빨갛게 적신 카밀은 고개를 완전히 세웠고, 록시아스의 두 발 사이에 왼발을 끼워 넣으며 정면을 바짝 들이밀었다.

“록시, 제 피를 줄 수 있게 허락해 주세요.”

고개를 기울이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마셔 주세요.”

콧대가 맞물렸다.

“제발, 제가 죽을 때까지 마셔 주세요.”

록시아스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어 내뱉어지는 숨은 없었다.

“어차피 이제는 안 죽겠지만….”

호흡을 참느라 다물린 입술에, 카밀은 혈액으로 범벅인 입술을 조심스레 붙였다. 그런 채로 유혹했다.

“록시가 저를 만들었으니까, 저는 다 록시 거예요.”

굳게 다물린 입술에 제 피를 발랐다.

그럴 리 없겠으나, 카밀은 록시아스의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전달되는 박동이 그만큼 거셌다. 덕분에 성취를 자신했다.

“마음대로 가지세요.”

“…….”

드디어 록시아스의 입술이 열렸다. 말 대신, 혀가 나왔다. 카밀은 자신의 턱을 핥으며 달려드는 록시아스의 허리를 승낙받지도 않고 끌어안았다. 크게 웃고 싶다, 고 생각하며 바닥으로 무너졌다.

***

키스 같은 취식. 혹은 취식을 가장한 키스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혀가 금세 아문 탓이었다. 카밀은 혓바닥 아래 더는 피가 차오르지 않자 불안해졌다. 아직 끝나서야 안 되었다. 그야 더 알아볼 것이 있으므로.

혀를 한 번 더 깨물까.

하나 아직 록시아스의 혀가 제 입 안에 있었다. 남은 한 방울 한 방울까지 깡그리 긁어 취할 심산인 듯했다. 카밀은 이 황홀한 순간을 그만두기는 싫었다. 어차피 남은 피가 사라진 때에 맞춰 록시아스가 알아서 그만둘 테니. 자신을 뿌리칠 테니까.

예정된 순서로 머지않아 록시아스가 입술을 물렸다. 카밀은 흡혈 당하는 동안 내리감고 있었던 록시아스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당장 ‘예상한 것’을 시도하고 싶었으나 때를 기다리며 록시아스를 쳐다보기만 했다. 록시아스는 불그죽죽한 입가를 손목으로 닦았다. 그리고 말했다. 혼쭐을 낼 줄 알았는데, 음성이 평이했다. 그저 조금 늘어져 있을 뿐, 취한 것처럼.

“좋아 죽겠지?”

록시아스의 행동을 따르는 양 제 입가며 턱을 손바닥으로 쓸어 닦은 카밀이 생글거리며 답했다.

“네, 록시. 너무 좋아요.”

“생일이라 봐준 거야.”

‘정말이에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카밀은 참았다.

“고마워요.”

“그래, 고마워해야지.”

대신 카밀은 다른 질문을 내뱉었다.

“록시, 흥분했어요?”

‘정말이에요?’ 따위보다 단도직입적으로.

“제 피를 마실 때마다 흥분해요?”

노골적으로.

“기분 같은 거 말고, 몸이요.”

확실하게.

“왜냐면 록시가….”

제 피를 마실 때마다 아래를 세우잖아요. 마치 내가 록시에게 피를 빨릴 때마다 그러는 것처럼. 내가 록시를 앞에 두고 있을 때마다, 내가 록시를 생각할 때마다 그러는 것처럼요. 똑같이…. 우리는 똑같아요, 나는 알아요.

준비된 추궁과 고백은 길었으나, 록시아스의 음성에 의해 가로막혔다.

“그렇지.”

록시아스가 당황하길 바라서 꺼낸 질문은 아니었다. 하나 카밀은 상상했던 바보다 담담한 록시아스의 모습이 의아했다. 눈을 깜빡거리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네 말이 맞아.”

수긍이었다. 록시아스가 수긍했다. 제 피를 마실 때마다 흥분하는 것이 맞노라 인정했다. 기쁨이 넘쳐 등줄기가 찌릿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너는 뭐를 기대해?”

카밀은 웃었…, 웃으려고 했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아가야.”

입꼬리를 일자로 굳혔다.

록시아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

틀렸다. 록시아스는 담담하지 않았다.

카밀은 허공에 뜬 손과 록시아스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손이 날아왔다. 짜악! 파찰음이 퍼지고 카밀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록시아스는 전에 없이 크게 분노했던 것이다. 이토록 화가 난 록시아스를 마주한 적이 없어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대는 너를 버릇없게 만들잖아.”

카밀은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록시아스가 또다시 손을 들었다. 그가 때린 뺨을 감싼다. 짐짓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알아들었어?”

피를 마시고 몸이 달아오르든 말든, 건방진 꿈은 꾸지도 말라는 경고였다.

“…알아들었어요, 록시.”

카밀은 제 뺨을 문지르는 록시아스의 손에 손을 포갰다. 이제는 체온이 같아서인지, 록시아스의 손이 더는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는 이보다 예쁠 리 없었고, 이보다 침울해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록시아스는 자신을 따라 사냥을 나온 카밀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카밀이 흡혈귀로 산 지 만 하루가 지났다. 만 하루란, 우주가 통째로 폭발하는 둥 불상사가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살아갈 수 있을 흡혈귀에게 찰나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막 흡혈귀가 되었으므로 한참 식욕이 넘치고 흐를 카밀은 배를 주리며 그 하찮은 시간을 괴로울 만큼 더디게 인식했을 것이다. 한 시간도 아니고, 만 하루나. 록시아스는 인내심이 투철하게 성장한 카밀에게 새삼 놀랐다. 검은 숲의 자신이었다면 30분도 견디지 못하고 무엇이든 물어뜯고도 남았을 터였다.

록시아스는 자신의 옆에 꼭 붙어 걷는 카밀을 힐끔거렸다. ‘흡혈귀처럼’ 걷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속도에 맞춰 척척 따라오는 것 또한 기특했다. 울상인 표정만 어떻게 좀 갈무리하면 안 되나 싶었다. 그렇게 싫은지….

충분히 이해는 됐다. 록시아스 역시 집을 나서자마자 만연한 악취를 내리 맡고 있었으므로. 하나 그렇다고 해서 카밀에게 제 피를 주어서야 안 됐다. 버릇은 처음부터 단단히 들여야 했다. 한두 번 제 피를 줘 버릇하다가는 그것이 당연한 줄로 여기고 다른 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니까. 낯빛만 따지면 카밀은 지금도 충분히 질려 있었다. 다른 피는 마셔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쯧. 잘게 혀를 찬 록시아스는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보다 한 걸음 뒤늦게 멈춘 카밀이 록시아스와 나란히 서기 위해 두 발자국 자리를 물렀다.

소맷자락이 스친 두 사람은 산화되어 새카매진 문을 응시했다. 아니, 문이라기보다 구멍을 임시로 막아 놓은 판자때기라 불리는 것이 적합했다.

그들이 당도한 장소는 몇십 년 전 문을 닫았으나 현재까지 꾸준히 찾아오는 이들이 있는 폐광이었다. 방문자는 노숙자나 취객, 갈 곳 없는 방황 청소년들, 혹은 사냥감을 구하는 흡혈귀였다.

두 흡혈귀는 거뭇거뭇한 나무판자를 뚫고 퍼지는 맥박 소리를 들었다. 먹잇감은 두 명. 딱 맞았다.

“아가야.”

폐광 안으로 들어서기 전, 록시아스는 카밀을 마주한 후 미끈한 턱을 쥐어 자신을 보게 했다.

“표정 풀어.”

정신 차리라는 듯이, 창백한 뺨을 톡 두드렸다.

“표정만 보면 네가 사냥당하는 줄 알겠어.”

얼굴을 푹 숙였다가 올린 카밀은 미간을 좁힌 채 입꼬리만 당기더니 물었다.

“록시, 손잡아도 돼요?”

대답 대신, 록시아스는 뺨에서 거둔 손을 내려 카밀의 손목을 붙들었다. 카밀은 그제야 진심 어린 웃음을 만면에 띄웠다.

함께 걸음을 옮겼고, 입구를 가로막은 판자에 스며들듯 폐광 안으로 들어섰다.

어지러이 섞인 심장 박동 소리와 악취에 이어 이색적 방문자인 두 흡혈귀를 맞이한 것은 흙바닥에 고여 서서히 증발하는 알코올 냄새와 폐광 내부를 꽉 메운 대마 냄새였다.

록시아스의 품에서 그가 풍기는 향기로운 내음만 맡으며 살았던 카밀은 콧잔등을 구기며 불쾌한 감상을 가감 없이 토로했다.

“더러워요.”

동의하는 바였다. 록시아스는 붙든 손목을 놓고 손을 깍지 껴 잡아 주었다. 세심한 카밀이 안정을 얻도록. 그러나 카밀의 심장은 더욱 날뛸 뿐….

술과 약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 두 인영을 보기도 싫다는 듯이 시선을 뗀 카밀은 고개를 돌려 록시아스를 바라보았다.

“못 해요, 저는, 록시….”

“헛소리하지 마.”

금빛 눈썹이 일순 꿈틀거릴 만큼 잡은 손에 악력을 실은 록시아스는 해롱거리는 먹잇감들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갓 난 짐승도 먹이 먹는 법부터 배우는데, 왜 못 해.”

“토할 거예요.”

“아니. 전부 삼킬 거야.”

“한 모금도 못 넘길 거예요.”

“한 사람으로도 모자랄 거야. 넌 아주 배고프니까.”

반박할 여지가 있기도, 없기도 했다. 실지 카밀은 사막 모래를 삼킨 양 목구멍이 건조했으며, 평생 굶은 것처럼 극도로 허기진 상태였다.

하지만 카밀은 ‘록시아스의 피’가 부족했지, ‘사람 피’에 대한 결여를 실감하지는 못했다. 카밀이 배고픈 이유는 록시아스의 피를 마시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이든 짐승 피든, 다른 피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앳된 사냥감들의 얼굴을 훑어본 록시아스가 나긋하게 말했다.

“성체보다는 덜 큰 게 맛있어. 피가 싱싱해. 핏줄이랑 살갗이 연해서 피도 잘 나와.”

“썩은 내가 나요. 싱싱하지 않을 거예요….”

“애들은 겁쟁이니까 반항도 덜 해. 처음 마시기 좋아.”

그의 피를 마시고 탄생하였으나, 록시아스는 마치 카밀이 제 피를 마셔 본 적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맛살을 구긴 카밀은 록시아스와 연결되지 않은 쪽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 부패한 생선으로 가득한 죽은 바다에 코를 박아도 이보다는 향긋할 것만 같았다.

인간이 제각기 다른 음식 취향을 가졌듯, 흡혈귀도 각자 혈액 취향이 달랐다. 남자의 피만 취하는 흡혈귀도 있고, 인간이 아닌 짐승의 피만 원하는 흡혈귀도 있고, 아이의 피가 아니면 입에도 대지 않는 흡혈귀도 있으며,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의 피만 즐기는 흡혈귀도 있다. 가리지 않고 피라면 죄 좋아하는 흡혈귀도 물론 있었다.

카밀은 입맛이 지독하게 까다로운 흡혈귀였다. 특정 흡혈귀의 피만 원하는 흡혈귀라니. 록시아스는 입가를 가리고 오만상을 지은 카밀을 보았다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굴 닮아서… 물론 자신을 닮았겠다. ‘창조자’ 흡혈귀의 능력을 물려받는 경우는 보았어도, 입맛을 닮는 경우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지만.

하지만 록시아스 자신은 카밀의 피를 맛보기 이전까지 입맛이 그다지 까탈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아무튼 카밀은 예쁘고, 흡혈귀가 되어서는 인간이었을 때보다 번거로운 아이가 되었다.

수월찮은 카밀에게 먼저 모범을 보여야지.

록시아스는 내리 붙잡고 있었던 카밀의 손을 뿌리치듯 놓았다. 카밀이 어쩌기 전, 사냥감들에게 다가갔다. 진동하는 악취가 코를 찔렀으므로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하나 짐짓 편안한 기색으로 한 아이를 먹잇감으로 골랐다. 더 못생긴 쪽으로. 그나마 나은 쪽은 예민한 카밀에게 양보했다.

무릎을 접어 앉은 록시아스는 울퉁불퉁한 폐광 바닥이 침대 위인 듯 편안하게 누워 있는 먹잇감의 뺨을 거칠게 잡아 돌렸다. 만취한 아이의 고개는 힘없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목덜미가 드러났다.

허리를 숙인 록시아스는 눈동자를 치켜 카밀과 시선을 맞췄다. 카밀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눈빛으로 물었다.

그따위 쓰레기를 마실 거예요? 록시?

응.

록시아스는 소리 없이 입술을 모아 대답했다. 더러운 냄새가 풍기는 살갗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 피가 뿜어지고 입 안을 적셨다. 당장 뱉어 내고 싶었다.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넘겼다. 카밀에게 고정한 눈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잘 봐, 카밀아. 나는 네 피가 아니라도 마실 수 있어.

너도 그럴 수 있어. 내 피가 아니라도 마실 수 있어.

싫어요, 록시. 내 피가 아닌 피를 마시지 마세요. 그런 더러운 피를 마시지 마. 미치도록 싫어요. 죽이고 싶어요… 어차피 죽을 거지만… 나는, 내가, 죽일 거야.

다섯 모금을 겨우 마셨다.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드러낼 요량으로 일부러 목울대를 크게 울렁거리며, 사냥감에게서 송곳니를 거뒀다.

흡혈귀와 먹잇감 한 마리, 아니, 쓰레기 하나. 그리고 그 옆에 쓰레기가 또 하나. 카밀은 그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카밀은 화를 내고 있었다. 카밀을 올려다본 록시아스는 넘어갈 것도 없는 목구멍을 또다시 조였다가 풀었고, 명령했다.

“마셔.”

새빨간 눈동자에 온갖 혐오를 압축시킨 카밀은 뜻밖에 망설이지 않고 순순히 답했다.

“네, 록시.”

모범을 보인 창조자가 했던 그대로.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눈빛을 맞댄 채로 몸을 숙였다. 아직 잇자국 없이 깨끗한 쓰레기의 목을 우악스레 쥐었다. 그때였다. 쓰레기가 컥컥거리며 눈을 떴다.

“뭐, 뭐, 야. 누구, 누구세요?”

“…….”

쓰레기의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었다. 눈길을 줄 이유도 없었다. 오직 록시아스만 응시하며, 카밀은 쓰레기의 목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컥… 살려, 커억, 주세요…?”

약에 취해 천국을 누비던 아이는 눈을 뜨자마자 죽음의 문턱으로 내던져졌다. 목전으로 실감하게 된 죽음은 달갑지 않았다. 아이는 곧장 눈시울을 적셨다. 제 목을 틀어쥔 괴한의 손목을 때리고 긁으며 발버둥 쳤다. 그리고 카밀의 손등에 불거진 푸른 핏줄과 뼈마디가 꿈틀거렸다.

“흐윽, 크윽!”

아이가 입가로 타액을 쏟으며 눈을 뒤집었다.

“이렇게 하면 돼요, 록시?”

록시아스는 입꼬리를 뾰족하게 올려 웃으며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응.”

짧은 대답 속에 반복된 명령이 함축되어 있었다.

응, 카밀아, 마셔. 그대로 마시면 돼. 먹잇감의 살갗에 입술을 붙여, 송곳니로 뚫어. 피를 마셔. 마셔. 마셔. 마셔. 얼른, 마셔. 얼른. 마셔. 마셔. 마셔. 마셔!

“네….”

입술을 들썩여 송곳니를 내보인 카밀은 차근차근 쓰레기의 살갗을 향해 입술을 내렸다. 록시아스가 지시한 대로, 쓰레기의 살갗을 송곳니로 뚫었다. 피가 한 방울, 혀끝에 닿았다. 토하고 싶다. 두 방울, 세 방울, 몇 방울이 모여 한 모금이 되었다. 혓바닥 아래로 고였다.

꿀꺽. 카밀은 겨우 한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우드득, 쓰레기의 목을 부러뜨려 버렸다. 내던졌다. 일어섰다. 자신을 따라 치켜지는 붉은 눈동자에게 보고했다.

마셨어요, 록시.

항의했다.

끔찍해요. 어떻게 이 역겨운 구정물을 몇 모금이나 마실 수 있어요?

카밀은 쓰레기의 몸을 마구 밟아 짓이겼다.

어떻게 나한테 마시라고 할 수 있어요, 록시 피도 아닌 걸.

카밀은 여태 록시아스가 아래에 두고 있는 쓰레기를 잡아 빼앗았다. 그 역시 목을 틀어쥐어 뼈를 조각냈다. 쓰레기 위에 내던졌다. 쓰레기와 쓰레기를 짓뭉갰다. 밟고, 걷어차고…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주먹을 휘둘렀다. 피가 튀었다. 매스꺼운 피로 손과 무릎과 가슴팍과 뺨과 이마가 젖었다.

구정물은 록시아스의 입술도 적셨으며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고 배 속에 고여 있었다. 내 피도 아닌 피가…!

고깃덩이가 된 듯한 먹잇감에서 떨어져 나온 안광은 즉시 록시아스를 향했다.

“…록시.”

씨근덕거리는 호흡 사이로 록시아스의 이름을 흘린 카밀은 불그죽죽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가락이 지나간 이목구비로 빨간 자국이 주윽 그어졌다. 턱을 지난 손은 곧 맥없이 툭, 허공에 매달렸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눈꼬리를 내리고, 핏대 선 눈을 촉촉하게 적신 카밀이 중얼거렸다.

“너무 싫어요….”

“…….”

“너무 힘들어….”

새빨갛게 얼룩진 뺨으로 맑은 눈물방울이 또르르 굴렀다.

“집에 가요, 이제….”

그저 고개를 끄덕인 록시아스는 고깃덩이를 재로 만들며, 생각했다.

아무튼 카밀은 예뻤다. 그리고 흡혈귀가 되어서는 인간이었을 때보다 번거로운 아이가 아닌, 다루기 성가신 포악한 짐승이 되었다. 누굴 닮아서… 물론 자신을 닮았겠다. 하필.

입을 꾹 다물어도 한숨이 거듭 터져 나왔다.

***

어둑한 사각형 공간에 자진하여 머무르는 두 남자는 창백하며 말이 없었고, 사소한 움직임조차 없었다. 특정 장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령처럼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오직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정신 탓에 주위로 핏발이 선 빨간 눈동자만이 미동했다. 정적 그 자체가 된 서로를 마주 노려보고 있다. 상대의 얼굴과 가슴팍, 혹은 손목을 번갈아 주시하며.

편식이 심한 흡혈귀를 회유하고자 끌고 나갔던 첫 사냥 이후로 록시아스는 식사하지 않았다. 카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벌써 스무 날을 굶었다.

다음 사냥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록시아스는 끈기 있게 카밀이 다른 피를 마시도록 부추겼다. ‘착한 카밀아. 배가 고프면 안 돼’라며 카밀을 어르고 달랬다. ‘평생 굶든지, 그럼’ 하고 짜증을 내며 꾸중도 했다. 혼자 사냥을 나간다며 협박도 했다. 하나 록시아스는 현관을 나서지 못했다. 않았던 것이 아니라, 못 했다.

폐광에서 맛보았던 끔찍한 피 맛에 여태 혓바닥이 고문당하는 듯했다. 그때 마셨던 몇 모금을 떠올리자면 속이 울렁거렸다. 록시아스는 카밀로 하여금 다른 피를 받아들이도록 종용하였으나 본인부터가 카밀이 아니고서야 식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카밀에게 모범을 보이기란 한 번으로 족했다. 구역질을 불러일으키는 피를 마시기란 정말이지 단 한 번으로 족했다. 아니, 그 한 번조차 벌어지지 말았어야 하는 악몽이었다.

독한 것.

입 안을 맴도는 말을 짓씹은 록시아스는 윗입술을 들썩이며 카밀을 노려보았다.

