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39. 푸른 카트르(6)
* * *
혹시 살아있다면 이라고?
리파 소토르프가 살아있을 수가 있나?
초대 왕의 존재는 영겁을 살아온 아르켈조차도 까마득하게 옛날 사람이라고 느끼는 이다.
그만큼 오래 전 인물이, 과연 지금까지 살아있을까?
심지어 리파 소토르프는 팬텀 소토르프에게 패해 불멸성을 잃었는데?
하지만 어떨까. 고개를 돌려 메르넬라와 이레네를 바라본다.
그들 역시 소토르프가 아니다.
나와 다르게 이 둘은, 살아남은 나의 동포들은 단순한 다이나토스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나와 같이 영겁의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늙어간다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리파 소토르프 역시 불멸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도 있나.
“……폐하.”
떨리는 목소리가 나를 부르는 것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 번째 왕님의 말이 진실일까요?”
메르넬라 역시 같은 의견을 묻고 싶은지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그래 너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대반란은 지상의 종족들이 일으킨 게 맞지만, 배후가 있다는 생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못 해봤겠지.
나 역시 그러니까.
그러나 팬텀 소토르프는 배후가 있다고 확신했다.
“진실일지는 나도 몰라.”
이미 오래전에 뒤졌을 놈이 남긴 말이 진실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그럴듯하다고는 생각해. 너희도 한 번쯤은 과연 지상의 종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선조께서 전멸한 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을 거 아니야.”
내 말에 이레네와 메르넬라는 고민 끝에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지상의 종족들을 증오했는데, 그런데 배후가 있을 수도 있다니.”
“그럼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하죠?”
“하?”
이레네와 메르넬라를 바라본다.
그녀들은 흔들리고 있다.
갑작스럽게 증오의 대상이 지상의 종족에서 알 수 없는 배후가 된 것이 혼란스러운 거겠지.
“뭘 어떻게 해. 바뀌는 건 없어. 대반란의 날 배후가 있었다. 그렇다고, 지상 것들이 우리를 배신한 사실이 사라지나?”
지상의 종족에 의해 대반란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바뀌는 건 있지. 만약 그들이 조종당한 거라면, 정상참작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그건 각자의 판단이겠고.”
물론 나야 정상참작을 해줄 생각이기는 하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너희가 어떻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지상의 종족은 정상참작할 거고.
뭐, 사실 이런 건 중요한 게 아니지.
가장 큰 문제는.
“당장은 배후가 있다면 어떤 놈인지 밝혀내야지. 그리고.”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하고 싶지.
정확히는 아르켈은 어떻게 하고 싶을까.
“……죽인다.”
나도 놀랄 정도로 서늘한 단답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것은 내가 한 말이나, 내가 한 말이 아니다.
팬텀 소토르프의 말을 듣고 잠들었던 분노를 터트린, 아르켈의 감정이다.
“나가자.”
여기서 볼 일은 다 봤다.
퀘스트 창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알았어.
이곳은 초대 왕과 관련된 장소가 아니다. 바르바라가 말했던 그런 장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신전은 이곳을 그토록 감시했는가.
뭐, 그것도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후우.”
부정한 자의 검의 주인인 두 번째 선택받은 자.
그자의 행적을 알아본다면 자연스럽게, 신전이 어째서 이곳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했는지 알 수 있을 터다.
***
두 번째 선택받은 자의 정보는 희박하다.
남겨진 기록은 전혀 없고, 그저 전설로만 남았을 뿐인 존재.
그 전설마저도 천족을 배신했다는 일화로, 그의 성검은 부정한 자의 검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래 뭐, 인간에게는 까마득한 오래 전의 일이니 그와 관련된 기록이 남지 않을 만도 하지.
나라가 바뀌어도 여러 번 바뀌었을 시간이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기준이다.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
바르바라가 넘겨준 찻잔을 받아주고 한 모금 마신다. 여전히 맛있는 차다. 대마왕이 손수 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야.
“물어볼 게 있어서.”
“허허. 내게 올 때는 항상 물어볼 게 있구나. 리파가 남긴 것은 찾은 거냐?”
“아니.”
“그래? 그렇다면 아직 날 믿지 못할 텐데, 믿지도 못하는 이에게 무엇을 물어보려고.”
(내가 지금 네 말을 믿을 근거는?)
과거 바르바라가 친절히 내 물음에 답해주었을 때, 나는 저렇게 말했다.
그때 한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나.
“의심했던 건 미안.”
“후후. 농담이다.”
내 사과에 바르바라는 피식 웃어버리고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서 뭘 물어보려고 왔느냐.”
