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39. 푸른 카트르(5)
* * *
한창 귀신 이야기를 하다가 유적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레네, 그만 좀 매달려요.”
메르넬라는 조금 귀찮다는 듯 이레네를 타박했으나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그러자 메르넬라가 내게 도움을 달라는 시선을 보낸다.
뭐, 이레네가 왜 저러는지 아니까 뭐라고 말하기가 힘드네.
“그럼 팔 좀 살살 잡아요.”
“떨어질 거 같아서 싫습니다.”
무표정으로 또박또박 대답하고 있으나, 이레네의 목소리에는 아주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귀신이 무섭다니.
거참, 어이가 없어서.
“조금만 그러고 있어 줘. 좀 진정되면 놔주겠지.”
그래도 진정되면 알아서 메르넬라의 팔을 놓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이번에는 이레네의 편을 들어줬다.
“네.”
메르넬라는 약간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켈님. 저기 보세요.”
루이나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다섯 개의 발판이 눈에 밟혔다.
“퍼즐이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인가.
“퍼즐이요?”
“그래.”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적에는 최소 다섯 명 이상이 있어야만 풀 수 있는 퍼즐이 존재한다.
그것 때문에 일부러 5인 파티를 꾸린 거다.
그리고 버그인지는 모르겠지만, 게임상에서 이 퍼즐은 이상하게도 인족만이 작동시킬 수 있었다.
동료로 맞이할 수 있는 용이나 천족은 퍼즐을 건드릴 수가 없어.
단순 버그라고 생각하기에 조금 찝찝해서 일부러 인족으로 다섯 명을 꾸린 거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이메로노를 데려왔겠지.
“보안 장치네요.”
메르넬라가 내게만 들리게끔 소곤소곤 말했다.
“보안 장치?”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인족만이 건드릴 수 있는 보안 장치에요. 아마 조상님께서 인족 외에 다른 종족이 들어오지 못하게끔 하신 것 같아요.”
아, 그래서 게임상에서도 용이나 천족은 이 퍼즐을 건드릴 수가 없었구나.
버그가 아니라 설정상 그랬던 거였어.
아니 그럼 게임사 놈들은 왜 그걸 말해주지 않은…….
생각해보니 다이나토스라는 종족이 있는지도 몰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구나.”
메르넬라의 말에 의문이 해소됐다.
자, 그럼. 이제 퍼즐을 풀어야지.
발판을 순서대로 올바르게 밟으면 문이 열리는 퍼즐일 거다.
보통 세 번 정도 틀리면 유적이 붕괴하니까, 여기서는 신중하게 힌트를 찾아서…….
“재미있네.”
게임 내에서는 발판에 쓰인 문자를 읽지 못했다.
그래서 유적에 있는 글자 모양을 힌트로 삼아, 발판을 밟는 방식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네.
[나의 사랑이]
[벼랑 끝에 몰린]
[푸른 카트르]
[무너지는 곳]
[이곳은]
발판에 쓰인 문자는 우리 다이나토스의 언어였다.
“이곳의 이름이 푸른 카트르였나보네요. 낭만적이에요.”
“낭만적?”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 말을 메르넬라를 바라보니, 그녀는 내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슬그머니 웃었다.
“카트르의 꽃말은 사랑이에요.”
아, 카트르가 꽃이었어?
내가 아르켈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르켈은 그다지 꽃에 관심이 없었으니 몰랐을 만도 하다.
“그리고 푸른 카트르의 꽃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랍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무슨 꽃말이 그래? 선물로 줄 수 없는 꽃이잖아.”
“후후. 푸른 카트르는 실존하지 않는답니다, 아르켈님.”
지구로 치면 푸른 장미 같은 건가.
메르넬라와의 이야기를 끝낸 후 뒤를 돌아 이쪽을 바라보는 나머지 세 명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자, 지금부터 한 명씩 이 발판을 밟으면 됩니다. 밟고 나서 가만히 있어야 하니까, 유의해주세요.”
대충 발판에 있는 문장을 조합해보면 세 가지 정도 조합법이 나온다.
[이곳은 벼랑 끝에 몰린 나의 사랑이 무너지는 곳 푸른 카트르]
[이곳은 푸른 카트르 벼랑 끝에 몰린 나의 사랑이 무너지는 곳]
[벼랑 끝에 몰린 나의 사랑이 무너지는 곳 이곳은 푸른 카트르]
뭐, 이 정도가 가장 말이 되는 문장이 되겠지.
“아르켈님.”
“왜.”
“마법으로 분신을 만들어서 밟으면 되지 않습니까?”
“좋은 질문이야, 이레네.”
정말로 좋은 질문이다.
“비비안님. 분신 생성 마법을 사용해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비비안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쯧. 느리군요.”
뭐,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느려 보이기는 하지.
그래도 저 정도면 인간 중에서는 꽤 빠른 편이다.
이거 봐, 영창도 금방 끝냈잖아.
이제 마법이 발동할 차례다.
“어라?”
비비안은 눈을 끔뻑이더니.