흡혈귀로 태어난 지 고작 한 달 정도 지났다. 새 탄생에 당연히 뒤따르는 광포한 식욕을 견디는 동류는 여태껏 없었다. 인간이었을 적 제아무리 점잖은 지식인이었다고 한들, 욕망을 억제하는 데 노련한 수도승이었다고 한들, 허기에 익숙한 다이어트 중독자였다고 한들, 죄 흡혈귀가 되면 게걸스럽게 흡혈했다. 누구의, 무엇의 피인지 가리지도 않았다. 냄새를 맡고, 박동을 듣고, 눈에 띄면 물어뜯었다.

그런데 카밀은….

독하다는 표현으로 모자라다.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두 사람 중, 록시아스가 먼저 움직였다. 록시아스는 한숨을 삼키며 의자에 등을 깊게 기댔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놓고 턱을 괴었다. 주먹을 펴서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다가, 다시 손을 쥐어 뺨을 기댔다. 그를 지켜보던 카밀이 마른 음성을 꺼냈다.

“록시.”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무거웠다. 카밀은 이어 물었다.

“목, 마르지 않아요?”

질문으로 시위하는 듯했다. 우리의 갈증은 전부 록시 탓이에요. 록시가 자꾸만 다른 피를 마시라고, 마시자고 고집을 부리기 때문이에요, 하고.

“말라.”

록시아스는 솔직하게 대꾸했다. 에너지원이 공급되지 않아 활동력이 잦아든 상태였다. 종일 옆을 떠나지 않는 카밀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또한 카밀의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니, 숨겨 봤자 탄로 날 터였다.

카밀은 재차 물었다.

“많이 힘들어요?”

“죽을 것 같아.”

록시아스는 턱을 받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록시아스와 달리 허리를 곧게 펴고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여 앉아 있는 카밀이 공감을 표했다.

“저도 그래요.”

그래서 어쩌라고.

배를 주려 예민해진 록시아스는 주먹을 미끄러트려 관자놀이를 받쳤다. 더욱 삐딱한 자세로 카밀을 흘겨보며 뇌까렸다.

“나가서 먹고 와.”

“하….”

카밀이 한숨을 쉬었다.

먹으라고 자리를 깔아 줘도 처먹다 뱉은 게 누군데 한숨을 쉬어?

눈이 가늘어진 록시아스는 쯧쯧, 혀를 찼다. 건너편에 자리한 카밀의 낯빛 또한 온온하지는 않았다.

“제가 나가서 먹으면, 록시는요?”

날 선 신경을 끊어 놓을 듯이 긁는 상대의 맥박 소리에, 신경질적인 저음까지 더해지니 머리가 울렸다. 록시아스는 일주일 전부터 현기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먹잇감들이 어째서 잠으로 시간을 허비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심정이었다. 가능하다면 잠이라도 자고 싶었다. 어지러운 머리를 쉬게 하고, 배고픔도 잊고, 유혹도 차단하고….

“어차피 안 나갈 거잖아.”

“만약에 나가면요, 록시는요?”

그럴 리 없겠으나, 만에 하나라도 카밀이 사냥을 나선다면…. 그런 카밀을 뒤따라가, 다른 피로 배를 채운 카밀의 피를 마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체하며 먹잇감을 사냥하고, 다시, 카밀의 피로 입 안을 씻으면, 안 될 일이지.

이성과 본능이 실타래처럼 엉켜 생각을 어지럽혔다.

“…쓸데없는 질문은 하지 마.”

“록시.”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파.”

“제 피 마실래요?”

“…….”

꿀꺽. 카밀이 불쑥 뱉은 질문이 끝나자마자 록시아스는 마른침을 넘겼다.

“록시 피를 마시게 해 달라고 안 조를게요. 록시는 제 피를 마셔도 괜찮아요. 배고프잖아요. 힘들잖아요.”

“웃기지 마.”

“록시가 힘든 건 싫어요.”

록시아스는 끈기 있게 카밀이 다른 피를 마시도록 부추겼다. ‘착한 카밀아. 배가 고프면 안 돼’라며 카밀을 어르고 달랬다. ‘평생 굶든지, 그럼’ 하고 짜증을 내며 꾸중도 했다. 혼자 사냥을 나간다며 협박도 했다.

반대로 카밀은 저는 굶더라도 록시아스는 허기를 겪지 않도록 노력했다. ‘록시. 제 피를 마셔 주세요’라며 록시아스에게 부탁을 빙자하여 흡혈을 허락했다. ‘저는 배고파도 돼요. 그래도 록시까지 배고플 필요는 없어요’라고 희생적인 애정을 고백했다. ‘왜요…. 왜, 대체 왜 제 피를 마시지 않아요?’ 하며 울분 섞인 추궁도 했다.

어차피 한계에 다다르면 마실 거면서 록시아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무엇에 비롯된 고집인가, 하면 아무도 몰랐다. 록시아스 본인조차.

자존심 때문이라기에는 이미 몇 번이고 카밀을 흡혈했다.

갑을 관계 유지 때문이라면, 록시아스가 포식자이므로 어찌 되었든 ‘갑’이었다.

혹 카밀이 흡혈 당한 뒤에 ‘공평하게 저도 록시 피를 마시게 해 주세요’라고 떼를 쓸 수도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거절하면 그만이었다.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카밀은 록시아스를 이기지 못하므로 록스아스에게 아무것도 강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록시아스는 때가 되면 무너질 의지를 붙들고 놓지 않으려 할까.

결국에 록시아스는 카밀이 자해하여 피를 입술맡에 들이밀어야 마실 터였다. 허기에 지치고 지쳤을 때쯤일 것이다.

하지만 카밀은 그러한 상황이 오기 전에 록시아스가 자진하여 자신을 흡혈해 주길 바랐다. 록시아스에게 더는 밉보이지 않고 싶기 때문이었다.

애정을 받지 못한다면 미움이라도 받고자 했던가. 극단적이고 당돌한 목표는 록시아스가 불현듯 사라졌던 3일, 그 이래로 퇴화했다. 미움받더라도 록시아스가 떠날 만큼 미움받아서야 안 됐다. 록시아스의 공백은 카밀이 유일하게 견딜 수 없는 최악의 처벌이었다.

“록시.”

별안간 자리에서 벗어난 카밀이 건조하게 읊조렸다.

“사랑해요.”

삐뚜름하게 기울어진 고개를 바르게 든 록시아스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카밀을 올려다보았다. 사랑해요, 라는 고백에도 맹숭맹숭하기만 한 표정 위로 카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래서 록시가 괴로우면 저도 힘들어요.”

록시아스는 카밀을 응시한 채로 고개를 반대편으로 기울여 도로 턱을 괴었다.

“내가 괴롭다고, 누가 그래.”

“배고프잖아요.”

“응.”

록시아스의 앞에 다다른 카밀은 꿇어앉았다. 양 무릎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올리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차분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 이제 저도 알아요.”

“아는데 넌 왜 사냥을 안 해.”

발치에 무릎을 접어 앉은 카밀을 향해 눈을 내리깐 록시아스는 안색이며 음성이며 카밀에게 무심하기 짝이 없는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괴로워도 되지만, 당신은 안 된다’.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를 지껄였던 카밀을 비웃으려 만들어 낸 조롱이었다.

“저는 록시를 사랑해서, 록시가 아니면 손가락 하나라도 대기 싫으니까요.”

“어.”

“록시 피 말고는 못 마시겠으니까, 사냥 안 할 거예요.”

“그래, 그럼.”

두 무릎에 놓인 손이 구부러졌다.

“근데 록시는….”

주먹을 쥐며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놓은 카밀이 말했다.

“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다른 피를 못 마셔요?”

카밀에게 실컷 무정함을 전시하던 록시아스의 이목구비가 대번 확 구겨졌다.

“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제 피만 마셔요?”

흡혈귀가 되고 나서 식사한 횟수가 고작 두 번. 한 번은 태어나기 위하여 마셨던 창조자의 피였으며, 한 번은 사냥을 강요당하여 마신 쓰레기의 피 한 모금이었다. 록시아스는 굶주리다 못해 홍채의 붉은 기가 옅어진, 가엾고 건방진 카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제 피가 제일 맛있다고 했고, 제 피가 아니면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제가 매달려서 부탁해야만 겨우 마시고….”

“카밀아.”

“왜 그러는 거예요? 록시.”

“배고파서 돌았어?”

“록시는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카밀은 주먹을 도로 펴서, 제 무릎을 감싸 쥐었다.

“사랑하지 않으면 참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다가 다시 손가락을 구부렸다. 거스러미 하나 일어나지 않은 말끔한 엄지 밑을 검지 손톱으로 호볐다.

“아프든 말든 그냥 상처 주면 되잖아요, 사랑하지도 않는데 무슨 상관이야.”

외면받을 사랑을 고백하는 것보다, 보상받지 못할 사랑을 인정하는 편이 훨씬 아팠다.

“그래서… 저는 록시가 왜 참는지 모르겠어요. 왜 참아요? 록시.”

손톱에 파인 엄지손가락에서 피가 방울방울 맺혔다. 록시아스의 시선이 단번에 사로잡혔다.

“내가 소중해서요?”

“…….”

“착각이에요. 소중하면 저한테 이러지 말아야 하잖아요….”

카밀은 엄지에서 핏물을 훔쳐 바른 검지를 록시아스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록시가 나쁜 게 아니에요. 록시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제가 나빠요.”

록시아스가 입술을 떨었다. 화가 났기 때문일까? 어떠한 말을 꺼내려다 그만둔 걸까? 아니면, 눈앞에서 핏물이 흐르니 흥분되어서?

“그냥 상처 주세요.”

무엇이든 어떨까. 궁금해 봤자 알 수 없을 테니 아무렴 상관없었다. 록시아스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으므로.

‘기대가 나를 버릇없게 만든다’라고 했다.

“하.”

카밀은 일순 고개를 잔뜩 숙여 록시아스에게 얼굴을 숨기고는 쓰게 웃었다.

그럼 기대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말해 주면 될 것을.

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다른 피를 못 마셔요? 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왜 제 피만 마셔요? 제 피가 제일 맛있다고 했고, 제 피가 아니면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제가 매달려서 부탁해야만 겨우 마시고…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으면 참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 말에 한마디, 무엇이든 말해 주었다면 기대하지 않았다.

또다시 이렇게, 절대 긍정도 하지 않으나 부정도 하지 않는 록시아스에게 피를 준다. 기대를 품는다.

“록시….”

차가운 입술이 검지를 머금었을 때, 카밀은 물기가 매달린 눈을 접고 웃음 지었다. 최선을 다해 가식을 떨었다.

“제 피를 마셔 줘서 고마워요.”

록시아스에게 예쁨받고 싶어서.

어쨌든, 록시아스를 먹였다. 록시아스는 제 피로 배를 채우고 생기를 얻을 것이다. 그것으로 됐다. 괜찮았다. 괜찮다. 괜찮아.

괜찮아….

카밀은 록시아스를 먹이며,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배고파도 괜찮아. 괴로워도 괜찮아.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아. 슬퍼도 괜찮아. 미움받아도 좋아. 이렇게, 록시가 내 피를 마셔 주고 있으니까 기뻐. 행복한 거야. 괜찮은 거야. 괜찮을 거야. 영영.

영영, 이렇게 자신을 세뇌하다 보면 정말 괜찮아질 때가 오길 바라면서.

***

몇 세기 전.

눈이 새빨간 아이가 물었다.

‘수도사. 사랑이 뭐야?’

신에게 영혼과 육체를 헌신했으므로 평생 독신이었던 수도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은 신께서 너와 나, 그리고 만물에 베푸시는 영광이란다.’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영광?’

‘신의 영광은 우리가 어둠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길을 밝혀 주는 은혜의 빛이란다.’

아이는 이해하지 못했다. 수도사는 아이가 언젠가 자신의 말뜻을 깨닫길 바라며 덧붙였다.

‘그러니 항상 신께 감사해야 한다.’

깨달음이란 의문을 해결한 뒤에 따라오는 법이었다. 아이는 물었다.

‘낮에는 해가 뜨니까 밝잖아. 그러면 낮에는 신한테 안 감사해도 되는 거 아냐?’

천진한 아이가 신에게 예를 갖추지 않아도, 수도사는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친절하게 가르쳤다.

‘록시. 신의 영광으로 물리치는 ‘어둠’은 밤에 내리는 어둠과는 다른 것이란다. 밤에 내리는 어둠은 낮이 되면 물러가지만, 그 ‘어둠’은 우리의 눈을 영영 멀게 한다.’

‘눈이 영영 멀어? 장님이 되는 거야?’

‘그래. 장님이 되는 거란다.’

신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영원히 지옥을 떠도는 장님이 되는 거란다.

별안간 하늘을 올려다본 수도사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건 나쁜 거야?’

‘그럼. 나쁘지. 나쁘고말고….’

수도사를 따라 고개를 한껏 꺾어 하늘을 쳐다본 아이는 흘러가는 구름을 눈으로 좇았다. 그뿐이었다. 아이는 신을 볼 수 없었다. 영광도, 사랑도 느낄 수 없었다.

***

몇 세기 후.

눈이 새빨간 아이가 말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참을 이유가 없잖아요. 아프든 말든 그냥 상처 주면 되잖아요, 사랑하지도 않는데 무슨 상관이야.”

누구에게도 영혼과 육체를 헌신할 필요가 없었던 흡혈귀는 침묵했다.

“그래서… 저는 록시가 왜 참는지 모르겠어요. 왜 참아요? 록시.”

흡혈귀는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소중해서요?”

아이는 자꾸만 흡혈귀가 모르는 것을 물었다.

“착각이에요. 소중하면 저한테 이러지 말아야 하잖아요….”

착각이 아니었다. 흡혈귀에게 아이는 정말로 소중했다. 그의 영생을 끝내 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아요. 록시가 나쁜 게 아니에요. 록시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제가 나빠요.”

사랑하지 못하는 쪽이 나쁜 게 아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쪽이 나쁜 것이다, 라고 말하는 아이는 슬퍼 보였다.

“그냥 상처 주세요.”

이미 고통스러운 얼굴로 상처를 달라니. 흡혈귀는 의아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괜찮겠지.

흡혈귀는 그저 아이의 손가락에 묻은 핏물을 핥으면서….

“록시… 제 피를 마셔 줘서 고마워요.”

아니, 아이가 아니었다. 카밀은 자신보다 키가 큰 청년이었다. 한 줌에 들어오던 손목은 이제 완전히 둘러 잡을 수 없을 만큼 두꺼웠다. 가느다랗고 곱기만 하던 손가락은 마디가 강인하게 불거졌다.

의자에서 내려온 록시아스는 카밀을 바닥으로 밀어붙였다. 카밀의 위로 올라타고는 두 팔을 결박했다. 카밀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넓게 벌어진 가슴팍이 불쑥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그랬다. 어느새 카밀은 다 커서, 흡혈귀까지 되었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데리고 나가면 이놈이나 저놈이나 돌아보고 쳐다보고 수군덕거리며 얼굴을 붉히도록 아름답기야 언제나 한결같아도, 앳된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자신보다 몇 세기나 짧게 산 카밀을 아가야, 아가야, 부르며 애 취급하였으니 몇 번이고 생일을 함께 보냈음에도 실감하지 못했다. 카밀은 어른이었다. 퍽 귀여운 낯으로 록시, 록시, 하며 이것저것 묻고는 했던 아이는 사라졌다. 언제부터?

‘그럼 저는 취향이 까다로운 것 같아요. 그리고 제 취향은 록시예요.’

그때는 분명히 아이였다.

‘록시, 나, 록시에게 물리고 싶어요! 록시가 내 피를 먹어 줬으면 좋겠어요! 록시! 너무 괴로워요… 계속…! 록시가 사냥하는 걸 본 이후로 계속!’

그때 역시 카밀은 어리숙했다.

‘인간들은 몽정할 때 꿈을 꾼다던데, 너도 그랬어?’

‘…….’

그때도 카밀은 미숙했다. 막 욕망을 깨우쳤을 뿐이었다.

‘어떻게 좋아하지 않고 복종만 해요? 좋아해서 복종하는 건데.’

그리고 그때는….

‘좋아하지 말라는 것만 빼고, 록시아스가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제 마음대로요.’

몸집만 큰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었다. 그때부터 카밀은 어느 정도 어른이었다. ‘아이’는 이미 흐렸다.

‘오래 살았고, 똑똑하고, 너무… 예쁜 록시가 왜 이런 건 모를까… 싶지만, 알려 줄게요. 내가 알려 줄 때도 있어야 공평하잖아요.’

아마도, 그즈음부터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는 계속, 해가 질 때만 기다렸어요. 달이 뜰 때만… 록시와 보내게 될 새벽만을 기다렸어요. 지금도 기다리고 있어요.’

내내 아이가 아니고자 바랐던 카밀은 흡혈귀가 되기 전부터 어른이었다.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으면 참을 이유가 없잖아요.’

록시아스가 모르는 이야기를 할 만큼 어른이었다.

사랑.

록시아스는 자신에게 ‘록시아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첫 번째 동료였던 수도사를 떠올렸다. 그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랬다. 그때 수도사가 무어라고 했는지…. 신, 영광, 빛, 어둠, 지옥,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또렷이 되새길 수 없는 걸 보니,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하지만 카밀은 사랑을 운운하며 록시아스를 원망하고, 사랑을 거론하며 자책하고 록시아스를 용서했다. 사랑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으니 마음껏 이용해 지껄인 것이다. 록시아스는 모르는 사랑. 록시아스만 모르는 사랑.

“카밀아.”

록시아스는 눈이 새빨간, 흡혈귀가 된, 어른인 카밀에게 물었다.

“사랑이 뭐야?”

왜 눈물짓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카밀은 촉촉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되물었다.

“…사랑이요?”

“그래, 사랑.”

“왜요, 사랑이 왜요, 록시?”

수도사는 곧장 잘만 대답해 주었는데, 카밀은 어떻게 그런 것을 묻느냐는 표정을 짓더니 또다시 질문을 돌려주었다.

“날 사랑한다며.”

“네, 록시. 사랑해요.”

“그럼 너는 사랑이 뭔지 아는 거잖아.”

록시아스는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사전적 의미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진정한 무지였다.

“말해 봐, 사랑이 뭔지.”

록시아스는 짜증이 났다. 카밀의 손목을 짓눌렀다.

가르쳐 준 적도 없는 것들을 척척 알아서 깨우친 카밀이었다. 사랑 또한 스스로 학습했겠다. 록시아스는 패배감을 감수하며, 거듭 물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네가 배운 사랑은 뭐야?”

혼자서만 어른이 된 카밀은 사랑을 그렇게 정의했다.

“록시아스요.”

록시아스, 자신이라고…. 여전히 록시아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카밀에게 더는 묻고 싶지 않았다. 사랑. 애초 그따위 것을 왜 궁금해했을까….

‘록시는 저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그러는 거예요?’

그러니까 카밀이 사랑을 이유로 대며 자신에게 왜 그러느냐고 반항한 탓이었다. 분명 카밀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죽이지도 않고 여태껏 만들었던 동류를 통틀어 가장 상냥하게 대해 줬는데, 마치 자신이 거짓을 행했다는 양 원망을 내비친 카밀 탓이었다. 괘씸하기 짝이 없게.

‘소중한 카밀아.’

항상 진심이었다. 카밀을 무엇보다 귀하게 생각했다. 상대가 흡혈귀든 사람이든 짐승이든 물건이든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대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만은 확신했다.

‘소중하면 저한테 이러지 말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카밀이 그딴 오해를 하다니 억울했다.

‘저는 록시가 왜 참는지 모르겠어요. 왜 참아요? 록시.’

나는 왜 참았는가.

카밀을 아래에 두고 고민에 빠졌던 록시아스는 곧 정답을 찾았다.

