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1화 〉 포식자들의 세상 1
* * *
화성에 처음 비가 내리던 날 사람들은 거리에 뛰쳐나와 미친 듯이 기뻐했다. 어른들도 아이들도 인류의 위대한 첫걸음에 환호했다.
지구 시간 서기 6666년 6월 6일 태양계 4번째 행성 화성의 테라포밍은 인류가 우주로 활발히 진출할 것이라고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인류는 화성이나 금성에 사람이 사는 것이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다.
.
.
.
나는 약간 긴장한 상태로 거리를 걷고 있다. 자주 다니는 익숙한 거리였지만 오늘은 긴장되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 최근 남자친구와 사이가 서먹해지고 있고 연락이 뜸해지고 있다. 연락을 20일 이상 안 하고 있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가 점심시간에 연락이 왔다. 오랜만의 연락이 반가움 반 두려움 반이다. 사실 나는 직감하고 있다. 싸운 적도 없이 연락이 뜸했으니까 화해 같은 것은 아닐 거고, 아마.. 나를 불러낸 이유는 이별 통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상사 ‘에프타인’에게 약속이 있으니 일찍 가겠다고 말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할 때 쯤 구름이 끼고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비가 올 것 같다. 3000년 전 만 해도 기적의 상징이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귀찮은 기상 현상일 뿐이다. 다행히 핸드백에 우산이 있으니 비 맞을 일은 없다. 남자친구가 지정해준 약속 장소는 ‘외레시스’라는 야외 카페였다. 테라스가 있고 야외 대형 모니터가 식사와 휴식을 보조 해주고 있다.
대형 모니터에는 지구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남자친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다. 내부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고 야외에는 두 테이블에 손님 두 그룹이 있었다. 한 그룹은 가족의 외식, 다른 한 그룹은 세 명의 중년 남자들이었다. 약속 시간은 아직 20분이 남았다. 쓸데없이 일찍 왔다.
나는 할 일도 없기에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대형 모니터의 지구 소식을 말없이 본다. 지구의 아나운서는 지구인 답게.. 한쪽 눈을 기계로 교체한 것이 한눈에 보였다. 지구인들은 신체 개조에 거부감이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구인들은 뇌와 의식만 자신의 것이면 다른 신체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재밌는 것은 지구인들도 고위 계급으로 올라갈수록 신체 개조를 하지 않고 있다. 반대로 하류로 갈수록 기괴한 금속 팔, 다리는 기본으로 달려있다. 아니.. 고위층도 기계 투성 이지만 티가 안나게 개조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소위 높은 사람들은 돈도 많을 테니까.
지구인에 대한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중년 세 남자 그룹이 불만을 드러냈다.
“언제까지 지구 자식들 시간대로 계산해야 하는거야.”
“별수 있냐. 국제 통용 시간대인데.”
“헷갈리고 불편해. 우리 화성이랑 공전주기도 자전주기도 전부 다르잖아.”
“국제라고 해봐야 지구, 화성, 금성정도 아냐?”
“금성 놈들은 자존심도 없어. 지구 자식들에게는 항상 불만없이 복종하잖아.”
“금성 놈들이 맨날 저자세로 나가니 지구 자식들이 우리 화성인들도 얕보는거라고.”
술이 적당히 들어갔는지 말에 조심성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꼭 지구인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은근히 금성인들을 끼워 넣는다. 나는 금성 출신인데, 이런 이야기가 들릴 때 마다 반응하진 않아도 가슴 한 켠에 답답함을 느낀다. 뉴스는 인류의 성공과 기술 발전에 대한 역사를 기록한 관광지 홍보가 목적이었다.
“9999년 10월 11일, 두 달 뒤이면 인류는 서기 10000년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런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지구에 있는 ‘위대한 인류 기념관’을 방문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리포터 체니아 였습니다.”
“저게 광고야 뉴스야?”
술 취한 세 명의 중년 남자들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구 자식들은 기업들이 지배하는 곳이니까.”
“그래 그래. 돈 되는 일이면 노골적으로 품위 없는 짓도 서슴없이 하는 자식들이니까.”
“저런 놈들이 인류는 맨날 하나니 뭐니 하면서 같은 편인 척 하는거 너무 역겹다고.”
