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9. 아포디미아
* * *
이곳에 자리 잡은 건 오로지 침묵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 누가 감히 발언할 수 있단 말인가.
아직, 왕께서.
입을 열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하.”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역겨움이 들었다. 대마왕을 칭송하며 무릎을 꿇고 있던 마족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보인다.
그래 나와 바르바라와 닮았다.
그녀가 모든 마족의 정점이자, 그들의 왕이라면.
“발언을 허한다.”
첫 번째 신이시여.
나는 동포들에게 있어서는 왕이고, 아래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신인 존재였다.
다시금 저희의 땅에 강림하여주셔 감사합니다.
수많은 이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합창을 이룬다. 그러나 그 누구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그 누구도 감히 나를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같은 살아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자신과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올바른가? 이것은 사리에 맞는 것인가?
과연 선조들이 다른 종족들을 노예로 취급하던 것은 정당한 일이었나?
오히려 똑같이 살아있는 생명체이면서 그들을 억압하고 노예로 부린 우리의 선조야말로 죄의 대가를 치룬 것이 아닐까?
이건 내 생각이 아닌, 아르켈의 생각이었다.
“너도 약간은 제정신이긴 했구나.”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냥 레베카에게 미친 놈인 줄 알았더니 이런 생각도 할 줄 아는 놈이었어.
물론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레베카인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해서 지상을 침공하는 걸 꺼렸던 거야.
“폐하.”
푸른 머리의 단호한 인상의 기사가 내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나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조금 전 통화를 했던 이 중 한 명인, 클레안드로다.
다른 애들은 안 오고 안드로만 왔네?
“클레안드로, 폐하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벤 놈은?”
“없습니다.”
그거 다행이네. 만약 벤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면 안타까웠을 거야. 뭐, 검에 베였다고 죽을 놈은 우리 중 단 한 명도 없다만.
“그럼 됐어. 다른 애들은 궁궐에 있고?”
“예. 저만 폐하를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그럼 가자.”
아, 가기 전에.
“지금부터 여기를 떠날 때까지는 제가 레베카님께 하대를 해야 합니다. 이해해주세요.”
레베카에게만 들리게끔 살짝 속삭여 말하니, 그녀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손님이 계셨군요. 따라오시지요, 레이디.”
“어? 저요?”
안드로가 손을 내밀자 레베카가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레베카 너지. 여기에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누가 있다고.
“예. 폐하께서 데려오셨으니, 손님이 아닙니까.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여성을 지키는 기사와도 같이 레베카의 손을 잡는 안드로의 모습에 왠지 모를 짜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 짜증을 굳이 내색하지 않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내 뒤를 따라 레베카 그리고 안드로까지 탑승한 후에 마차의 문이 닫힌다.
“하아. 숨 막혀서 죽는 줄 알았네. 진짜 저런 것 좀 안 하면 안 되나.”
저 많은 사람이 내가 왔다는 이유로 무릎을 꿇은 채 단 한마디도 안 하고 있다니. 진짜 숨이 꽉 막히는 광경이 아닐 수가 없다.
“그것이 법도이기에.”
저런 법도를 정한 정신 나간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아, 아르켈의 선조구나. 내 조상을 욕하는 꼴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지상 생활을 어떠셨습니까, 폐하.”
“아, 됐어. 여기서까지 폐하 소리 듣기 싫어.”
“그런가.”
내 말에 곧바로 안드로가 편하게 말을 놨다.
“그럼 지상 생활을 어땠나, 아르켈.”
“그냥 그랬어.”
사실 나만의 작은 던전을 만들고 있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기는 하지만.
그걸 말하는 순간 안드로가 날 어떻게 바라볼 줄 아니까 적당히 말했다.
“그냥 그랬어, 라. 그런 것치고 너무 오랫동안 침공의 서막을 알리지 않는 것 아닌가.”
또 그 말이냐.
“그 건은 좀 이따가 다 있을 때 말할게.”
“편한 대로.”
굳이 같은 말을 두 번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귀찮고, 효율도 낮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설득한다고 해봐야 먹히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아, 이쪽은 내가 지상에 잠입하는 걸 도와주시는 분. 표면상으로는 이쪽이 내 상관이니까 나한테 존댓말 하지 않아도 이해해.”
“아르켈을 도와주시는 레이디셨군요. 감사합니다. 당연히 이해하도록 하겠습니다. 클레안드로 데프테로스입니다.”
“……뭐야 도대체?”
응? 뭐가 이상했나? 안드로의 자기소개는 흠 잡을 곳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아까까진 공손하게 말하다가, 이젠 친구처럼 말하는 거 너무 이상하지 않아?”
아, 그게 이상하다고 느껴졌었던 건가.
나도 뭐, 반쯤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긴 하다.
“이 녀석하곤 사적인 자리에선 친구야.”
