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32. 마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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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메르넬레와 이레네를 마중하러 갔다.
내가 마중하러 온 이유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당연히 메르넬라를 빨리 보고 싶어서다. 게다가 내가 마중오지 않으면 메르넬라가 섭섭해 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다른 하나는 두 사람 다 마법에는 젬병이기 때문이다. 마중 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내가 있는 쪽까지 날아서 왔을 거다.
그 모습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그나저나 슬슬 도착할 때가 됐는…. 아, 저기 내려오고 있네.
“왔어?”
물의 길에서 내려오자마자, 메르넬라는 기나긴 분홍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내게 달려들더니.
“아르켈님!”
곧바로 품에 안겼다. 저기 메르넬라? 나도 좋기는 한데, 일단 그 가슴이 뭉개지는 감촉이 조금 곤란하거든?
게다가 이레네도 보고 있는데. 일단 때어놓고 진정 좀 시켜야겠어.
“보고 싶었어요.”
하긴 이럴 만도 하구나. 레베카와 달리 메르넬라는 나와 맺어진 직후 곧바로 헤어져서는 이날까지 모습 한 번 본 적이 없으니까.
메르넬라는 때어놓으려고 했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그녀를 껴안아줬다.
“나도.”
실은 나도 보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레네는 모를까, 메르넬라더러 내려오라고 한 것은 편애에 가깝다.
우리 중 회복 능력에 탁월할 건 메르넬라가 아니라 부르누카의 부인이자, 아홉 번째 다이나토스인 엠마였으니까.
뭐 그렇다고 메르넬라가 회복 능력을 아예 사용하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편애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흠흠.”
헛기침 덕분에 이레네의 존재를 상기해냈다.
메르넬라의 온기를 느끼다 보니 나도 이레네가 있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네.
“아으.”
메르넬라도 이레네가 옆에 있음을 인지하고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두 분 해후는 다 나누셨는지요?”
“덕분에 충분히 나눴어.”
딱 적당할 때 헛기침해줬어, 이레네. 안 해줬으면 몇십 분은 더 이러고 있었을지도 몰라.
“잘 왔어, 이레네.”
내 인사에 이레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지상을 향해 흐트러졌다.
뭔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레네는 우리 중 유일하게 성인의 모습이 아닌, 아이의 모습을 한 다이나토스다. 그렇다고 겉모습처럼 우리 중 가장 어린 것은 아니다.
단지 선천적인 이유로 성장이 멈췄을 뿐이지.
그런 이레네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니 왠지 어린아이가 필사적으로 예의를 갖추려고 하는 것 같아.
그래도 어떻게 웃음을 참아서 다행이지. 대놓고 웃었으면 분명 상처받았을 거야.
“폐하를 뵙습니다.”
아, 메르넬라는 이제 나를 아르켈님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졌지만, 이레네는 아니지.
“지상에서는 날 폐하로 부르는 건 금지. 차라리 아르켈님이라고 불러.”
아포디미아라면 모를까 지상에서도 나를 폐하라고 부르면 안 되지. 우리끼리 있을 때는 상관없지만,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부르면 심히 곤란해질 수도 있다.
“그런 불충은 저지를 수 없습니다.”
불충? 그게 불충이면 메르넬라가 뭐가 돼?
“메르넬라도 나를 아르켈님이라고 부르잖아.”
“메르넬라는 곧 황후마마가 되실 것이기에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아, 그런 쪽으로 해석해서 괜찮다고 판단한 거구나. 아무래도 이레네는 끝까지 나를 폐하라고 부를 생각인가보다.
하긴 유전자적으로 새겨진 것이 있으니 어쩔 수가 없나 싶다. 메르넬라도 처음에는 나를 아르켈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고.
그럼 어쩔 수 없지. 메르넬라 때처럼 하는 수밖에.
“명령이야, 이레네.”
불러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거절을 하면 명령을 하면 되지.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명을 받듭니다. 폐 아니, 아르켈님.”
이거 봐. 얼굴이 굳기는 했지만, 명령하니까 직빵으로 먹히잖아.
“그런데 저희는 어디로 가나요?”
아 그 부분을 설명을 안 해줬네?
“일단은 레베카가 운영하는 던전으로 갈 거야.”
“아.”
“레베카? 그리고 던전이요?”
메르넬라야 당연히 레베카의 존재를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레네는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겉모습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뿜을 뻔 했다.
아,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소름이 돋네. 겉모습은 여자 아이처럼 보이나 이레네 역시 나와 같이 영겁을 살아왔다. 인간 기준은 물론이오, 지상의 종족 중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용 기준으로도 할머니다.
그것도 말이 좋아서 할머니지. 사실적으로 생각해보면 할머니 수준이 아니긴 해.