“하나라면서 우릴 못살게 굴었지. 그러니 화성, 금성이 독립한 거 아니야.”
이 아저씨들,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는데 화성, 금성이 독립한 것은 3000년 전 일이다. 그 전부터 광석 채취를 위해 파견되었던 화성과 금성의 광부들이 테라포밍 성공을 계기로 인구가 늘어나면서 독립한 것이다. 지구도 전쟁 해봐야 손해라고 판단하여 재빠르게 인정해 버렸다. 덕분에 관계가 나빠지지 않았고 교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저 아저씨들이 지구인에 대한 악감정은 지구인들 특유의 거만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직업 특성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고 ‘나의 상사’가 지구 쪽 담당이기 때문에 지구인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는데 특유의 거만함은 처음에 적응이 안돼서 밤잠을 설쳤을 정도다. 욕을 들은 것도 아니고 폭력을 당한 것도 아니지만 자꾸 생각하게 만드는... 그래서 열 받아서 하루 종일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들이다. 콕 찝어서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사람을 하대하고 만만하게 여기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에 대해 말하면 쪼잔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냥 넘어가면 만만한 사람으로 여기고 더 무례하게 대하니 환장할 노릇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앞을 보니 세 아저씨들이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나를 본다. 내 뒤쪽에는 아무도 없으니 100% 나를 보는 중이다. 오른쪽에 있는 능글 맞게 생긴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가씨는 금성 출신이요?”
나는 대답한다.
“..네.”
아마 내 머리색을 보고 맞췄다고 생각한다. 금성에서 제일 흔한 머리색이니까. 연하고 밝은 블론드는 금성인들의 90%는 가지고 있는 머리색이다. 내가 짧게 말하고 끊어버렸지만 아저씨들은 다시 말을 걸었다.
“거봐. 금성인일 것 같다고 했잖아.”
“저런 머리색을 일부로 염색하진 않으니까.”
“에이.. 근처 유흥업소에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금성인들의 이미지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미인, 미남이 많다는 이미지이고 두 번째는 성매매가 합법이라 금성 출신들은 대부분 그런 곳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이미지다. 모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화성 유학생 시절 금성인 이미지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다. 미인 미남이 많다는 낭설은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어이없는 이유였다. 금성의 옛 이름이 ‘비너스’고 비너스는 ‘미의 여신’이기 때문에 미의 여신의 기운을 받아 미남 미녀가 많다는 설이다. 어느 시대나 미신은 존재하는 법일까.
두 번째는 좀 무례하게 느껴지는 이미지인데. 사실 금성 제2의 도시가 거대한 매춘 도시이긴 하다. 수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금성 재정에 엄청난 한 축을 담당해주는 고마운 도시이자 금성인들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도시이기도 하다. 이 낭설은 화성인 사이에서도 금성인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분위기지만 술만 취해도 이걸로 시비 거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여자였으니 말할 것도 없다. 금성인이라는 이유로 엉큼하게 쳐다보는 남자, 여자도 많이 겪었다. 물론 내가 꽤 예쁘기 때문이겠지만.
어쨌든 지금도 세 아저씨들이 수군거리는 것이 불쾌하지만 악의는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생각하고 넘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행히 세 아저씨들이 더 이상 귀찮게 하지는 않는 상태에서 5분이 더 지나갔고 남자친구가 도착했다.
“어... 왔어?”
“응. 뭐 먹을래?”
내가 왔냐고 말하자. 짧게 대답하고 바로 테이블에 앉아 메뉴부터 물어본다. 분위기가 내가 생각 하는대로 인 거 같다. 적당한 스테이크를 시키고 서로 말없이 먹는다. 스테이크가 반 쯤 사라지자 남자친구가 말을 했다.
“여기까지 할까?”
“어? .........그래.”
여러 차례 마음을 준비했건만 나의 대답은 약간의 미적거림 뒤였다. 남자친구도 그런 태도에 트집을 잡거나 하진 않았다. 원래 말수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식사 중 나의 여러 신호들을 캐치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약간 비참했다.
“내가 계산할게.”
