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31. 갑자기 분위기 육성물로 흘러가는 줄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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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묘를 마치고 지상으로 올라온 후 며칠이 지났다. 그 며칠 동안은 벨라트릭스에게 고대 제국의 유적지와 관련된 정보를 사고, 비비안을 환영해주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럼 메르넬라 부탁할게.”
[네, 아르켈님.]
메르넬라에게 소소한 부탁 한 가지를 하는 중이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메르넬라라면 충분히 믿고 맡길 수 있겠지.
“한 번 올라갈까?”
레베카와는 시간을 많이 보냈지만, 메르넬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시간을 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네.
[괜찮아요. 기다리고 있는 것도 기쁘니까요.]
기특한 말을 해준다. 나와 이어지고 나서는 집착도 심하게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다만 레베카가 아닌 다른 여자들과 놀고 있으면 조금 화가 날지도 모르겠네요.]
전언 철회. 순간 내가 소름이 돋을 살기였어, 메르넬라. 분명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살기가 느껴졌다고.
“그, 그건.”
[믿고 있어요, 아르켈님. 그럼 시키신 일 때문에 먼저 끊겠어요.]
어…….
이거 아무래도 망한 거 같은데? 그것도 아주 제대로.
“하아.”
메르넬라한테 나중에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벌써 머리가 아파.
생각해보니 레베카는 내 옆에 있으니까 내가 다른 여자를 만들면 그 보상이라도 받으려고 할 수 있지, 메르넬라는 그럴 수도 없잖아.
“몰라. 나중 일은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그리고 미래의 나는 분명 과거의 나를 원망할 거다. 이미 정해진 패턴이다. 통신구를 품에 넣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은 착잡한데 풍경은 끝내주네.”
옅은 달빛이 비꾸러지듯 지상을 비춘다. 그와 함께 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올라, 거멓게 물들었음에도 하늘은 몽환적인 자태를 뽐내는 중이다.
몇 번을 봐도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 밤하늘이다. 지구에서는 이런 밤하늘을 본 적이 없어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흐음…….”
여기저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하나같이 형형색색의 금속 혹은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원석을 들고 무언가를 조립하고 있다.
“저게 포탈이란 말이지?”
마법사들이 분주하게 포탈을 만드는 과정을 멍하니 바라보는 중이다.
딱히 아르켈의 기억을 들춰봐도 저것과 관련된 지식은 없다. 하긴 아르켈은 마법 공학 쪽에는 젬병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뭐가 됐든 그쪽은 부르누카의 영역이었으니까.
“포탈 설치에만 일주일이라…….”
고작 일주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포탈을 설치하고 그 포탈을 관리할 건물도 지어야 한다. 게다가 포탈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국가의 승인도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마, 두 달은 걸리지 않을까 싶어.
아라엘 왕국의 승인은 벨라트릭스가 알아서 해주겠다고 했으니까 상관은 없겠지. 무려 국왕의 여동생이다. 딱히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
이렇게 생각하면 항상 문제가 생기던데, 일단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자.
“이렇게만 보면 한가롭네.”
마을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애초에 기반이 달랐으니 당연한 거기도 하다. 마을의 크기를 생각하면 시설 수준은 말이 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상회가 지점을 열었고, 신전에도 정식 사제가 있으며, 대장간 거리도 있다. 여관도 벌써 두 채나 들어섰으며 심지어 아라엘 왕국 마법사 길드 본부가 이 마을에 있다.
모험가들 입장에서는 거점으로 삼기에 이만한 마을이 있을까 싶어. 덕분에 마을 안에서 돌아다니는 돈도 상당하다.
덕분에 촌장인 에디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나를 볼 때마다 감사하다며 꾸벅 고개를 숙인다.
그렇게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내 목적을 위해서 기반을 마련해줬을 뿐인지라 양심이 찔렸다.
그나마 한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비비안이 해결해보겠다고 했으니 당장 내가 간섭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나는 전혀 한가롭지가 않네.”
이렇게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잠깐 나온 거였다.
벨라트릭스 덕분에 고대 제국의 유적 위치는 대충 파악했어. 그리고 게임 덕분에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유적도 있다.
그럼 이제 이 정보를 어떻게 써먹느냐가 중요하다.
처음에는 자이로니아를 보낼까도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몇 가지 생긴다.
첫 번째. ‘던전 자하드’를 플레이할 때 고대 유적 중에서는 혼자서는 절대로 공략할 수 없는 곳도 있다는 거다. 정확히는 그런 곳이 대부분이다.
최소 두 명, 심지어 많게는 다섯 명까지도 인원이 필요한 곳도 있어. 그러니 자이로니아만 보내는 건 무리가 있다.
두 번째. 내 목적은 단순히 유적의 공략이 아니다.
