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25. 그 목소리(2)
* * *
등골이 서늘해졌다.
뭐야 이 목소리는.
귀가 아니라 머리를 통해 들려온다. 이게 말이 되는 현상인가?
순간 비비안이 정신 간섭 마법을 사용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 가능성을 부정한다.
반푼이 대마법사인 비비안이 내게 정신 간섭 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을 리가 없다.
“방금 뭔가 들리지 않았어?”
“아니요.”
벨라트릭스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다.
비비안은 고룡의 심장에 넋이 나가 있었다.
그렇다면 목소리는 내게만 들렸다는 뜻이다.
정상적인 대마법사라고 할지라도 불가능해.
대마법사는 물론이고, 용조차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이 몸에 정신 간섭 마법을 성공시킬 수 있는 존재가 있을지나 궁금하다.
그러니까 이 목소리는 정신 간섭 마법 같은 게 아니다.
그냥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그리고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어.
어디서였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때다.
아르켈의 몸에 빙의하기 직전 들려온 목소리가 분명하다.
이날까지 그 목소리의 존재가 나를 아르켈의 몸에 빙의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맞아.
이 자는 아르켈의 몸에 나를 빙의시켰다.
훨씬 상위의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 존재라면 내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도 가능하겠지.
“하.”
이날 이때까지 그냥 가만히 내버려뒀으면서.
심지어 ‘현재 목표’도 가만히 내버려둔 주제에.
지금 와서 비비안 모바레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라니.
어이가 없네.
왜 갑자기 비비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라고 시키는 걸까.
『……페리드를 주의하세…요.』
여기서 갑자기 페리드를 언급한다고?
페리드는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그것보다 어째서 내가 페리드를 주의해야 하지?
아니, 내가 마족 행세를 하는 한 페리드를 주의해야 하기는 하지.
하지만 주인공은 날 죽일 수 없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절대로 날 죽일 힘이 없어.
그런데 어째서.
『천…족을 주…의하……세요.』
점점 목소리가 끊겨 들려온다.
내 머릿속에 간섭할 수 있는 시간제한이라도 있는 건가.
페리드 다음에는 천족인가.
사실 천족을 주의하라는 것도 이상한 말이다.
천족은 이 땅을, 이 행성을 지키는 존재다.
그런데 어째서 천족을 주의하라고 하는 걸까.
설마 이 존재가 원하는 건 이 세계의 멸망인가?
그래서 아르켈의 몸에 나를 빙의시킨 건가?
아니. 아무래 생각해봐도 그건 아니지.
그렇다면 현재 목표를 던전 운영같은 소소한 것으로 지정했을 리가 없다.
그냥 세계 멸망을 바라면 현재 목표에 세계를 멸망시키세요, 라고 적으면 됐으니까.
아르켈에겐, 아포디미아에겐 그럴 만한 힘이 있다.
정복은 무리일지 몰라도, 공멸이라면 가능해.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이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페리드와 천족을 주의하라고 했었지.
그렇지 않아도 아리아의 도움을 받아서 주인공을 보러 갈 생각이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빠른 시간 내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직접 가서 모습을 봐야 어떻게 판단을 하든가, 하지.
“크흠.”
바로 그때,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비비안이 헛기침했다.
“실례했습니다. 자태가 너무 아름다워서 넋을 놓고 말았어요.”
아아, 비비안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라고 했었지.
그래 그렇게 해주도록 하자.
그 목소리의 존재가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따라주자.
“얼마에 파실 거죠?”
“시세대로 하죠.”
일반적인 용의 심장의 시세 정도면 된다.
그 정도면 포탈을 설치할 수 있는 가격은 되겠지.
이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히 배려해준 것…….
“고룡의 심장은 시장에 나온 적이 없어서 시세를 측정할 수 없어요.”
아니 고룡의 심장 가격을 전부 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비비안의 말대로 이건 시세를 측정할 수 없는 물건이다.
이렇게 온존하고 거대한 용의 심장을 누가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어떤 대가로 사려고 들겠는가.
원래라면 얻은 사람이 그냥 사용했을 물건이다.
절대로 시장에 나올 리가 없는 물건이야.
내가 이 심장을 섭취해도 강해질 건덕지가 전혀 없어서 팔려고 하는 거지.
“이 마을에 포탈을 건설해주시면 어떤가요.”
니콜라스가 말했던 조건을 그대로 읊었다.
하지만 상황이 다르다.
니콜라스는 내게 지랄을 한 거고.
지금은 내가 비비안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거니까.
“그 정도로는 아르켈님이 손해 보는 거래에요.”
그러나 비비안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좀 놀랄만한 일인데?
탐욕적인 마법사가 자신이 이득을 볼 수 있는데도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할 줄이야.
“포탈 건설 말고도 금화를 더 얹어드려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드릴 수 있는 금액이 생각보다는 적네요.”
