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39. 푸른 카트르(6)
* * *
사명을 알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직감했다.
루이나와 비비안은 저 너머로 가면 안 된다는 걸.
“잠깐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비비안님도요.”
내 진지한 표정에 루이나와 비비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그렇게 메르넬라와 이레네를 데리고 꽃밭 너머로 이어지는 길을 향해 나아갔다.
“벽화네요.”
메르넬라의 말마따나 길의 양옆에 있는 벽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가장 처음 보인 벽화는 단 한 명의 존재가 있었을 뿐이다.
그다음 벽화에는 세 명이 한 명의 존재를 경배하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했던 말이랑 똑같네.”
“네?”
“저거 봐.”
손가락으로 한 명의 존재를 경배하고 있는 세 명을 가리킨다.
“저 날개는 천족의 날개야.”
그 세 명 중 한 명은 분명 천족이었다.
“그리고 저 뿔. 저런 뿔은 마족의 상징이지.”
벽화에 그려진 뿔이 바르바라의 뿔과 흡사하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터다.
저 벽화에 그려진 마족은 분명, 바르바라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벽화에 그려진 세 명 중 마지막 남은 자의 머리에 그려진 것은 필시 헤일로였다.
“다이나토스의 상징인 헤일로까지.”
그렇다면 저 세 명에게 경배받는 존재는, 원래 이 세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창조신일 테지.
“바르바라가 태초에 신이 천족, 마족, 다이나토스를 만드셨다고 말했어.”
이 벽화에 그려진 내용은 바르바라가 해준 말이랑 똑같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것이 초대 왕님이 남긴 것이라면, 퀘스트 창이 떠야 하는데 퀘스트 창은 아직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혹시나 싶어 앞으로 더 나아가려는 때였다.
『그대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우리는 이미 죽었다는 뜻이겠지.』
다시금 리파 소토르프의 환영이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기록된 환영이 나오는 것뿐이야. 소통도 하지 못해.”
이레네를 안심시킬 겸 그렇게 말하며 리파 소토르프를 바라본다.
『태초에 이 세계는 세 차원이 존재했다. 우리를 창조해내신 신께서는 우리에게 각각 차원 하나씩을 맡기셨다.』
그것이 천족이 다스리는 천계, 마족이 다스리는 마계, 마지막으로 다이나토스가 다스렸던 지금의 지상인가.
『천족은 너무나 신을 따랐으며, 우월주의가 강했다. 마족은 자신의 쾌락을 중시하고 제멋대로였다. 때문에, 신께서는 천족과 마족이 다른 종족을 다스릴 그릇을 되지 못한다고, 그렇게 판단하셨다.』
리파 소토르프의 말에 이레네와 메르넬라는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회의적으로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천족과 마족은 다른 종족을 다스릴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그렇다고 다이나토스가 다른 종족을 다스릴 그릇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선조는 다른 종족을 핍박하다가, 대반란으로 인해 멸망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우리 다이나토스가 다스리던 지상에 수많은 종족을 만드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것들을 다스리라고 하셨지.』
리파의 환영은 그 말을 끝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스스로를 비웃는, 그런 미소였다.
『그러나 신께서는 모르셨다. 우리 다이나토스가.』
라파의 환영이 점점 어디론가 향한다. 그 환영을 쫓아 걸어갔다.
복도의 벽화 역시 라파의 말에 따라 지상에 수많은 종족이 창조되는 장면을 여실히 보여줬다.
『힘에 미쳐있다는 것을.』
그리고 리파가 멈춰선 곳에는 다이나토스가 모든 종족을 무릎 꿇린 모습이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처음에는 질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자기변명이라도 하듯, 리파는 씁쓸하게 웃으며 나즈막이 속삭였다.
『신께서는 천족과 마족에 비해 우리 다이나토스를 약하게 창조하셨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보다 약한 것이 싫어, 그들을 이기고 싶어 노력했다. 발전하려고 했다.』
바르바라는 말했다.
다이나토스는 천족이나 마족과 달리 끝없이 발전하려고 했다고.
그러나 바르바라는 몰랐다.
그 발전하려고 했던 이유는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단순한 질투 한 조각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설령.』
라파가 다음 벽화를 가리키자, 나 역시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다음 벽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벽화를 본 순간,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어 입을 벌리고 말았다.
『우리 외의 다른 종족의 희생 하더라도 말이다.』
벽화에는 인체 실험이 자행되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다이나토스가 수많은 종족을 붙잡아 그들의 몸에 무언가를 실행하고 있어.
『우리는. 아니, 나는.』
리파의 환영에서 점점 떨림이 생겨난다.
그 광기에 찬 눈동자를 보고,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힘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천족과 마족을 넘어서고 싶었다. 그래서 신께 내가 제일 강하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신조차 뛰어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신을 뛰어넘고 싶었다고?
