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38. 그들은 선(Goodness)이다(6)
* * *
“어차피 때가 오면 죽을 것들이다. 지금 죽나, 이후에 죽나 마찬가지일 뿐.”
“이 지상은.”
“멸망해야 하는 것이 순리이니까.”
천족의 목소리가 공명하여 메아리친다.
“너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마찬가지다.”
“지금부터 너를 멸하겠다.”
아, 그러십니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말았다.
신의 사자라는 것들이 그렇게 인간을 쉽게 죽이려고 하면 안 되지.
최소한 용서해주는 척이라도 해보려고 하던가.
더군다나.
한숨을 내쉰 후에는 나도 모르게 싸늘한 시선으로 천족들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라를 신뢰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대마왕은 아르켈보다 더욱 오래 살았다.
누군가를 속이고 이용하는 것에 도를 튼 존재일 테니까.
하지만 저것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내 의심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바르바라의 말대로 천족은 이 지상을 멸망시키려 하고 있다.
대청소라는 명목 아래 말이지.
그리고 아마도 나는 그걸 막아야만, 이 게임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누가 왜, 어떻게, 어째서 이런 판을 짜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보여줘야지.
“무엇이 그리 웃기지?”
“죽음의 공포에 실성이라도 한 것인가?”
응? 아, 나도 모르게 웃어버린 모양이다.
그런데 그게 뭐.
내가 웃겠다는데, 왜 너희가 그걸 지적하고 있어.
어이가 없어서 또 웃음이 나오네.
“그럼 웃기지 안 웃기냐.”
그냥 미소가 아닌, 비웃음을 머금는다.
“그걸 위협이라고 하는데 내가 웃기지 않고 배기냐.”
눈앞의 천족은 딱 봐도 그리 강한 것들이 아니었다.
하긴 스무 명의 목숨을 제물로 삼아 나온 천족이 강하다고 해봐야 얼마나 강하겠어.
“별것도 아닌 놈들이. 그딴 알량한 힘으로 위협하는데, 존나 웃기지.”
대천사가 온다고 하더라도 내 상대가 될 수 있을까, 말까인데.
너희 같은 하급 천족이 위협을 해봐야 내가 눈 하나 깜빡하겠냐고.
“무엄하다. 감히 필멸자 주제에 감히 우리를 능멸하려고 드는가!”
격분한 천족 중 한 명이 날카로운 창을 내게 겨누고는 날아들었다.
딴에는 나를 죽이겠다고 오는 거 같지만, 그렇다면 실망스럽다.
놈의 속도는 지금의 루이나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루이나가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면 저 정도 속도는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을 터다.
문뜩 바르바라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인족이 무서운 이유가 끝없이 발전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럼 반대로 말해서.
발전하려는 욕망이 없는 천족과 마족은.
태어난 순간 재능의 여하로 강함이 정해지는 건가.
“어, 어떻게…….”
떨림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죽었는지 모르고, 분노한 표정을 지은 채로 허무하게 떨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는 목이 보였다.
딴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날아든 천족을 죽인 건가.
정신 차리자. 이렇게 쉽게 죽이면 안 된다.
이제 딱히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어졌지만, 저것들은 모두 정보 덩어리다.
천족이 대청소를 위해 무슨 계획을 하고 있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다.
물론 하급 천족이니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실낱같은 정보 한 조각이라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정보 하니까 또 떠오른 게 있다. 이것들을 정리하고 나서 대사제의 방도 뒤져 봐야지.
“……다음.”
그럼 우선 빠르게 제압할까.
“다음 안 나와? 한 번에 덤비던가.”
“네놈, 정체가 뭐냐.”
“하아.”
어째 반응이 다 저렇게 한결같을까.
“이것들은 사제도 그렇고 니들도 그렇고 상황 파악이 그렇게 안 돼?”
제발 상황 판단을 좀 해라.
내가 왜 너한테 내 정체가 뭔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지금 너희가 질문할 상황인 것 같아?”
도망을 치던지. 아니면 한 번에 덤비던지. 바로 기습을 하던지.
내가 당장 떠올린 선택지만 하더라도 세 가지가 넘는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게 질문이냐?
“아, 올려다보려니까 목이 아프네.”
생각해보니까 내가 왜 저것들을 올려다보고 있어야 돼.
“내려와.”
중력을 조작해 남은 천족들을 땅에 처박았다.
그리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일어나지도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는 천족들을 바라본다.
“질문은 서로 동등한 처지 혹은 상대보다 내가 위인 상황에서나 할 수 있는 거다. 이 비둘기 새끼들아.”
“네놈, 당장 풀지 못할까! 우리 천족이 너를 가만히 놔둘 것 같으냐!”
이런 상황에서도 꽥꽥 소리를 지르는 거 보소.
“비둘기 날개를 달아서 대가리도 새대가리인가.”
어쩜 이렇게 대사제랑 반응이 비슷한지 모르겠어.
“내가 너희를 어떻게 하든, 다른 천족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
오늘 밤 내가 이곳에 온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여기에 남는 증거는 인멸하면 그만이다.
“너희 중 한 명이라도 나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혹여나 한 명이라도 이 자리에서 도망쳤다면 또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안타깝게도 도망칠 시간에 멍청한 질문을 해댔으니.
하기야, 그때 도망쳤다고 해도 내가 바로 제압했겠지만.
“하. 이래서 열등 종족이란.”
“응, 그럼 너는 열등 종족한테 제압당한 비둘기겠네?”
“닥쳐라! 우리가 죽는다고 그 사실을 알아내지 못할 것 같으냐!”
“과거의 기억을 읽는 천족이 기억을 읽어줄 것 같냐? 그게 너의 알량한 믿음이냐?”
내 물음에 천족들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너희가 믿는 게 딱 그 정도지.
