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30. 내 여자다
* * *
“그럼 앞으론 우리의 첫 왕이 남긴 무언가를 찾아봐야 하나.”
생각해보면 너무 추상적인 것 같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남긴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니. 과연 언제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심이 많은 표정이구나. 뭣하면 내 아이들에게도 찾아보라고 해줄까?”
“그건 됐어.”
마족이 지상에 돌아다니다가 무슨 꼴이 일어날까 겁난다, 이년아.
“혼자서 찾을 수 있겠느냐?”
“누가 혼자서 찾는데?”
“도와줄 자가 있느냐?”
“있기는 해.”
당장 벨라트릭스에게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제국의 유적지의 위치를 전부 알려달라고 하는 수도 있다. 그 정도 정보는 돈이 들기는 하겠지만, 돈은 많으니까 딱히 상관없어.
그 외에도 몇 명 생각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흐음, 그렇구나.”
“그러나 던전 운영에 소홀해서는 아니 된다.”
“그건 당연하지. 레베카가 우승하게끔 할 생각이니까.”
“우승이 문제가 아니다.”
내 말에 바르바라가 고개를 저었다.
“욕망을 수집하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이었다. 지금 지상은 욕망의 한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상황이니라.”
“……그렇단 말이지.”
욕망 쪽도 신경을 쓰긴 써야겠구나.
뭐, 그건 나나 레베카 뿐만이 아니라 축제에 참여한 모든 마족이 신경을 써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우선순위가 그리 높지는 않다.
“그럼 슬슬 난 가볼게.”
의문도 어느 정도 해소됐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방향성도 잡혔다. 여기서 볼일은 끝났으니까, 슬슬 돌아가 봐야지.
“돌아가겠느냐? 그리하거라. 다음에 볼 때는 부디 이 몸을 죽여줬으면 좋겠군.”
자기를 죽여달라. 바르바라가 항상 하는 소리다. 그러나 이번에는 저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이번엔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닌데?”
“호오? 왜 그리 생각했느냐.”
“그거야 대마왕 바르바라답게 말했잖아.”
형용할 수 없는 광기가 담긴 눈빛도 없고.
“왠지, 그냥 형식상 말한 느낌이라고 할까?”
“후훗, 그대의 말이 옳다.”
그래 그런 것 같더라.
“지금은 그대처럼 내 짐을 나눠들 수 있는 이가 있다면 괜찮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구나.”
그 말은 앞으로는 죽여달라고 말하지 않을 거라고 받아드려도 돼?
“이러한 감정도 아주 잠깐이겠지만.”
“……그러냐.”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바르바라를 뒤로한 채 어전 밖으로 나왔다. 이제 레베카를 찾아서 같이 돌아가면 되겠구나 싶었는데.
“둘 다 아직 여기 있었어?”
밖으로 나오자마자 레베카와 율리히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보아하니 둘 다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정확히는 율리히는 레베카에게 관심이 없고, 레베카는 율리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눈치다.
“대마왕님과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어. 이제 돌아갈 거야.”
슬쩍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마냥 떨려온다. 무어라 말하고 싶은 것이 눈에 보여.
그러나 말할 수가 없어.
분명 부모인데, 자식인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눈빛조차 주지 않는 것이 두려워. 말을 걸면 돌아올 무시가 무서워서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보인다.
바르바라랑 이야기가 끝나니까 이런 소소한 문제가 닥쳐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율리히.”
율리히의 감정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부인이 레베카를 낳다가 죽었다. 바르바라가 마계 최고의 잉꼬부부라고 표현했을 정도면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무시는 아니지 않나, 싶어. 그 부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게 레베카다. 그러면 더 아껴줘야 하지 않나 싶어.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이건 내 오지랖이 넓은 거다. 오지라퍼라고 한 소리 들어도 반박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누가 나한테 오지라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예, 아르켈님.”
“레베카는 이제 내 여자다.”
그래서 율리히의 감정을 깨울 수 있을 법한 말을 꺼냈다. 그래도 충격이 덜 하라고 최대한 산뜻하게 말했다.
“아, 아르켈!”
레베카가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지만, 그녀를 제지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레베카한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건 알아. 하지만 그래도 일단 부모니까 알아두라고 말한 거야.”
“그렇군요.”
그리 말했음에도 율리히는 침착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
이건 좀 의외의 반응이다.
소설에선 보통 이런 식으로 폭탄선언을 하면 감정이 조금은 보이던데? 그 틈을 비집어서 감정을 폭발하게 하는 게 정석 전개이지 않나?
“부족한 여식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아르켈님께서 데려가신다면 아무 불만도 없습니다.”
“그걸로 끝이야?”
“예. 제가 더 무언가 말을 해야 합니까?”
뭐라 할 말이 없네. 아리아 때와는 돌아오는 반응이 생각과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미연시는 참고할 만하고, 소설은 참고할 만하지 않은 상황이라니. 보통 반대여야 되지 않아?
“그, 일단 진심으로 축하해줘야 하지 않겠어?”
“아르켈님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제 못난 여식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그 말대로인데 제가 축하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 이건 조금 많이 글러 먹었네.
이건 그냥 대하는 태도가 자식이 아니다. 아예 그냥 남을 대하는 태도라고 봐도 될 정도다. 이 정도로 감정이 꽉 막혀 있으니까 폭탄선언을 해도 틈이 안 보이지.