“초대 왕님이 남긴 건 못 찾았지만, 팬텀 소토르프가 남긴 걸 찾아서…….”
쨍그랑,
유리잔이 부서지는 소리가 생생히 귓가에 들린다.
찻잔에서 시선을 돌려 바르바라를 바라본다.
허망하게 남은 찻잔의 잔해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다.
보기 드문, 아니 처음으로 그녀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그 새끼가 뭘 남겼다고?”
“어.”
신전에서 엄격히 관리하는 유적에서 팬텀 소토르프의 환영을 봤던 것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리고 그 유적의 이름이 푸른 카트르이며, 초대 왕과 닮은 인형이 관에 안치되어있었다는 것까지 면밀히 바르바라에게 설명했다.
“그 쓰레기가.”
내 이야기를 유심히,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들은 바르바라는 고개를 숙였다.
“리파에게 사과를 해? 하.”
기묘하게 비틀린 미소와 함께 바르바라는.
“꼴값을 떨고 있구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힘을 방출하고 말았다.
“하.”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뭐야, 이거.”
분명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력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아.
하지만 그 힘에서 범접할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신의 피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부류의 힘이 틀림없어.
이것이 대마왕의 힘인가?
“속죄? 그건 리파가 사라지기 전에 했어야지. 속죄하려면 리파에게 자리를 되돌려 줬어야지!”
힘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주변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져 간다.
차를 따르던 주전자도, 탁자도, 앉고 있던 의자도, 모든 것이.
이제 이 방에서 멀쩡한 것은 오로지 나뿐인가.
“심호흡 좀 하지.”
바르바르가 흠칫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후우.”
그러기를 잠시, 조용히 나를 바라보던 바르바라는 이내 내 충고에 따라 심호흡을 내쉬었다.
“하아. 터무니없구나, 너는. 다이나토스 아니, 소토르프다워.”
뭔데 그 말은
알 수 없는 넋두리하지 말고 정확히 말을 해.
“잠시 기다려 주거라.”
바르바라가 손을 휘두르더니 순식간에 방은 원상태로 돌아왔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노라.”
자리에 앉아 다시금 찻잔을 손에 쥔다.
저러면 내가 아까 했던 넋두리의 의미를 물어볼 수가 없잖아.
“뭔 일 있었어?”
그냥 어깨를 으쓱이고 조금 전에 보았던 것은 못 본 거로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무엇을 묻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더냐.”
아, 그래 바르바라가 가진 힘의 편린을 봐서 여기 온 목적을 잊어버릴 뻔했네.
“두 번째 선택받은 자를 직접 만났던 마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인간에게는 기록조차 남지 않은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하지만 마족은 달라.
우리 다이나토스만큼 오래 살지는 않더라도, 그들 역시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종족이니까.
“남아있겠지? 인간이라면 몰라도, 마족에게는 고작인 세월이잖아. 그렇지 않아?”
“……있다.”
“허풍 빼고 정확한 사실만 말하는 마족이어야 돼.”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정확한 정보를 줄 아이들이 있느니라.”
바르바라는 눈을 감고 천천히 그때의 일을 회상하듯 읊조리며 말했다.
“애초에 두 번째 축제에 참여했던 이들 중 살아남은 내 아이는 오로지 둘 뿐이니라. 심지어 너도 아는 아이들이지.”
내가 아는 마족은 별로 없는데?
“율리히와 베르셀리우스만이 두 번째 축제에서 살아남았느니라.”
아. 과연, 알 만도 하군.
그건 그렇고 하필 율리히라니.
베르셀리우스는 몰라도, 율리히는 저번 일 때문에 만나기가 조금 거북한데.
“가보거라. 궁금한 게 있거든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라. 내가 무엇이든 답하라고 명령했다고 말하고.”
거기까지 말한 후 바르바라는 손을 흔들었다.
나가보라는 뜻이다.
내가 먼저 나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바라가 먼저 나가라고 하다니.
이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궁금한 건 답해줬으니, 이만 가보거라. 혼자 있고 싶구나.”
그래 가봐야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문뜩 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
“물어볼 것이 남았느냐?”
힘이 빠진 듯, 축 처진 목소리와 함께 약간 힘없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녀가 눈에 보였다.
그래 소녀였다.
눈앞의 여성은 분명 나보다도 오래 살아온 존재였으나, 지금 내 눈에는 힘없는 소녀로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메르넬라, 그러니까 지금 내 동포와 초대 왕님의 모습이 너무 닮았어. 그것도 혹시 이유가 있어?”
“그것은.”
바르바라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게 물어볼 일이 아니라, 네가 직접 알아봐야 할 일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