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38. 그들은 선(Goodnes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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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일까. 분명 나름 할 걸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점점 할 게 많아져 가고 있다. 처음에는 던전을 살리려고 바쁘게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 분명 그랬을 건데 이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나를 머리 아프게 만드는 중이다.
현재 신경 써야 할 것만 해도 세 가지에 이른다.
하나는 던전. 제대로 운영하지 않아서 던전이 망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 신경을 써야 한다.
두 번째는 선택받은 자와 부정한 자의 검. 두 번째 선택받은 자의 검이 어째서 부정한 자의 검이라 표시되는 것인지, 그리고 어째서 다이나토스의 초대 왕에 관련된 기록이 저장돼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세 번째는 초대 왕이 남긴 무언가. 이건 우선은 고대 제국의 유적을 돌아다녀 볼 계획이기는 한데, 그 유적에서 발견할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 든다.
“흘려냈어…….”
그래도 희망적인 건 루이나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것 정도일까. 내가 자작위를 받고 고작 이틀이 지났을 때 루이나는 드디어 이레네의 첫 검을 흘려내는 데 성공했다.
“한 번 막은 정도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고작 한 번입니다, 계속하죠.”
“거기까지.”
“예? 아르켈님! 어째서!”
뭐가 어째서야.
“대결이 아니라 수련이었잖아. 그리고 간신히 첫 일격 한 번 받아낸 거 가지고 뭘 그렇게 집착해. 한 번 흘려냈으면 됐어.”
루이나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 대략 이 주 정도가 흘렀나.
“재능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네요.”
“그러게.”
적어도 아래 아이들보다는 재능이 있는 편이기는 하지. 그건 그런데.
“그 꽃은 언제까지 들고 있을 생각이야?”
오늘 아침 메르넬라와 이레네의 살의를 훈련하고자 마을에 들렸다. 그런 와중에 메르넬라는 마을의 아이들에게서 꽃을 받았다.
예쁜 누나한테 주는 선물이라나, 뭐라나. 그걸 점심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저렇게 손에 들고 있는 거다. 저 정도면 꽤 마음에 든 게 아닌가 싶어.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고민 중이에요.”
“고민할 거 뭐 있어. 마음에 들면 화분에 꽂아두면 되지.”
“하지만 증오스러운 인간이 준 꽃이잖아요.”
“고작 4~5살 꼬마들이 증오스러워? 걔들은 아무것도 안 했고, 니가 예쁘다면서 꽃까지 줬는데도?”
“……후우.”
곧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않나, 싶어. 지금으로써는 칼같이 증오스럽다고 대답하지 않고 저렇게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
“어?”
순간, 나쁜 감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단순한 예감이 아니다. 이 감각은 분명 내가 설치해놓은 마법이 발동한 거야.
“왜 그러세요, 아르켈님.”
메르넬라를 바라본다. 지금 루이나와 메르넬라 그리고 이레네까지. 이 셋을 한 자리에 내버려두고 떠날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 다.
루이나가 죽을지도 모르는 도박을 할 필요가 없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자.”
마침 루이나가 이레네의 첫 일격을 막아냈으니, 여기서 수련을 멈춘다고 해도 딱히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거다.
“루이나는 나 따라오고, 메르넬라랑 이레네는 던전으로 가 있어.”
“저도 같이…….”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 그래. 던전에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요.”
메르넬라를 납득시킨 후 이레네와 함께 던전으로 이동시키고 루이나를 바라보았다.
“마을에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원래 없었지만, 바로 아까 볼일이 생겼어.
“루이나.”
“네, 말씀하세요.”
“마을로 이동하자마자 경비병 모아서 신전으로 와.”
“네?”
“설명해줄 시간 없어. 바로 이동한다.”
루이나의 손을 잡고 곧바로 마을로 이동했다.
“최대한 빨리 와.”
루이나를 마을 한복판에 놔두고 곧바로 신전을 향해 뛴다.
나에게 있어 던전과 신전의 공통점은 내가 손을 댄 여자들이 있는 장소다.
내 여자는 당연히 내가 지켜야지.
그런 생각에 던전의 가장 안쪽과 신전에 결계를 설치해놨었다.
결계의 효과는 미미하다. 명백히 적의를 가진 이를 포착하는 정도다. 겨우 그 정도 효과이기에 탐지 마법에도 들키지 않을 그런 소소한 결계를 설치했었는데.
그런 생각을 한 과거의 나를 칭찬해야 할까. 아니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리아가 위험하다는 거다. 누군가가 이 백주대낮에 명백한 적의를 품고 신전으로 들어갔다.
“아리아!”
“으으읍! 읍!”
신전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피 냄새가 반겨줬다. 신전에 방문한 두 모험가의 시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다섯 사내의 손에 보따리 넣어지려고 하는 수녀복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 보인 순간.
“어떻게 할까요, 형님.”
“목격자는 죽인다.”
“예.”
