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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75화 (75/99)

〈 75화 〉 33. 설명의 시간(2)

* * *

“이해는 하는데,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티는 내지 마.”

저 둘이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 과거에는 그랬으니까.

어라? 나 지금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나?

“예.”

“알겠어요.”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일단 두 사람이 알아주니까 참 고마운 일이야.

“우선 손님분들이 머무를 방부터 준비해야겠네. 나디아 부탁 좀 할게.”

“네, 레베카님.”

레베카와 나디아가 이야기를 하는 사이 메르넬라와 이레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 다 미안해. 아포디미아랑 다르게 여기 생활은 많이 불편할 거야. 감수해줘.”

아포디미아에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모두를 아래 아이들이 봐준다. 그러나 여기선 그런 시종들이 없다.

전부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 해. 나야 그 생활이 익숙하기는 하지만, 이 둘은 아니다. 그래서 먼저 사과를 했다.

어찌됐든 내 필요로 부른 거였으니까.

“저는 아르켈님 옆에 있을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아르켈님과 같은 방을 쓰고 싶은 것 정도일까요.”

같은 방? 아, 그건 좀.

“언니, 그거 반칙! 나도 방 따로 쓴단 말이에요!”

나디아와 이야기를 하던 레베카가 눈에 불을 켜고 메르넬라에게 달려들었다. 아, 저긴 저대로 내버려둬야겠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나한테 불똥이 튈 수도 있어.

“괜찮겠어, 이레네? 여긴 시종도 없는데.”

“상관없습니다. 저희가 항상 호화롭게 자란 것은 아니니까요.”

하긴. 맨 처음 아포디미아로 이주했을 때부터 부유했던 건 아니다. 그때는 오히려 아래 아이들이고 우리고 다 같이 고생했지. 쌓아 올린 것도 하나 없이, 0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자원도 부족해서 아래 아이들이 몰래 지상으로 내려가서 자원을 수집하기도 했었지. 그건 지금도 그렇지만.

“그럼 아르켈님 옆 방으로.”

“그리고 밤에 몰래 숨어들려고 그러시는 거 모를 줄 알아요?!”

너희는 아직도 그 이야기 중이야? 왠지 그림이 그려진다. 저러다가 곧 나한테 누구랑 같이 방을 쓸거냐고 물어볼 그림이 그려져.

“폐 아니, 아르켈님.”

“응? 왜 불러 이레네.”

“저 마족 여성분은 정말로 아르켈님의 연인인가요?”

“어, 맞아.”

보면 알잖아. 뭘 새삼스럽게 물어봐.

“메르넬라가 그걸 묵인했다고요?”

아. 그걸 물어보려고 했던 거구나. 메르넬라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우리 동족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이 너무 깊어서 집착하고 있는 것 역시도 모두 알고 있다.

예전에 아래 아이 중 하나가 혼자서 내 옆에 다가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아이를 죽이려고 들었다는 건 우리에겐 웃지 못할 이야기 중 하나다.

그러니까 믿지 못할만도 해. 하지만.

“저러는 거 보면 알 수 있잖아.”

바로 눈앞에 증거가 있잖아. 저러고 있는데 믿지 않을 수 있어?

“그렇기는 하지만, 믿기지 않아서요.”

그건 그렇겠지. 솔직히 나도 믿기지 않아. 아포디미아에서 레베카와 메르넬라가 내가 있던 욕실에 쳐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둘이서 살벌하게 싸웠었단 말이지.

“그 메르넬라가 자기 말고 폐하의 옆에 누군가가 있는 걸 묵인하다니.”

이레네는 메르넬라와 레베카가 소소하게 다투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먼저 사랑하면 진다는 말은 사실이었군요.”

뭐야, 그 말은. 왠지 나를 나쁜 남자로 취급하는 것 같은 말 같은데. 그냥 내 착각이지?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또? 뭔데?”

“저희와 같이 다닐 두 인간을 육성할 때까지 저는 무엇을 하면 되지요?”

뭔 소리야?

“당연히 나랑 같이 가르쳐야지.”

“예?”

“어느 날 짜잔하고 등장해서 같이 유적을 공략하는 것도 웃기잖아. 같이 가르치면서 사람 옆에 있는 것도 익숙해져야 하고.”

“익숙해져야 합니까?”

“제발 부탁이니 익숙해져 줘.”

그거 때문에 같이 가르치려고 하는 것도 있으니까. 둘 다 마법은 젬병이라 어쩔 수 없지만, 루이나를 가르치는 것 정도는 같이 해줄 수 있잖아.

“너희 둘을 불러온 건, 나로서도 도박이야.”

원래는 게임의 동료 캐릭터 중에서 몇 명을 뽑아서 육성하려고 했었다고. 만약 천족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형성할 수 없었더라면 데려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너희가 사람을 아니, 지상의 종족을 보고 계속 살기를 내뿜으면 저번에 말한 대로 다시 돌려보낼 거야.”

