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41. 발락의 던전
* * *
“그건 무슨 의미냐?”
“율리히한테 직접 물어봐.”
내가 설명해줄 영역이 아니지.
율리히와 레베카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집안 문제니까.
물론 나도 반쯤은 레베카의 가족이기는 하지만,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고.
“간다.”
당황해하는 베르셀리우스를 뒤로하고 마계에서 나와 던전에 돌아왔다.
“그놈이 두 번째 축제까지 살아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팬텀이 영상에 남긴 말대로, 리파 소토르프가 살아있을 가능성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리파 소토르프가 살아있다면, 그녀를 만난다면 어쩌면 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있다고 한들,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살아있을 가능성도 그리 크지 않다.
“결국은 그놈의 유적을 뒤져야 한다는 소린데.”
신전에서 관리하는 유적이 또 있을까?
“뭐야.”
어떻게 해야 신전 쪽에 정보를 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 팔찌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아포디미아에서의 연락이다.
“웬일로 먼저 연락을 했어?”
메르넬라가 여기 있는데 나한테 먼저 연락을 걸다니.
그것참 의외의 일이네.
[폐하.]
아밀리아의 목소리다.
그녀가 연락했다는 건…….
[일전에 잡아왔던 천족들에게 강도 높은 세뇌를 통해 몇 가지 정보를 빼냈습니다.]
역시. 아밀리아한테 천족들의 심문을 맡기길 잘했다.
이렇게 단시간에 정보를 빼냈을 줄이야.
“말해줘.”
[마족의 축제가 너무 잘 흘러가고 있어서, 천족이 강수를 두려고 해요. 곧 신전 쪽에서 대규모 토벌대가 형성될 예정이라고.]
나한테는 그다지 필요 없는 정보네. 토벌대가 이곳으로 오면 모르겠지만, 사실상 이곳은 아직 한적한 던전이다. 굳이 토벌대가 직접 올 이유가 없다.
그래도 기왕 알아낸 정보니까 듣기는 해봐야지.
“토벌대의 규모는?”
[신전 기사단 중에서 한 개 사단이 움직일 예정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리고?”
왜 말을 못해?
[기사단에 중급 천족도 몇 명 섞여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마족들은 바르바라가 직접 힘을 써서 지상에 나올 수 있는 거다.
그것도 최고위급 마족은 힘이 너무 강해서 지상에 나올 수도 없다.
그렇다면 천족은 어떤가.
지난 번 보았던, 희생을 통해서 혹은 마족과 마찬가지로 천족의 왕이 직접 힘을 써야만 지상에 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는 건.
“그 여자 짓이겠구먼.”
기사단에 천족이 그것도 중급 천족이 섞여 있다는 건 마르벨리아, 대천사의 분신인 그녀의 짓임이 분명하다.
[꺼림칙한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뭐, 지금은 굳이 말할 건 아니야. 토벌대가 향할 곳도 알아냈어?”
[에일리안드 왕국과 론델 왕국의 국경 사이에 있는 던전이라고 하네요.]
“에일리안드와 론델 사이?”
어째 되게 익숙한 위치인데? 그러니까 분명히 거기라면……. 잠깐만.
“확실한 정보 맞아? 세뇌가 잘못됐을 가능성은? 물론 네 실력은 믿지만, 혹시 모를 수도 있으니까 확인 차 묻는 거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고.”
[대천사도 아니고 저런 잔챙이한테 제 세뇌가 잘못들 리가 없다고 생각하옵니다, 폐하.]
“그건 그렇지.”
그럼 진짜라고?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 빠르지 않나?
아직 주인공은 던전 자하드의 프롤로그의 끝이라고 할 수 있는, 파스칼의 던전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발락의 던전에 토벌대를 보내려고 한다고?
무언가 이상하다.
아직 페리스는 그 정도로 성장하지 않았어.
분명 성장할 여지가 더 필요하다.
그런데 어째서 기사단까지 움직이면서 던전을 토벌하려고 하는 거지?
아니 잠깐만.
애초에 용사는 왜 필요하지? ‘던전 자하드’에서는 인간이 마족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용사를 육성하는 거였다.
하지만 천족이 지상에 내려올 수 있다면 왜 굳이 용사를 선정하고 그를 성장시키려고 하는가.
“아밀리아.”
[예, 폐하.]
“그놈들한테서 용사, 선택받은 자가 어떤 존재인지 상세히 파봐.”
[알겠습니다. 그런데 너무 잡졸들이라, 정보의 질이 그리 좋지 않더라고요. 그 부분은 고려해주셔야 해요.]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것들이 하급 천족이라는 건 나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들한테서 용사에 관한 정보를 잘 모르고 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놈들이 모르면 새로운 정보원을 데려가면 되니까.”