그야 카밀이 아까우니까… 아마도. 그래서 나는 참았다. 짜증이 나도 카밀을 해치지 않았고, 화가 나도 카밀을 죽이지 않고 참았다. 카밀이 자살 시도를 했을 때는 찰나조차 망설이지 않고 살려 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흡혈귀가 된 카밀은 더더욱 귀중한 존재이므로 더더욱 아껴 주었다. 맞다. 그래서 여태 그의 피를 마시지 않고 버틴 것이다. 다른 피를 마실 시도라도, 결심이라도 해 본 것이다.

더불어 그가 ‘보통 흡혈귀’처럼 ‘보통 사냥감’으로 식사하기를 바란 것이다. 다른 게 아니라… 흡혈귀가 흡혈귀의 피를 주식으로 삼을 경우에 어떠한 효과, 혹은 부작용이 따를지 밝혀진 바도 없고 말이다.

그를 살해할 의무를 진 카밀은 건강하고 강력하며 완벽해야 하니까, 조금의 흠이라도 나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저를 아껴 주는 줄도 모르고, 카밀은 마치 그가 대단한 희생이라도 하는 양 착각하고 있었다.

‘그냥 상처 주세요.’

그럴 수야 없다.

턱을 치켜든 록시아스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카밀은 길게 휘어지는 록시아스의 목에 눈길이 붙잡혔다. 이어 록시아스가 날숨을 뿌리며 카밀에게, 금세 나아서 피딱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카밀의 엄지손가락에 시선을 던졌다.

“카밀아.”

“네… 록시.”

두 사람은 동시에 목울대를 울컥거렸다.

자신의 노고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카밀에게 구구절절 변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록시아스는 카밀의 한쪽 손목을 놓아주었고, 간단하게 일렀다.

“마셔.”

“네?”

마시라고, 나를.

의사를 명백하게 전달하기 위해 록시아스는 즉시 자신의 손목을 물어뜯고 상처를 내어 카밀의 턱께로 옮겼다. 툭, 툭. 핏물이 카밀의 입가로 낙하했다.

카밀은 공중을 갈랐다가 자신을 물들이는 피와 록시아스를 번갈아 보며,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토록 원하던 피로 고픈 배를 채울 기회를 주었는데 어째서 온전히 기뻐하지 않는 걸까. 록시아스는 물을 자신이 없었다. 대답을 들은들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기 때문이었다. 마치 ‘사랑’처럼. 카밀은 어른이었고, 자신은 여태 검은 숲의 그 짐승과 별다르지 않았으므로.

“마음 바뀌기 전에 마셔.”

“…….”

“빨리.”

“…록시는요?”

“나도 널 마실 거야.”

기어이 카밀의 눈 앞머리로 눈물이 고였다. 록시아스는 못 본 체했다.

“얼른.”

“…네.”

뒤늦게 대답한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붙잡히지 않은 쪽 팔을 들었다. 록시아스가 그랬던 것과 같이 스스로 팔목을 송곳니로 찔러 피를 뽑아냈다.

“기뻐요.”

록시아스에게 팔목을 갖다 바쳤다. 기쁘다는 말이 무색하게, 눈 앞머리에 고인 눈물은 콧대를 타고 광대로 미끄러졌다.

“응.”

록시아스는 계속해서 카밀의 눈물을 외면했고, 면전으로 내밀어진 카밀의 손목을 낚아채 잡았다. 그와 동시 카밀은 록시아스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두 팔이 교차했다.

단내를 펄펄 풍기는 피에 입술을 붙이기 전, 멈칫한 록시아스는 카밀을 불렀다.

“그리고, 카밀아.”

“…네.”

고개를 사선으로 기울이고는 록시아스의 팔목을 향해 입술을 벌린 카밀은 역시 행동을 멈춰 세우며 대꾸했다. 록시아스는 일순간 눈동자를 왼쪽, 오른쪽으로 굴리다가 평소보다 가라앉은 언성으로 읊조렸다.

“상처받지 마.”

그러고는 즉각 카밀을 흡혈했다. 겸연쩍은 마음을, 스무 날이나 굶은 덕분에 다급한 식사로 자연스레 해치울 수 있었다.

반면 카밀은 한참이나 록시아스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천천히, 아주 아주 느리게 록시아스의 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런 날이 또 언제 올지 몰랐다. 식욕에 정신을 빼앗기기 싫었다.

이런 날이란, 록시아스와 함께 서로를 흡혈하는 날이었고, 록시아스가 자신에게 흔들려 금이 간 모습을 알아서 내비친 최초의 날이었다.

…피를 넘기지 않는 순간에도 목울대가 자꾸만 울걱거렸다.

***

상대를 흡혈하는 행위는 단순히 허기를 충족하기 위함이라기에는 너무도 빨리 의식을 앗아 갔다. 일찍이 이성을 놓은 록시아스를 따라 카밀은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사고 체계는 오로지 상대의 피를 삼키는 과정에 한해서 제대로 작동했다. 오가는 말이란 전무했으나 공간은 소란스러웠다.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에 또 다른 심장 박동 소리가 얹히고 얹혔다. 흡혈에 몰입한 오감이 상대의 피가 핏줄을 도는 소리까지 잡아낼 지경이었다.

팔목에 최초로 새겨진 잇자국은 곧 다른 부위에도 남겨졌다. 두 사람은 마치 영역을 넓혀 가는 짐승처럼, 동맥이 지나는 자리라면 사정없이 깨물어 흔적을 아로새겼다. 살갗을 가려 흡혈을 방해하는 천은 찢겼다. 뜯어진 셔츠 단추가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팔목이며 팔뚝, 어깨와 목이 송곳니로 뚫렸다. 경쟁처럼 식사했다.

오래 굶주리기야 했어도, 이토록 호전적인 식사는 전에 없었다. 불분명한 현상에 의해 더 많이, 더 빨리 상대의 피를 마셔야만 한다며 종용당하는 듯했다. 포만감이 차올랐으나 마음은 갈수록 촉박해졌다.

길든 들개가 먹이 앞에서 목줄을 끊고 내달리듯이. 극도로 흥분한 카밀은 록시아스의 허락에 따라 움직이지 않았다. 카밀에게 지배자이며 창조자인 록시아스는 그 순간만큼은 그저 먹잇감에 불과했다. 차려진 밥상에 승낙을 구하는 미련한 천치가 아니었다, 카밀은.

제 목울대에서 조금 비낀 부근을 빨아 당기는 데 여념이 없는 록시아스의 흑발을 둘러 잡은 카밀은 내내 바닥에 내려져 있던 뒤통수를 들었다. 록시아스의 팔뚝을 붙들고는 상체를 올렸다. 번갈아 놓인 다리가 그 과정에서 더 조잡하게 얽혔다.

카밀의 움직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흡혈하던 록시아스는 등이 카펫에 닿았을 때에야 뒤바뀐 시야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런들 어떠한지. 흡혈에 지장만 없다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도리어 카밀이 위로 가니 피가 알아서 뚝뚝 흘러 편했다.

카밀은 손가락으로 록시아스의 목을 쓸었다. 아직 자신의 송곳니가 닿지 않은 깨끗하고 질긴 혈관이 여실히 느껴졌다. 얼른 뚫고 싶었다. 한데 제 목을 내어 준 자세로는 불가능했다.

안색이며 호흡이 상기된 카밀은 통보하듯 말했다.

“록시, 그만… 내 차례예요.”

어깨를 펴자 목에 붙어 있던 록시아스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다시금 달려들기 전에 턱을 내려 록시아스의 목을 물었다.

귓가로 록시아스의 숨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어 귓불을 물렸다. 그곳을 흡혈해 봤자 혈액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을 텐데, 의아해하면서도 카밀은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피를 넘기기에도 바빴다. 원초적인 욕구가 카밀을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같은 몸에서 흐르는 피라도 심장에 가깝게 지나던 피일수록 달았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목에서 뿜어지는 피를 취하며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같은 때, 카밀의 귓불을 씹던 록시아스는 감았던 눈을 뜨고 끔뻑거렸다. 부족했다. 식탐이 구멍 난 항아리처럼 채워질 줄 몰랐다. 늪지대처럼 자신을 삼켰다. 눈꺼풀이며 몸이 무겁게 처졌다. 온전히 거동할 수 있는 부위란 턱과 치아, 혀나 목구멍뿐인 듯했다. 카밀의 피를 더 마셔야만 원기를 본래대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기가 생겼다. 손을 들어 금발을 휘어잡아 당겼다. 카밀의 턱이 치켜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송곳니가 자신의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별안간 식사가 중지된 카밀이 눈살을 찌푸리며, 동공이 팽창한 붉은 눈을 제게로 내렸다.

“내 차례야.”

서로가 서로의 영역이었으므로 나란히 서기란 불가능했다. 물러서면 고꾸라지므로 양보란 사치였다.

몸을 뒤집어 카밀을 두 팔 안에 가둔 록시아스는 전에 자신이 물었던 부위를 혀로 핥았다. 회복력이 뛰어난 흡혈귀의 살갗은 금세 아물며, 먹잇감이 되어 본 적 없다는 듯 잇자국을 숨겼다. 무의미한 재생이었다. 거듭 송곳니를 박아 넣을 거니까.

동족의 피로 최상의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유일한 먹잇감은 그야말로 꿀물이 끊임없이 샘솟는 우물이었다. 록시아스와 카밀은 무한하게 재생하는 서로의 혈액을 길고 긴 시간 동안 갈취했다. 그래도 상대는 멀쩡했다. 천만다행이었다. 인간이었다면 이미 핏기 하나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터였다.

극단적인 축복은 두 사람을 절망으로 내몰았다. 마셔도 마셔도 바닥을 보이지 않는 상대를 흡혈하는 동시에, 록시아스와 카밀은 자신들의 욕구가 막장을 드러내지 않아 불안해졌다. 그야말로 향기로운 꽃으로 만들어진 미로를 헤매는 셈이었다. 황홀했지만, 대체 언제까지…. 벗어날 수는 있을까. 애초 발을 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는 이미 쓸모없는 감회였다.

문제는 정신적 결핍이었다. 독주 같은 상대로 인해 만취했으나 욕망은 깨진 잔이었다. 물리적 허기는 충족된 지 오래였다. 두 사람은 배가 불렀다. 살갗에서 송곳니를 거두었다. 카밀이 위, 록시아스가 아래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록시아스는 의문이 진하게 고인 눈빛으로, 카밀은.

“…….”

“…록시.”

‘그럴 줄 알았다’라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록시아스를 훑었다. 불그죽죽하게 물들어도 빛나는 얼굴에서, 제가 낸 잇자국이 서서히 아물고 있는 목으로, 가슴팍으로, 호흡에 따라 들썩이는 복부로, 그 아래로….

“하.”

폐부를 누르던 묵은 숨을 내뱉는 것인지, 실소인지 모호했다.

록시아스는 카밀을 따라 시선을 내리려다가, 관두었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카밀이 무엇을 보고 묘한 표정을 짓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흥분한 두 몸뚱이 때문이겠다. 놀랍지도 않았다. 자신은 카밀을 흡혈한 뒤 으레 육체적으로 반응하였고, 카밀은 언제나 자신에게 달아오르니까.

카밀은 록시아스와 시선을 나누는 찰나에 머리를 굴렸다. 록시아스를 설득할 방법을 고심했다. 피차 배부른 입장이므로 허기에 돌아 버린 체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이대로 끝내서야, 배가 불러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자신과 록시아스는 식물이 아니었다. 물만 받아 마셔서야 만족하지 못한다. 자신과 록시아스는 흡혈귀이며 짐승이었다. 식물보다 복잡한 욕구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 채워 넣어야 할 것은 식탐이 아니라….

“록시.”

록시아스에게 제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팔등으로 바닥을 받치고 몸을 띄운 카밀은 속삭이며 물었다. 록시아스가 닿아도 된다고 허락하지 않았으니, 카밀의 입술은 록시아스의 귓가에 붙을 듯 가까이 있었으나 거리는 더 좁혀지지 않았다.

“만족해요?”

록시아스는 질문을 되돌렸다.

“너는? 만족해?”

되물을 줄은 몰랐다. 하기야 록시아스는 명령할 때만 직설적이지, 다른 데서는 영 빙빙 돌려 표현하는 습관이 있었다. 의도적으로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비밀스러울수록 자신이 노골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쪽이 마음을 숨긴다면 영영 닿지 못한다. 무엇이든 내보여야 했다. 마치 자신과 록시아스의 심장 소리처럼.

“아니요. 만족 못 했어요, 아직.”

멈추지 않고 표현하면 언젠가는 록시아스가 들어 줄 터였다. 불가사의한 차단막을 별안간 걷어 내고 자신을 마시라며 승낙한 오늘과 같이.

“저는 돼지가 아니잖아요, 록시.”

카밀이 선택한 록시아스를 설득할 방법은 특별하지 않았다. 줄곧 해 왔던 방법이었다.

“밥만 먹는다고 끝나지 않아요.”

마음을 가감 없이 노출하고, 욕망을 폭로 당하는 방법이었다.

“욕심이 많아서 죄송해요.”

자진하여 자신을 못나고 안쓰럽게 장식하여 록시아스의 동정심이든 보호 본능이든 그 외 어떠한 정서든, 무엇이든 자극하여 록시아스가 참다못해 반응하도록 조장하는 방법이었다.

“해결하고 싶어요.”

카밀은 변명하듯, 록시아스를 설득했다.

“지금 당장요.”

“…….”

“죄송해요.”

허락받지 않고 만져서요. 록시아스가 욕실이든 거실이든 다른 장소로 숨어 버리기 전에 결판을 내야 했으므로 여유가 없었다. 무엇이 죄송한지 말도 않은 카밀은 힘을 단단히 써서 록시아스의 허리와 팔뚝에 팔을 두르고는 옆자리로 몸을 굴렸다. 순식간에 위치가 바뀌었다.

“록시가 피도 마실 수 있게 해 줬는데, 다른 것까지 바라면 안 되잖아요.”

카밀이 아래, 록시아스가 위였다.

“이건 나 혼자 할 수 있고… 그래도.”

카밀은 한쪽 팔을 머리맡으로 가져가 뒤통수를 벴다.

“록시가 허락해 줘야 하기로 했으니까, 물어볼게요.”

다른 쪽 손은 제 복부 위에 올렸다.

“록시, 자위해도 돼요?”

카밀은 한치의 부끄러움도 묻지 않은 말간 얼굴로 승낙을 청했다.

“자위하면서 록시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름은 안 부를게요.”

“…하.”

뭐 이런 게 다 있지…?

록시아스는 고개를 쳐들며 헛숨을 토했다. 이어 고개를 제자리로 끌어 내려 마주한 카밀은 뻔뻔스레 웃고 있었다.

“내 아래에서, 내가 보는 앞에서?”

“네, 록시 아래에서, 록시가 보는 앞에서 하고 싶어요.”

채신없고 경박한 주제에, 카밀의 웃는 낯짝은 흠결 하나 없이 청순했다.

“록시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왜….”

“기억해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록시가 욕실에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

“이따위로 컸을까.”

“록시 마음에 들게 예쁜 표정만 지을게요. 전부 기억해서 써먹어요. 록시가 원하는 대로요.”

안 돼, 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도.

벨트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린 카밀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록시 밑에서 자위해도 돼요?”

록시아스는 당장 카밀이 없는 방으로 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뜨거운 육체를 식히기를 바랐으나.

“한번 해 봐.”

과연 카밀이 어디까지 뻔뻔해질 수 있는지 밀어붙이고 싶은 오기가 생겨, 음탕한 행위를 허락했다.

확신으로 기다리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카밀은 복부에 올려놓은 손을 내려 벨트를 풀었다. 금속이 부닥치며 나는 철컥거리는 소음을 향해 록시아스의 이목이 하향했다.

벨트에 이어 단추와 버클을 풀어 내린 카밀은 허리를 들어 올리며 바지를 허벅지까지 끌어 내렸다. 속옷 한 겹만 남았다. 더욱이 선명하게 드러난 두툼한 실루엣과 맞닥뜨린 록시아스는 그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어 카밀이 엄지손가락을 드로어즈 밴드에 걸었다.

식사는 아까 마쳤는데.

록시아스가 목을 넘기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사회적 위신보다 부적절한 방식으로라도 사랑에게 흥미를 끄는 법부터 터득한 카밀은 수치로 얼굴을 붉히기보다 입꼬리를 둥글려 상쾌하게 미소 지었다. 제 표정을 읽은 록시아스가 알기를 바라며. 내던지면 가벼워진다는 사실을. 어차피 해방될 것을 무겁게 묶어 놓을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카밀은 하체를 공중으로 띄우며 드로어즈를 장골 아래로 내렸다. 허벅지와 딱 붙어 있던 발기한 성기가 드로어즈 밴드에 걸렸다. 허리를 도로 낮춘 카밀은 드로어즈 안으로 아예 손을 집어넣었다. 천 아래로 들어선 손가락 한 마디와 닿은 성기를 이윽고 둘러 잡으며 속옷 밖으로 꺼냈다.

두 번째로 보게 된 카밀의 성기였다. 두 번 모두 발기한 채였으니 본래 생김새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쁘고 험상궂은 성기였다. 대척점에 놓여야 할 두 단어가 어찌 함께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카밀의 것을 보이면 될 터였다.

원체 흰 살결에 혈액이 집중되니 선홍빛을 띠었다. 뿌리 부근은 짙게 붉었다가 기둥을 타고 오르면서 빛깔이 점점 옅어져 상아색에 가까웠다가, 끄트머리에 근접할수록 도로 농농해졌다.

색色에서 영감을 얻는 자칭 타칭 예술가들이 수많으므로 남근을 미화한 예술품 역시 널리고 널렸다. 여러 분야에 일가견이 있는 록시아스는 남근을 그리고 조각한 예술을 무수히 접하였으나, 그 어떤 작품도 카밀이 내놓은 실물에 견주자면 추했다.

그런데 어째서 험상궂으냐 하면 온전히 크기 탓이었다. 하의에 압박된 실루엣만으로도 보통을 훌쩍 넘어선다고 상상하기란 쉬웠는데, 온전히 드러나니 되레 상상 이상이었다. 이전에도 놀랐지만 록시아스는 새삼 놀랐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저따위로 커다란 음경을 보고 초연하기란 어려울 터였다.

그런 성기를 보고 있자니 심장이 무리하게 뛰다 못해 가슴팍이 발칵 뒤집힐 지경이었다. 뒷골이 뻐근했다. 다리 사이는 저릿하고 갑갑했다. 록시아스는 카밀이 부러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욕구를 까발릴 수 있는 카밀이 샘났다.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아니, 아니다. 카밀이 부럽다니? 제 혀가 환장해 있는 피를 음미하고 난 뒤에 시각적인 자극까지 맛보니 머리가 돈 것이 틀림없었다.

“아….”

감싼 성기를 위아래로 굼뜨게 훑기 시작한 카밀은 고개를 젖히며 입술을 살짝 벌렸다.

나더러 들으라고, 일부러 낸 소리일까.

록시아스는 제 피가 묻어 있는 입술을 타고 흐르는 음절에 과도하게 오해했다. 수증기처럼 흐릿한 저음이었는데, 귓바퀴가 뜨거워졌다.

귀두 끄트머리에 맺혀 있던 선액이 양을 늘리더니, 들썩거리는 복근으로 뚝뚝 떨어졌다. 뿌리부터 귀두 아래까지만 쓸던 손바닥이 선단까지 올라가 귀두를 문질렀다. 손가락 사이사이와 손바닥에 선액이 발렸다. 미끈함이 감돌게 된 손짓은 숫제 느렸다.

록시아스가 욕정을 분출할 때 자신을 떠올리도록, 록시아스의 마음에 들도록 예쁜 표정만 짓겠다고 했다. 하나 카밀은 자꾸만 좁혀지는 미간과 구부러지는 눈썹을 잡을 수 없었다. 입술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니, 입술은 다물린 편보다 살짝 벌어진 모습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여하튼 이목구비를 포함한 온몸을 노련하게 절제하기 힘들었다. 제게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을 록시아스가 바라보기만 해 줘도, 흥분은 갈무리할 수 없도록 아주 빠르게 극으로 치달았다. 그 탓에 반대로 손은 느리게 놀렸다. 오래, 최대한 오래 록시아스의 새빨간 눈동자에 고여 있고 싶었다. 스밀 때까지.

