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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26화 (26/99)

〈 26화 〉 8. 아르켈 소토르프(3)

* * *

“제가 죄송했습니다!”

“어?”

뭐야, 갑자기 왜 그래? 기껏 레베카를 구하겠다고 마음 먹고 봉인을 푸는 상태였는데, 갑자기 왜 고개를 숙이는 거야.

아, 잠깐만 잠깐만요!

곧바로 봉인을 푸는 것을 멈춘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힘을 보일 필요가 없잖아!

“세이프?! 아니면 아웃?!”

급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와, 다행이다. 게임마냥 워프 게이트가 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일단 세이프다.

“죄송합니다……. 히끅. 다, 다이, 흐윽. ‘다이나토스’이신 줄 몰랐습니다. 제발 목숨만, 끄읍, 목숨만 살려주세요.”

와, 운다 울어.

어느 사이 다시 용에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간 자이로니아가 우는 모습은 참으로 꼴불견이었다.

울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저게 뭐야.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봐도 저거, 지린 거지?

설마 저 용이 지려버릴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하긴 무서울 만도 하지. 아르켈의 전력을 내보이면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너, 날 알아?”

설마 지상에 존재하는 자의 입에서 ‘다이나토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히끅. 네, 조금뿐이지만……. 알고 있어요. 선조께서 말씀해주셨거든요. 지금은 제가 가장 오래 산 용이지만.”

“그렇구만.”

가장 오래 살아온 용이 선조라고 부를 정도면 얼마나 까마득하게 옛날 일인 거야. 그 정도면 확실히 다이나토스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해도 그럴 듯하긴 하다.

“아르켈.”

아, 이제 올 것이 왔구나. 레베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마음이 아파져 왔다.

수상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모습이 슬퍼, 무섭다는 듯이 나를 주시하면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그 모습에 자조하고 만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레베카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너, 정체가 뭐야?”

후회는 되지 않지만, 조금 전까지 내게 따스하게 미소를 짓던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서 안타까움이 생기고 만다.

“마족도 아니었던 거지? 진짜 정체가 뭐야.”

레베카가 원래 내 뿔이 있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힘을 발현하면서 그 여파로 뿔도 날아가 버렸나 보다.

“레베카님, 그게.”

일단 설명을 하긴 해야겠지. 그냥 사실대로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팔찌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그래, 이럴 것 같기는 했다. 전력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는데.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금방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어딜 가려고. 볼일 있으면 내 앞에서 해.”

아, 그래도 레베카의 저 표독스러운 태도 덕에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내 힘에 완전히 질려버렸다면 내가 떠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인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정도까진 아닌가 보다.

그 점이 기뻐서, 나도 모르게.

“바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아, 나 진짜. 무슨 정신머리로 여기서 아포디미아 쪽과 통화를 하겠다고 말을 했는지 모르겠네.

몰라, 일단 받기나 하자.

[우리의 왕이시여.]

메르넬라의 목소리가 아닌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목소리는 시릴리오인가. 메르넬라가 아니면 어떻게 말이 통하지 않을까?

[힘을 사용하신 것이 포착되었습니다. 그것도 저번보다 더욱 강한 힘을!]

어, 왠지 아닌 거 같다.

[지금이야말로 진격의 때입니까? 그대, 왕을 위해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선봉에 서서 나팔을 불겠습니다. 가장 앞장서서 깃발을 들어 올리겠습니다. 제 손으로 문을 열겠습니다!]

응 꿈이야. 메르넬라가 아니라고 말이 통하리라 생각하다니. 그럴 리가 없는 걸 알고 있으면서 잠깐 달콤한 꿈을 꿔봤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저 간악한 지상의 무리에 본때를 보여줄 시간이심을 말씀해주십시오! 제게 선봉의 명예를 하사하여주십시오!]

목소리에서 넘실거리는 광기가 엿보인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까지 만들었는지 알기에 공감할 수 있지만, 반대로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비켜라, 시릴리오.]

새롭게 끼어든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도 남자의 목소리다.

[폐하. 선봉은 저, 에이글에게 맡겨주십시오.]

[다들! 통신은 제 담당인 거 잊으셨나요! 전부 저리 꺼져!]

아, 저 너머에서 익숙하다면 익숙한 메르넬라의 비명이 들려온다.

“하하, 개판이네.”

아주 그냥 개판이다, 개판이야. 그 녀석은 뭘 하는 거야? 분명 아르넬의 기억 상, 내 다음가는 녀석에게 전권을 맡기고 왔다.

[폐하와 저만의 시간을 침범하려고 들다니, 해보자는 거죠? 각오하세요. 곱게 죽이진 않은 거예요?]

[하. 메르넬라 네가 아무리 ‘트리토’라고 해도 우리를 힘으로 어떻게 해볼 생각 마라!]

[옳은 말이야, 에이글. 실로 ‘테랄토스’다운 말이었어.]

[그러니까! 힘으로 해보고 어떻고! 통신은 제 담당이라고요!]

그런데 이 개판을 그냥 내버려두고 있다고? 그게 지금 가당키나 한가.

“안드로!!”

우리 열한 명의 ‘다이나토스’ 중 첫 번째인 아르켈 소토르프에 이어 두 번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 기억 속에 떠오르는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예, 폐하.]

역시 옆에 있었구나. 그런데 이 개판을 그냥 놔두고 있었다고?

“지금 뭐하자는 거지? 내가 자리를 비우면 두 번째인 네가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내 누누히 말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옳은 말씀이십니다, 폐하. 하오나.]

“하오나 뭐.”