“하지만…….”

이레네는 조금 망설이듯, 나를 바라보았다.

“죽이지 않는 것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하오나 적대하는 것을 숨기기는 힘듭니다. 생리적으로 무리예요.”

“알아.”

선조님께 물려받은 원한은 깊디 깊어. 그것을 명령 한 마디로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지금은 더 큰 목적을 위해 원한은 잠시 미뤄둬.”

그러니까 원래라면 절대로 내 동족을 지상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테지만.

“현명하신 우리의 재판관님께서 생각하기에 지금 당장 적대할 건 지상의 종족이 아니라, 천족이지 않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천족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심어놨다. 천족이 대청소라는 명분으로 지상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우리의 원한을 없던 것으로 만들려고 드는데,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있을 리가 있나.

“……옳은 말씀이십니다. 제가 잠시 사적인 감정에 그 생각을 못 했습니다.”

이레네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해지도록 노력해볼게요.”

“메르넬라는?”

이레네한테는 확답을 들었으니 이제 메르넬라한테만 들으면 되나.

“무슨 이야기 하셨어요?”

아직도 레베카와 다투는 중이었는지 이쪽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마냥 눈을 꿈뻑꿈뻑 뜨면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심히 귀엽기는 하지만, 그녀를 위해 했던 말을 또 하기에는 시간이 아깝다.

“나중에 이레네한테 설명 들어. 그럼 둘 다 오늘은 쉬어.”

“아르켈님은요?”

“일.”

아포디미아에서는 그냥 옥좌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됐지만, 여기서 나는 굉장히 바쁜 몸이다.

“오늘은 어디로 가려고?”

“어디 갈 생각 없습니다. 오늘은 던전을 확장할 생각이에요.”

슬슬 던전 확장 공사도 해놔야지. 미리미리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유적에 돌아다닐 때 던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레베카한테 맡기는 수도 있지만, 아니 원래 레베카가 해야 될 일이기는 하지만, 이건 내가 좋아서하는 거니까.

“아, 그럼 나도 같이 가.”

“저도 같이 가겠어요.”

아니 레베카는 그러려니 하는데 메르넬라까지 따라올 필요는 없지 않아?

“그,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도 될까요? 여기 있다가는 심장이 남아나지 않아요, 주인님 오빠…….”

“주인님? 도마뱀 년이 감히 폐하께…….”

“오빠요? 도마뱀 여자가 간덩이가 부었네요?”

“이레네! 메르넬라!”

둘을 말렸다. 자이로니아가 걱정돼서 그런 게 아니다. 이레네가 아공간을 여는 꼴이 분명 제노사이드를 꺼내려고 하는 거 같아서 말린 거다.

제노사이드를 여기서 쓰는 순간 내 작고 소중한 던전이 붕괴할 게 눈에 훤했으니까.

“아공간 닫아. 자이로니아는 돌아가도 돼.”

자이로니아한테도 저러는데, 나중에 인간들이 몰려다니는 도시로 들어가면 과연 이레네와 메르넬라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가만히 있을 거다. 가만히 있게 만들어야지. 지금부터 익숙해지면 되니까. 나도 익숙해졌는데, 이레네와 메르넬라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다.

“너무 혼란해요.”

동감이야, 나디아.

* * *

바르크 백작 영지의 대사제인 로버트는 입맛을 다시고 중이었다. 그의 침대에는 두 여성이 쓰러져 있다.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당분간은 내버려두는 게 맞겠지.

‘하아.’

그는 대사제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욕망에 솔직했다. 그런 이가 대사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 대주교 마르벨리아가 그의 뒤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원래 그는 신실한 신도였다. 그러나 마르벨리아와 대화를 나누면서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대사제가 된 후에도 정확히는 대사제가 된 후에 욕망에 솔직해졌다.

사제, 견습 사제, 심지어 신도들까지 손을 댔다. 그런데도 로버트는 아직도 무언가가 부족함을 느꼈다.

‘아리아…….’

마음에 들었으나, 유일하게 손을 대지 못한 여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푸하.”

물을 마셨음에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로버트는 제게 말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아르케 마을로 간 아리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실로 건방지게 짝이 없다. 예전부터 그랬다. 대주교 마르벨리아의 말에 따라 로버트는 은연 중 신과 천사님들을 동일 시 여겼다. 아리아는 그것을 알고, 항상 제게 훈계를 했었다.

사제 주제에 감히 대사제에게 훈계를 한 것이다. 그 건방진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나 다른 이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그녀를 건드리려고 했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도망쳐버리다니.

다시금 물을 마셨다. 그런데도 여전히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타오르는 갈증에 자꾸만 물을 마심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로버트는 이내 이유를 깨달았다. 이 갈증은 분명.

“가봐야겠군요.”

아리아를 향한 갈증이다. 그렇다면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그녀를 손에 넣기 위해서 직접 아르케 마을로 가는 수밖에 없다.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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