록시아스의 감각은 모조리 카밀에게 몰입되었다.

청각이 카밀의 축축한 숨소리를 남김없이 마셨다. 그보다 흠뻑 젖어 있는 음란한 소음과 함께 삼켰다. 시각은 다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음과 카밀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뇌리로 전달했다.

자신이 욕실에 있을 때나 혼자 있을 때 떠올릴 수 있도록 예쁜 표정을 짓겠다고 했나. 주제를 모르는 카밀은 그가 어떠한 표정을 지은들 꾸준히 고운 줄도 몰랐다. 게다가 지금 지어 보이는 표정은 예쁘기보다….

만져 달라고, 만지라고, 표정으로 현혹하는 듯했다. 요망함이 도를 넘은 카밀은 언어도 사용하지 않고 하아, 하아, 숨소리만 내뱉고는 내리깐 속눈썹을 잘게 떨며 입술만 살짝 벌리는 행태로 보는 이의 정신머리를 헤집었다.

만져 달라고, 만지라고… 만질까?

록시아스는 아랫입술을 훑었다.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팔랑거릴 듯 길쭉한 금빛 속눈썹이 떨릴 때마다 엄지로 눌러 고정하고 싶었다. 흡혈귀가 된 뒤로 창백하기만 할 줄 알았으나 체온이 높아질수록 채도 높은 장밋빛을 띠는 뺨을 쓸어내리고 싶었다. 벌어진 입술을 꼬집어 더욱 빨갛게 물들이고 싶었다. 언뜻언뜻 보이는 혀끝을 손가락으로 굴리고 싶었다. 불쑥거리는 목울대를 깨물고 싶었다. 어느새 잇자국이 사라져 매끈한 목에 다시금 상처를 내고 싶었다. 아름답게 자리 잡은 근육을 자랑하는 상체를 함부로 주무르고 싶었다. 껄떡거리며 체액을 흘리는 성기를….

자신의 성기도 꼭 그러한 상태일 터였다. 족쇄 같은 하의를 당장 벗어 내리고 싶었다. 문지르고 싶었다. 카밀을 만지고 싶고, 자신을 만지고 싶었다.

어느 쪽을 만질까.

어느 쪽이든 카밀에게는 감추고 싶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카밀만큼 되바라지지 못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통에도 카밀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카밀의 모든 곳을 전부 훑어보아도 저 눈빛만은 꿋꿋이 마주하기 어려웠다. 뒷목이 홧홧해지기 때문에… 가려야 했다.

록시아스의 손끝이 카밀의 허리, 혹은 그의 무릎 곁에 놓인 천을 향했다. 식사에 방해되어 거침없이 찢어 벗겼던 셔츠였다. 록시아스는 식욕을 충족하기 위해 내던졌던 셔츠를 다시, 또 다른 욕구를 방출하기 위해 잡아 들었다.

언제인가, 록시아스는 카밀이 누구보다 해박하길 바랐다. 그리고 지금, 록시아스는 카밀이 무엇을 인식하여도 배우지 못하는 천치이길 바라고 있다. 무엇을 감지하여도 느끼지 못하도록 불감하기를 원했다. 자신이 카밀 위에서 어떤 추태를 저지르든 절대 모르도록.

양손으로 잡은 셔츠를 길게 당겼다. 카밀이 눈동자를 흔들었다. 무얼 하는지 궁금하겠지.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카밀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백치여야 하므로, 지금부터.

셔츠로 카밀의 눈자위를 덮었다.

“머리 들어.”

“…아.”

입꼬리를 들썩인 카밀이 신음인지 탄식인지, 그것도 아니면 실소인지 모를 모호한 음절을 토하더니 얌전히 뒤통수를 들어 올렸다. 록시아스는 재빨리 금발이 풍성한 머리통 뒤로 셔츠를 당겨 묶었다. 그러고 나서 물었다.

“뭐가 보여?”

카밀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 버렸으니 당연했다. 완벽했다. 더더욱 완벽해지려면 카밀의 귀까지 틀어막아야 했으나, 그 방도를 구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록시아스는 바짝 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적시며 벨트를 풀었다.

철컥거리는 소음에 저절로 눈길이 옮겨졌으나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카밀은 아쉬움에 튀어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수줍음 많은 록시, 정신적 벽이 허물어지니 물리적 암막을 자신에게 씌웠다. 자신으로 하여금 무너진 그를 감상하지 못하게 하도록…. 사랑스러운 록시.

하나 암흑이 적막을 불러오지는 못했다. 카밀은 소리에 집중했다. 소리를 따라 록시아스가 무엇을 하고 어떠한 표정을 짓는지 상상하면 되었다. 자신 있었다. 셀 수 없도록 록시아스를 그려 본 자신이었다. 록시아스가 보여 준 적 없는 모습까지.

호흡 소리가 불규칙했다. 록시아스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뱉기도, 기나긴 마라톤을 완주한 양 헐떡거리기도 했다. 숨소리를 비집고 울리던 철컥거리는 소음은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툭, 단추를 풀고,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게 들렸다.

벨트 잠금쇠가 허공에서 딸각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록시아스가 바지를 내린 듯했다. 어디까지 내렸을까? 속옷과 함께 내렸을까? 눈을 가린 셔츠를 당장 내던지지 않는 이상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머지않아 확신할 수 있었다. 속옷과 함께 내렸다. 게다가 곧장 수음을 시작했다. 아주, 아주, 다급하게…. 찔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젖어 있었는지.

그 밑에서 자위하는 자신을 훑는 눈빛이 워낙 끓어 도리어 건조해졌을 것이라 여겼다. 불타는 듯 뜨겁게 전해지는 감정이 혐오인지 열망인지 고를 수 없었던 탓이다. 후자였다. 록시아스는 자신을 관조하며 전소되고 있었다. 아래는 적시면서.

이어서 청각을 자극하는 소음이란 모조리 눅눅하며 끈적거렸다. 카밀은 록시아스가 그를 스스로 문지르며 내는 차진 소음에 맞춰 손을 놀렸다.

어설픈 록시. 눈만 가릴 것이 아니라 귀도 틀어막았어야죠. 록시아스가 숨을 아무리 옅게 내뱉어도, 나는 록시아스가 얼마큼 흥분했는지 알 수 있어요. 록시아스가 아무리 조심하며 자위해도, 나는 록시아스가 얼마큼 거친 손놀림으로 성기를 문지르는지 느낄 수 있어요. 내 배와 가슴팍으로 튀는 액체가 온전히 나의 체액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반은 내 것, 반은 록시가 흘린 거야.

고개를 한껏 젖힌 록시아스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

뜨거운 온도를 지닌 신음이 꼬리만 겨우 잘렸다.

카밀은 마치 눈을 가린 쪽이 자신이 아닌 록시아스인 양 보란 듯이 웃었다.

록시는 나한테 전부 들키고 있어.

상대가 숨길수록 모조리 내보이기로 한 카밀은 그가 얼마나 절정에 다다랐는지 알리는 것처럼, 호흡이 내뱉어지는 간격을 더욱 짧게 하며 앞섶을 더 세게 쥐고 흔들었다. 눈을 내보이지 못해도 록시아스가 감동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던 중에 하마터면 록시아스를 부를 뻔했다. ‘록시, 마음에 들어요?’라고 물으려다가.

‘록시’만 제하고, 카밀은 하려던 질문을 꺼냈다.

“마음에, 하, 들어요…?”

대답을 구하고자 묻지 않았다. 록시아스가 그 스스로 선택한 음란함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되새기길 원해서 물었다.

대답할 필요가 없었던 록시아스는 입술을 떨며 그저 중얼거렸다.

“하아… 아, 미쳤어….”

카밀의 살갗에 정액을 흩뿌린 뒤였다. 만지고 싶었던 그곳에. 근육이 갈라진 복부에, 널따란 가슴팍에, 길쭉한 목에, 눈을 가려 놓아도 미려한 얼굴에.

카밀은, 록시아스가.

“먼저 싸길 기다렸어요.”

제 몸에 흘려 놓은 정액을 손으로 훔쳐 발랐다. 록시아스에게 직접 닿을 수 없다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무엇이라도 쥐는 것으로 만족했다. 아직은.

사정감에 헐떡거리던 록시아스는, 제 정액으로 손을 적신 후에 마저 수음하는 카밀을 벌겋게 익은 눈으로 응시했다.

“…미친.”

새끼.

끝까지 채신없고 경박하며 음탕한 카밀을 향한 욕이었고, 그런 카밀을 내려다보며 찰나 망상에 사로잡혔던 자신을 향한 경멸이었다.

카밀의 난잡한 손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망상이었다.

“아… 이름, 부르고 싶어요.”

록시아스의 정액을 바른 손으로 성기를 문지르며 절정에 가까워진 카밀이 읊조렸다. 내용은 애달프나 음성은 선정적이기만 했다.

“허락해 주면, 하아, 안 돼요?”

풀어 헤친 앞섶을 갈무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카밀을 관망하던 록시아스는 거듭 아랫입술을 혀로 닦다가 희미한 어조로 불허했다.

“안 돼.”

“…하.”

카밀이 눈썹을 휘었다. 록시아스는 셔츠에 가려진 눈만 제외하고 카밀의 모든 곳을 샅샅이 훑었다. 시선을 떨어트리려야 떨어트릴 수 없었다. 괴이한 힘이 시선을 통제하여 카밀에게만 머무르도록 강제하는 듯했다.

“아.”

내내 조금이나마 열려 있던 입술이 다물렸다. 어금니를 세게 물었는지, 미끈한 턱 옆으로 길게 홈이 팼다. 휜 눈썹 앞머리가 가깝게 모였다. 성기를 부여잡은 손이 수음을 멈췄고, 손등에 불거진 핏줄과 팔뚝을 가르는 근육이 홀로 불쑥거렸다. 동시에 복부가 들썩거렸다. 숨을 몰아쉬며 카밀이 턱을 한껏 젖히며 파정했다. 혈액이 묵직하게 쏠린 선단에서 정액이 곡선을 그리며 뿜어졌다. 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복부와 가슴팍으로 튀었다.

카밀이 사정하는 광경을 낱낱이 감상한 록시아스는 가슴을 부풀리기 시작했다. 잠잠해지는가 했던 심장이 도로 내달렸다. 겨우 식힌 열이 다시금 끓어올랐다. 서로의 피를 마셔 혈관에 같은 피가 돈들, 육체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한데 마치 자신이 사정한 양 등허리가 저릿하며 눈꺼풀이 풀렸다.

“하아, 하아… 록시.”

끝났으니 이름을 불러도 되었다. 카밀은 잦아들지 않은 호흡에 록시아스의 이름을 섞어 되뇌었다.

“록시….”

록시아스에게 암흑만 허락받은 카밀은 눈자위를 덮은 셔츠를 풀 생각도 않고, 가려진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록시, 록시.”

손으로 허공을 갈랐다. 팔을 얼마큼 더 뻗어야 록시아스에게 닿을지 감으로 느끼고 있었으나 함부로 만져서야 안 될 일이었으므로 카밀은 계속하여 허공만 더듬었다. 그리고 록시, 하고 몇 번 이름을 부르고 나서.

“록….”

카밀의 것이 아니었으나 카밀과 같은 체온을 가진 손이 카밀의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카밀은 내리 읊조리던 이름을 꿀꺽, 마른 공기와 함께 넘기며 숨을 멈췄다. 적당한 힘으로 가슴을 누르는 손바닥에서 가느다란 진동이 전해졌다.

“하….”

록시아스는 한숨 같은 조소를 뿌렸다. 오로지 자신을 향해서.

카밀을 만지고 싶었고, 자신을 만지고 싶었다. 어느 쪽을 만진들 카밀에게는 감추고 싶었기에 카밀의 눈을 가려 놓고 자신을 만졌다. 황홀했다.

욕심 하나를 해결하면 다른 하나는 자연스레 증발하리라 믿었다. 착각이었다. 욕심 하나가 해결되니 다른 욕심은 비대해져 빈자리까지 차지했다. 카밀을 만지고 싶은 욕구가…. 록시아스는 기어이 충동적으로 카밀에게 손을 댔다.

손바닥에 가득한 카밀의 맨살은 보기와는 달리 부드럽지만 않았다. 피부 아래 촘촘히 짜인 근육이 그대로 느껴지듯 단단했다. 가슴팍도 그랬고, 복근을 따르는 깊은 선으로 쪼개진 복부도 그랬고, 널따란 어깨에 비하여 늘씬한 허리도 그랬다.

카밀의 상체를 쓸어 만진 손바닥에 카밀의 정액이 진득하게 묻었다. 그를 아랑곳하지 않은 록시아스는 홀린 듯 이어 카밀의 팔뚝을 주물렀고, 완전히 성숙한 남성성을 대변하듯 울대가 크게 불거진 목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히듯 매만졌다. 그러는 동안 카밀의 울대가 몇 번이고 울컥거렸다.

목을 타고 올라간 손가락이 턱으로 넘어왔고, 입가를 맴돌았다. 카밀이 말했다.

“록시, 제가 뭘 잘못했어요…?”

이렇듯 야릇한 손길로 록시아스가 만져 주기를 질리도록 바랐으나, 상상에 그칠 것이라 단념했던 카밀에게 지금 상황은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당황스러웠다. 황홀한 손길이 벌처럼 느껴졌다. 이러다가 별안간 뺨이라도 맞을 것 같았다.

이마 끝에서부터 턱 끝까지, 록시아스는 카밀의 얼굴선을 손끝으로 조용히 덧그릴 뿐이었다. 그리고 입가로 되돌아온 손가락이 카밀의 입술 사이를 벌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카밀은 하마터면 치아를 다물 뻔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고, 입술은 더욱 벌어졌다. 두 손가락이 혀를 감는다. 정액 묻은 살갗을 지났던 손가락은 맛이 썼다.

뒤늦게 록시아스가 말했다.

“그냥… 만지고 싶어서.”

혼잣말 같기도, 자신 없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변명 같기도 했다.

카밀이 어떠한 말로 대꾸하기 전에 록시아스는 두 손가락을 겹쳐 카밀의 혓바닥을 꾹 눌렀다. 셔츠 위로 빼꼼히 드러난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잡혔다. 혓바닥이 꿈틀거렸다. 더욱 벌어진 카밀의 입가로 타액이 비쳤다. 목울대는 이전 목이 직접 만져질 때보다 격렬하게 울컥댔다.

이미 사정을 한 번 마친 두 성기는 수음이 없었던 일인 양 꼿꼿하게 일어섰다.

그만둬야… 그만….

록시아스를 말려 세우는 생각이 허공에 나부끼는 먼지처럼 머릿속을 맴돌다가 스러졌다.

갑작스레 목을 세운 카밀이 혓바닥을 희롱하는 록시아스의 손가락을 핥기 시작했다. 록시아스는 저도 모르게 독풀에 손을 댄 양 카밀의 입 속에서 손가락을 쑥 빼냈다. 낮게 뜬 카밀의 어깨를 눌러 도로 바닥에 붙어 있도록 했다.

“가만히… 있어, 착하지.”

카밀을 가만히 뉘어 놓고 무엇을 하려고?

록시아스는 자신에게 물었다.

록시아스는 누군가의 의도하에 출생하지 않고 어느 날 불현듯 모체 없이 탄생했다. 검은 숲을 정복하기 위해 찾아온 탐험대를 본능적으로 먹어 치우고 계획 없이 민가로 내려갔다. 마을과 나라를 건너고 건너다가 우연히 만난 수도사에게 글과 세상사를 배웠다. 이후로는 파도에 실린 부표처럼 정처 없이 떠돌며 어떠한 입장에도 정착하지 않고 흘러가는 존재로 살았다.

그러하던 록시아스는 죽기 위해 난생처음 계획을 세웠다. 계획에 따라 자살을 수만 번 기도했으며, 계획에 따라 인재를 찾아 나섰고, 계획에 따라 카밀을 입양했으며, 계획에 따라 카밀을 양육했고, 계획에 따라 카밀을 흡혈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본디 어떠한 목적으로 인해 창조되지도 않았으며, 어떠한 의도에 의해 삶을 영위한 적도 없고, 뜻깊은 의미에 속박되어 본 적도 없는 록시아스에게 계획이란 사치였을지도 몰랐다.

계획에 따라 수만 번 기도했던 자살은 모두 실패했으며, 계획에 따라 찾아 나선 인재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을 타기 전까지 가냘프고 멍청했고, 계획에 따라 강인하고 완벽한 흡혈귀로 키워 놓았더니 자신의 피가 아니면 마시지도 않았으며, 자신 또한 그의 피가 아니면 배를 채우지 못하게 되었다.

오만했다. 계획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다며 착각했다. 돌아보니 온통 어그러진 길만 밟아 걷고 있었다. 카밀과 나란히 걷기 시작한 즈음부터.

어떠한 피든 무작위로 취하던 혀는 이제 카밀만을 갈구했다. 무지를 고상함으로 착각하며 비웃었던 욕정을 카밀로 인해 깨우쳤다. 마시지 않겠다며 다짐했으나 마셨고, 내보이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었으나 내보였고, 만지지 않겠다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으나 만졌다.

전부 계획에 없었다.

카밀과 엮이면 계획보다 충동을 택하게 되었고, 이성보다 본성을 앞세우게 되었다.

카밀을 가만히 뉘어 놓고 무엇을 하려고?

무엇을 할지 정해 놓아서 무엇을 할까.

어차피 카밀에게 휩쓸려 움직일 텐데.

록시아스는 자신 밑에서 얌전히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는 카밀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두려움! 성적 욕망만큼이나 록시아스와 친밀해질 리 없는 감정이었다. 이 순간조차도 카밀은 록시아스가 건설한 의지와 자존심을 함락시키고 있었다. 그것들이 무너져 공터가 된 자리에는 불가사의한 감정과 갖가지 의문, 그리고 원초적인 욕구가 새로이 구축되었다.

자신이 손길을 내어 주자마자 아래를 세우는 카밀을 더 만지고 싶었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오른쪽 어깨를 눌렀고, 카밀의 왼뺨을 감쌌다.

“네가….”

어깨에 놓인 손을 팔뚝을 따라 미끄러뜨렸다. 뺨을 감싼 손을 올려 금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나를 어떻게 하기 전에.”

팔뚝에서 떨어져 손등을 갉듯이 지난 손이 카밀의 허벅지로 옮겨졌다. 금발 머리칼을 마음껏 헤집은 손은 귓바퀴를 돌고 내려와 바닥을 짚었다.

피하는 순간 쫓기는 처지에 놓인다. 록시아스는 더는 쫓기기 싫었다. 카밀에게 붙잡히기 싫었다. 자신이 사냥하는 쪽이어야만 용납되었다. 쫓기다가 결국 무릎을 꿇은 채 정과 자비를 구걸하며 종래 먹히는 쪽은 상대여야만 했다.

“내가 먼저 할 거야.”

카밀을 더 만지고 싶었고, 자신을 더 만족시키고 싶었다. 방치하지 않고, 도망치지도 말고.

록시아스가 내뿜는 생소한 기색을 피부로 전해 받은 카밀은 당장 천 쪼가리를 걷어 올리고 록시아스의 표정을 감상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록시… 잠깐.”

그러나 이어지는 록시아스의 행동에 카밀은 ‘록시를 봐도 돼요?’라고 감히 물을 수 없었다. 아무런 단어도 발음할 수 없었다. 머리가 비었다. 어둠만 읽히던 시야가 하얗게 셌다. 소름이 온 살갗을 타고 돋아났다. 등줄기가, 온몸이 식었다. 육체며 정신이 세상과 함께 알알이 부서져 날아갔다.