비비안은 가방에서 서류를 몇 가지 꺼내더니 책상 위에 올렸다.
“우선 이 정도에요.”
대충 보니까 무슨 양도서 같다.
이게 어느 정도 가치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마침, 옆에 전문가가 있네.
“공작부인. 이게 어느 정도 가치인지 봐주시겠습니까?”
무려 왕국 제일의 상회를 운영하는 공작부인이다.
이게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는 단번에 알아차리겠지.
“그러죠.”
벨라트릭스는 책상 위의 서류를 살펴보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비비안을 노려보았다.
“마법석, 스크롤, 게다가 물류 창고를 전부 양도하겠다고요?”
“어느 정도 가치이길래 그러십니까?”
“이건 아라엘 왕국 마법사 길드의 전 재산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예? 내 귀가 지금 잘못됐나.
“제정신이에요, 모바레크 자작?”
“그냥 용의 심장이 아니라 이 정도 심장이에요.”
“고룡의 심장이 마법사에겐 이 정도 가치가 있는 건 알지만, 너무 과하지 않아요?”
“전혀 과하지 않아요, 부인. 오히려 다른 마법사 길드 쪽과 경쟁이 시작되면 지금 제가 제시한 것보다 가격이 훨씬 높아질 수도 있어요.”
경매에 들어갈 것까지 고려했었구나.
하긴 소문이 퍼지면 다른 마법사 길드의 대마법사들도 군침을 흘리며 내게 찾아올 것이 분명하긴 하지.
“그래서 처음부터 전 재산을 가져왔죠. 양도서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어요.”
벨라트릭스가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비비안이 제시한 대가가 상당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너무 미친 짓이에요!”
“이것만 얻을 수 있으면…….”
“아라엘의 마법사 길드는 박살이 날 건 고려하지 않는 건가요?”
아. 마법사 길드가 풍비박산 날 정도야?
그건 나한테도 조금 곤란한데?
마법사 길드는 마법사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는 기관이기도 하다.
그런 마법사 길드가 박살 난다?
모험가로 활동하는 마법사들이 다른 왕국으로 떠날 수도 있다.
이건 말려야 돼.
보아하니 비비안은 내가 충분한 대가를 받지 않으면 고룡의 심장을 받지 않으려는 것 같다.
탐욕적인 마법사 중에서도, 정직한 마법사들이 저렇기는 하지.
제대로 된 대가를 주지 않으면 물건을 받을 수 없다는 그런 강직함, 싫지는 않다.
그러면 무슨 대가를 말해야 하지?
어…….
“마법사 길드의 본부를 여기로 옮기는 건 어떻습니까.”
고민 끝에 비비안에게 내가 받을 대가를 제시했다.
“예?”
“저와 공작부인은 마을이 커지길 바라거든요.”
“그렇죠. 아, 확실히. 마법사 길드의 본부가 여기 있으면 그만큼 마법사들이 많이 찾아올 테니 마을이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
벨라트릭스가 제법 괜찮은 조건이라는 듯이 눈을 밝혔다.
뭐가 됐든 마법사 길드가 풍비박산 나는 것보다는 좋은 조건이겠지.
“본부를 이리로 옮겨주시고, 포탈 건설을 해주신다면 심장을 드리겠습니다.”
“상관은 없지만, 겨우 그 정도로 괜찮나요?”
겨우 그 정도라.
이런 시골에 마법사 길드의 본부가 생기는 거다.
겨우라는 말은 분명 어폐가 있어.
지만 비비안은 아무래도 마음이 걸리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예. 나머지는 뭐, 빚으로 해두죠.”
“빚이요?”
“네. 나중에 갚을 빚. 장부에 달아놓으세요.”
빚.
다르게 말하자면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해도 된다.
목소리가 말한 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저도 마법사 길드가 망하는 건 원치 않으니까요. 아니면 혹시 싫으신지?”
“바로 계약서 작성하죠.”
잠시 후 비비안과 계약서를 작성했다.
옆에 있는 벨라트릭스가 공증을 섰다.
이로써 고룡의 심장은 곧 비비안의 손에 넘어갈 거다.
“본부를 옮기고, 포탈을 건설하려면 한 달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럼 그때 다시 뵙죠.”
그때까지 고룡의 심장은 아공간에 고이고이 모셔두자.
여기 넣어두면 잃어버릴 걱정도, 도난 당할 걱정도 없으니까.
그렇게 계약서 작성이 끝난 후 비비안이 급히 자리를 떠났다.
“이제 마을이 많이 붐비지 않을까?”
“그렇겠죠?”
“그럼 슬슬 데려다 줄게.”
벨라트릭스를 데려다주고 나서는, 최대한 빨리페리드의 모습을 보러 가볼 생각이다.
그 목소리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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