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12. 두 여자
* * *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폐하?”
잠시 후 부르누카가 가져온 것들을 바라보며 나는 그저 눈을 끔뻑였다.
“어…….”
부르누카가 가져온 장식품에는 딱히 불만이 없다.
보석 세공품부터 시작해서, 금으로 만든 액세서리, 심지어 돌을 깎아 만든 조각상까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자랑할 것이 분명하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걸 가져오지 말입니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다. 장비 쪽도 성능에 불만이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아니, 솔직히 말해서 불만이 있기는 하다.
뭐 이렇게 성능이 좋아?
“이거 기술력이 너무 좋아도 문제네.”
생각해보니까, 내가 초대 선택받은 자의 성검을 별거 아닌 성검이라고 판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지상은 여전히 다이나토스가 세웠던 고대 제국의 기술력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 고대 제국의 기술력을 이어받은 아포디미아의 기술력은 지상을 한참 초월해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기술력과 오직 아포디미아에만 존재하는 마나 전도율이 뛰어난 금속, ‘아우프헤벤’이 맞물려 만들어낸 장비의 성능은 그야말로 초월적이었다.
지상의 무기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부르누카.”
다시금 장비를 바라보고 깨달았다. 아, 이건 너무 과하다.
“예, 듣고 있습니다.”
딱히 부르누카의 잘못은 아니었다. 내가 가져간다고 하니 부르누카는 당연히 최고의 장비를 가져왔겠지.
하지만 이 정도 무기를 던전 보상이랍시고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걸 보상으로 놔뒀다가는 밸런스가 붕괴할 게 분명하니까.
“장식품은 놔두고, 장비들만 제일 안 좋은 것들로 가져와.”
“예? 잘못들었습니다.”
“제일 안 좋은 장비들을 가져오라고.”
아, 네 귀 잘못된 거 아니니까 손가락으로 귀 후비지 마. 정확히 들은 거 맞아.
“안 됩니다. 폐하의 손에 그런 졸작에 쥐게 하는 것 자체가 죄이지 말입니다.”
“내가 쓸 거 아니니까 괜찮아.”
“아하. 그럼 아래 아이들이 쓰는 장비를 가져오겠습니다.”
잠깐만.
아래 아이들이 쓰는 장비 중에서도 좀 정신 나간 성능을 자랑하는 게 몇 개 있지 않던가.
“……그러지 말고 연습용 무기 가져와.”
아예 여기서는 장비로 취급하지도 않는 것들을 가져가는 게 맞는 거 같아.
“겨우 그거면 됩니까?”
“어.”
우리야 겨우 그거지만, 지상에는 그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성능을 자랑하니까 괜찮아.
“아, 그리고 이 장비들은 내가 챙겨가도 되지?”
부르누카가 가져온 장비 중에 몇 개 탐이 나는 게 있기는 했다. 이건 보상용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면 딱 맞겠거니 싶은데.
“당연하지 말입니다.”
좋아, 그럼 부르누카가 가져온 것들을 전부 아공간에 챙겨두도록 하자.
“아, 폐하의 무기들도 전부 조정해놨지 말입니다. 가져옵니까?”
내 무기? 아. 아르켈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따로 있기는 하지. 어떻게 할까? 가져갈까?
잠시 고민을 해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됐어. 내 무기는 안 가져갈 거야.”
그것들은 쓸 일도 없을 거다. 쓸 일이 있다 싶으면 가져오면 되고.
“알겠습니다. 연습용 무기는 창고에 가야 하니 아래 아이들을 시켜서 가져오지 말입니다. 시간이 걸릴 테니 바로 폐하께 드리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용건은 전부 끝나셨나요, 폐하?”
부르누카가 나가자, 메르넬라가 옆에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이제 부르누카를 포함해서 다른 모두가 전부 제 할 일을 하러 갔지만, 오로지 그녀만이 내 곁에 남아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일이니까.
“어.”
“그럼 방으로 가시겠어요? 아니면 식사를? 그것도 아니면 씻으시겠어요?”
우리 열한 명의 다이나토스는 제각기 역할이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왕이고, 안드로는 나를 지키는 호위 겸 성의 안전을 책임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메르넬라의 역할은 시종장이었다.
시종장이 왕을 따라다니는 게 당연했기에 나도 딱히 메르넬라가 내 옆에 남아있어도 아무 말도 못 하는 중이다.
“씻으신다면 제가 목욕 시중을 들까요?”
“내가 그거 하지 말랬지.”
아르켈의 기억 중 아포디미아에서 보낸 단편적인 기억들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메르넬라는 항상 아르켈의 목욕 시중을 들려고 했다.
그것도 알몸으로.
가슴에 저런 질량 무기를 가지고 무슨 목욕 시중은 목욕 시중이야.
“왜 항상 거부하는데 다시 물어보는 거야?”
“그거야 오늘은 폐하의 마음이 바뀌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아르켈은 언제나 메르넬라의 목욕 시중을 거부했고, 그건 당연히 나도 같은 마음이다.
저걸 직접 보는 순간 내 이성이 없어지리라 확신한다.
“하아.”
나도 사실 섹스하고 싶어.
내가 다리를 벌리라고 하면 메르넬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다리를 벌리겠지.
나도 알아, 아는데.
그 순간 나를 향한 메르넬라의 집착 역시 강해질 것을 아니까 안 해. 한 번 쾌락에 이때까지 당했던 집착보다 더 강한 집착이 날 따라붙는다?
그렇다면 난 쾌락을 포기하겠다.
“그럼 식사를 하시겠어요?”
식사라. 그러고 보니 레베카도 슬슬 배고프지 않을까? 시간이 늦었으니 잠을 자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안 자고 있으면 배가 고플 시간이기는 했다.