[새로운 정보원이요?]
“니가 아까 말했잖아. 기사단에 중급 천족이 섞여 있다며.”
[네 그랬죠. 폐하, 설마.]
“응. 그것들 족쳐서 잡아와야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
애당초 이 게임에 천족이 끼어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까놓고 말해서 마족이 먼저 지상에 개입하기는 했지만, 마족은 어디까지나 지상이 멸망하지 않았으면 해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거니까 논외다.
“그럼 통신은 여기까지다.”
[알겠습니다. 저는 말씀하신 대로 용사에 대해서 최대한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마.”
아밀리아와의 통신은 거기서 끝이 났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발락 에포스는 칠대 마왕의 직계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남의 도움을 받으려고 들지는 않겠지.
응 절대로 그럴 거다. 그런 족속은 대부분 자존심이 밥이라도 먹여준다는 듯, 자존심을 지키니까. 정작 자존심을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걸 몰라요. 에휴.
뭐 어쩌겠어. 발락의 성격을 고치는데 드는 시간보다, 발락이 최후를 맞이할 시간이 더 빠르다. 아무리 칠대 마왕의 자제라고 하더라도 신전 기사단 한 개 사단에 중급 천족 몇 명이 섞여 있다면 감당하기 힘들 터다.
인간에 비교하자면 마족은 어마어마하게 강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로 단련하지 않았을 경우를 전제로 하는 거다. 단련한 인간은 강하다. 마족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실제로 인간인 용사에게 얼마나 많은 마족이 살해당했는가.
“후우.”
“뭘 그렇게 고민하고 있어?”
“아. 레베카님.”
레베카가 다가오자 우선 고개를 숙였다.
“아포디미아 쪽에서 정보를 보냈습니다. 발락의 던전을 토벌하기 위해 신전 기사단이 나설 예정이라고 해서 고민 중입니다.”
“그래? 규모는?”
“일 개 사단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중급 천족도 몇 명 섞여 있고요.”
“천족이? 아직 축제는 초중반인데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니요?”
“예전 축제에서도 천족이 직접 움직이는 경우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건 축제가 끝날 무렵에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랬어? 던전 자하드에서는 천족이 직접 개입한 장면이 없어서 몰랐…….
아니지.
주인공 시점에서는 천족의 개입이 눈에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신전에 의해 정복된 던전 중에서는 천족이 개입한 던전이 있을 수도 있다.
“그 정도 규모면 발락은 살기 힘들겠네.”
레베카는 무신경하게 그렇게 말했다. 같은 마족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딱히 상관없다는 눈이었다. 하기야 축제에 참여한 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하니까 저런 반응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생각해보면 그래. 나 역시 레베카의 경쟁자가 사라지면 좋은 일이기는 하지. 심지어 발락은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왠지 이대로 내버려두면, 천족의 마음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대로 해.”
“예?”
“보아하니 발락을 도와주고 싶은 거잖아.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경쟁자를 돕는 일이 되는데 그래도 괜찮은 건가.
“나랑 같은 칠대 마왕의 직계를 이런 식으로 이기면 나도 찝찝해.”
아아, 그랬지. 레베카는 언제나 당당하고 자존심이 넘쳤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발락과 승부가 나는 건 싫을 거다.
“그리고.”
응? 이유가 또 있나.
“같은 마족이 천족한테 당하는 꼴은 나도 보기 싫거든.”
글쎄 그건 어떨까. 마족이 아무리 천족을 싫어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경쟁자를 처리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다.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셈이니까. 아마도 저 말은 나를 배려해주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감사합니다, 레베카님.”
“고마우면. 쪽.”
레베카가 탐스럽게 익은 것 같은 붉은색 입술을 내밀었다.
최근 발칙한 애교가 많이 늘었네. 아, 자세히 보니까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고 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어 터질 것 같아서 황급히 입을 맞춰주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감촉이 입술을 타고 흐른다.
“여긴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뭐, 솔직히.”
응? 왜 갑자기 저런 짜게 식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걸까.
“솔직히 뭐요.”
“솔직히 지금 여길 누가 어떻게 하겠거니, 싶어. 자이메로노부터 시작해서, 메르넬라 언니까지 있는데.”
“아. 하긴.”
대천사 중 한 명이 오면 모를까, 그 정도 존재가 오지 않는 이상 이 던전은 안전하겠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 아르켈.”
레베카가 손을 흔들어주는 것을 뒤로한 채 나는 발락의 던전으로 향했다.
음. 최근 들어 던전이나 마을이 아니라 밖으로 향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 이번 일이 끝나면 던전 관리를 하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