“실패할 리가……없는 마법인데…….”
당황스럽다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리고 그런 비비안을 메르넬라는 물론이오, 이레네조차도 무시하거나 깔보지 않았다.
마법은 완벽했으니까.
분명 영창도 완벽했고, 마법진의 형태도 완벽했다.
그런데도 마법이 발동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마법이 발동하기 직전 마법진이 부서졌다.
“당황하지 마세요. 유적에서는 분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니까요.”
정확하게는 공간이동 마법과 분신 마법 둘 다 사용할 수가 없다.
이레네가 분신 마법을 사용하면 되지 않냐고 한 이유는 뻔하다.
분신 마법을 사용하면 굳이 다섯 명을 채울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직접 보여준 것뿐이다.
“이해했어, 이레네?”
“네. 죄송합니다.”
“그럼 내가 말한 순서대로 발판 위에 서자.”
첫 번째 문장 조합 순서대로 발판 위에 서자, 문이 열렸다.
와, 게임에서는 힌트를 찾는다고 개고생을 했을 텐데 이렇게 쉽게 열리니까 뭔가 허무하네.
“아, 아르켈님!”
문이 열리고 내가 곧장 문앞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루이나가 황급히 나를 불렀다.
“왜 그래?”
“함정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함정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유적에 함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 유적은 본디 다이나토스가 지상을 지배할 때 만든 건축물이다.
함정을 설치해놨을 리가 없잖아.
누가 이곳에 들어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유적을 지키는 수호자 같은 존재는 있긴 하지만.
“와.”
“아름답네요.”
“너무 예뻐요.”
그렇게 문으로 들어선 순간, 나를 제외한 여성들의 입에서 하나같이 탄식이 나왔다.
뭐, 예쁘다는 걸 부정하기는 힘드네.
조금 전까지는 칙칙한 벽만 있었는데, 문 너머 공간에는 이렇게 푸른색 꽃으로 가득 찬 꽃밭이 있으니까.
이게 푸른 카트르라는 꽃일 거다.
“하.”
정확하게는 조화인가.
푸른색 보석으로 꽃잎을 만들고, 초록색 보석으로 줄기를 표현하다니.
그야말로 돈지랄의 표본이 아닌가.
감탄하고 있는 여성들을 뒤로 한 채 꽃밭의 길을 따라 앞으로 향한다.
꽃밭의 끝에는 관이 하나 놓여있었다.
“하.”
이 관의 주인이 누구라는 것이 예상이 간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관을 열었다.
“……리파 소토르프.”
역시나 관의 주인은 초대 왕이었나.
그렇다면 이곳은 초대 왕의 무덤이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어째서, 누가 초대 왕의 무덤을 만들었나.
초대 왕의 무덤을 만들고 왜 푸른 카트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가.
“아마 두 번째 왕이겠지.”
부정한 자의 성검에서 봤던 환상을 떠올린다.
우리의 두 번째 왕, 팬텀 소토르프는 리파 소토르프를 적대하지 않았다.
리파 소토르프 쪽에서 일방적으로 팬텀을 적대했을 뿐이다.
오히려 팬텀은 리파 소토르프를, 좋아하고 있었다.
“메르넬라! 이레네!”
“네, 아르켈님. 어?”
“허억.”
내 부름에 곧장 달려온 메르넬라와 이레네가 열린 관의 시신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겠지, 이 관의 시신이 자신과 굉장히 닮았으니까 놀랄 만도 하다.
“초대 왕, 리파 소토르프님의 시신이다.”
“초대 왕님이시라고요?”
“그래 그 날 봤던 환상의 모습과 일치해.”
그러자 이레네와 메르넬라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초대 왕님께서 메르넬라님과 이렇게 닮았다니.”
우리 역시 초대 왕의 얼굴은 몰랐다. 그래서 이렇게 놀라고 있는 것이고.
그러나 당장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메르넬라.”
“……네.”
“초대 왕님은 두 번째 왕님께 패배하시고 어떻게 되셨지?”
다이나토스의 역사에 대해서는 메르넬라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그 이후 행적에 관해 서술된 책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두 번째 왕과의 결투에서 돌아가신 건 아니고?”
“네. 그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중에 팬텀이 리파 소토르프의 시신을 찾아서 이런 거창한 무덤을 만들어준 건가.
리파를 사랑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서?
의문이 의문을 물며 새로운 의문을 자아내던 그 순간.
『우리의 후예가 찾아왔나 보구나.』
다시금 리파 소토르프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났다.
“히이…….”
“아, 아파요!”
그 모습을 본 이레네가 메르넬라의 팔에 매달렸으나, 그 소리를 무시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리파 소토르프님이십니까?”
『앞으로 나아가라. 너의 사명을 알아라.』
단순한 환영인가. 소통은 할 수 없나 보다. 그나저나 앞으로 나아가라니, 더는 앞으로 갈 곳이 없어 보이는데.
그런 의문이 들자마자,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사라지며 꽃밭의 길이 이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