남자친구는 자신이 계산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그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식사만 했다. 식사 중에 이별 통보 한번 하고 간 것이다. 특별히 잘못 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부모님께 내 얘기를 했다고 말하고부터 서서히 서먹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면 금성 출신이 발목을 잡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나도 결혼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미련일까. 어찌 되었던 분노하지는 않았다. 자꾸 생각나긴 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는데 대형 모니터에 모처럼 금성 소식이 들렸다. 앵커는 금성에서 다른 행성을 조사하기 위해 우주선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테라포밍 가능 여부를 위해서라고 한다.최초의 테라포밍 이후 인류는 생각보다 가만히 있었다. 금성이나 화성은 기반 시설 개발 및 확충, 인구 증가 등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았고 지구는 두 행성의 독립 이후에도 자원 채취와 교역에 두 행성을 자극하지 않으며 진행하느라 테라포밍은 관심 밖이었다.
“저 금성 놈들은 이와중에 무슨 탐사선이야?”
“뭐 선진국 흉내라도 내고 싶은가보지.”
짜증나는 대화를 뒤로 하고 야외 식당을 나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핸드백에 우산을 폈다. 우산이 펼쳐지고 머리 위를 떠다니며 내가 비에 맞지 않도록 자신의 역할을 해낸다. 생각보다 비가 많이 내리는지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내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고 바이오 칩이 있는 손등을 찍는다. 택시는 ‘삐빅’ 소리와 함께 자동으로 내 집으로 향한다. 30분 정도 후 나는 내 집 정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택시에서 내린 뒤 집 정문 앞의 쓰레기 더미를 지나고 있다. 그런데 부스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심코 소리가 나는 곳을 본다. 소리가 나는 곳에서는 왠 소년이 쓰러져 있다. 정신을 잃은 것 같다. 처음에 시체인가 생각했지만 미약하게 가슴 부분이 위 아래로 오르락 내리락 한다. 그 소년은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고 있다. 갈색 머리, 흰 피부, 마른 몸이다. 이대로 가면 저 소년은 죽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제 서야 나는 어? 라고 혼잣말을 한다. 나는 일단 소년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구급 서비스에 연락을 취했다. 손등에 대고 구급 서비스를 불렀는데 통신 상태가 이상하다. ‘치직’ 소리가 날 뿐이다.
“이거 왜 이러지?”
나는 혼잣말을 하며 오른쪽 손목을 흔들었다. 이대로 두기 뭐해서 나는 소년을 들었다. 아직 소년이기 때문인지 말랐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가볍게 들 수 있었다. 나는 정문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12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거실로 들어서자 일단 큰 수건을 두 어개 집어 물기부터 닦아냈다. 그 뒤 곧 쓰레기 더미에 있던 탓에 시큼한 냄새가 올라왔다.
“아이 씨ㅡ.”
짜증나는 것을 참으며 바로 샤워실로 갔다. 거기서 검진기를 찍어 보았다.
심박수 : 정상
혈액형 : A
신체나이 : 15
.
.
.
다 정상으로 보이는데. 언제부터 쓰레기 더미에 있었던거지? 그리고 왜 옷을 다 벗고 있었지? 강도? 요즘 강도는 잘 없다. 바이오 칩 해킹이라면 몰라도. 그리고 옷은 푼돈이라서 범죄를 저지를 만큼 가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의문들을 생각하면서 소년의 샤워를 끝내주고 대충 내 큰 옷을 입혀주었다. 침대에 눕히고 다시 구급 서비스에 연락했다.
‘치직’
“아 왜 이러는거야! 짜증나게에에에!!!!!”
오늘까지만 해도 바이오 칩에 문제가 없었는데. 아니 바이오 칩에 문제가 있다면 내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연락만 안 되는게 뭐지? 버그인가? 일단 건강 체크기기는 소년이 정상임을 알려주었으니 내일 칩 센터에 가서 점검을 받고 다시 연락해보기로 했다. 그전에 경찰 서비스에 연락해 보지만 결과는 같았다. 뭔가 바이오 칩에 문제가 생기긴 한 것 같다. 거실에 임시로 이불을 깔고 소년을 눕혔다. 다행히 예비로 이불들이 있기에 기절한 소년을 덮고 나도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고 기상 알람이 울린다. 나는 다행히 일어날 때 힘들거나 밍기적 거리는 성격은 아니어서 알람음이 울리면 바로 일어난다. 일어나자 마자 기지개 한번 켜주고 물 한잔하러 거실로 나오니 소년이 깨어 있었다.