하지만 아르켈의 기억에 따르면 안드로와는 공적인 자리에선 왕과 신하의 관계이나, 사적인 자리에선 친구 관계라고 하니까.
나도 이상하게 안드로와 이렇게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쪽이 더 편하다.
“사실은 다른 애들하고도 이렇게 지내고 싶은데, 싫어하더라고.”
“그거야 다른 애들은 너랑 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까. 유전자적으로 무리겠지.”
“유전자적으로 무리?”
이건 다이나토스에 대해서 설명을 조금 더 깊이 해주는 쪽이 레베카가 이해하기 더 쉽겠구나.
음, 그러니까.
“우리 종족은 힘으로 서열을 결정해.”
다이나토스, 스스로 최강이라고 칭했던 종족답게 서열은 단순히 힘으로 정해진다.
“내가 왕이니 당연히 1위. 안드로가 2위.”
“부끄러운 졸장이오나, 폐하의 다음가는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참고로 메르넬라의 서열은 3위다. 뭐 2등 아래부터는 힘의 차이가 너무 크게 나서 딱히 상관은 없지만.
아. 그래도 메르넬라는 다른 애들에 비해서는 제법 강한 편이기는 하다.
“아, 저는 레베카 플락이라고 해요.”
어찌보면 이제야 안드로에게 제 이름을 소개하는 레베카의 행동은 실례이기도 했으나, 안드로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름다운 이름이십니다, 레이디.”
이 새끼 이거 토 나오게 왜 이래?
“결혼한 놈이 딴 여자한테 왜 그렇게 느끼하게 굴어. 니 부인이나 잘 챙겨.”
결혼도 한 놈이 어딜 남의 여자한테. 아니, 남의 여자는 아니지. 적어도 내 여자는 아니니까.
“결혼했으니 더더욱 딴 여자에게 예의를 갖춰야 하는 법이다, 아르켈.”
“그러시겠지.”
안드로에게 딴 속셈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내 기분이 이렇게 상하고 있는 것은 필시 아르켈의 기억에 점점 동화되고 있기 때문일 거다.
분명 그래야만 한다.
“그러고 보니 안드레. 레베카한테는 증오심이 안 느껴져?”
“느껴질 리가 있나. 마족은 지상의 생명체가 아니잖나.”
“그렇구만.”
다이나토스의 유전자 깊이 새겨진 증오는 오로지 지상의 생명체에만 국한된다는 건가.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자를 데려오다니, 너무 경솔한 거 아닌가?”
응?
“메르넬라가 무슨 또라이 짓을 해도 난 모른다.”
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안 그래도 나도 그게 걱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난 모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막상 메르넬라가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면 말려줄거면서.
“무슨 일 생기면 잘 부탁해.”
“모른다고 했지. 메르넬라의 너를 향한 집착은 나조차도 껄끄러워.”
옆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고 망상을 한껏 부풀리면서 당장 지상으로 내려오려고 할 정도다.
“니가 껄끄러우면 나는 얼마나 껄끄럽겠냐.”
옆에서 지켜보는 니가 껄끄럽다고 느낄 정도면 당사자인 나는 얼마나 껄끄럽겠어. 껄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무서울 정도다.
“그쯤 되면 그냥 받아줄 만도 하지 않나. 메르넬라가 못난 것도 아닌데. 결혼은 좋은 것이다, 아르켈.”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겠어. 아무리 대답해봐야 내가 질 말싸움 같은데 굳이 응수해줄 이유가 없다.
“치사한 놈.”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안드레는 잠시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마차가 점점 궁궐에 가까워진다. 사실 이걸 마차라고 표현하는 게 맞나 싶기는 해.
말이 끄는 게 아니라 하단의 엔진이 마나를 연료 삼아 나아가고 있는 거잖아. 그럼 마차가 아니라 자동차라고 봐야 하지 않나?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 사이에 마차가 멈췄다. 아 몰라, 그냥 마차라고 하자.
마차에서 내리자, 아까와 같은 광경이 다시금 시야에 과시되었다.
또냐.
“하아.”
메이드 혹은 집사 복장을 한 아래 아이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인 정적의 상황.
“발언을 허한다.”
“첫 번째 신이시여 다시금 저희 앞에 강림하여주시어 감사합니다.”
첫 번째 신이라는 호칭에 소름이 돋는다.
내가 무슨 중2병도 아니고 저런 호칭이 달가울 리가 없다. 그러나 아래 아이들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늙지 않는 다이나토스와 달리 아래 아이들의 수명은 고작해야 수백 년 정도다. 그렇기에 아래 아이들에게 있어 우리는 진실로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일 것이다.
“궐에 드시겠습니까? 아니면 산책을 하시겠습니까.”
“들어갈 거야.”
“알겠습니다.”
아래 아이들이 궁궐의 문을 열자마자 나는 도망치듯 그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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