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화 〉 37. 부정한 자의 검
* * *
“포탈 운영 허가서예요.”
마참내.
드디어 허가를 받았구나. 와, 길었다면 길었다. 포탈이 완공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허가를 받는 건 또 다른 일이라서 굉장히 길게 느껴졌어.
이것도 벨라트릭스라는 뒷배가 있어서 빠르게 허가를 받은 거지 그녀가 없었더라면 몇 달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칭찬이라도 해줄까?”
“됐거든요.”
유감. 진심으로 칭찬해주고 싶었는데 말이야. 뭐, 됐다고 하니까 안 해줘도 상관없겠지.
“그런데 루이나는 알고 있지만, 옆에 두 분은 누구시죠?”
“아. 인사해. 여긴 메르넬라. 그 옆은 이레네.”
“안녕하세요. 벨라트릭스 호케트라고 해요.”
“또 여자…….”
아, 메르넬라의 눈빛이 위험하다. 여자만 보면 아주 그냥 날 죽이려고 드는구나. 이런 메르넬라가 내 옆에 철썩 붙어 있는 덕분에 며칠 동안 아리아를 못 만나고 있다.
“메르넬라. 호케트 공작부인이셔.”
“아. 결혼하셨군요? 메르넬라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결혼한 여자라는 걸 알자마자 저렇게 화색이라니.
“예? 예. 저도 잘 부탁드려요.”
메르넬라의 태도 변화가 너무 극적이라서 벨라트릭스가 따라가지를 못하고 있다.
“이레네입니다.”
“이레네가 꼬마처럼 보여도 우리 셋은 나이가 비슷해. 둘 다 나랑 실력도 비슷하고.”
“히익. 괴물이 세 명.”
방금 실례되는 말을 하지 않았어? 사람한테 대놓고 괴물이라니. 아니 다이나토스 입장에서는 실례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칭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하긴 벨라트릭스는 내가 고룡을 혼자서 토벌한 걸 알고 있으니까. 나 정도 실력자가 세 명이라는 사실에 무서울 만도 하다.
“괴물이 맞긴 하지요.”
루이나가 짜게 식은 시선으로 우리 셋을 바라본다. 왜 저러느냐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그녀는 며칠이나 이레네에게 두들겨 맞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상처가 하나도 없는 이유는 메르넬라가 깔끔하게 치료해준 덕분이다.
“할 말이 있는데요.”
“뭔데?”
“오라버니 아니, 국왕 전하께서 포탈 허가서를 빨리 내주는 대신 조건을 붙였어요.”
조건? 갑자기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신을 보고 싶데요.”
“국왕 전하가?”
“네. 저희 남편도 보고 싶다고 하고요.”
역시. 왜 이런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 걸까. 루이나를 가르치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전적으로 이레네가 바쁜 편이기는 하지만, 이레네와 메르넬라가 폭주할 것을 대비해서 항상 옆에 있어야 해서 나도 바쁘다.
그리고 슬슬 비비안이 고룡의 심장을 전부 흡수할 때도 되지 않았나? 바쁜 사람 오라가라 하는 거 맞아?
“음.”
그래도 가기는 해야겠지. 포탈 허가권은 그만큼 중요하니까. 하지만 나 혼자서 불쑥 찾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손님이 늘어도 상관없으면 가도 돼.”
“손님이요? 설마.”
“어. 내가 어디 가려면 애들도 데려가야 하거든.”
루이나는 상관없지만, 메르넬라와 이레네는 반드시 데려가야 한다. 이 둘을 내버려뒀다가 살의를 참지 못하면 진짜 답도 없어. 며칠 동안 그런 기미가 보이지는 않았다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잠시만 기다려봐요. 연락해보고 올게요.”
벨라트릭스가 나가자마자 메르넬라가 은밀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정말 아무 관계도 아니시지요?”
“설마 내가 결혼한 사람을 건드리겠어?”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야. 애초에 벨라트릭스는 별로 내 취향도 아니고.
“그럼 아직 결혼도 안 하고, 남자도 모르는 루이나양은요?”
“어?”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래.
“역시. 루이나양에게는 마음이 있는 게……. 당장 처리해야…….”
“잠깐.”
메르넬라가 루이나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급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니 그런 생각 없거든. 그냥 제자로 삼은 것뿐이야.”
내버려뒀으면 루이나는 어……. 죽지는 않았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공포를 느꼈을 거다.
“그런가요?”
“내가 그렇다고 하는데, 왜 그걸 또 의문형으로 물어봐.”
“하지만 아르켈님은 이미 전과가 있으시잖아요.”
나한테 전과가 있다고? 이건 무슨 소리야.
“전과? 나한테 무슨 전과가 있어.”
“제가 아포디미아에서 외로이 있을 때 레베카양과 지내셨잖아요.”
“말은 똑바로 해야지. 그건 정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족과 지내는 것과 지상을 정찰하는 게 관련이 있나요?”
그렇게 물어보면 할 말이 없기는 하다. 내가 아닌 아르켈은 분명 레베카를 좋아해서 정찰 임무도 내팽개치고 레베카와 붙어 있었던 거니까.
하지만 그게 나는 아니잖아.
물론 내가 정찰 임무를 똑바로 수행한 건 아니기는 하지만, 적어도 레베카를 좋아해서 옆에 있었던 게 아니다. 그냥 나만의 작고 소중한 던전을 키우려고 했던 것 뿐이지.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한담?