「현재 목표2 : 다이나토스의 첫 번째 왕이 남긴 것을 찾으십시오.」
다이나토스의 첫 번째 왕이 남긴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문제는 남긴 것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거지. 물건일 수도 있고, 방일 수도 있다. 심지어 다이나토스인 내가 직접 가야 무언가 발동하는 조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유적을 공략하는 건 간단하다. 그냥 다 때려 부수고 마지막 방에 도달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다가 내가 찾는 것까지 망가질 수도 있다.
적당히 부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찾는 것이 무언지도 조건도 모르는 상황이니 혹시나 뭔가를 부수면 안 되는 조건일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 유적을 공략해나가는 게 맞는데…….
“자이로니아는 그렇다고 치고.”
내가 유적에 가야 한다면 자이로니아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던전에 남겨놓는 게 맞다. 레베카한테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그럼 여기서 마지막 문제가 생긴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유적을 공략하려면 나 혼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럼 이제 유적을 같이 공략할 동료가 필요한데. 그 동료를 어디서 만들 수 있냐는 거지.
심지어 동료를 데려가려면 인간 행세를 해야 하니 내 본래 힘을 보여줄 수 없다. 그만큼 동료들의 힘도 강해야 한다.
왜 동료들의 힘도 강해야 하냐고?
“아르켈이 나오기 전까지는 엔드 컨텐츠였단 말이지…….”
고대 제국의 유적 탐색은 아르켈 소토르프가 히든 보스로 등장하기 전까지는 던전 자하드의 엔드 컨텐츠였다. 두 번째 확장팩의 최종 보스까지 토벌한 파티가 엔드 컨텐츠로 유적을 탐험하고 다녔다는 소리다.
그 시기의 주인공과 동료들은 마스터에 도달한 것은 물론이오, 게임상 ‘마스터 레벨’이 굉장히 높다. 그런 파티조차 힘겹게 공략한 것이 고대 제국의 유적이었다.
“하아.”
심지어 주인공의 파티는 내가 직접 육성을 해서 그렇게 강해진 거지, 당장 NPC 중에서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 검황은 그 정도로 강하겠구나. 하지만 검황은 애초에 동료로 영입할 수 없고, 지금 시기에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니까 패스.
“결론은, 유적 탐사 파티원을 내가 직접 키워야겠네.”
일단 후보 중에는 루이나와 비비안이 있다. 루이나는 애초부터 육성 중이었으니까 문제없고 비비안은 고룡의 심장을 흡수하면 전력에 꽤 도움이 될 거다.
그럼 이제 남은 후보는 두 명인데.
“나랑 루이나가 전위에 서고, 비비안은 후위에서 화력을 담당해줄 마법사니까. 함정을 해체해줄 도적이랑, 치료를 책임져줄 사제가 필요하겠네. 그리고 욕심 좀 부리자면 궁수 한 명 정도 추가해도 좋고.”
게임적인 요소를 생각하면 화력이 아니라 정밀한 저격을 해주는 궁수도 필요하기는 해.
사제는 아리아가 있기는 하지만, 아리아는 우리 마을에 정식 사제여서 매인 몸이라고 봐도 좋다. 게다가 게임에서는 본 적이 없는 NPC라서 어느 정도까지 클 수 있을지도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사제는 뭐니뭐니해도 에밀리가 최고긴 한데.”
선택받은 자 페리드의 첫 번째 동료 성녀 에밀리. 성녀답게 그녀의 신성력은 어마어마하다. 다른 사제 동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성격이나 성능 쪽으로 약간씩 하자가 있기도 하고.
그래도 에밀리는 페리드 옆에 있으니까 빼낼 수는 없을 테니 다른 사제들을 고려해보는 게 맞기는 하다.
그게 아니면 내 넘치는 재력으로 사제 없이 포션으로 버티는 방법도 있기는 하고.
“도적이랑 궁수는.”
도적도 궁수도 지금 당장은 딱히 떠오르는 애가 없다.
인간 도적 동료나 엘프 궁수 동료가 한두 명이어야지. 적당히 골라서 뽑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어이가 없네.
“갑자기 왜 이렇게 됐지.”
던전 디펜스를 즐기려고 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동료를 구하는 것도 문제고, 고대 제국의 유적을 탐사하면서 동시에 던전을 지키는 것도 문제다. 던전 쪽이야 레베카가 있으니까 내가 적게 신경 써도 괜찮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동료를 구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그들을 도대체 언제 육성하느냐다.
“후우.”
뜬금없이 게임 장르가 던전 디펜스에서 육성물이 되어버린 상황이라고 할까?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주인공이 영입할 수도 있는 동료들을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
“그러면 내가 굳이 육성할 필요도 없잖아.”
좋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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