어쩐다.
나는 메르넬라를 흘깃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바라보셔요?”
다른 이라면 몰라도 메르넬라만큼은 레베카와 마주치면 안 된다.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고 그 발작을 일으켰었던 메르넬라다.
그런데 내가 데려온 손님이 여자라는 걸 알게 된다? 그 뒤에 일어날 일은 정말이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그럼 식사 부탁해.”
“네, 알겠어요. 미리 준비하라고 일러놓았으니 같이 식당까지 가도록 해요, 폐하.”
레베카가 어떤 상태인지도 좀 알고 싶은데. 아, 생각해보니까 경황이 없어서 아래 아이들한테 손님의 존재를 은폐하라는 말도 안 해놨었구나?
좆됐다.
만약 아래 아이 중에서 한 명이라도 메르넬라에게 레베카의 존재를 말하는 순간…….
지금이라도 메르넬라 몰래 말해놔야겠…….
“폐하, 그리고 시종장님을 뵙습니다.”
“어머 무슨 일이니?”
노크와 함께 어전에 들어와 무릎을 꿇은 이는 아래 아이 중에선 제법 계급이 나이가 있는 녀석이었다.
아마 메르넬라의 직속 부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종장의 직속 부하이니만큼, 저 아이는 성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살핀다.
아, 갑자기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폐하의 손님께서 함께 식사하셨으면 한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손님?”
무언가를 직감이라도 한 듯 메르넬라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변한다.
“폐하께 무슨 손님이 오셨다는 것이니? 난 듣지 못했는데.”
“붉은 머릿결의 아름다운 마족 아가씨로 성함은 레베카 플락…….”
어째 이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적이 없는 걸까. 제발 부탁이니 내 예감이 한 번이라도 틀려봤으면 좋을 텐데!
“……이십니다.”
“폐하.”
메르넬라가 이쪽을 바라보려고 하자 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럴 때 시선을 마주하는 건 아무리 나라도 부담스럽다.
“어째서 제게 손님이 오셨다는 걸 말해주지 않으셨나요?”
어라? 생각보다 메르넬라의 목소리가 평온하다? 곧바로 발작을 일으키리라 생각했는데 왜지?
“시종장으로서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데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으시다니요.”
아니 이렇게 침착하니까 더 불안해지잖아. 그냥 화를 내. 아까 통화했을 때처럼 발작을 일으키라고! 그게 더 마음 편하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손님분도 식당으로 부르면 되겠네요.”
이런 반응이면 괜찮지 않나 싶어서 메르넬라와 시선을 맞이한 순간.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죠?”
메르넬라의 눈은 평온한 목소리와 달리, 완전히 맛이 가 있었다. 저 정도면 광인의 눈빛이라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망했다. 이대로 레베카와 메르넬라는 마주하게 두면 안 된다. 그 순간 메르넬라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는 예상조차 할 수가 없어.
“그럼 손님분을 식당으로 모시겠습니다.”
“기다…….”
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메르넬라가 내 손을 붙잡았다.
양손으로 내 한 손을 강렬히 붙잡고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어찌 이리도 소름이 끼칠 수 있을까.
“그렇죠, 폐하? 단순한 손님분이시니 같이 식사하셔도 괜찮잖아요.”
떠나가는 아래 아이에게 기다리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메르넬라에게 손을 놓으라는 말도 하지 못하고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그렇지요?”
그 눈에 언뜻 보이는 광기에 뒤섞인 슬픔이 보인다.
내가 메르넬라의 구혼을 거절했음에도 그녀가 계속해서 내게 집착할 수 있던 이유는 내가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내가 곁을 내준 여자가 생겼다면 그녀는 과연 어떻게 할까.
“그래.”
결국, 그녀의 잔잔한 광기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서러움을 이기지 못해 비극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식당으로 가는 동안에는 계속해서 후회했다.
내가 미쳤지, 왜 레베카와 메르넬라를 대면하게끔 했지?
처음부터 아래 아이들을 단속했어야 했는데 미처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한 내 실수다.
“후우.”
아니야, 괜찮아. 레베카는 그저 단순한 손님이다.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메르넬라. 지금부터 만날 마족은 지상에 잠입하는 걸 도와주시는 분이야. 표면상으로는 내 상관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나한테 어떻게 말해도 불손하다고 말하면 안 돼.”
일단 최대한 레베카와 내 입장이 어떤지를 설명했다.
“네, 폐하.”
고분고분하게 듣고 있으니까 왠지 더 무섭다. 메르넬라가 내 뒤를 따라오는 중이라, 그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어서 더 불안하기만 하다.
사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그 속죄를 하기 위해서 아르켈의 몸에 빙의한 게 아닐까? 그래서 게임의 스토리와는 다르게 이런 상황이 닥친 거고?
그럴 리가 없지.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내 좆대로 행동해서 생긴 나비 효과에 불과하다.
내가 아르켈을 연기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아르……켈?”
레베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내가 아닌, 내 뒤를 주시한다. 그런 레베카의 눈이 메르넬라와 비슷해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일 리가 없다.
왜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내게 집착하는 메르넬라 뿐만이 아니다.
스스로 내 청혼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줘서 며칠 풀이 죽어서 그렇지, 그 전까지는 레베카 역시 내게 어마어마한 집착을 보였다.
“어?”
등에 푹신하고 따스한 감촉이 느껴진다. 메르넬라가 등 뒤에서 나를 껴안았고, 이 감촉이 메르넬라의 그 풍만한 폭유의 감촉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 여자는 누구야.”
서슬 퍼런 목소리와 함께 레베카가 한 걸음씩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직감했다.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개판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는 것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