“마법으로 공간의 기억을 지우면 그만이야.”
고도로 발전한 마법은 어떤 것이라도 할 수 있다.
공간의 기억을 읽어낸다면, 공간의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 역시 가능할 수밖에 없잖아.
“헛소리하지 마라. 마법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느냐!”
“그거야 차차 알게 되겠지. 천족들이 너희를 구하러 오면 니네 말이 맞는 거고, 아니면 내 말이 맞는 거고.”
응? 왜 그런 벙찐 표정을 지어.
“구하러 온다고? 네놈, 설마 우리를 생포할 생각이냐?”
“당연한 거 아니야?”
애초에 생포할 생각이 없었으면 그냥 바로 죽였지.
이것들은 내가 지들을 못 죽여서 이렇게 속박하고 있는 줄 알았나?
도대체 얼마나 새대가리인 거야.
“그, 그만둬라!”
“하등 종족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여라!”
“하아…….”
왜 그렇게 이해를 못 할까.
너희가 지금 나한테 무슨 요구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는 걸.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인가.
이런 상황에서조차 자신들이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사상에 빠져서 저러는 걸까.
아, 모르겠다.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닥쳐.”
너무 시끄럽다는 거다.
“풀어라!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하등 종족!”
닥치라고 했는데도 닥칠 생각을 안 하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정지.”
마법으로 천족의 몸에 흐르는 시간을 멈췄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아공간에 넣어 놨다가 나중에 다시 꺼내면 되겠지.
“자, 그럼.”
심문할 천족도 확보하겠다. 아리아를 납치하려던 흑막도 처리했겠다.
이제 여기서 볼 일은 끝……이 아니구나.
“우선 대사제의 방부터 조사해봐야지.”
혹시 모를 실마리가 있을 수도 있다 싶어서, 지하의 공간을 뒤로하고는 대사제의 방으로 가기 직전.
“저건 철거.”
손을 휘둘러, 흉측한 기둥을 모두 부순 후 지하에서 빠져나왔다.
“보자.”
지금 보니까 사제가 생활하는 방이라기엔 외관이 화려하다.
신전에서는 분명 탐욕은 멀리하라고 가르치는 거로 아는데.
정작 대사제가 이런 화려한 방에서 살았다니, 어이가 없다.
“음…….”
딱히 뭔가 실마리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사제인 주제에 대신전에서 온 편지도 한 통 없다니.
“어?”
잠깐만.
추기경 후보에 들어갔다는 놈이 대신전에서 온 편지가 없을 리가 없잖아.
그렇다는 건 편지를 태웠다는 건데.
“저긴가.”
방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난로를 바라보았다.
편지를 태우기에는 안성맞춤인 도구다.
“제발 있어라.”
형체만 알아볼 수 있는 종잇조각 하나만 있으면 된다.
종잇조각이라도 있으면 마법으로 복원하면 그만이니까.
반대로 화로를 청소해서 흔적조차 없으면 복원도 할 수 없어.
그러니까 제발.
“쯧.”
내 바람과는 다르게 혹시나 화로는 깨끗했다. 오늘 청소라도 한 듯이.
쓰레기통이라도 뒤져볼까?
혹시나 싶은 마음에 방에 딱 하나 있는 쓰레기통을 뒤집어엎어 보았다.
“뭐야.”
쓰레기 중에서 타다가 만 종잇조각 하나가 살랑살랑 허공을 타고 내려온다.
“이게 있네?”
이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지.
종잇조각이 태워지기 전, 온전히 편지였던 형태로 시간을 되돌린다.
조금 시간을 돌리자, 종잇조각은 편지 한 장이 돼 있었다.
===
하신 날이 다가오신다고 합니다.
그분께선 힘을 회복하고 계신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세요.
그리고 근처의 던전 정도는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세요. 그런 것까지 제가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건가요? 그래서야 추기경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조언을 해주는 제 입장도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우리가 관리 중인 유적에 침입하려는 모험가가 있어서 얼마나 피곤한 줄 아십니까?
모험가 놈들은 전부 얼어 죽었으면 좋겠어요. 말이 좋아 모험가지, 제가 보기에는 그냥 무법자에 불과합니다. 왜 나라에서 이런 놈들을 관리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썼으니 더 쓰는 건데, 도대체 교황 성하께선 왜 이 유적을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것도 우리가 이 유적을 관리하는 줄도 모르게끔 관리하라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저도 모르게 불평을 너무 많이 적었군요.
그러니 앞으로는 저를 그만 괴롭혀주시길 바랍니다.
이 편지는 평소처럼 처리하도록 하세요.
===
”……대신전에서 온 편지는 아니네.”
편지를 대충 읽어보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아마도 편지가 여러 장이었던 것 같다.
이전 장에는 제법 그럴듯한 내용이 쓰여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 편지 한 장으로는 정보를 알 길이 없다.
이것 말고는 쓰레기 중에서 딱히 종잇조각이 보이지도 않고.
좀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나. 다른 다이나토스한테 천족 심문을 맡기고 우선은 기약 없는 유적 탐사를…….
“……잠깐만.”
대신전이 관리하는 고대 유적이 있다고?
그런 내용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정보가 있었잖아.”
대신전이 비밀리에 관리하는 고대 유적. 딱 봐도 수상한 냄새가 난다.
그곳이 바르바라가 말한, 첫 번째 왕께서 남긴 것이 있는 유적이 아닐까.
“조사해볼 가치는 있어.”
당장은 그 유적의 위치조차 특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무언가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좋아.”
제법 괜찮은 수확도 있었으니 이제 슬슬 떠나볼까.
“아, 떠나기 전에.”
혹시나 진짜로 천족이 조사를 하러 올 수도 있으니까, 공간의 기억은 지워놓도록 하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