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27. 신의 피(2)
* * *
단언컨대 게임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문구를 본 적이 없다.
저 ‘??’이 무슨 의미인지 유추할 수조차도 없다.
이런 문구가 어째서 내 앞에 나타났는지, 그 이유조차도 모르겠다.
일단 문구가 나타나는 조건은 신의 피에 손을 댔다가, 때는 것 같은데.
「??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의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기에 메세지를 전달받으실 수 없습니다.」
“맞네.”
한 번 더 신의 피를 만졌다가 손을 떼려고 하니, 다시 한 번 알림창이 나타났다.
이 문구가 나타나는 조건이 신이 남기고 간 물건을 만지는 거다.
그러니 이 문구가 신과 관련된 것은 알겠어.
현재로써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하.”
‘게임 던전 자하드’에서 나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 게임에 만 시간을 넘게 꼬라박았으니, 모르는 게 있으면 문제가 있지.
하지만 현실인 던전 자하드의 세계는 달라.
알고 있는 것이 많기는 하지만, 모르는 것도 수두룩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하.”
내가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이가 없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게임도 아닌 현실에서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방법은 단 하나지.
전지전능한 신이 되면 된다.
“하하하.”
내가 생각해봐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생각이기에 다시 한 번 웃고 말았다.
“신의 피가 마음에 드십니까, 형제분?”
등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신의 피가 도난도 불가능하고 꽃 자체를 꺾을 수도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신전의 보물이다.
너무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분명 수상하다고 여기는 게 당연해.
신전의 수도승이 주의를 시킬 생각으로 온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죄송합…….”
나오려던 말이, 노인의 모습을 보고 쏙 들어가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백발과 주름이 무성한 인자한 인상의 노인은 분명 내가 아는 두 교황 중 한 명의 모습이었으니까.
하펜 그레이스 마누엔 3세.
현 교황으로 그는 훌륭하고 독실한 신자이며 그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은 이였다.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잘 됐네.
이 사람의 호감을 이끌 수만 있다면 페리드를 만나기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물론 그 여자와 마주칠 가능성도 커지기는 하겠지만, 딱히 문제는 없겠지.
“무엄하다. 교황 성하께 무릎을 꿇지 않는다니.”
마침 잘됐네.
확실히 나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존경의 의미를 담아 그저 고개를 숙였을 뿐이다.
일부러 그랬다.
교황의 호감을 사려고 일부러 그런 것이다.
“어째서 무릎을 꿇어야 하죠?”
내 말에 근처에 있는 모든 이들이 경악한다.
몇몇 이들은 나를 불경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욕한다.
그래 다들 그렇겠지.
내 행동을 이해할 수 없고, 수도승의 행동이 타당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펜 교황만큼은 내 행동을 이해할 것을 안다.
“저희는 그저 신을 모시는 신자일 뿐입니다.”
지금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의 아래 우리는 평등합니다. 같은 신을 모시는데 어찌 위아래를 구분하고, 어찌 같은 신자에게 무릎을 꿇어야 하는지요.”
언젠가 게임에서 하펜 교황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고 있을 뿐.
“연세가 있으시기에 존경의 의미로 고개를 숙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그는 그렇게 말했다.
인사를 할 때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신자의 무릎은 오로지 신께만 허락되는 것이라고.
그의 생각을, 그의 신념을 입에 담는다.
“불온하군.”
그래 너는 불온하다고 생각하겠지. 이름도 모를 수도승.
하지만 하펜 교황도 그럴까?
그의 성향을 꿰뚫고 있기에, 그의 신념을 알기에.
나는 하펜 교황이 내 말에 오히려 흡족해할 것을 안다.
“다들 그만두게.”
이거 봐라.
수도승이 봉을 들고 내게 다가오려는 순간, 바로 제지를 하잖아.
“저 젊은이의 말이 옳다.”
옳다고 느낄 수밖에 없지.
나는 지금 당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 당신의 신념을 말했으니까.
“내가 종종 말하지 않았나. 나는 왕도 귀족도 아닐세. 그저 신자일 뿐이야.”
교황은 신이 뽑은 자리가 아니다.
추기경 중에서 적합한 이를 선출하는 거다.
그렇기에 교황은 신의 대행자가 아닌, 신자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 같은 신자끼리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우리가 무릎을 꿇어야 할 때는 오로지, 신께 기도드릴 때뿐인데.”
그의 신념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말에 수도승과 주변 사제들이 모두 고개를 숙인다.