레베카를 살짝 바라본다. 그녀는 조금 전 율리히의 발언에 절망이라도 한 듯 제 두 팔을 껴안고 있었다. 이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듯한 행동이다.
이렇게 되니까 괜히 화가 나네. 너 지금 내 여자한테 상처 줬냐?
율리히의 감정을 어떻게든 건드려보고 싶어졌다. 아니 내 여자에게 저런 식으로 말한 만큼, 그의 마음에도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럼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원인을 언급하는 거지.
“네 부인이 원하지 않을 테니까.”
부인을 언급한 순간, 율리히가 말없이 나를 노려본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왔다.
“아, 아르켈…….”
레베카가 하지 말라는 듯 내 손을 잡는다. 아버지를 염려하는 걸까? 아니면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게 싫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이런 말까지 하면 진짜로 율리히가 자기를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일까.
“제 아내의 이야기는 꺼내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 둘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율리히였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나를 노려본다.
아, 이제 얼굴이 좀 볼만하네. 아까까지 무표정이던 얼굴이 살짝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눈썹이 올라간 것이 눈에 띄었다.
“맞아, 아르켈. 그러지 마.”
저래도 아버지라고 염려하는 건가. 저걸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효녀야, 효녀.
“기다려보세요, 레베카님.”
레베카를 진정시키고 다시금 율리히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개인 사정을 운운하는 것은 매너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매너라. 율리히의 말에 웃고 말았다. 그는 확실히 대마왕의 심복답게 매너 있는 마족이 분명하다.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인지 모를 나 같은 놈도, 바르바라의 손님이라서 충실히 예의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거 알아?
“나 원래 예의란 게 없어. 왕이란 족속들은 다 그런 거야. 바르바라도 그렇잖아. 몰랐어?”
왕은 제멋대로,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존재다. 그럴 수밖에 없지. 정점에 선 존재가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잖아.
“네 부인은 네가 이러는 걸 원하지 않았을 거란 거, 너도 사실 알고 있지?”
지금까지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은 주제에. 내 입에서 아내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반응을 보였다.
물론 아내를 향한 그리움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입에서 아내의 존재가 거론된 것이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네 부인은 네가, 레베카에게 이러는 걸 원하지 않았음을 너도 알고 있어.”
그렇다면 어째서 한 발자국 물러났을까? 화가 났으면 오히려 나한테 다가와야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물러날 이유는 없잖아.
나한테는 율리히가 한 발자국 물러난 것이 레베카에게서 도망치는 것으로 보인다.
“레베카에게 관심만 없었을 뿐, 이날 이때까지 지원은 아끼지 않았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어.”
부모로서 도리는 다했다. 그저 애정을 주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네가 죽어서 부인과 다시 만나면, 당당할 수 있을까?”
“누구나 죽으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냉정하네. 이 이상 말해봐야 율리히의 태도가 바뀌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 네 그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야.”
한 번쯤은 해야 됐을 말이다. 율리히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레베카를 키워줘서 감사합니다, 아버님.”
이건 왕이 아닌, 사위로써 말한 거니까 예의를 차리고 말했다.
물론 사위 역할은 딱 여기까지다. 네가 레베카를 딸로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너를 장인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으니까.
“가죠, 레베카님.”
레베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녀의 섬섬옥수가 조금씩 떨림을 느끼고, 손에 힘을 줘 꽉 잡아줬다.
“아르켈….”
그렇게 울먹이는 듯이 말하지 마. 괜히 나도 슬퍼지잖아.
“역시 아버님은 날…….”
“성묘하러 가죠.”
“…성묘?”
그래 성묘하러 가자. 그럼 조금은 레베카의 우울함을 날려버릴 수 있을까 싶어서 그리 제안해봤다.
“레베카님의 어머님의 무덤에 가자고요. 저도 인사를 드려야하니까요. 아, 혹시 마족은 무덤도 안 만드나요?”
만약 그럼 내 계획이 꼬이는데?
“저택 지하에 안치되어 계신다고 들었어.”
“잘됐네요. 돌아가기 전에 인사 한 번 드리고 가죠.”
안 그래도 지상으로 돌아가려면 플락가의 저택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가는 김에 겸사겸사 들르면 되겠네.
“하지만 거긴 아버님만 들어가실 수 있는 곳인데.”
그게 무슨 문제야. 레베카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제가 마계에서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건 단 두 명뿐입니다.”
“두 명? 한 명은 대마왕님이시고 다른 한 명은 누구야?”
그중 한 명이 바르바라인 건 맞다.
내가 바르바라한테 함부로 말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바르바라가 먼저 시작했으니까 상관 없으리라고 생각해. 바르바라도 나한테 아무 말도 안하고.
그리고 당연히 남은 한 명은.
“레베카님이죠.”
왜 내 입에서 예상도 못 한 말이 나왔다는 듯이 그리 멍을 때리고 있어?
“내 여자를 함부로 대할 남자가 어딨습니까.”
자기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굉장히 기쁜 말이긴 한데, 그거랑 아버님만 들어갈 수 있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율리히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전부 무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들어간다고 하면 어쩔 거야. 말릴 수 있으면 말려보라지. 과연 율리히가 날 말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기는 하다만.
“……내 남자 최고네.”
“그렇지요?”
아, 이제야 웃네. 그래 그렇게 웃어주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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