록시아스에게 붙잡힌 성기만 빼고.

록시아스가 자신을 만질 때는 별안간 뺨이라도 맞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한데… 뺨을 종일 맞아도 이보다는 덜 자극적이겠다.

그는 록시아스를 둘러싼 견고한 벽을 무너트리고자 고군분투했다. 드디어 그 수많고 광활하며 높았던 벽들이 산산이 조각난 현재, 카밀은 결코 풀어낼 수 없는 난제를 앞둔 학자처럼 무력감과 공포에 뒤덮였다. 성취감에 도취되는 것은 온전히 제힘으로 목적을 이룩할 때였다. 함락하려 쉬지 않고 칼집을 내었고, 겨우 울타리 몇 개를 부순 뒤였는데, 대뜸 천재지변이 일어나 모조리 작살났다.

카밀은 자신이 록시아스에게 태풍이며 파도 같은 존재이길 꿈꿨다. 록시아스를 자신의 회오리 안으로 끌어들여 제 품으로 떠밀고 가두길 바랐다. 애초 순서가 바뀐 소망이었다. 태풍이며 파도는 록시아스 자체였다. 이끌고 휘두르는 것은 록시아스의 몫이었다. 카밀 자신은 한낱 풀 한 포기였다. 산들바람에 뽑혀 나부끼면서 제가 바람 그 자체라 착각한, 교만한.

카밀의 허벅지 밖으로 무릎을 괸 채 허벅지를 세워 앉은 록시아스는 카밀의 성기를 쥐어 위아래로 쓸어 내며, 카밀의 표정을 살폈다.

천 위로 자리 잡은 금빛 눈썹이 구겨진 채 꿈틀거렸다. 콧대가 워낙 높아 천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기에 실루엣조차 드러나지 않고 감춰진 두 눈은 깜빡이는지, 감긴 채로 눈알만 굴리는지 보이지 않았다. 항시 물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은 벌어졌다가, 더욱 벌어졌다가, 다물렸다가, 더욱 꾹 다물렸다가, 파르르 경련하며 다시금 벌어지기를 반복했다.

“아, 록시… 잠깐… 하아, 왜….”

헐떡거리며 신음 사이사이에 단어를 끼워 넣어 흘렸다.

“갑자기, 하, 왜… 왜 이래요?”

열렬하게 갈망하던 때는 언제고, 왜 이러느냐며 따졌다.

록시아스는 되물었다.

“왜, 싫어?”

그에 카밀은 입술을 말아 물며 고개를 휘적거렸다. 고개가 제자리로 돌아오자 다시 입술을 열었다.

“너무, 아, 너무….”

머리 꼭대기로 기어오르며 꼬박꼬박 말대꾸하던 건방진 개새끼는 어디로 갔을지. 카밀은 말을 더듬으며, 그 말간 눈을 가린 천을 적셨다.

“너무 좋아요….”

선액을 흘리며 록시아스의 손바닥을 적셨다. 속수무책으로 흥분을 강요당하며, 좋아요, 록시, 좋아요, 더듬더듬 순종을 읊조렸다.

반항하던 카밀은 짓누르고 싶었고, 순종하는 카밀은 더욱 깔아뭉개고 싶었다. 록시아스는 기이한 정복욕을 체감하며 카밀의 것을 더 세게 쥐고 흔들었다. 손아귀에 눌린 성기가 감히 껄떡거렸다.

상상으로만 경험해 보았던 록시아스의 손길은 실지 겪으니 폭력 같았다. 카밀은 희열이 격해지면 고통으로 변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증된 쾌락이 쓰라렸다. 록시아스를 앞에 두고 홀로 하는 수음은 스스로 시작과 끝을 정할 수 있었으나 록시아스에게 수음 당하는 통에는 치밀어오르는 절정을 견딜 방법을 고를 수 없었다.

“죽을 것 같… 아!”

엄살이 아니었다. 당장 혼절할 것만 같았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카밀은 이미 가려진 눈을 거듭 구겨 감았다. 그래도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뇌가 타들어 가다 기어이 머리가,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등허리가 꼿꼿이 굳었다. 손가락 발가락이 곱아 들었다.

카밀은 그저 이마와 목에 핏대를 세우며 턱을 한껏 치켜들었다. 입술이 벌어졌으나 단 한 숨의 호흡조차 토해 내지 못했다. 뱉어 낼 만한 것은 죄다 아래로 쏠렸다. 모든 체온이 뭉쳐 만들어진 열기와 록시아스에게 마음을 침잠 당하는 동안 피부 아래로 가득 차올랐던 물기가, 전부 섞여 터져 나왔다.

카밀이 쏟아 낸 정액이 록시아스의 손등을 뒤덮었다. 손짓을 멈춘 록시아스는 미간을 왈칵, 구겼다.

“카밀아.”

“하아, 하아….”

카밀은 뭍에 끌어 올려진 어류처럼 급하게 씨근덕거리느라 대꾸하지 못했다.

“누가 멋대로 쏟으래.”

엄격하게 뇌까린 록시아스는, 실컷 사정하고도 남은 정액을 찔끔찔끔 뱉으며 껄떡거리는 성기를 우악스레 쥐었다.

“죄, 아, 죄송해요….”

참을 도리가 없는 본능적인 분출이었으나, 카밀은 마치 죄를 지은 자처럼 자진하여 사죄했다. 그리고 매서운 악력으로 통제당하는 성기를 다시금 세웠다. 록시아스는 식을 틈도 없이 도로 발기한 성기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가, 뇌까렸다.

“끝도 없네.”

“…….”

카밀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에 팔뚝을 올리며 숨을 골랐다가, 바닥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록시아스는 그를 바라보며 카밀의 앞섶을 놓았다. 단단히 일어선 성기가 튕겨 나가듯 록시아스의 손바닥에서 벗어나며 카밀의 복부와 딱 달라붙었다.

오르가슴에 따라붙어 찾아온 광선이 시야를 스치자 또다시 암흑뿐이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희롱당하는 동안 혓바닥 아래 잔뜩 고였던 타액을 삼키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곧이어 손끝이 록시아스의 구두 앞코에 닿았다.

“…록시.”

수줍음을 매단 음성이 카밀의 입술과 록시아스의 다리 사이로 퍼졌다.

“발목, 만져도 돼요?”

눈물 자국이 동그랗게 찍힌 셔츠를 풀어 줄까, 하고 일순 고민하던 록시아스는 ‘나중에’라는 결론을 내리며 대답했다.

“응, 만져.”

길쭉한 손가락이 잽싸게 구둣발을 지나 기어 올라왔다. 발목이 덥석 잡혔다. 그리고 록시아스는 카밀을 나무랄 자격도 없이 선액을 흘리는 자신의 성기를 잡았다. 카밀의 체액으로 흠뻑 젖은 손으로 찰나 기둥을 쓸어 만졌다. 질척, 질고 축축한 소리가 났다.

차단당한 시야를 대신하여 청각과 촉각을 곤두세운 카밀은 그 질척한 소음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록시아스의 복사뼈를 검지로 둥글려 만지며, 위를 향해 턱을 치키고는 말했다. 구걸하는 어조로.

“저를 써 주세요, 록시.”

“…하.”

“손이나, 입이요.”

복사뼈를 지분거리던 손이 발목을 완전히 둘러 잡는가 싶더니 바짓단 아래로 들어와 종아리를 쓸었다.

“록시 마음에 들게 노력할게요. 입은 자신 없지만….”

록시아스는 저를 쓰라 발칙하게 제안하는 카밀의 턱을 쥐었다.

“그럴까?”

카밀은 턱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 불명확한 발음으로 이어 말했다.

“네, 열심히 할게요.”

찍어 누르자마자 고분고분해진 카밀이 깜찍했다. 진즉 이럴걸. 아무것도 봐주지 말고, 피하지 말고 이랬어야 했다.

록시아스는 순종을 다시 배운 카밀의 금발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에 이마를 비비며, 카밀은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록시 거니까, 록시 뜻대로 써요… 깨끗하게 쓰든 더럽게 쓰든.”

카밀은 말꼬리가 막 지난 입술을 벌렸다. 록시아스가 금발에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관자놀이를 지난 손가락이 카밀의 눈자위를 덮은 셔츠에 걸렸다. 끌어 내렸다. 매듭이 풀린 셔츠가 콧잔등을 타고 떨어졌다.

드디어 시야를 돌려받은 카밀은 록시아스를 또렷이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허벅지에 얹힌 셔츠를 구겨 잡았고 그것을 옆으로 팽개치며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기울였다. 앞섶을 붙여 오는 록시아스의 골반께에 광대를 붙였다. 잠시 옆얼굴을 느릿하게 비비적거렸고, 혀를 꺼냈다. 열 오른 기둥에 혀끝이 닿았다. 그대로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록시아스가 금발에 다섯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새카만 속눈썹을 흔들었다.

“아….”

잠시 놓았던 발목을 재차 움킨 카밀은 선단 끝까지 기어 올라간 혀끝을 지나온 길을 따라 그대로 내려갔다. 뿌리로 당도하자 혓바닥을 넓게 펼친 채 고개를 좌우로 기울이며 기둥 전체를 모조리 핥아 적셨다. 이윽고 혀를 거두고 나서는 입술을 모아 귀두에 붙였다.

록시아스는 어서 시작하라며 부추기는 듯이 카밀의 머리채를 구겨 잡았다. 그에 카밀은 즉시 입술을 열고 귀두를 머금었다. 입술을 모아 조이되, 살갗이 송곳니에 스치지 않도록 주의하며 느릿하게 성기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아….”

성기를 삼키고는 볼이 홀쭉해진 카밀을 내려다보던 록시아스가 허리를 굽히며 신음했다. 기둥에 붙은 혀가 미약하게만 꿈틀거려도, 쌀 것 같았다.

“…….”

아직 전체가 입 속에 담기지 않았다. 한데 카밀의 입 속은 생각보다 좁았고, 록시아스의 것은 카밀의 것보다 크진 않았지만 어쨌든 컸다. 남들 것을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마는. 여하튼 전부 넣어 빨기 위해서는… 식도까지 들어갈 텐데?

카밀은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눈동자를 치켜 록시아스를 보았다. 록시아스는 눈을 감고 아랫입술을 물고 있었다. 그에게 붙들린 머리채가 더욱 당겨졌다.

하기야 여태까지 록시아스가 보였던 기색을 봐서는 그 또한 어찌해야 할지 모를 것 같았다. 카밀은 일단 록시아스의 성기를 모조리 머금을 요량으로 혓바닥을 아래로 붙이며 턱을 최대로 벌렸다.

목구멍 아래까지 넣어야 한다면, 목구멍 아래까지 넣으면 되었다. 카밀은 혓바닥 안쪽을 누르는 묵직한 선단을 더욱 깊숙이, 억지로 밀어 넣었다.

“하, 카밀….”

“읏….”

실패했다. 입구까지만이라도 도달하였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목구멍이 아팠다. 혓바닥이 있는 대로 눌려 구역질이 올라왔다. 눈물이 삐져나왔다. 그러나 카밀은 아무리 힘겨워도 록시아스의 성기를 뱉어 내지 않았다.

거듭 시도했다. 그러는 동안 록시아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흐, 흐으…’ 같은 신음을 흘리며 간혹 허리를 꼴 뿐이었다. 머리채를 점점 더 세게 쥐고 머리칼을 통째로 뽑을 듯 당기면서.

세 번째 시도를 끝으로 속눈썹에 눈물방울을 대롱대롱 매달았다가 결국 뺨에 눈물 자국을 낸 카밀은 록시아스의 왼쪽 발목과 오른쪽 허벅지를 부여잡으며 결심했다.

목구멍이야 찢어지기밖에 안 하겠지. 또한 찢어진들 금세 나을 거다.

끝까지 밀어 넣어 록시아스의 전부를 삼킬 것이다.

음식이든 피든 지나가라고 뚫린 길이니 성기라고 못 넣을 리 없었다. 카밀은 고개 각도를 약간씩 틀며 선단으로 목 입구를 눌러 넓혔다.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지고 인후가 쓰라렸으나 그따위 장애물들은 가벼이 무시하며 구겨 넣듯 삼켰다. 드디어, 삼켰다. 천천히….

“흣…!”

좁은 입구에 걸쳐진 귀두가 이윽고 빨려 들어가듯 목구멍으로 들어섰고, 그러자마자 록시아스가 다문 잇새 뒤로 기함을 쳤다.

“어떻, 아, 하아….”

어떻게 그걸 목구멍 속까지 처넣을 수 있어!

상상도 못 했다. 제 입을 쓰라던 카밀에게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고 앞섶을 내어 주었던 때 록시아스는 그저 카밀이 그 예쁜 입술로 남근 앞머리만 사탕 녹이듯이 쪽쪽 빨다가 말 것이라고 예상했다.

제 머리채를 쥐는 손길이 거칠어질수록 만족을 느끼던 카밀은 종래 성기를 목젖까지 넣자마자 스르르 풀리는 록시아스의 아귀힘에 최상의 뿌듯함을 얻었다. 식도가 아리고 숨이 막혀 머리가 핑 돌았으나 기분은 최고였다.

자신은 록시아스의 성기를 입술에 문 첫 번째 존재였다. 록시아스의 성기를 내장까지 품은 첫 번째 수혜자였다. 아마도, 아니, 확실히.

“하, 흐.”

인후가 바짝 수축하며 기둥을 압박했다. 록시아스는 치밀어 오르는 사정감을 꾸역꾸역 차단했다.

상반된 감정이 록시아스의 머리맡에서 뒤엉켰다.

‘저는 록시 거니까, 록시 뜻대로 써요…. 깨끗하게 쓰든 더럽게 쓰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성장한 카밀에게 ‘이만 됐어’라고 이르며 그의 입 안에서 성기를 거두고 침으로 더럽혀진 입가를 닦아 깨끗하게 보존할까. 아니면, 미끈한 식도가 퉁퉁 부어오르도록 허리를 놀려 함부로 헤집고 나서 그 속에 정액을 잔뜩 발라 더럽힐까.

록시아스가 결정하기 전이었다. 이미 결단을 마쳤던 카밀이 먼저 움직였다.

카밀은 시선을 높여 록시아스의 얼굴에 고정한 채로 고개를 앞뒤로 흔들기 시작했다. 입 안을 가득 채운 성기에 여유 공간을 빼앗긴 혀를 어떻게든 달싹이며 기둥을 할짝거렸다. 같은 때, 록시아스의 발목을 거머쥐었던 손을 자신의 아랫배로 가져갔다. 고갯짓을 지속하며 수음했다.

여태껏 카밀은 ‘열심히 한다’고 약속했을 때 게으름 피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구음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카밀은 첫 번째 경험이 거북하고 힘에 부칠 만한데도 잠시 멈추는 둥 요령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록시아스의 음경을 빨았다.

머리를 쓰는 부분에서건 육체를 쓰는 부분에서건 상관없이 무엇이든 빠르게 배우는 카밀은 금세 수음하는 속도에 맞춰 고갯짓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저런 요령도 터득했다. 록시아스의 반응을 살피며 식도를 잔뜩 조이기도 하였고, 기둥에 불거진 핏대를 간지럽히듯 혀끝으로 훑기도 했다. 힘주어 모은 입술은 절대 한만해지지 않고 성실히 뿌리 부근을 압박했다.

“하아, 아, 그렇게….”

록시아스는 카밀을 오롯이 곱게 보존해 둘지, 혹은 거칠게 다룰지를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남근에 선사되는 갖가지 자극에만 몰입했다. 열심히 한다더니, 카밀은 정말이지 훌륭했다. 뛰어났다. 타고났다.

“거기, 읏….”

백 년 정도 전이었나. 아가리만 열면 구열질 나는 음담패설을 지껄이던 놈이 있었다. 인간이었고, 나중에는 흡혈귀가 되었다. 물론 창조자는 록시아스 자신이었다. 어쩌다 그 한심한 놈을 동류로 만들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하간, 그놈이 했던 말이 있었는데.

‘입술이 예쁜 애들은 좆을 못 빨아. 입술이 왜 예쁘게? 좆 빠는 노력을 안 해 봐서 예쁜 거야. 그러니까 환장하게 빨아 주길 바라면 입술이 크고 못생긴 애를 고르라고.’

그놈이 씨불이던 헛소리는 그야말로 헛소리였다.

록시아스는 제 성기 크게 맞춰 벌어진 카밀의 입술을 찌푸린 눈으로 관찰하며 “하.”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말아 올렸다.

입술이 예쁜 카밀은 죽으라고 노력하는데 타고나기까지 해서… 좆을 심하게 잘 빨았다. 워낙 멍청한 놈이니 이미 죽었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그놈을 찾아가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흣, 카밀….”

분출을 억누르는 데 한계가 찾아왔다. 뒷덜미가 빳빳하게 굳으며 아랫배부터 발가락 끝까지 근육이 멋대로 수축했다. 아래서 누군가 잡아당기는 양 내려가는 눈꺼풀 사이로 금발 정수리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록시아스는 빛이란 빛은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도록 차단된 어둑한 공간에서도 산란하게 반짝이는 금발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얇은 머리칼을 휘젓는 손가락에 감돌던 간지러운 느낌이 손끝을 먹어 치우더니 손목을 타고 올라와 전신으로 퍼졌다.

“아읏…!”

파정했다.

“…….”

등허리를 반듯하게 세운 자세로 구음과 수음을 동시에 행하던 카밀 또한 이어 고갯짓을 멈추더니 구부린 어깨를 잘게 떨며 사정했다. 절정이 낳는 신음은 배 속에 가둬진 채 용해되었다. 아직 목울대 부근까지 꽉 들어차 있었다, 록시아스의 성기가.

점성 높은 액체가 이물감만 완연하던 식도를 적셨다. 카밀은 한껏 벌어져 좁아질 수 없는 상태인 목구멍을 구태여 울걱댔다. 록시아스가 뿌린 정액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제 내장을 타고 내려가도록, 자신에게 스미도록, 제 소유가 되도록.

록시아스의 야욕으로 제조된 액상이 송두리째 카밀에게 흡수되었다.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제 정액으로 범벅된 손을 말아 쥔 카밀은 은밀하게 생각했다.

내 일부도 록시아스의 내부를 타고 내려가 스민 뒤, 그의 차지가 되었으면.

***

고개를 잔뜩 떨어트린 채 간헐적으로 몸서리치던 록시아스는 사정감이 물러나고 탈력감이 찾아오자 어깨를 늘어뜨렸고, 카밀의 턱을 붙들고는 허리를 조심스레 물렸다. 소중하고 기특한 카밀의 목구멍이 다쳐서야 안 되니까.

인후 깊숙한 곳까지 들어차 내벽을 압박하던 성기가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울대를 울걱거리거나 혓바닥을 꿈틀거리던 카밀은 이내 입 속이 완전히 비워지자마자 컥컥거리며 기침했다. 이어서는 구음하는 동안 모자랐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벌겋게 달아올랐던 낯빛이 말간 색을 서서히 되찾아 입었다.

바지춤을 갈무리하지도 않은 록시아스는 먼저 카밀의 입가를 손등으로 쓸어 닦았다. 보기에는 짐짓 투박한 손길이었으나 록시아스답지 않게 다정한 행동이었다.

흡혈하다 묻은 피로 얼룩덜룩하며 구음하다 흘린 체액으로 번들거리던 입가가 그나마 말끔해졌다. 마지막으로 카밀의 입꼬리를 엄지로 문지른 뒤 허리를 세운 록시아스는 바지를 추켜올리며 일렀다.

“일어나.”

“어디 가요, 록시?”

“발목 놓고, 이제.”

마치 발목에 들러붙은 먼지를 털어 내듯이 발을 두어 번 휘적거린 록시아스는 여태 꿇어앉아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밀과 시선을 마주했다.

“일어나.”

버림받기 직전인 개조차 저만큼 애달픈 눈빛으로 주인에게 애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일어나라고 했을 뿐이다. 록시아스는 마치 제게 이별 통보라도 받은 양 눈꼬리를 서글프게 내린 카밀의 입술을 검지로 톡, 톡, 두드렸다.

