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39. 푸른 카트르(4)
* * *
마을로 돌아간 후 우선 마법사 길드에 있는 비비안을 불러냈다.
“갑자기 불러서 죄송합니다, 비비안.”
“빚을 갚을 때라고 했으니 당연히 와야죠.”
그런가?
하긴 이세계관의 마법사는 빚지고는 못 사는 종속들이기는 하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들은 누구시죠?”
그러고 보니 서로 소개를 하지 않았구나.
루이나는 비비안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눈치지만, 메르넬라와 이레네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에 약간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이쪽은 이레네, 루이나, 메르넬라라고 합니다. 이쪽은 비비안. 마법사 길드의 마스터고, 우리 파티의 마법사가 돼주실 분이야.”
“파티요?”
아, 비비안한테는 말을 하지 않았었구나.
우선 대충 사정을 설명해줘야겠다.
“빚을 갚는 조건이 고작 고대 유적에 같이 들어가는 거였어요?”
대충 유적을 공략할 생각이라 5인 파티가 필요하다고 설명하니 비비안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거야 갑자기 유적을 공략한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
“네.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을 살펴볼 생각입니다. 당연히 거기에도 동행해주셔야 하고요.”
문제는 당장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거다.
추가 설명에 비비안은 눈을 찌푸렸다.
음, 이걸 도와주기에는 빚이 조금 부족한가?
“도와주신다면 새로운 마법서도 구해다 드리죠.”
에이글이 만든 마법서야 수없이 많다.
그 중 하나 정도 주는 거야 아무 일도 아니다.
마법사라면 에이글이 만든 마법서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알테니 거절하지 않겠지?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내 생각과 달리 비비안은 고개를 저었다.
어라? 생각과는 다른데.
설마 너무 바빠서 유적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하려는 건가?
“드래곤 하트는 물론이고, 주신 마법서를 탐구할수록 너무 큰 빚을 졌음을 알았어요. 그런데 고작 유적에 같이 들어가는 거로 빚을 청산할 수 있다고 하셔서 당황스러웠던 거예요.”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우리 다이나토스에게는 에이글의 마법서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인간 마법사에게는 내 생각보다도 더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나 보다.
하긴 드래곤 하트를 거의 거저 넘겨줬으니 빚은 충분하다고 봐야겠지.
“얼마든지 같이 갈게요. 유적에서 얻은 물건에는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을 거고요.”
“감사합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그럼 파티도 확인했으니 당장 떠나보실까.
“따라오시죠.”
앞장서서 포탈로 향한다.
비비안이나 루이나에게는 내가 마법을 쓸 줄 아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얌전히 걸어가도록 하자.
“아르켈님.”
포탈로 가던 중 메르넬라가 옆에 붙더니, 은밀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때 에이글이 재미로 만든 마법서를 준 인간이 저 여자였나요?”
“응.”
루이나랑 다르게 비비안은 상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다.
드래곤 하트도 줬으니 이제 마나도 충분하겠다, 그럴듯한 마법서만 있으면 실력 부분에선 날아오를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분명 한 사람 몫은 하겠지.
“혹시 저 여자에게도 마음이 있으신가요?”
아. 오랜만에 보네, 흑화 메르넬라.
죽은 동태 눈깔을 하고 나를 바라보는 메르넬라를 보고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예전에는 저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뭐랄까 이것도 귀엽다는 느낌이다.
“없어, 없어.”
그리 말하며 손을 들어 메르넬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이보다 더 부끄러운 짓도 많이 했으면서 뭘 이 정도로 얼굴이 빨개지는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네.”
진심이다.
물론 게임에서 비비안은 좋아하는 NPC 중 한 명이기는 해.
하지만 지금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여자라기보다는, 유적 공략에 필요한 동료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까?
“두 분은 연인 사이신가요?”
아 너무 노골적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나.
비비안이 저렇게 물어볼 만도 하다.
그리고 그 물음에 메르넬라의 얼굴이 한층 더 사과처럼 익었다.
“예.”
연인이라는 걸 숨길 이유가 없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울리는 한 쌍이세요.”
그 뒤로 비비안과 메르넬라가 이야기 하는 것이 들렸다.
아무래도 메르넬라는 비비안이 조금 마음에 들었나보다.
***
“이 땅굴은 마법으로 판 게 아니네요…….”
비비안은 질렸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확실히 그럴 만도 하다.
나랑 이레네가 힘을 합쳐도 그렇게 힘들게 팠는데, 보통 인간이 이 정도 땅굴을 파려면 얼마나 걸리겠어.
“차라리 저를 부르시지 그랬어요.”
더군다나 마법사의 입장에서 보면 굳이 이렇게 단순무식하게 막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할 것이고.
“이 앞은 누군가가 감시하고 있습니다.”
“누가요?”
“그건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혹시나 신전을 언급하는 순간 비비안이 도망칠 수도 있어서 이 부분은 일부러 말을 흐렸다.