그래서 안타까워.
하펜은 분명 올바른 신념을 지닌 교황이었다.
그러나 너무 확고했어.
꺾일 줄은 몰랐다. 너무 올곧았어. 올곧은 것이 신자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하펜 교황은 후일.
암살당하고 만다.
언제쯤인지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대놓고 암살당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정황이 하펜 교황이 암살당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벤트가 발생한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던전 자하드에서 신전도 떳떳한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몇 안 되는 이벤트 중 하나다.
“껄껄, 오랜만에 아주 훌륭한 신자를 봤구먼. 나와 차 한 잔 하겠나?”
계획대로 하펜 교황의 호감을 살 수 있었다.
“영광입니다, 성하.”
일개 견습 사제가 교황과 차를 마시게 된 것은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좋구먼. 따라오게나.”
교황의 뒤를 따라 대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교황 성하를 뵙습니다.”
교황이 대신전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이가 무릎을 꿇는다.
모든 이가 무릎을 꿇었기에 그의 표정이 어떤지 보지 못할 것이다.
그 누구도 교황과 시선을 마주하지 않기에, 그러지 않으려고 하기에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지금 어떤 표정인지 너무나도 쉽사리 예상할 수 있었다.
“다들 일어나게나.”
분명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겠지.
교황이 그리 말했음에도 누구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을 불경이라고 생각하듯이.
“일어나서 볼일들 봐.”
다시 한 번 교황의 일어나라고 말하자 그제야 신도들은 일어섰다.
그러나 일어섰음에도 감히 고개는 들지 않는다.
게임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이다.
한눈에 봐도 이것이 이질적인 상황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저들의 행동은 교황을 마치 왕으로 모시는 봉신과도 같다.
“가세나.”
신도들을 뒤로하고 나는 교황을 따라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직접 찻물을 끓이고, 내게 찻잔을 준 후 그 잔에 차를 가득 따라줬다.
“감사합니다.”
“들게나.”
차맛은 쓰기만 했다. 다른 풍미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
레베카 덕분에 차에 대해서는 꿰뚫고 있기에 알 수 있었다.
이 차에는 일반 평민들이 마시는 차다.
고위층이 마시는 찻잎을 쓰지 않았어.
고작해야 차 맛 하나에도 그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 같다.
“빈말로도 맛있다고 보기는 힘든 차지?”
“그렇기는 합니다.”
솔직히 맛있다고 말할 수 없는 차이기는 하다.
“껄껄, 솔직하구먼. 하지만…….”
“하지만 이 차를 우려낼 찻잎에도 신도들의 피와 눈물과 땀이 섞여 있죠. 그리 생각하면 맛있게 마실 수 있습니다.”
하펜 교황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먼저 선수를 쳐서 말했다.
“……자네 같은 신도가 많아져야 할 것인데.”
이것으로 나에 대한 신뢰도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갔을 거다.
“어디서 순례를 하러 왔는가.”
“아르케 마을입니다.”
“아르케 마을?”
“들어보신 적이 없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생긴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마을이라서요.”
“놀랍구먼.”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을에 신전이 있고, 사제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
“순례하러 온 것은 그 꽃을 보기 위함인가?”
“반은 맞습니다.”
“그럼 나머지 반은?”
찻잔을 내려놓고 하펜 교황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제 나에 대한 호감과 신뢰도는 어느 정도 쌓였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용사님의 존안이라도 뵙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하펜 교황의 눈에 나는 순수한 신자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 용사, 선택받은 자를 보러 왔다고 해도 불순한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지.
그저 순수한 의도라고 생각해줄 게 분명했다.
“그럼 운이 좋구먼. 마침 페리드의 훈련 시간이거든. 뜰로 가면 볼 수 있을 게야.”
용사의 위치까지 알려주다니, 나를 상당히 신뢰하는 것 같다.
“감사합니다.”
“아닐세. 내가 더 감사하지. 오랜만에 자네 같은 신실한 이를 볼 수 있었어.”
하펜 교황은 찻잔을 내려놓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신도들의 행동을 보고, 그리고 나를 보고,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내 오래 시간을 내지 못해 오히려 미안하네. 자네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일정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성하.”
나야 고맙지. 이제 거리낌 없이 페리드의 모습을 보러 갈 수 있으니까.
“그럼 가보게나. 아, 나가면서 밖에 있는 신도 분께 내 법의를 가져다 달라고 말해주게.”
“예.”
하펜 교황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왔다. 이제 주인공을 만나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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