“아.. 일어났구나?”
나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소년은 소리가 나는 방향을 쫓아 나를 바라본다. 한동안 말 없이 내 얼굴만 바라보니 약간 오싹했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을 유지하며 다시 말한다.
“이름이 뭐야? 혹시 사는 곳을 어딘지 말 해줄 수 있을까?”
소년은 말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다. 사람 말을 모르는 건가. 화성이나 금성, 지구 모두 공용어를 쓰기 때문에 말은 통할 것이다.
“저기.. 나 지금 출근 해야되는데 가면서 경찰서에 바래다 줄게. 너도 그 편이 좋지?”
소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알아듣고 있었다. 나는 대충 밥을 먹었다. 소년에게도 밥을 줬는데 정상적으로 전부 먹는다. 말도 알아듣고 식욕도 정상이고 특별히 편식을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이 소년은 왜 우리 아파트 정문 앞 쓰레기장에 벌거벗은 상태로 버려져 있었을까.
직장으로 가기 전 경찰서에 갔다. 경찰은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본 후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저 이 소년이 제 집 앞에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은데..”
경찰은 내 말을 듣다가 손목을 몇 번 터치한다.
“어제 실종 신고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종자 사진 중에 저 소년처럼 생긴 사람도 없고요.”
“하지만 어제 제 집 앞 쓰레기장에 나체로 버려져 있었어요. 일반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아 서요.”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었다구요?”
경찰은 소년을 잠시 본다.
“인공지능 로봇은 가지고 있는 것 만으로도 범죄 행위인거 아시죠?”
“네?? 아니요. 인공지능 로봇 아닙니다. 검진기로 확인도 해봤어요. 못 믿으시겠으면 확인해 보시던가요.”
“흠. 알겠습니다. 그럼 저 소년은 우리가 보호하고 찾아보겠습니다.”
“예. 그래요. 그럼 가볼게요.”
나는 소년을 잠시 봤다. 소년은 무표정하게 의자에 앉아 있다. 경찰서 모니터에는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화성의 유일한 대기업 회장 아킬로 소식이었다.
“우수한 지구 기업들의 제품도 좋지만 저희 화성에도 좋은 기업 제품들이 있습니다. 자신 있게 권합니다.”
화성 대기업 마르마스. 생필품부터 시작해서 중장비, 군수 물품까지 생산하는 화성의 초 대기업이다. 지구인들을 매우 혐오하지만 지구에서 오는 물품들을 쓸 수밖에 없었던 화성인들에게는 꿈의 직장이자 고마운 존재였다. 금성인인 내가 보기엔 지구기업이나 화성기업이나 똑같아 보이지만.
“아킬로 회장님은 젊은 시절 아름다운 갈색 머리를 지니고 있었 다는데 사실인가요?”
“예? 하하 상관없는 질문을 갑자기.. 예. 그렇습니다. 짙은 갈색이었어요. 갈색 머리가 흔하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갈색 머리였지요.”
갈색머리? 나는 잠시 소년의 뒷모습을 보았다.
...더 이상 지체하면 지각이다. 나는 약간 빠른 걸음으로 직장에 갔다. 내가 들어가는 큰 빌딩은 다른 빌딩과 다르게 장엄한 모습으로 서있다. 화성 외교부라는 문자가 크게 적혀있다. 외교부에 출근하지 3년차지만 여전히 들어갈 때 긴장이 된다. 작게 심호흡하고 들어가는데 ‘나의 상사’ 에프타인이 마침 출근하고 있다.
에프타인. 49세. 검은 머리, 흰 피부, 그리고 하늘색에 가까운 푸른 눈동자. 결혼 적령기를 넘겼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애인도 없었다. 아니 여자에 관심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차가운 이미지로 표정의 변화를 본 적이 없다. 화가 나는 일을 겪어도 화를 낸 적도 없고 어쩔 때 보면 좀 소름 돋는다. 감정이 있나 싶어서. 하지만 유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긴 한다. 얼마나 유능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에프타인은 주로 지구와의 외교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나는 그의 제3비서다. ‘나의 상사’니까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혼잣말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누군가와 통화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에프타인과 눈이 마주치자 눈으로 살짝 인사하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가자 비서진들이 벌써 와있었다. 바이오칩으로 시계를 확인해 보니 지각은 아니었다. 다들 왜 이렇게 일찍 왔지?