“그럼 계속 그렇게 더러운 상태로 있든가.”

씻으라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카밀은 안광에서 물기를 거두었다.

드디어 손을 잡아 주는가 싶으면 도리어 멀리 도망쳐 버리던 록시아스가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찰나 우울해졌다. 일어나. 그 명령대로 일어나면, 록시아스는 가는 줄도 모르게 사라져서 몇 초 혹은 몇 분 아니면 몇 시간 그도 아니라면 며칠 동안, 영영 돌아오지 않을 듯했다….

“록시는요?”

저를 떨쳐 내려 휘적거리던 발목에 기어이 붙여 놓았던 손가락을 그제야 거둔 카밀은 물으며 다리를 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꿇어앉아 있던 터라 하체가 저릿했다.

“씻어야지.”

앞섶을 갈무리하던 카밀은 그 말에 바지춤을 대충 골반에 걸치고는 입을 열었다. 목청이 혹사당한 탓인가 뱉어지는 음성이 갈라져 있었다.

“같이 씻어요.”

그사이 욕실로 향하려 몸을 틀었던 록시아스가 카밀을 돌아보았다. 그는 된다 안 된다만 고르면 되는데 무엇을 고민하는지 눈동자를 올리며 입술을 몇 번 달싹인 후에야 대답을 툭 던졌다.

“그래, 그럼.”

크나큰 선물이라도 받은 양 활짝 웃은 카밀이 대답했다.

“네, 록시. 고마워요.”

굳은 핏물이 딱지처럼 앉은 카밀의 입가를 찰나 훑은 록시아스는 얼굴을 홱 돌리고 발걸음을 재개했다. 소리가 그를 뒤따랐다. 열기를 실컷 소모한 뒤에도 얌전해지지 않은 심장 박동과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발랄한 발소리였다.

***

욕실 문을 닫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록시아스는 복도 벽이 그대로 노출된 문을 바라보며 하의를 내렸다. 그 옆에 선 카밀은 욕조 마개를 덮은 후 수도꼭지를 틀고 나서야 옷을 벗었다.

탈의를 먼저 마친 록시아스는 샤워 부스로 들어섰다.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몸을 적시기 전, 샤워 부스 유리 너머로 카밀을 흘겼다. 허리를 굽힌 카밀이 바지 구멍에서 발을 왼쪽 오른쪽 차례로 꺼냈다. 이어 허리를 곧게 세운 뒤에 바지를 곱게 접어 세면대에 걸쳐 놓았고, 록시아스가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은 하의와 속옷도 집어 올려 둔다.

거기까지 관조한 록시아스는 뜨거운 물을 틀었다. 샤워 부스 안으로 대번 홧홧한 수증기가 차오르며 유리 벽에 김이 어렸다. 그 너머, 광활한 등에 그려진 섬세한 근육이 흐릿해졌다. 눈을 감았다. 정수리를 때린 물줄기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이윽고 전신이 젖었다. 카밀의 피와 체액, 그리고 그 자신의 체액이 씻겼다.

간단한 샤워를 마친 후 부스 문을 젖히고 나와 타일 바닥을 디딘 록시아스와 욕조에 앞에 멀뚱히 서서 샤워할 차례를 기다리던 카밀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필연적으로 상대의 이목구비를 덧그리고 나서 발끝까지 진득하게 훑으며 하락했다. 젖은 몸도 젖지 않은 몸도 모두 나체였다.

카밀이 입을 뗐다.

“씻을게요.”

록시아스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기만 하고 카밀의 근처로 갔다. 정확히는 카밀 뒤 욕조를 향해서였다. 카밀 또한 샤워 부스로 향하기 위해 바닥을 밟았고, 록시아스의 옆을 스쳤다.

샤워하는 사이 욕조 물이 절반 정도 채워졌다. 록시아스는 수도를 잠갔다. 평소 목욕할 때 받아 놓는 양보다 적었으나, 두 사람이 들어가면 수면이 넘칠 듯했으므로 이미 충분했다.

오른발, 그리고 왼발을 담갔다. 이어서 록시아스는 무릎을 구부리며 전신을 물 밑으로 내렸다. 수면이 가슴팍 위까지 올라왔다. 욕조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뜨끈한 수온에 눈이 저절로 감겼다. 등 뒤로, 카밀이 샤워를 시작했는지 높은 곳에서부터 추락한 물살이 바닥을 치며 철썩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록시.”

잠들지 않는 존재이나, 반쯤 수면 상태에 잠겨 있었던 록시아스는 풀어진 눈꺼풀을 굼뜨게 들어 올렸다. 타일 바닥을 때리던 물소리는 언제 멎었을까. 추잡한 흔적 대신 물기만을 맨살에 묻힌 카밀이 욕조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갈까요?”

록시아스는 다리를 접어 욕조에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승낙의 말을 대신했다. 카밀이 기다렸다는 듯이 빈 공간에 발을 디뎠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록시아스가 예상했던 대로 수면이 급격히 높아지더니 일렁이던 물살이 욕조 밖으로 넘쳤다.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두 남자가 함께 두 다리 쭉 뻗고 앉기에 욕조는 비좁았다. 접었어도 자리를 차지하는 긴 다리가 신경 쓰이는지 괜스레 이리저리 옮기다가 발가락을 꼼지락거린 카밀이 물었다.

“불편하지 않아요?”

“나갈래?”

‘네가 더 불편하지 않으냐’라는 의미로 록시아스는 되물었다.

“아니요.”

즉시 고개를 휘저은 카밀은 무겁게 처져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말했다.

“제가 다리를 바깥쪽으로 피면, 록시가 제 위로 다리를 뻗을래요?”

두 남자의 시선은 곧 상아색이 일렁거리는 물로 떨어졌다. 이어 카밀이 더 물러날 공간도 없는데 욕조 벽에 등을 더욱 바짝 붙이려고 했을 때였다.

“아.”

소스라치게 놀란 듯 욕조 난간을 부여잡은 카밀이 기울였던 고개를 홱 올려 록시아스를 보았다. 록시아스에게 별안간 발목을 붙잡힌 뒤였다.

“네가 올려.”

그러더니 록시아스는 카밀의 양발을 제 허벅지 위에 두며 다리를 쭉 뻗었다. 그 과정에서 카밀이 어깨를 약하게 튕겼고, 오른발이 록시아스의 다리 사이로 떨어졌다. 신장이며 다리 길이가 평균을 훌쩍 상회하는 카밀의 발바닥이 록시아스의 중심에 닿았다.

“…록시.”

“…….”

카밀은 다리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짐짓 민망한 듯 공연히 발가락을 꿈틀거렸다.

“안… 무거워요?”

“안 무거워.”

록시아스는 카밀을 놀리듯이 입꼬리를 당기면서 가볍게 읊조렸다. 카밀의 귓불이 익었다. 수온이 뜨거운 탓은 아니리라. 재미있었다. 지켜보는 앞에서 수음을 하고는 손이나 입을 쓰라며 성기를 물었던 주제에 이제 와 발바닥에 좀 닿는다고 부끄러워하는 꼴이 가증스럽고 귀여웠다.

그러고 나서.

“시도 때도 없이….”

앞서 세 번을 사정하지 않았는가. 지치지도 않고 또다시 발기한 카밀의 성기를 알아차린 록시아스가 중얼거렸다. 카밀은 제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가 얼굴에 물을 끼얹어 닦았다.

또 그러고 나서.

“아직도 배고파서요.”

고갈되지 않는 것은 카밀뿐만 아니라 록시아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발바닥과 닿은 살갗이 단단해지고 있었다. 카밀은 자연스러운 움직임인 체하며 은근슬쩍 발을 놀렸다.

“피도 더 마시고 싶고, 록시도 더….”

“카밀아.”

“만지고 싶어서요.”

“등이나 닦아.”

마주 보며 자위했고, 목구멍까지 처넣어 해결했다. 더는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록시아스는 찰나 머릿속을 스치는 난잡한 지식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카밀에게 갈증과 욕정을 자극당하기는 한다. 인정한다. 인정하기에 오늘 카밀에게 이것저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미지의 영역은 금기 취급되기 일쑤였다.

무겁지 않다며 올려놓을 때는 언제이고 카밀의 다리를 치운 록시아스는 스펀지와 보디워시를 집어 카밀에게로 던졌다.

록시아스와 생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책으로나 접했던 외설적인 행위를 일순 머릿속으로 그린 카밀은 혹여 록시아스에게 들킬까 봐 표정을 굳히며, 제게 날아오는 스펀지와 보디워시를 받았다.

이어 록시아스는 등을 돌렸다. 구태여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스펀지에 보디워시를 덜어 내는 카밀의 맨살로 물이 튀었다.

스펀지를 주무르며 거품을 낸 카밀은, 아래를 빳빳하게 세우면서도 뻔뻔스레 금욕적인 기색을 자랑하는 이목구비 대신 시야에 들어선 늘씬한 등허리를 훑어보았다. 앞이 아름다우니 뒤태라고 다르지 않았다. 록시아스의 등은 검정 티끌조차 걷어 낸 하얀 대리석을 매끈하게 깎아 만든 듯했다. 그 위에 머무르다가 도르르 구르는 물방울은 진주 장식 같았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등에 스펀지를 가져다 대기 전, 가슴이 부풀 만큼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너무나 커다란 행운을 한 번에 소비했다. 더는 바라지 말고 상상하지도 말아야 하는데…. 그럴수록 실망하고 안달 날 테니까.

보기만 해도 아까운 등에 감히 스펀지를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록시아스가 목덜미를 떤 것은, 착각이겠지. 카밀은 수증기가 만연한 욕실에 있으면서도 마른 목을 넘기며 팔을 움직였다.

하얀 거품이 하얀 등에 덕지덕지 묻었다가 아래로 흘러내리며 수면에 섞이는 광경, 뒤에서 보니 유독 길어 보이는 목덜미에 툭 돋아난 뼈, 록시아스의 어깨 너머 욕조 난간에 걸린 다섯 손가락 등을 감상하며 카밀은 물었다.

“등 닦아 주는 거, 제가 처음이에요?”

알면서도.

묻는 카밀이 뻔했다. 록시아스는 욕조 난간에 팔을 얹고는 그 위로 턱을 내리며 툭 내뱉었다.

“어.”

자세가 바뀌며 곡선으로 구부러지는 등허리 모양을 바라보던 카밀은 미소를 지으며 스펀지를 허리 중 가장 잘록한 부분으로 미끄러트렸다.

“행복해요.”

“잘됐네.”

“…앞으로 매일 닦게 해 주면 안 돼요?”

이윽고 록시아스는 더욱 깊숙이 수그려 엎드린 뒤 팔뚝에 뺨을 붙였다. 나른하게 풀어진 눈을 두어 번 깜빡거린 후에야 대꾸했다.

“그렇게 해.”

등을 부드럽게 닦던 손을 멈췄다. 카밀은 또 물었다.

“오늘처럼요?”

종래 눈을 감은 록시아스는 중얼거리듯 대답을 흘렸다.

“…응.”

카밀은 또 물었다.

“식사하고, 다른 것도 한 다음에요?”

편안하게 풀어져 있었던 록시아스의 미간이 세로로 좁혀졌다.

“네? 록시. 오늘처럼?”

“카밀아, 등이나 잘 닦아.”

“…….”

“잘 닦으면, 너도 닦아 줄게.”

“…정말요?”

카밀이 스펀지를 떨어트렸다.

“그래.”

“약속이에요.”

수면 위를 동동 떠다니던 스펀지를 다시 집어 든 카밀은 록시아스의 등을 마저 닦기 시작했다. 애초 닦을 필요도 없이 깨끗하기만 한 등이었다. 점 하나, 흉터 하나 없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지지 않은 등.

“…….”

아무도 본 적 없으며 무엇도 스친 적 없고 누구도 어루만져 본 적 없는 등을, 카밀은 열심히 닦았다. 그리고 쓰지 않는 팔을 올렸다. 손바닥을 폈다. 볼록 튀어나온 날개뼈를 덮었다… 록시아스는 침묵했다.

“…….”

손바닥은 이어 날개뼈를 벗어나 어깻죽지로 넘어갔다. 록시아스는 침묵했다. 목이 올라가는 부근을 엄지손가락이 훑었다. 록시아스는 침묵했다. 앞면으로 넘어간 손끝이 빗장뼈에 닿았다. 록시아스는 침묵했다.

“록시.”

카밀은 스펀지를 또다시 빠트려 버렸다. 거품만 쥔 빈손을 수면 아래로 내렸다. 손가락으로 허리선을 덧그렸다. 골반에서 멈췄다가, 앞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손목이 허벅지를 지났다. 록시아스는 침묵했다.

“인제 그만 닦아도 될 것 같아요.”

다시 닦기 시작한 지 십 분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록시아스는 침묵했다.

“록시는….”

록시아스는 제 뒤에 찰싹 들러붙는 살갗을 느꼈다, 등을 누르는 무게를 느꼈다, 그러나 계속해서 침묵했다.

“저 닦아 주지 말고 다른 거 해요.”

“…….”

“매일 오늘처럼 할 거면, 바꾸는 게 낫겠어요. 등 닦아 주는 거 말고 다른 거로요.”

카밀은 록시아스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였고, 열렬한 호흡에 절인 저음으로 속삭였다.

오늘 너무나 커다란 행운을 한 번에 소비했다. 더는 바라지 말고 상상하지도 말아야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안달 날 대로 안달 났다. 연속적인 허락으로 인내심이 허물어진 지 오래였다.

“…….”

그리고 록시아스는 침묵했다.

금기 취급된 미지의 영역은 본래 암묵적으로 행해지는 법이었다.

***

허리춤을 간지럽히며 넘어와 자신의 성기를 감싸는 손을 겹쳐 잡으며 록시아스는 찰나 과거를 회상했다.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이가 반나절 멈추지 않고 지르던 비명을 멈췄다.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제 탄생을 세상에 선포하듯 내지르는 울음소리였다.

탯줄을 자른 산파가 핏덩이 같은 아이를 깨끗한 물로 씻겼다. 수도사는 식은땀에 절은 산모의 손을 쥐며 기도했다.

고통스러운 잉태를 해낸 이와 당신의 땅에서 숨 쉬며 살아갈 아이에게 축복의 광영을 비추소서… 아멘.

출산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록시아스는 그렇게 생명이 나는 법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게 될 생명이 태초 어떻게 생기는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으니 궁금했다. 당연하게도 수도사에게 물었다.

‘수도사. 아기는 어떻게 생겨?’

수도사는 항시 록시아스에게 과학적 사실보다는 신화적 유래를 가르쳤다.

‘아기는 신께서 내려 주신단다.’

‘그렇구나.’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신이 아기를 내려 줄 수도 있겠다. 하나 신이 내려 주는 아기를 배 속에 담기 위해서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또한 때로 그 일련의 과정은 잉태가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행해지기도 했다.

어둑한 밤, 박동 소리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장소를 찾았더니 매음굴이었다. 그곳에서 록시아스는 수도사의 가르침보다 현실적이며 노골적인 ‘사실’을 배웠다.

나체로 혹은 하의만 내린 채 붙어 뒹굴고 삼키고 흘리는 남자와 여자와 여자와 남자와 남자와… 등등.

“…….”

그때만큼 순진하지 않다. 그렇다고 때 묻지도 않았다.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했으며 동시에 다름이 없었다. 세속을 겪을 만큼 겪은 존재였으나 검은 숲의 산물로서 딱딱한 껍질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오늘 그 껍데기를 깬다.

록시아스는 눈을 감고 고개를 젖혔다. 뒤통수를 카밀의 어깨에 기댔다. 카밀에게 등을 맡기고, 수중에서 자신을 애무하는 손길에 온 감각을 맡겼다.

무엇 때문에 억눌러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보았던 매음굴 풍경은 떠올리고자 하면 아직도 선연한데, 불과 몇 달 며칠 전 자신을 자제하도록 했던 께름칙한 감정은 아득했다.

아마도…. 무지하던 시절만큼 순진하지 않았으나, 세월이 이만큼 지나도록 때 묻지 않았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 같다. 마치 마차에서 내려가 본 적 없는 귀족이 흙바닥을 밟기 무서워하는 것처럼. 손톱만 한 티끌이라도 묻을세라 몸을 사렸다. 조금이라도 거뭇한 흔적이 남으면 죽기라도 하듯이. 우스운 일이었다. 죽음을 위해 사는 주제에.

“아….”

카밀의 손길이 이전처럼 조심스럽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거칠게 만져졌다가 이어 물살이 보드랍게 문질러지니 금세 정신이 무르게 녹았다.

“하아… 아!”

소리가 나오는 대로 마음껏 뱉었다. 어차피 몸이 얼마큼 들끓는지 심장 박동으로 낱낱이 들키고 있었다. 구태여 숨기는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등허리 아래로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록시아스는 등 뒤로 손을 뻗어 그것을 손가락으로 퉁겼다. 귓바퀴에 입술을 붙인 카밀이 뭉개진 호흡을 흘렸다.

시도 때도 없다며 카밀을 괄시했다. 무슨 자격으로? 먼저 시도 때도 없이 카밀의 피를 원했다. 기어이 욕망대로 소화하고 나서 또다시 욕심부린 것이 누구인가. 본능에 정신이고 육체고 죄 몰두한 야만스러운 짐승이 누구인가.

점점 세차게 흔들리는 카밀의 팔뚝에 물살 또한 거세게 일렁거렸다.

“이제, 읏…!”

욕조 난간을 꽈악 부여잡은 록시아스가 제 무게를 카밀에게 전부 실었다. 귓바퀴에 머무르던 카밀의 입술이 록시아스의 뺨에 더 가까워졌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옆얼굴에 콧대를 붙이며 소곤거렸다.

“록시 그 표정… 예뻐요.”

“하아, 으읏!.”

평소 표정이 많지 않으나 지금만큼은 눈썹을 한껏 휘고, 눈꺼풀을 떨고, 무심함이 어울리는 입술을 잔뜩 벌린 록시아스가 그의 성기를 쥔 카밀의 손을 덮었다. 파정했다. 그러나 카밀은 수음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를 말리기 위해 손목을 붙들었다. 미끄러졌다. 붙들었다. 또 미끄러졌다.

“그만… 카밀아, 그만, 아!”

두 다리를 모으며 카밀을 거듭 뿌리치려고 했다. 간지러운 등허리를 카밀의 배에 문댔다. 천치처럼 타액을 흘린 입술을 카밀의 목덜미에 붙였다. 그만, 그만….

“쌌어, 흐, 그만, 응?”

눈동자를 사선으로 내린 카밀은 제 목에 비비적거리는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손짓을 멈췄다.

“물속이라 몰랐어요… 미안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투명한 물결 속에서 구부렁거리는 진한 백색 액체를 보았다. 경련하는 록시아스를 알아차렸다. 손아귀에서 껄떡거리는 성기를 느꼈다.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록시아스의 표정이 너무 예뻐서, 마음껏 허물어진 록시아스를 보는 게 좋아서 멈추기 싫었다.

“힘들어요?”

카밀에게 기댄 채 받기만 했는데 무엇이 힘들까. 록시아스는 밭은 숨을 내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몸을 뒤집었다. 카밀의 가슴팍에 손을 올려 눌렀다. 크게 흔들린 물살이 사방으로 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카밀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가 욕조에 등을 붙였다. 그 위에 올라앉은 록시아스에게서 뚝뚝 흐르는 물기가 카밀을 도로 적셨다.

“너도 받아야지.”

주면 받는다. 거절할 리 없고 거부권을 갖지도 못한 카밀은 “해 주세요.” 록시아스를 받아들였다.

“하….”

그는 자신을 주무르는 록시아스의 들썩이는 어깨를 감쌌다. 다른 손은 흑발로 뻗었다. 젖어 축 처진 검은 머리칼 끄트머리에 맺힌 물방울이 카밀의 손끝으로 옮겨 왔다. 마디를 타고 흘렀다.