뭐, 계획대로 되면 들키지는 않을 테니까 상관은 없겠지.
“게다가 마법 탐지 장치도 있어요. 그래서 직접 땅굴을 판 겁니다.”
“그렇군요.”
마법 탐지 장치까지 있다는 말에 비비안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분명 위험을 감지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비비안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이걸 아르켈님이 직접 파셨다고요?”
메르넬라는 깜짝 놀라고는 내 손을 잡고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왜 그런 사서 고생을…….”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메르넬라.
아니 이런 땅굴 조금 팠다고 내 손에 뭐 굳은살이나 박혔겠어?
“크흠. 저쪽이 유적으로 통하는 마법진이 있는 입구입니다.”
헛기침하며 메르넬라의 손을 치우고 입구를 가리켰다.
유적의 벽을 파괴하고 싶지는 않아서, 일부러 입구를 찾았다.
저 입구를 찾는 것도 꽤 시간이 걸렸지.
“고대 마법이네요. 세상에 어떻게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거지?”
순간이동 마법진을 보자마자 비비안이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마법진을 살핀다.
마법사로서 호기심을 느끼는 건 이해하겠는데, 그럴 때가 아니다.
“자 잠시 주목.”
일행의 시선을 내쪽으로 모은다.
지금부터 유적에서 주의할 점에 대해서 말해야, 공략 성공률이 올라갈 것이다.
“말씀하세요, 아르켈님.”
“마법진을 통해 유적으로 이동하면 어쩌면 저희가 나뉠 수도 있습니다.”
이곳은 게임에서는 없던 유적이다.
어떤 유적인지 어떻게 공략해야 하는지 공략에 얼마나 걸리는지 내 머릿속 데이터에 아무런 정보가 없다.
“만약 저희가 나뉘었을 경우, 그 자리에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괜히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함정에 걸리거나 몬스터를 만날 수도 있다.
그 경우 우리 다이나토스야 문제가 없지만, 비비안과 루이나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찾아갈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거다.
“하나 더 참고로 유적의 벽은 부술 수 없습니다. 괜히 힘 빼지 마세요.”
음. 평범한 인간은 절대로 이 유적의 벽을 부술 수 없다.
그럼 우리들은?
우리들이야 힘을 사용하면 부술 수는 있지.
하지만 메르넬라와 이레네는 결코 유적을 파손하려고 들지 않을 거다.
감히 조상의 흔적을 파손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나는 뭐…….
유적 공략을 위해 필요한 필수 퍼즐 혹은 열쇠가 손상될 수도 있으니 유적을 파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마지막으로 여기 식량이 든 가방입니다. 잘 가지고 계세요.”
물과 식량이 든 가죽 가방을 루이나와 비비안에게 줬다.
이레네와 메르넬라는 이런 게 필요 없을 거다.
각자 아공간에 챙길 건 챙겼을 테니까.
“질문 있나요?”
내 물음에 비비안이 손을 들었다.
“혹시 떨어지게 돼도 통신 마법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글쎄요. 그런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유적도 있어서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시도는 해봐도 좋습니다.”
“알겠어요.”
자, 그럼 할 말도 다 했겠다.
“그럼 들어가죠.”
나는 제일 먼저 순간이동 마법진으로 발을 옮겼다.
***
유적.
고대 우리의 제국의 건물 양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는 장소.
던전 자하드 내에서는 특수한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던전으로 취급되는 장소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적에 특수한 아이템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 아니지, 이 세계의 종족들은 아직도 이곳에 잠든 고대 제국의 기술력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으니까.
“여기가…….”
“아….”
메르넬라와 이레네는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유적의 모습을 바라본다.
심정은 이해가 된다만, 일단 감동은 잠시 접어뒀으면 좋겠다.
뒤이어 루이나와 비비안까지 도착한 것을 확인한 후 턱을 쓰다듬었다.
“불이 있네요. 저 등불은 어떻게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걸까요.”
비비안의 말은 무시하기로 하자.
“……우선 떨어지지는 않았네.”
일행이 서로 갈라지는 형식의 유적은 아니다.
다만, 근처에 순간이동 마법진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돌아갈 길은 없다는 뜻이다.
공략에 성공해야만 나갈 수 있는 유적인가.
혹시나 싶어서 식량과 물을 여유롭게 가져오기를 잘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어?”
어떤 식으로 앞으로 나아갈까를 생각하던 중이었다.
메르넬라와 닮은 인영이 잠시 내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귀신이 있는 건가요?”
“여자 귀신 같았어요.”
너무 순식간에 사라진 지라 나 말고 다른 사람은 그 인영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나 보다.
“아무래도.”
메르넬라와 닮은 인영은 분명 저번에 부정한 자의 검을 통해 봤던 환상 속의 그 여인이었다.
우리의 초대 왕인 리파 소토르프임이 틀림없다.
“제대로 찾아왔나본데.”
이 유적이 초대 왕과 관련이 있는 유적임이 분명한 증거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