어디 변명이나 들어보자. 그나마 다른 녀석들과 비교하면 안드로는 제정신이었으니까 변명 정도는 들어줄 수 있다.

[출격 준비를 하고 있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제 실수에 대한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지상에 내려간 후, 적들을 멸하고 폐하의 앞에서 자결하겠으니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소서.]

안드로 너마저……. 제정신이 아니었구나. 머리가 아프다, 너무 아파.

무슨 내가 허락만 하면 지상에 박으려는 기다리고 있는 삼 분 대기조냐.

“잘 들어. 진격은 하지 않는다.”

나는 지상을 침공할 생각이 전혀 없다. 진짜 아르켈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아르켈은 레베카 때문에 침공의 생각을 지웠고, 나는 이 지상이 너무나도 아름답다고 느껴서 침공을 꺼렸다.

게다가 너희가 침공하면 내가 지금까지 노력해서 쌓아 올린 나만의 작고 예쁜 던전이 무너지는 거잖아!

우리 던전은 아가야, 지켜줘야 한다고.

[그, 그렇지만 폐하. 이미 진격 준비를 마쳤습니다. 지금 와서 철회하는 건.]

[무엄하다, 시릴리오. 폐하의 말씀을 반박하려고 들다니 이 무슨 추태냐.]

아, 그래도 역시 안드로가 그나마 제정신이긴 하구나. 진짜 다행이다.

[진격만 금하신 것을 보면 침공은 허가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우선 우리끼리 조용히 내려와서 내부를 차근차근 파먹자고 하시는 뜻이시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폐하?]

제발 다들 좀 닥쳐줬으면 좋겠다.

“아니 침공도 안 할 거야. 그냥 내려오지 마.”

[예!?]

[그, 그러나 폐하!]

전력을 보인 것도 아니고, 해방하는 도중에 멈췄다.

내 전력을 비율로 따지자면, 조금 전에 고작 50% 정도 내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쯤 봉인을 풀었을 때, 겨우 50%만으로도 저 용은 충분히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었다.

다시 한 번 아르켈의 전력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잡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긴 했지.

아니 생각해보니까 열받네. 전력을 낼 생각이긴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전력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저것들은 이렇게 침공, 침공, 노래를 불러댈까.

아, 이건 안 되겠다.

“내가 직접 올라갈 거니까, 너희 가만히 대기하고 있어. 조금이라도 내려오려고 하면 나 진짜 화낸다.”

한 번 직접 가서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어.

[정말이십니까!]

[폐, 폐하께서 올라오신다고요!? 이럴 때가 아니야! 다들 승부는 다음으로 미루겠어요! 저는 당장 몸을 씻으러 가야! 아이들아, 빨리 목욕 준비를!]

내가 올라간다는 뜻을 밝히자 메르넬라가 목욕을 한다며 분주해졌지만,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다.

“아르켈. 올라간다니, 무……슨 뜻이야?”

“아, 그게.”

맞다. 레베카가 듣고 있었지. 어차피 다 설명할 생각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설명해주는 건 조금 곤란한데.

[응?]

아, 잠깐만.

[지금 여자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요, 폐하?]

메르넬라가 있었……지…….

[설마, 설마, 설마 만에 하나라고는 하지만, 설마.]

하아, 또 머리 아프게 만드네.

[역시 여자를 두셨었군요. 그래요, 그렇지 않고서야 폐하께서 침공을 허가하지 않으실 리가 없죠. 어떤 불여우 년이 폐하의 총기를 흐린 게 분명하군요.]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나는 아니지만, 아르켈은 실제로 그러기는 했어.

[이 메르넬라,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내려가서 폐하의 총기를 흐린 그 계집년을 단숨에 죽이겠…….]

“메르넬라 트리토.”

낮은 목소리로 메르넬라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폭주를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명령이다. 거기에 가만히 있어.”

[폐, 폐하!]

[메르넬라 트리토. 감히 폐하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생각인가.]

서슬퍼런 안드로의 목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왔다. 좋아, 일단 메르넬라의 폭주는 막았어.

“메르넬라. 니가 생각하는 건 절대 아니야.”

사실 맞기는 하다. 나는 아니지만, 아르켈은 레베카 때문에 침공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지금 올라가서 설명해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 알겠사옵니다. 아이들아 목욕 준비는 끝났니?!]

메르넬라의 분주한 걸음 소리가 귓가에 들려온다. 자리를 비운 게 확실해보이네. 이걸로 메르넬라는 괜찮아졌지만, 다른 애들은 또 모른다.

“안드로.”

[하명하십시오.]

“명령이다. 지금부터 내가 올라갈 때까지 내 말 조금이라도 어기는 놈은 그냥 베버려.”

[명을 받듭니다.]

이렇게 말해두면 안드로는 나 몰래 딴짓을 하려는 놈들을 분명히 벨 것이다. 이렇게 말해두면 내 말을 들은 다른 놈들도 섣불리 다른 행동을 할 생각을 못하겠지.

“믿는다.”

[……이 클레안드로, 데프테로스의 칭호를 걸고 믿음에 응할 것을 맹세합니다.]

뭘 또 그렇게 감격스럽다는 듯이 말하고 있냐. 너무 감격스러워서 목소리 떨리는 거 봐라.

이렇게 충성하면서 어떻게 내 머리를 아파할 짓을 이렇게 골라서 하는지 모르겠다.

“그럼 끊는다.”

[예. 무사히 귀환하십시오, 폐하.]

“오냐.”

통화를 끊은 후, 고개를 돌렸다. 자 이제 께름칙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베카에게 설명할 시간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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