“아, 록시….”

“…머리카락 만져.”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속으로만 물은 말에 대꾸해 준다. 즉시 카밀은 손바닥으로 흑발 뒤통수를 덮었다. 구부린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사이로 들이쳤다.

“후….”

폐부 깊숙한 곳에서 끌어 올린 숨을 내쉰 카밀이 흑발을 실컷 어루만지던 손을 록시아스의 뺨으로 옮겼다.

“하아….”

앞서 사정한 여운이 여태 남은 탓인지, 아직도 카밀의 손에 그를 맡긴 것 같은 표정인 록시아스가 얼굴을 붙여 왔다. 카밀은 감싼 뺨을 엄지로 한 번 쓸었고, “록시.” 물었다.

“키스해도 돼요?”

입술은 벌써 가까웠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어깨에 올려 두었던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세워 슬쩍 기울였다. 그와 반대 방향으로 록시아스가 턱을 비스듬히 꺾었다. 열린 두 입술이 섣불리 상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애타게 벌어진 입술보다 코끝이 먼저 닿았고, 록시아스가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하나하나 허락받을 거야… 이제 애도 아니잖아.”

그에 카밀은 싱긋 웃었다. 한데 록시아스는 카밀이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신이 온통 젖은 탓이겠지…. 그리고 카밀에게 입술을, 숨을 빼앗겼다.

입 안으로 들어서는 말캉한 혀는 피에 젖어 있지 않았다. 흡혈을 빌미로 입술을 겹쳤던 때와 달랐다. 같기도 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이 타액뿐인데도 만족스러웠다.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자신을 사냥했던 상대의 송곳니를 혀끝으로 문질렀다. 괜찮아, 하고 어르는 듯이. 서로를 빨아당기려 안달 내던 두 사람의 키스는 의외로 상냥하게 이루어졌다.

록시아스는 카밀에게 해 주던 수음도 잊고 두 팔을 카밀의 가슴팍으로, 얼굴로 올렸다. 카밀에게 주고, 카밀에게 받는 혀 짓에만 몰두했다. 성기를 쥐고 흔드는 것보다 입술을 맞대고 숨을 나누는 것이… 더 황홀했다. 카밀에게 앞섶을 물리며 그의 목구멍에 체액을 쏟아 냈던 때보다 더 묵직하며 부드러운 정복감이 치밀어 올랐다. 짜릿했다. 첫 키스란 그랬다.

카밀은 상대가 눈을 감을 적에 함께 내렸던 눈꺼풀을 조심스레 올렸다. 록시아스는 내내 눈을 감은 채 자신의 혀를 껴안고 있었다. 치아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기쁘다. 또한 불안했다. 식사와 수음 혹은 구음은 욕망을 처리하기 위해 어쩔 도리 없이 허용한 셈 쳤다.

그러나 키스는 어째서? 록시아스의 앞섶을 물고 그의 정액을 모조리 삼켰던 때보다 행복하며 비참했다. 어째서? 그 질문이 카밀을 온전히 즐기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복잡했다. 첫 키스란 그랬다.

잠시 입술을 떨어트리고 모자란 숨을 몰아쉰 록시아스는 고개 방향을 바꾸어 다시금 카밀에게 키스했다. 같은 때, 카밀은 록시아스의 허리를 붙잡아 자신에게 가까워지도록 당겼다. 발기한 성기와 성기가 맞붙었다. 록시아스가 혀 짓을 멈췄다. 카밀이 굳은 혀를 혀로 감아올렸다. 키스가 다시 시작되었고, 록시아스가 허리를 뒤로 물리려고 할 때마다 카밀은 그러지 못하도록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키스하는 동안 줄곧 비벼지던 성기가 껄떡거리며 사정액을 흘렸다. 쥐어진 채 다급하게 애무 당하지 않으니 사정이 길었다.

“읍….”

허리를 꼬던 록시아스가 참지 못하고 얼굴을 뒤로 물렀다. 깊게 섞여 있던 혀가 입술 밖으로 나오며 딸려 간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카밀은 제 팔뚝 안에 록시아스를 가뒀다. 세게 껴안았다. 떨리는 복부와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맞붙었다. 록시아스의 뾰족한 코끝이 카밀의 어깻죽지를 눌렀다. 언제나 냉랭한 체온이 믿기지 않도록 뜨거운 입김이 카밀의 살갗에 스몄다.

“목욕물이 다 식었어요.”

록시아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듯이 입술을 내린 카밀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더워….”

“…….”

“더 목욕할 거예요? 록시.”

턱을 물리고 록시아스의 이마에 들러붙은 흑발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치우며 카밀이 물었다. 록시아스가 떨어트려 놓았던 시선을 올렸다.

“그러면 물을 다시 받을게요. 아니면….”

이마에서 미끄러진 손이 록시아스의 눈썹을 두어 번 살살 쓸었다가 내려간 뒤 뺨을 에워쌌다.

“목욕은 내일 다시 하고, 침대로 갈래요?”

“…침대로 가서?”

머릿속에 떠오른 ‘남은 일’이란 하나뿐이었으나 록시아스는 물었다. 카밀은 구부린 검지로 록시아스의 콧잔등을 쓸어 만지며 대답해 주었다.

“또 키스해요.”

그 속에 흐르는 피만큼이나 카밀의 저음은 달콤했다. 록시아스는 빈 입 속으로 혀를 굴렸다. 단맛이 느껴졌다.

“오래오래, 그만하고 싶어질 때까지 키스해요.”

카밀은 록시아스의 입술도 만졌다. 엄지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가 뗐다. 새빨간 살이 옅은 분홍빛으로 질렸다가 도로 혈색을 찾았다.

“우리, 시간 많잖아요.”

“우리… 그래, 그치.”

카밀이 머물다 간 아랫입술을 혀로 훑은 록시아스가 중얼거렸다.

“가진 건 시간밖에 없지….”

거짓말이었다. 시간을 무한히 가진 쪽은 카밀뿐이었다. 죽음을 바라는 록시아스 자신에게 시간이란 길고 지루하나 종래 끝날 소비재였다. 그러므로 마음이 급해졌다.

손을 잡은 채로 욕조를 벗어났다. 저택은 넓었다. 욕실과 침실을 잇는 기다란 복도를 지나는 동안 두 사람은 잡은 손을 놓치지 않았으며 중간중간 잠시 멈춰 입술을 나눴고, 차분해질 줄 모르는 숨을 공유했다.

***

내달리던 마음이 별안간 멎은 것은 침대에 몸을 던지고 나서 한참이나 키스하던 중, 위에 자리한 카밀이 록시아스의 무릎을 바깥으로 밀었을 때였다.

“잠, 깐.”

고개를 돌려 입술을 뗀 록시아스가 발바닥으로 카밀의 허벅지를 밀며 잠긴 목소리를 꺼냈다.

“카밀아.”

“네, 록….”

록시아스의 턱에 묻은 타액을 닦아 내며 카밀이 대꾸하던 중이었다. 록시아스가 별안간 카밀을 밀쳐 눕히고는 올라탔다. 카밀은 일순 눈을 동그랗게 뜨기야 했으나 곧 놀란 기색을 감쪽같이 감추고는 끊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록시.”

위에서 쏟아지는 불편한 눈빛에 카밀은 곧 협의해야 할 문제가 남았음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할까요?”

눈치 좋은 카밀은 즉시 록시아스의 의사를 물었다. 어떻게 할까. 섹스를 기대하는 두 사람은 같은 남성이었다. 실루엣은 다르나 육체에 달린 가짓수는 동일했다. 두 눈, 코 하나, 입술 하나, 두 귀, 두 팔다리, 그리고….

자연스레 짝을 짓도록 부합하는 성별이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결정해야 했다. 누가 어느 쪽을 맡을지.

카밀은 록시아스의 대답을 기다렸다. 록시아스와 결합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어느 쪽이냐는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 쪽이든 서로가 서로에게 새겨지는 것이므로.

록시아스는 두 가지 선택지를 머릿속으로 미리 실행해 보았다. 둘 다 녹록지 않았으나 결말은 달랐다. 첫 번째 선택지, 카밀로 하여금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카밀은 제가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카밀이 죽지 않을까?

흡혈귀와 성관계를 하다 명을 다한 인간이 몇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무리도 아니었다. 흡혈귀와 인간은 겉모양이 비슷하다 쳐도 피부 아래로 작동하는 힘은 맹수와 벌레만큼 차이가 났다. 지금 카밀이 흡혈귀라도 그랬다. 자신은 그 어떤 흡혈귀라도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 만큼 성숙한 흡혈귀였고, 카밀은 흡혈귀가 된 지 겨우 몇 주 지난 풋내기였다.

카밀이 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한번 시작하고 나면 카밀이 목숨을 보전할 만큼만 밀어붙일 자신이 없었다. 카밀과 관련한 욕구라면 유독 자제하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카밀이 그만하라며 울고 빌어도 자신만 좋다면 정신을 놓고 마음껏 해 버릴 것이 뻔했다. 소중한 카밀에게 그래서야….

그렇다면 두 번째 선택지가 안전했다. 여하간… 자신은 죽지는 않을 테니까. 고작 ‘그런다’고 죽을 거라면 애초 카밀을 데려다 키우지도 않았겠지.

“카밀아.”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친 카밀은 ‘아파도 괜찮으니까 록시 마음대로 해 주세요’라는 말을 목구멍 아래 대비해 놓았다. 그리고 방금 마음을 굳힌 록시아스가 말했다.

“아파도 괜….”

“이렇게 누워서 박을래, 아니면 엎드려서 박을래?”

‘…찮으니까 록시 마음대로 해 주세요’라는 말은 그대로 증발했다. 카밀은 말하다 말고 다물지도 못한 입술을 달싹거렸다가 이내 다물었다가 도로 열었고.

“키스하다가 박을래요.”

팔을 뻗어 록시아스의 얼굴을 감싸 끌어와 입을 맞췄다.

입술에만 키스하겠다고 한 적은 없다. 부드럽게 엮었던 혀를 풀어낸 카밀은 록시아스를 끌어당기며 몸을 모로 돌렸다. 자연스레 아래에 눕혀진 록시아스의 뺨과 턱에 차례로 입술을 내린 뒤에 밑으로 내려갔다.

울대가 연신 울걱거리는 목에 입을 맞추었고 혀로 핥았다. 가로로 길게 이어진 쇄골을 따라 혀끝을 미끄러트렸다. 맥박 소리가 가장 우렁찬 가슴팍에 콧방울을 붙였다가 떼며 미끈한 살결에 거듭 쪽, 쪽, 키스했다. 이어서는 만지기 전부터 꼿꼿이 선 유두를 입술로 물었다.

“아….”

성기만큼이나 존재 이유가 불명확했던 신체 부위가 바로 유두였다. 씻을 때조차 구태여 신경 쓴 적 없는 유두를 카밀이 빨아 당기자 대뜸 낯선 감각이 가슴 전체로 퍼졌다.

“하아… 이상, 해.”

“이상해요? 좋게 이상해요? 나빠요?”

제가 닿지 않은 곳이 없길 바랐기에 입술에 담았고 반대쪽은 손가락에 끼워 문질렀는데, 예상 밖으로 록시아스가 반응을 보이니 카밀은 물었다. 좋다면 더 하고, 나쁘다면 그만두고 다른 곳을 만질 참이었다.

“모르겠는데… 간지러워, 아!”

별안간 유두를 살짝 깨물고, 반대쪽은 손가락으로 슬쩍 꼬집는다. 아프지 않으나 비명이 튀어나왔다. 조금 놀라서, 웃음이 나오지는 않으나 간지러워서. 손가락 발가락이 조금 구부러질 만큼….

“간지러워요?”

“어, 응, 간지러워, 잠깐 그만….”

“네….”

대답만 잘해 놓고 카밀은 록시아스의 가슴팍에서 떠나지 않았다. 유두가 벌겋게 익을 때까지 집요하게 굴었다. 핥고 깨물다가 또 핥고 꼬집고 그러다가 입술에 담아 쭉 빨아 당기고는 달래듯이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더니 대뜸 쭉 잡아당겼다가 놓고 나서 손끝 사이에 넣고 살살 굴리기를 순서 없이 반복했다.

유두는 말할 것도 없고, 하얗기만 하던 가슴팍에 울긋불긋한 자국을 몇 개나 새긴 카밀은 그제야 족하다는 듯 아래로 내려갔다. 하나 회복력이 뛰어난 록시아스의 피부는 카밀이 남긴 상흔을 금세 지워 버렸다. 일순 눈동자를 치켜뜬 카밀은 도로 말끔해진 가슴팍을 보며 다음을 기약했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못하도록 물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랫배까지 내려간 카밀은 딱 한 번 해 보았으나 벌써 여러 번 경험이 있는 양 자연스레 록시아스의 성기를 핥았고, 감싸 물었다. 목을 세운 록시아스는 그런 카밀을 내려다보다가 끝에 가서는 매트리스에 뒤통수를 붙인 채 신음했다.

“아, 읏… 흐으…!”

록시아스가 파정하며 무릎을 세웠다. 카밀은 쏟아지는 정액을 입 안으로 모조리 받으며 록시아스의 허벅지 아래로 손을 넣었다.

정액을 삼키지 않고 혓바닥 아래 모아 놓은 카밀은 록시아스의 두 다리를 잡아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떨어질세라 양손으로 록시아스의 다리를 붙든 채로 상체를 일으켜 꿇어앉았다. 높게 들린 다리를 따라 허리가 붕 뜬 록시아스는 카밀을 쳐다보았다. 카밀 또한 록시아스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마주한 채로 카밀은 록시아스의 다리 한쪽에서 거둔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손바닥을 모았다. 입 안에 가득했던 정액을 그 위로 흘렸다. 그리고 말했다. 마지막 말미를 주는 것처럼.

“이제, 록시도 안 만져 본 데까지 다 만질 건데.”

꿀꺽. 록시아스가 목을 울렁댔다.

“싫으면 말해 주세요.”

록시아스는 물었다.

“싫다고 하면 그만둘 거야?”

카밀은 대답했다.

“아니요, 못 그만둘 거 같아요.”

록시아스는 말했다.

“그럼 그냥 해….”

카밀은 어깨에 올라간 왼쪽 다리에 입을 맞췄다. 시선은 내내 록시아스에게 머물러 있었다. 록시아스가 속눈썹 한 올만 움직인다고 하여도 놓치지 않고 볼 심산이었다. 모든 순간을 기억에 남길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정액으로 질척한 손을 록시아스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은밀한 부위를 찾는 손길에 록시아스의 눈동자가 찰나 산란했다. 카밀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무릎에 거듭 입술을 내렸다.

회음을 훑고 내려간 손가락이 탄탄한 둔부를 벌리며 입구를 찾았다. 손끝을 가져다 대었을 뿐인데 록시아스가 “아.” 얼굴을 붉히며 발가락을 구부렸다. 얼굴을 붉히며 발가락을 구부리다니, 록시아스와 어울리지 않은 반응이었고, 카밀이 꿈꾸던 반응이었다.

“손가락부터 넣을게요.”

카밀은 록시아스가 놀라지 않도록 하나하나 일러 주기로 결심했다. 록시아스는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물며 시트를 쥐었다. 입구를 누르던 중지가 이윽고 한 마디, 안으로 들어섰다.

“읏….”

겨우 손가락 한 마디였다. 그러나 록시아스는 즉시 지독한 이물감을 느꼈다. 카밀은 손가락을 조이는 압박감을 전해 받았다. 정말이지 겨우 손가락 한 마디. 카밀의 몸에서 머리카락만 빼면 가장 얇다고도 할 수 있는 신체 부위였다, 손가락이란.

벌써 버거우면 끝까지 갈 수는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카밀은 신중을 기울이기로 했다. 자신의 말마따나 남는 것이 시간이었다. 인내심은 닳았지만 참고 기다리는 것이 자신의 특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중지로 내벽을 누르며 동시에 손목을 느릿하게 돌렸다. 구멍이 움찔거렸다. 록시아스는 미간을 좁힌 채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앞니로 문 아랫입술은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더없이 상냥한 저음으로 읊조렸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아, 아직….”

“아직 손가락 하나밖에 안 들어갔어요.”

곧 검지가 중지 위로 포개지며 구멍 안으로 들어갔다. 정액 덕분에 미끄러지듯 넣을 수 있었다. 카밀은 내내 록시아스의 얼굴에서 뗄 줄 모르던 시선을 아주 순간만 구멍 쪽으로 옮겼다. 자신의 손가락 두 개를 머금은 분홍색 구멍이 뻐끔거리고 있었다. 미리 묻은 정액으로 번들거렸다.

“이제 손가락 두 개 넣었어요.”

“응… 하, 그래.”

“기분이 어때요? 록시.”

록시아스는 스스로 이마를 닦더니 그리 또렷하지 못한 발음으로 뇌까렸다.

“잘 모르겠는데….”

어느새 세 번째 손가락이 입구를 누르고 있었다. 록시아스는 잘 모르겠다고 한 것치고는 점점 낯빛이 상기되어 갔으며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다.

“아…!”

중지, 검지에 이어서 약지가 록시아스의 구멍 속으로 쏘옥 들어갔다. 눈을 잔뜩 찌푸린 록시아스는 아랫입술에 타액을 발랐다. 입술이 말랐다. 입 안도 말랐다. 허기나 갈증 탓은 아니었다. 긴장이 이유였다. 긴장… 그딴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나.

“하아… 몇 개 들어갔어?”

“세 개요. 아파요?”

“조금….”

“그래도 정액을 발라서 잘 들어간 것 같아요, 록시 정액이요. 내 입에 있었던 거.”

카밀은 손가락 세 개를 슬쩍 벌렸다. 즉각 록시아스가 이전보다 입술을 크게 벌리며 가슴을 들썩였다. 그의 손이 닿는 부근이라면 벌써 시트가 마구 구겨져 있었다.

“그렇게, 읏… 벌리지 마.”

“더 벌어질 건데….”

“아파, 응?”

“하지 말까요?”

“아니, 하고, 하는데… 아프게 하지 마.”

계속 말을 걸면 록시아스가 긴장을 덜지 않을까 싶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어째 구멍은 수축만 거듭할 뿐,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벽 안을 차분하게 문지르고 누르며 동시에 카밀은 반대편 손으로 록시아스의 복사뼈를 간지럽히는 듯이 만졌다. 여전히 무릎이나 종아리에 입술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중심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구멍을 살폈다.

오늘 안에 들어갈 수 있나? 찢어지지 않을까?

노파심이 짙어질수록 카밀의 손길은 저돌적으로 변해 갔다. 두 번째 마디까지만 들어섰던 손가락을 종래에 불쑥, 끝까지 집어넣었다. 록시아스는 턱을 세게 다물었다. 그리고 카밀이 손바닥을 위로 향하도록 뒤집고는 손가락을 구부린 때였다.

“흐으읏…!”

대뜸 록시아스가 허벅지를 모으며 허리를 튕겼다. 발기한 성기 끄트머리로 주륵, 선액이 흘렀다. 누가 억지로 짜낸 것처럼. 동시에 간헐적으로 뻐끔거리던 구멍이 경련하는 양 빠르게 수축과 이완을 일순 반복했다.

생소한 반응에 카밀은 다시 한번 손가락을 구부렸다. “아흐흑…!” 록시아스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미끈하게 이어지는 내벽의 안쪽, 움푹 들어갔다가 조금 더 깊숙한 곳에 도톰하게 올라온 부분이 눌린 뒤였다.

“록시, 아파요?”

“흐, 머, 뭐 했어?”

“그냥….”

말꼬리를 흐린 카밀은 또다시 같은 부분을 눌렀다.