『그래서 신의 영역에 발을 내디뎠다.』
리파의 환영을 따라 조금 더 걷자, 벽화에 ‘디오이키시’ 우리가 아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종족이 시험관에서 배양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의 신과 똑같이, 나는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냈다. 내가, 내가 해냈다. 나는 신의 영역에 들어섰다! 하하하하하!』
“하아.”
끝없이 메아리치는 웃음에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도 웃고 있는 리파 소토르프 아니, 리파 소토르프의 모습을 흉내 내고 있는 이의 모습을 바라본다.
“너는 리파 소토르프가 아니야.”
바르바라는 말했다.
우리의 초대 왕은 창조신의 뜻을 받들었다고.
그런 리파 소토르프가 신의 영역에 발을 내디뎠을 리가 없다.
그리고 애초에.
“아래 아이들은 리파 소토르프님이 아닌, 팬텀 소토르프님께서 창조하셨어요.”
메르넬라의 말대로다.
다이나토스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아래 아이들이라는 존재는 팬텀 소토르프 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니 너는, 리파 소토르프가 아니다.
『나는 달라졌다.』
환영의 목소리가 점점 갈라진다.
『천족과 마족의 왕이라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
리파의 환영이, 그 형태가 점점 허물어져.
『신의 영역에 들어서는 것에 성공했다!』
환영의 몸집이 커지고, 목소리는 점점 굵어져 간다.
『신께 선택받은 우리의 왕보다 강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 누구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졌단 말이다!』
환영은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곳은, 초대 왕의 무덤이 아니다.
방금 봤던 시신 때문에 이곳이 초대 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 시신이 진짜 리파 소토르프의 시신인지 확인조차 해보지 않았어.
이곳은, 리파 소토르프의 무덤이 아니라, 팬텀 소토르프의 무덤이었다.
무덤조차 아닐 수도 있다.
『강해지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어. 나는 그것을 믿었다. 내 후손들에게, 우리 종족에 그리 가르쳤다. 힘이 진리이니까.』
우리가 이토록 힘을 숭상하게 된 것도 팬텀 소토르프 때문이었나.
『그래, 그렇게 믿었다.』
팬텀 소토르프의 환영은 힘이 빠진 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나는 힘을 얻었어도, 내가 진정으로 가지고 싶었던 것은 얻지 못했다.』
그의 환영이 저 너머 꽃밭에 있는 리파 소토르프의 시신 쪽으로 향한다.
『그저 그녀를 본뜻 인형을 위로 삼아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나였다니.』
역시 시신조차도 아니었나.
『그뿐 아니라, 나는 주변을 보지 못해 파멸의 불씨를 불러 왔지.』
그날 환상 속에서 봤던 까마득한 구렁텅이를 떠올려본다.
본능적으로 팬텀이 말하는 파멸의 불씨가 그 구렁텅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속죄하려고 한다.』
속죄?
어떻게?
『나의 후예여.』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속죄를 하려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환영이기에 그럴 수도 없다.
『그대의 현 상황이 예상이 가기에 말하마. 지상의 종족을 미워하지 말아다오. 그들은 우리를 죽일 자격이 있었으니까.』
눈이 꿈틀거린다.
저놈이 지금 무슨 말을 한 것인가. 대반란이 일어날 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정확히는 내가 치러야 할 죗값이었지. 내 죄를 대신 치르게 해 미안하다.』
“닥쳐.”
이미 뒤진 주제에 무슨 망발을.
대반란이 일어날 것을 알았으면 미리 대비를 했어야지. 자기 죄를 대신 치르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 한마디로, 죽어 나간 나의 동족들이 이해하고 편히 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건가?
『그래도 지상의 다른 종족이 밉다면, 한 가지만 생각해다오.』
“닥치라고.”
지금은 지상의 종족보다도 니가 증오스럽다.
당장 저 환영을 지워버릴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해, 손을 들어올려 힘을 모으는 순간.
『과연 지상의 다른 종족들이 힘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몰살시킬 수 있었겠느냐. 분명 다른 무언가의 개입이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다른 무언가의 개입이 있었어?”
메르넬라와 이레네를 바라본다. 그녀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눈을 꿈뻑이고 있었다.
이날 이때까지 그저 지상의 종족들이 비겁한 수로 우리의 선조를 몰살했다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팬텀 소토르프의 입에서 나온 진실은, 너무나도 달라서, 그래서 충격적이었다.
『너의 사명을 기억해라. 너는 지상을 다스리는 이다. 지상에 파멸을 몰고 와서는 안 되는 존재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걸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럴 자격도 없는 하찮고 어리석은 왕이나, 너에게 하나 더 부탁하마.』
팬텀 소토르프의 환영이 점점 사라져간다.
『혹시 리파가 살아있다면,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다오.』
그 말을 끝으로 환영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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