대충 상황이 파악되네. 아니 상황이 파악되기는 무슨.
그저 저것들이 감히 아리아를 건드리려고 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감히 나를 죽인다고 말한 것도, 감히 나를 향해 적의를 보인 것도 용서할 수 없으나.
저것들을 죽일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아리아를 손댄 것만으로 충분했다.
“우선.”
저것들이 아리아를 인질로 잡을 수도 있다. 그러니 검을 뽑지도 않았다. 괜히 아리아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이 싫었으니까. 그러니 손을 뻗어 마법을 시동한다.
“마법사다. 전원 흩어져.”
흩어져? 어떻게 흩어질 수 있단 말이냐. 이미 마법의 시동은 끝났다. 단지 한 마디 명령만이 남았을 뿐.
“멈춰.”
괴한들은 단 한 번의 마법에 입조차 굳어버려 그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도 허락받지 못한 꼴이 되어버렸다.
“으으읍…….”
“아리아.”
급히 아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줬다.
“후우, 고마워요. 아르켈.”
“괜찮아?”
“네. 덕분에 살았어요.”
“다행이다.”
진짜로 다행이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아리아는 계속해서 몸을 떨고 있다. 그만큼 무서웠다는 거겠지.
“저분들은 어떻게 된 거죠?”
아리아는 저를 납치하려고 했던 괴한들을 바라보았다.
“몸과 심장을 굳게 만들었어. 저대로 내버려두면 고통스럽게 죽을 거야.”
불법 침입에 납치까지 하려고 했으니 죽여도 별 상관없겠지.
“맙소사. 사람을 죽이면 안 돼요. 아르켈.”
하아?
“널 납치하려고 한 인간들을 왜 걱정해?”
설마 성직자라서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저는 저 사람들을 걱정하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걱정되기에 하는 말이에요. 당신은 신께 인정을 받은 마족이에요. 그러니 저 때문에 인간성을 버리지 말아줘요, 아르켈.”
아……. 설마 이런 식으로 업보가 올 줄은 몰랐네. 아리아가 저렇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업보가 이렇게 터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하아. 그래 뭐.”
그럼 ‘지금’은 잠깐 살려두도록 할까. 그래 굳이 아리아 앞에서 죽일 필요는 없지.
“커헉.”
“허어, 허어억.”
마법을 푸니 괴한들이 급히 숨을 몰아쉰다. 뭐 딱 그거밖에 못 하지.
그래 당장은 말도 못하고 몸이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원래 한 명쯤은 심문해야 해서 살려둘 생각이긴 했으니까. 심문을 다 하고 나선 죽이려고 했지만. 그래 당장 한 명이나 다섯 명이나 살려두는 건 똑같지.
“아리아. 저것들이 왜 너를 노린지 알아?”
“하, 한 가지 집히는 게 있어요.”
엥? 딱히 기대하지 않고 물어봤는데 있다고?
“집히는 게 있다고? 어디서 원한이라도 산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아리아는 너무 올곧아서 원한을 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며칠 전에 대사제님이 이곳에 오셨었어요.”
“대사제?”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바르크 백작 영지 신전의 대사제님이요.”
“아.”
그럼 아리아의 전 상관이 되는 건가? 신전에서 상관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비슷한 관계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런데?”
“그게…….”
이어지는 아리아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나로 인해 남자를 알게 된 아리아는 대사제가 자신에게 정욕을 느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대로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서 도망치듯이 우리 마을로 왔다라. 그래서 내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 거였구나.
그것보다.
“그래서 그 대사제라는 놈이 와서 뭐라고 했는데.”
“다시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당연히 전 거절했는데 그래도 계속 저를 설득하시더니…….”
“설득하더니.”
“제가 계속 싫다고 하니까, 그 선택을 후회할 거라고 말하고서는 떠나버리셨어요.”
거참,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네. 너무 뻔한 대사라서 질릴 정도로 전형적인 대사야.
“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바로 말해줘. 이럴 때 연락하라고 수정구를 준 거니까.”
“죄송해요.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너한테 연락 오는 거면 안 귀찮아. 이런 일이면 더더욱 그렇고.”
아, 이렇게까지만 말하면 괜히 아리아를 탓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구나.
“그리고 죄송할 필요 없어. 아리아 잘못이 아니잖아.”
“……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아리아의 안심하는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말을 덧붙이는 게 정답이었던 것 같다.
그나저나, 대사제라. 물론 이것들이 대사제의 의뢰로 찾아왔는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거의 맞는 것 같기는 해.
그럼 그 새끼를 어떻게 처리할까. 아니 이건 나중에 고민해도 될 문제야. 지금 당장은 저 괴한 새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잘 처리했냐고 소문도 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게 중요하지.
“크으윽.”
말도 못하는 것들이 뭘 그렇게 무섭다는 듯이 나를 쳐다봐. 진짜 무서운 건 앞으로인데, 굳이 지금부터 그렇게 볼 필요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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