“네 분 모두 와도 좋다고 하셔요. 어머, 제가 좋지 않은 때에 들어왔나요?”
“아니. 딱 좋은 타이밍이었어.”
진짜로. 변명할 거리를 생각하느라 골머리 썩일 필요가 없어졌잖아.
“잠깐만. 네 명?”
“네. 루이나도 가는 거 아니었어요?”
“갈래?”
“네.”
그래 뭐, 본인이 가겠다는데 상관없겠지.
“그런데 언제까지 가야 돼?”
“가능하면 지금 당장이요.”
아, 네. 그래 귀찮은 일은 빨리 처리하는 게 낫지.
“가자, 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포탈 허가서가 나온 덕에 포탈을 타고 곧바로 아라엘 왕국의 수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차를 타고 왕성으로 온 것까지는 좋은데.
곧 국왕이 회의를 끝내면 알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기 전까지 응접실에서 대기하는 중이다.
“알현이 이렇게 빨리 이뤄져도 돼? 오늘 하루 정도는 기다릴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한 나라의 왕을 만나는 자리인데 생각보다 기다릴 필요가 없네.
“제가 있으니까요.”
아 맞다. 몸을 팔았던 창녀라고는 하지만, 벨라트릭스는 국왕의 여동생이자 공작부인이었지. 확실히 그녀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리고.”
“그리고 뭐. 뭔데 말을 안 해. 사람 궁금해지게.”
“우리 왕국에는 마스터급 실력자가 없으니, 당신을 포섭하고 싶은 거겠죠.”
그건 뭐, 그럴 거로 생각하긴 했어. 그래서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한 거고. 당연히 거절할 생각으로 온 거다.
“아마 귀족 자리 하나 던져주지 않을까 싶네요. 당신이 원한다면.”
“난 딱히 관심 없는데.”
“당연히 그러시겠죠. 당신이라면 어딜 가도 한 자리 꿰찰 수 있는데 그러지 않는 거니까요.”
못하는 것과 그러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크다. 벨라트릭스도 그것을 알기에 내가 포섭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전하께선 당신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있나 봐요.”
“어떻게?”
“그건 저도 잘 모르죠.”
너도 모르면 어떻게 하냐. 뭐, 됐어. 뭘 제시하든 간에 내 마음이 변할 일은 없을 거 같으니까.
“들어가면 예법에 맞게 인사해야 해요. 지금부터 알려드릴 테니까 잘 봐두세요.”
그래 예법이 중요하기는 하지. 무려 국왕을 알현하는 자리다. 귀족들도 많이 있을 텐데 예법을 갖추지 않고 인사하면 국왕 체면이 뭐가 되겠어.
한 나라의 국왕이니 체면도 생각해줘야지.
“저희가 인간의 왕에게 굳이 인사를 해야 하나요?”
“메르넬라의 말에 동의합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고, 메르넬라와 이레네는 탐탁지 않나 보다.
“저희가 고개를 숙일 분은 오로지 아르켈님 뿐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래 너희의 눈물 나는 충성심은 잘 알겠어. 그 충성심으로 살의를 억제해주면 참 좋을 텐데. 에휴, 인생.
“안 하면 돌려보낸다.”
“할게요.”
“……하겠습니다.”
역시 동서고금 막론하고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방법 중 가장 좋은 방법은 회유가 아니라, 협박과 고문인가보다. 돌려보낸다고 한마디 하자마자 저러는 걸 봐라.
그렇게 루이나를 제외한 우리 셋은 벨라트릭스에게 아라엘 왕국의 예법을 배웠다.
그리고 잠시 후.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아르켈이라고 합니다.”
국왕 앞에서 내가 대표로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셋도 흠잡을 곳 없이 예법을 지킨다. 좋아, 이걸로 체면은 지켜줬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먼 길을 와줘서 고맙군.”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본다.경비병은 보이지 않지만,귀족들은 상당히 많이 보인다.국왕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호케트 공작인가?
벨라트릭스가 바로 옆에 있는 거 보니 맞겠지.
음,이렇게 많은 귀족이 있다는 건 아마,국왕과 회의 중이던 귀족들이 전부 여기로 온 것 같은데.
그럼 그 회의가 나와 관련이 있었던 건가.
“바르크 백작에게 그대의 실력은 익히 들었노라.이곳에 오늘 그대를 부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부탁할 것이 있어 불렀느니라.”
그 부탁은 당연히 나를 포섭하려고 하는 거겠지.아라엘 왕국은 여덟 왕국 중에 유일하게 마스터가 없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과인의 봉신이 되지 않겠는가?”
역시.예상은 틀리지 않구나.
“귀족 자리를 약속하지.그대가 만든 마을을 영지로 인정해주겠네.전폭적인 지원도 약속하겠네.귀족의 의무도 수행하지 않아도 되네”
딱히 끌리지 않는 제안이다.인간 행세 중인 아르켈은 어느 왕국을 가도 저 정도 지원은 받을 수 있는 몸이니까.
“물론 이 정도로는 탐탁지 않을 게야.다른 왕국에서도 이 정도 지원은 충분히 해줄 수 있을 테니까.그러니.”
내 마음을 읽었나 의심이 될 정도로 국왕의 말은 내 생각과 일치했다.그래서 약간 기대가 됐다.도대체 무엇으로 나를 포섭할 수 있다고 저리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가.
“그 검을 가져오라.”
그 검?이건 또 무슨 소리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