“리디스. 이제 왔구나?”
“아..네...”
제1비서 유리치가 말했다. 10년 넘게 외교부에서 근무하고 있고 지구에 관해서 꽤나 통달한 인물이다. 제2비서인 칼렌도 어서오라고 말하고는 무언가 문서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 나도 내 자리에 앉았다.
“오늘 무슨 일 있나요?”
내가 묻자 유리치가 말했다.
“리디스. 뉴스 못 봤어? 외교부 비서라면 뉴스 정도는 매일 체크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 아.. 어제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러자 칼렌이 말했다.
“아무래도 리디스 너가 갈거 같은데.”
“가다뇨??”
그러자 유리치가 바이오 칩으로 영상을 전송해 주었다.10월 11일 어제자 뉴스다.
“지구와 화성이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금성에 불만을 표하고 있습니다. 이에 지구와 화성은 공동으로 조사단을 파견하여 이번 실종 사건들의 진상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실종 사건?
“최근 5년 간 실종자만 8160만 명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금성은 우리도 열심히 찾고 있다고만 하고 있는데요. 이 어이없는 숫자를 어떻게 보고 계시나요.”
앵커가 질문을 하자 전문가처럼 보이는 늙은이가 말한다.
“네. 정말 어이없는 숫자입니다. 특히 금성 제2도시로 관광을 간 사람들은 100명 중 한 명은 사라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물론 우주에서 가장 큰 관광도시고 부랑자들도 꽤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금성의 왕 케테로스의 태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 그렇군요. 그래서 이번에 지구와 화성이 공동으로 금성에 가서 강력 항의를 할 생각인 거군요.”
“그렇습니다. 특히 이번에 지구는 굉장히 피해가 막심합니다. 아무래도 지구인들이 제일 많이 이용했으니까요.”
칼렌이 설명했다.
“금성은 루기 차관님이 담당이긴 하지만 이번에 지구와 같이 합동조사하는 만큼 외교적인 식견도 필요하다고 지구를 오래 담당한 에프타인 차관님이 맡기로 했어.”
“리디스 금성 출신이지?”
“예? 네...”
“그럼 금성을 잘 알겠지? 아마 차관님은 너를 데려갈 것 같아.”
“그래서 이렇게 일찍 오셔서 준비하셨던 거군요...”
곧 ‘나의 상사’ 에프타인이 들어왔다. 에프타인은 특유의 무표정함과 냉정한 목소리로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제 남자친구와의 결별 때문에 일찍 퇴근했고 그래서 이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만인 점은 좀 미리 통보 좀 해줬으면 하는 점이다. 나도 외교부의 일원인데 미리 알려주면 안되는 것일까. 보안 상의 이유라고는 해도 뉴스를 통해 미리 예상해서 준비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점은 좀 꼴불견이다. 어찌되었던 선배들의 예언대로 내가 에프타인과 동행하게 되었다. 일단은 우리가 지구를 방문하고 지구의 외교부가 합류한 뒤 금성으로 가는 것이다. 지구로 가는데 일주일, 금성으로 가는데 다시 일주일. 왕복 4주쯤 걸릴 것 같다.
리디스 케언– 여자. 28세. 주인공. 외교부 차관 제3비서
에프타인 슈라흐 – 남자. 49세. 외교부 차관(지구담당)
유리치 프리구프– 여자. 36세. 외교부 차관 제1비서
칼렌 카릭– 남자. 41세. 외교부 차관 제2비서
아킬로 브레스터– 남자. 133세. 화성 대기업 마르마스 회장
소년 – 남자. 15세. 쓰레기장에 기절. 리디스가 구조.
남자친구 – 30세. 리디스의 전 남자친구. 이름은 리튼 페일.
케테로스 미카드 – 남자. 29세. 금성의 84대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