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가서 설명해줄게.”
레베카와 나디아 그리고 자이로니아까지 모아서 전부 설명할 생각이니까 괜히 여기서 입 아프게 설명하고 가서 또 설명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어요? 무장 상태를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어? 무장 가지고 왔어? 내가 준비해주려고 했는…….
“그, 그거 집어넣어!”
이레네, 너 지금 그거 뭐야!
“예?”
예는 무슨 예야! 왜 의문형인지 이해를 못 하겠어?!
“아니 니 무장을 그대로 들고 오면 어떻게 해.”
이레네가 아공간에서 꺼내 든 것은 그녀의 전용 무장이었다. 설마 저걸 들고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거대한 포신을 자랑하는 빔 병기라니. 지상은 아직 중세 판타지인데 저런 게 나오면 장르가 바뀌고 말잖아.
“잠깐만, 메르넬라 설마 너도?”
“……네.”
메르넬라, 너마저…….
아니야 이건 내 실수다. 전용 무장은 들고 오지 말라고 말을 해야 했는데 미처 말을 못했네.
그래 이 두 명은 지상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다는 걸 내가 깜빡했다. 전부 내 잘못이다.
“제노사이드의 상태는 문제없습니다. 내려오기 직전 부르누카가 손질까지 해줬어요.”
“상태가 문제가 아니라고. 하아…….”
이레네의 무장, 제노사이드는 그 이름마냥 흉악한 병기다. 마력을 동력원으로 삼아 빔을 쏘아대는 병기인데 최대 출력은 마을 하나쯤은 충분히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다.
그걸 연발로 쓸 수 있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재해나 다름이 없다.
상식적으로 그런 걸 쓰게 둘 리가 없잖아.
“그거 집어넣어. 당장. 그리고 기다려.”
내 아공간에 쓸만한 게 있나? 아, 있기는 하네.
“자.”
“이건 아래 아이들이 연습용으로 쓰는 무기가 아닌지요.”
이레네가 짜디짠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 불충한 시선은. 왕님께 그런 시선을 보내도 되는 거냐. 어이가 없네.
뭐, 제노사이드에 비하면 형편없는 무기인 건 인정해. 아래 아이들이 무언가를 맞춘다는 개념을 배울 때 쓰는 무기니까.
“지상에서는 이 정도 무기로 충분해. 아니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쳐.”
그래도 이 정도로도 지상에서는 충분히 사기라고. 마력으로 화살을 만들 수 있는 활이다. 게다가 비거리도 평범한 화살과 다르게 사용자의 마력에 따라 충분히 늘어난다.
정밀 저격수로 역할은 충분히 해줄 수 있는 무기야.
오히려 제노사이드가 문제지. 그걸 쓰면 정밀 저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화력 담당이 되는 거잖아.
“이 정도만으로 충분하다고요?”
“그래.”
“그러고 보니 지상은 아직 냉병기에 사용한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진짜인가요?”
“진짜야.”
다들 냉병기를 쓰고 있는데 빔병기를 쓰는 건 반칙이잖아. 그렇지?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이해해줬구나, 이레네.
“헌데 과거 저희 제국의 기술을 하나도 흡수하지 못했나 보군요.”
그러고 보니 이레네의 말마따나 그러네. 물론 우리의 기술력이 과거보다 더욱 진보하기는 했지만, 현재 인류의 기술력은 고대 제국보다도 못한 건 조금 이상하지 않아?
“그거야 당연히 그렇겠죠.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당시의 왕님께서 저희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설정이었어? 메르넬라를 바라보자, 그녀는 조금 더 첨언을 덧붙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지상에 있는 자연경관 중 몇 개는 당시의 왕님께서 저항하신 흔적이라고 하던데요.”
“그래?”
“아르켈님도 모르셨어요?”
“어.”
그런 설정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의 다이나토스가 강하긴 했나 보구나. 설마 저항하는 것만으로 자연경관이 만들어질 정도라니.
그럼 당시 우리의 왕을 죽일 수 있을 정도라면 당시 지상의 다른 종족들은 얼마나 강했던 걸까.
인류가 쇠퇴한 건가? 아니, 그렇지는 않겠지. 당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종족이었으니까. 그중 당시의 왕을 이길 법한 종족이 있기는 하겠지.
예를 들어 용이라던가. 아니면 왕이 중독된 상태였을 수도 있고.
“가르쳐줘서 고마워 메르넬라.”
“후후, 별말씀을.”
메르넬라가 입을 가리며 웃는 것이 고혹적으로 느껴져 순간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아니, 이레네도 옆에 있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일단 가자.”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 곧바로 던전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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