“흐윽, 이상, 아…! 잠깐…!”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대신 록시아스와 매일 독서했던 카밀은 언젠가 읽었던 의학 서적의 내용을 떠올렸다. 해부학을 세밀하게 풀어낸 책이었으며, 당연히 생식기에 관한 정보도 자세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도 분명히 존재하는 국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으나 특정 행위에 퍽 쓸모 있는 국소. 록시아스는 그런 곳을 눌린 것이다.

“아, 그… 하으읏!”

반응을 끌어내는 부위를 반복하여 누르고 쓸었더니 록시아스가 눈가를 적시기 시작했다. 아래로는 선액을 얼마나 많이 쏟아 내는지 복부며 그 아래 시트까지 축축해질 지경이었다.

벌써 울면….

카밀은 일찍부터 눈물을 흘리는 록시아스에게 어쩐지 측은지심을 느꼈고, 인내를 멈춰도 될 때가 왔다고 직감했다.

“아으, 읏! 흐윽…!”

록시아스가 우는 소리를 내며 사정한 뒤였다. 이로써 몇 번째 사정일까? 카밀은 들썩거리는 배 위로 뿜어졌다가 뚝뚝 흘러내리는 진한 백탁액을 보며 생각했다. 하기야 몇 번 사정했건 중요하지 않았다. 록시아스가 좋아하면 그걸로 되었다. 같이 좋아하면 두 배로 좋겠고.

“흐….”

손가락을 빼내자 록시아스가 느른해진 눈으로 카밀 쪽을 보았다. 카밀은 손가락이 빠져나가자마자 아무것도 들인 적 없다는 듯이 단번에 수축한 구멍을 훑어보았고, 자신의 성기를 내려다보았고, 어깨에 걸친 다리를 시트로 한 쪽씩 조심스레 내린 뒤 록시아스의 위에 자리를 잡았다.

물이든 땀이든 간에 젖어 있는 흑색 앞머리를 쓸어 넘긴 카밀은 드러난 이마에 쪽, 키스했고 이어서 콧대와 뺨 그리고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록시아스는 상냥함을 충분히 받으며 크지도 못한 카밀이 어떻게 이리 살갑게 굴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기야, 카밀은 배우지 못해도 스스로 잘 깨우치는 편이었다. 여러모로.

록시아스를 빤히 내려다보던 카밀이 물었다.

“록시, 숨차요?”

“조금.”

“일 분만 기다릴게요. 록시가 숨 안 찰 때까지.”

록시아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카밀은 마치 제가 호흡이 부족한 것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한숨처럼 뱉으며 말했다.

“록시가 제대로 숨 쉴 때 키스하려고요.”

“지금 안 하고?”

“키스하면서 박기로 했잖아요.”

“아….”

“숨넘어가면 어떡해요.”

그리고 카밀은 침대맡에 걸린 시계로 눈을 돌렸다. 록시아스가 숨 쉴 수 있는 여유는 지금 40초 남았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왼쪽 무릎을 잡아 벌어지게 했고, 오른쪽 다리는 제 허리에 두르도록 했다. 30초 남았다. 록시아스의 복근 사이에 고인 정액을 앞서 그랬던 것과 같이 손가락으로 훔쳤다. 20초 남았다. 끈적한 손으로 제 성기를 문질렀다. 15초 남았다. 록시아스와 눈빛을 맞대고, 허리를 옮겨 제 성기를 입구에 맞췄다. 8초 남았다. 록시아스가 아랫입술을 물었다. 5초 남았다. 카밀은 고개를 숙였다. 3초 남았다. 입술이 붙었다. 열렸다. 1초. 혀가 섞였다. 약속했던 때. 허리를 밀었다.

“으읍…!”

“아…!”

얽힌 혀가 단번에 풀어지며 동시에 미간을 좁힌 두 사람이 뭉개진 신음을 뱉었다.

수월하게 들어가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입구에서부터 튕겨 나올 줄은 몰랐다. 록시아스는 퍽 놀란 양 속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그에 흑발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록시아스에게 제 입술을 물린 카밀은 아래로 제 성기를 붙들고 재차 삽입을 시도했다.

“카밀, 아, 흐읍…!”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준비하였으나 실상은 갑작스레 억지로 들어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는 창백해질 수도 없을 것 같았던 록시아스의 낯빛이 더욱 희게 질렸다. 카밀은 귓바퀴와 목덜미가 붉어졌다. 겨우 걸쳐 넣은 귀두를 끊어낼 듯 구멍이 지독하게 조여 댔다.

억지로 끝까지 들이친 후 움직이다 보면 제게 맞도록 넓어질 것이다, 라고 카밀은 일순 폭력적인 방법을 떠올렸으나 생각과는 반대로 허리를 가만히 고정했다. 애타는 욕구를 곧장 해결하지 못할수록 치밀어 오르는 폭력성을 혀로 노출했다. 키스가 거셌다.

록시아스는 카밀의 목덜미와 머리채를 붙들었다. 입가로 타액이 마구 샜다. 카밀에게 입 안을 틀어막히고 헤집어지고 동시에 아래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벌어져 괴로웠다. 숨을 고를 여유는 정말이지 없었다.

끝내 이루어 낸 록시아스와의 결합에 기뻐할 새가 없었다. 카밀은 록시아스를 달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거친 키스로 인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잊게 했다. 머리를 쓰다듬을 때 록시아스가 찰나라도 편안하게 미간을 풀었으므로 연신 머리칼을 어루만져 주었다. 같은 이유로 허리 언저리를 간지럽히듯 쓸어 만졌다. 한참을 그러다가, 자신의 팔뚝을 꼬집듯이 쥐는 록시아스의 손을 잡아 깍지를 끼고 시트로 떨어트렸을 때.

“흐, 아아! 흑!”

록시아스를 안정시킬 대안으로 내내 물리고 있었던 입술을 거두며 허리를 밀어붙였다.

“미안, 아, 해요….”

사과할 상대는 아래에 있으나 목을 젖혀 정면을 천장으로 올린 카밀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한계는 있었다. 언제까지고 억누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흘러넘치거나 깨어질 일이었다. 예정된 일이었고,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아… 좁아.”

읽었던 해부학 책에 그런 설명은 없었는데. 록시아스는 흡혈귀라 다른 건가. 내벽이 수축하는 정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손가락을 집어넣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안에 발린 정액 탓인지 원래 이런 촉감인지 알 수 없으나 기분 좋게 말캉한 점막이 성기 모양대로 들러붙어 모든 곳을 주물렀다. 온도는 따뜻했다. 겉살은 차갑기만 하더니…. 록시아스의 안은 지독하게 조이지만 않으면 감촉이며 체온이며 혼이 빠져나갈 만큼 완벽하게 좋았다.

곡선을 그리며 위로 뻗어 있던 금빛 속눈썹이 내리깔렸다. 그림자를 입은 붉은색 눈동자가 록시아스를 담았다. 록시아스는 팔뚝으로 스스로 눈을 가린 채 입술을 벌리고 헐떡거리고 있었다. 카밀은 팔뚝을 치워 록시아스가 표정을 드러내도록 했다. 눈을 감은 록시아스의 미간에 진 세로 주름이 더욱 깊게 팼다.

구겨진 눈썹 사이를 펴려는 양 문지른 카밀이 읊조리며, 허리를 찬찬히 물렸다.

“록시는, 후… 아파요?”

아프냐고. 아팠다. 놀랍게도, 아팠다. 록시아스가 신체적 고통을 느끼다니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믿기 어려웠다.

“흐, 아… 응, 아파.”

배 속이라서 그런가. 하기야 겉만 무적이라면 속까지 단단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생명체의 몸뚱이는 꽤 합리적으로 만들어졌다. 제 몸도 다르지 않겠으므로 아픈 것이다.

“이상해, 아파서… 조금, 하, 더 천천히, 응?”

이미 멈춘 것이나 다름없도록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곤란했다. 하나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안 된다’며 거절을 되돌리기 싫었으므로, 미소를 걸친 입술로 록시아스의 뺨에 키스했다. 허리를 천천히 물리던 중이었다. 기껏 집어넣은 기둥이 밖으로 드러났고 선단만 구멍 속이었다.

식은땀이 흐른 관자놀이에 흩어진 흑발을 귓바퀴 뒤로 넘긴 카밀은 록시아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워요, 록시.”

그러고 나서는.

“아, 흐윽…!”

록시아스를 밀어붙이듯이 허리를 앞으로 밀어 올렸다. 록시아스가 허리를 튕기며 카밀의 팔뚝을 긁었다. 단정한 모양의 손톱이 무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근육이 듬직하게 지나는 살갗에 붉은 생채기가 길게 새겨졌다. 그때 카밀은 미간을 좁혔는데, 팔뚝을 가로지른 손톱에 아픈 탓이 아니라 성기가 잘릴 듯했기 때문이었다.

“카, 밀아, 읏, 깊게, 말고…!”

영 조심스럽게 허리를 놀리던 카밀이 마치 안쪽을 죄 헤집어 놓겠다는 듯이 쑤시기 시작했다.

“안 깊어요, 아직….”

그렇지 않아도 록시아스를 배려해서 성기의 3분의 2까지만 들어가도록 조절하며 치대고 있었다. 곧 전부 넣을 생각이었다. 카밀은 그때 가서야 깊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생각이었다.

‘안쪽을 죄 헤집어 놓겠다는 듯이’란 오로지 록시아스의 감상이었다. 카밀은 록시아스에게 대답할 때가 아니면 어금니를 꽉 다물며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단단한 선단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선액 때문인지 말캉거리는 점막이 촉촉하고 부드러워지기까지 했다. 내벽 전체는 숫제 성기를 옥좼으나 살성이 보들보들하고 매끄러우니 되레 흥분되기만 했다. 록시아스가 아프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당장 몸이 욕구하는 대로 안쪽을 마음껏 쑤셔 대고 싶었다.

하체를 뒤로 뺀 카밀은 허리를 곧추세우고는 록시아스의 양쪽 오금을 쥐었고, 누르며 도로 허리를 숙였다. 록시아스의 허벅지가 길게 당겨졌다. 구멍은 더욱 수축했다. 그 안쪽으로 성기를 재차 미끄러트렸다. 록시아스가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흔들다가 턱을 치켰다.

이전과 같이 팔뚝으로 제 무게를 받친 채 록시아스의 위에 엎드린 자세가 된 카밀은 ‘록시, 유연하네’라고 새삼 감탄하며 록시아스의 종아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먼저 손으로 록시아스의 안을 만졌을 때와 비슷한 자세였다. 이번에는 손가락이 아닌 것으로, 록시아스를 눈물짓게 하는 부분을 건드릴 생각이었다.

손가락이 닿는 부근에 있다면 구태여 성기를 죄 집어넣지 않아도 충분했다. 오로지 상대의 쾌락을 끌어내기 위해 카밀 자신의 쾌락은 도리어 반쯤 덜어 내야만 했다.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어쨌든 록시아스를 자극하는 것은 자신이니까.

‘그곳’을 찾기란 손쉬웠다. 록시아스의 내부는 카밀에게 아주 좁았으며, 카밀의 음경은 록시아스에게 지나치게 거대했으므로.

록시아스의 다리가 높이 올라가도록 자세를 바꾼 것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추삽질 하기 무섭게 록시아스가 바르작대며 신음하기 시작했다.

“흐으! 윽! 어떻, 게, 아!”

아팠다. 분명히 아팠다. 난생처음 제대로 통감한 육체적 아픔이니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 없었다. 정말로 아팠는데, 몸이 둘로 갈라지는 듯이 아팠는데…. 카밀이 무엇을 어떻게 한 걸까. 아프지 않다. 아니, 아픈 것 같기도 하다. 고통과 비슷한 감각이다. 한데 좋다.

“이상, 해, 읏, 벌써, 쌀 것 같….”

눈물이 새어 나올 만큼 좋았다. 이전 카밀의 손가락으로 만져졌을 때도 금세 파정할 만큼 좋았지만, 성기로 문질러지는 지금 느껴지는 감각이 그보다 몇 배는 더욱 강렬했다. 이상했다. 어떤 기분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어떠한 기분도 들지 않는다. 육체만 남은 것 같다. 볼 수도, 카밀의 것이 아니면 만질 수도 없는 곳만 살아 있는 것 같다.

“하, 아아! 흑!”

참기 힘들도록 간지러운 느낌에 허리가 비비 꼬였다. 눈을 감고 있는데 시야가 환했다. 카밀이 아래를 밀어붙일 때마다 팍, 팍, 터지는 섬광 탓이었다.

“으, 흐… 으흑!”

록시아스는 자신이 눈을 감았다고 믿었으나, 카밀은 몽롱하게 반만 감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자신도 눈꺼풀이 거반 내려간 상태였다.

“하아… 하, 예뻐….”

“흐으… 읏, 아, 윽!”

아래를 치받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속을 찧는 남근만큼 딴딴한 허벅지에 거듭거듭 부닥친 둔부가 발갛게 부어올랐다. 카밀이 잔뜩 내보낸 묽은 체액으로 축축하게 젖은 결합부에서 연신 질컥거리는 소리가 퍼졌다. 그 사이로 카밀의 저음이 아릿하게 스몄다.

“사람이, 하아, 아닌 것 같아… 록시는.”

“후으, 빠, 빨라, 아으!”

“사람이, 후우,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말끝을 흐린 카밀은 그의 어깨에 올린 두 다리를 내리고는, 돌연 록시아스의 허리를 붙들더니 돌렸다. 아래가 꽂힌 채로 몸이 뒤집힌 록시아스가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지르며 전신을 팔딱거렸다. 손바닥에 바로 닿은 시트를 세게 움키는가 싶더니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 카밀, 미쳤어, 으…!”

곧장 재개된 추삽질에 록시아스의 잇새로 나오던 말이 스러졌다.

카밀은 록시아스의 어깨와 골반을 쥐어 제 쪽으로 누르며, 자신은 반대로 쳐올렸다. 카밀의 의지하에 여태껏 끝까지 들어가지 않고 있었던 성기가 결국 주름이 매끈하게 펴지도록 벌어진 구멍 안쪽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하악! 흐으, 흑, 후으…!”

얼굴을 옆으로 돌린 채였던 록시아스가 우는 소리를 내며 시트에 이마를 붙였다. 내장은 타는 듯했고, 머릿속은 녹는 듯했다. 별안간 내리꽂혔으나 아프지 않았다. 희열이 모든 감각을 이겼다.

“…록시, 아, 록시.”

카밀은 록시아스의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비강으로 훅 퍼지는 감미로운 체향을 모조리 취할 것처럼 록시아스의 살결에 콧대가 휘어지도록 비볐다. 어지러웠다. 너무 황홀하면 현기증이 날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을 머리 밖으로 흘려보냈다. 천치가 된 양 생각이란 생각은 죄다 흘러갔다. 공기처럼. 시간처럼…. 몸은 알아서 움직였다. 다행이었다. 록시아스에게 미움받기 싫으니까, 사랑받고 싶으니까, 계속해서 록시아스를 기쁘게 해 주고 싶었다.

“으, 하우으, 윽, 흑!”

카밀이 뒤를 쑤셔 올릴 때마다 전신이 앞으로 쏠리며 성기가 시트에 비벼졌다. 고작 천 쪼가리였다. 자신의 손도, 카밀의 손도 아닌 고작 천 쪼가리. 그런데 시트에 쓸릴 때마다 대단한 애무를 받는 듯 성기에서 액체가 질질 샜다. 척척한 맨살에 축축한 시트가 들러붙었다.

“아, 읏….”

길게 쑥 빠졌다가 대번 퍽 박아 올리기를 한참 반복한 뒤였다. 성기를 한계까지 깊숙이 꽂아 넣은 카밀은 이전처럼 멀찍이 빠져나가지 않고, 록시아스의 둔부에 붙인 하체로 무게를 실었다. 그런 채 뭉근하게 허리를 사방으로 돌렸다.

“아… 학!”

묵직하고 단단한 살덩이가 배 속을 전부 차지한 채로 은근하게 내저으니, 퍽퍽 쑤셔 넣는 것과는 또 다른 흥분점에 불이 붙었다. 몸속이 홧홧했다. 불덩이가 내장을 타고 내리 왕복하는 것 같았다. 입가로 새는 타액조차 뜨거운 듯 느껴졌다. 등줄기로 전해져 오는 카밀의 체온은 또한 열렬했다. 온통 더웠다.

“흑, 아, 흐으!”

“록시, 하아…!”

카밀은 록시아스의 손등에 손바닥을 겹쳤다. 손가락을 구부려 단단히 옭아맸다. 끝이 다가올수록, 록시아스가 사라질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록시아스가 증발하는 끔찍한 상상이 흐물흐물한 이성을 툭툭 건드렸다.

“못 가, 록시는… 날 못 떠나요.”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뇌까린 카밀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날 예뻐해 주세요….”

“흐윽… 아아!”

록시아스의 목덜미를 물었다. 성기를 한계까지 밀어 넣고 결코 물리지 않듯, 송곳니를 피부 아래로 가능한 한 깊게 찔러 넣었다.

“하, 아으, 너, 이 미친… 으읏…! 아흐!”

별안간 공기 사이사이를 메우는 피 냄새를 뒤늦게야 알아차린 록시아스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흐느꼈다.

“윽, 으으!”

꿈틀거리는 록시아스의 손가락을 미동조차 못 하도록 바싹 옥여 죈 카밀은 벌써 록시아스의 피를 네 모금째 삼켰다.

“흑… 읏!”

록시아스가 등을 말았다. 스읍,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더니, 빳빳하게 굳은 목덜미를 잘게 떨었다. 이어서는 아랫배와 허벅지를 경련하기 시작했다. 줄줄 흐르던 눈물은 펑펑 쏟아져 내렸다. 성기도 딱 그처럼 체액을 쏟아 냈다.

“하아, 하, 흐…!”

워낙 몸을 떨어 대는 록시아스 탓에 흩날리는 흑발이 카밀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하나 카밀은 눈살만 슬쩍 찌푸릴 뿐, 송곳니를 거두지 않았다. 이어 그는 록시아스의 혈액을 열 번째로 넘기며, 아래를 슬쩍 뒤로 물렸다가 확 찔러 올렸다. 한 번의 경험만으로 정확히 외운 록시아스의 약점을 짓누르듯 문질렀다. 그에 맞춰 록시아스의 성기가 희뿌연 액체를 왈칵 뿜었다. 동시에 송곳니가 목덜미에서 거두어졌다.

“하아….”

기어이 록시아스를 흡혈하도록 종용했던 정복욕이 사출 욕구에 동승했다. 카밀은 결합 부위에 무게를 가하며 가학적일 만큼 강하게 추삽질했다. 사정을 마치고 탈력감에 늘어져 있던 록시아스는 속절없이 희읍하며 카밀의 드센 행위를 받아들였다.

“…흐, 으윽.”

“…읏!”

이윽고 동작이 서서히 느려지는 듯하더니, 카밀이 몸을 굳혔다. 배 속에서 움찔거리는 성기의 진동이 록시아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록시아스는 죽음을 목전에 둔 이처럼 가늘게 호흡하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피가 아닌 다른 액체로 젖은 내부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뒤에서 팔을 뻗은 카밀이 껴안아 왔다.

“하… 록시.”

뾰족한 무언가가 뒤통수를 눌렀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카밀의 잘 깎인 콧날이었다.

“지금이 거짓말 같아요.”

시트에 이마를 붙인 록시아스는, 바로 귓전에서 울려 퍼지지만 아득하게 먼 듯 느껴지는 저음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있잖아요.”

카밀이 팔뚝에 한층 더 힘을 실어 자신을 옭아매듯 끌어안았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지금 또 말하고 싶어요.”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랑해요.”

카밀이 감히 고백한 간략한 문장이 팽팽하게 늘어지더니, 흐느적대는 뇌리를 관통한다.

“죽는 날까지.”

섬뜩했다.

“…누가 죽는 날까진데?”

록시아스는 침잠한 목소리로 물음을 중얼거렸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투를 연기해서.

답변은 빨랐다.

“영원히, 라는 의미였어요.”

그리고 명확했다.

“우리 둘 다 안 죽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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