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8. 아르켈 소토르프(2)
* * *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나랑 산책 좀 해줄래? 조금 생각을 정리 하고 싶어.”
던전을 나한테 맡기는 대신 산책 한 번? 이쪽이 완전 이득 보는 장사잖아?
“알겠습니다.”
나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다.
“차만 다 마시고 같이 나가자.”
찻잔을 건네주자 레베카는 천천히 차향을 음미한 후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순간, 아르켈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아르켈은 지상과 전쟁을 하는 순간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마계가 지상을 도우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지상의 정찰을 끝낸 후에 마계로 침입했고, 거기서 가장 처음 본 것이 레베카였다.
그때도 레베카는 저렇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유유자적 차를 마시며 미소를 짓고 있는 레베카의 모습에 아르켈은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켈의 기억과 동화해서? 그게 아니라면 레베카의 모습이 아름다워서?
“하아, 역시 아르켈이 타준 차가 최고야.”
세상만사를 잊어버리고, 순수하게 차에 집중하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진다.
뭐야. 나 왜 이래?
레베카가 매력적인 여성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왜 갑자기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이건 아르켈의 기억 때문이다. 내 감정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확신이 없는 건 왜일까.
“다 마셨다. 나가자.”
던전 바깥으로 나가는 동안에도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바깥은 이미 해가 저물어가, 하늘 위에 거대한 위성 아포디미아가 빛나고 있었다.
그런 시간임에도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레베카는 신기하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인간들은 어떻게 저리도 부지런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은 약하니까요. 약하니까 부지런하지 않으면 언젠가 닥칠 상황을 이겨낼 수 없는 존재이니 부지런할 수밖에요.”
“흥미로운 견해야.”
“흥미로워 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레베카와 함께 숲을 걸어 다닌다. 그러는 와중에도 내 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다.
“아르켈. 이거 봐.”
“아.”
반딧불이가 레베카 주위를 돌아다니는 모습을 본 순간, 넋을 잃고 말았다.
아름답다. 조그마한 빛이 에워싸고 있는 모습은 여신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뭐야, 왜 그렇게 얼빠진 얼굴로 쳐다봐.”
아, 이런.
“죄송합니다.”
너무 얼이 빠져 있었어.
“사과하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내가 고개를 숙이자, 레베카는 살며시 웃더니 이내 반딧불이를 내쫓고 계속해서 걸어나갔다.
아니, 반하게 만들라고 한지 고작 한 시간도 안 지났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나대는 거야?
“뭐해, 안 따라오고.”
“아, 네.”
그렇게 더더욱 숲의 안쪽으로 걸어가던 중 호수를 발견한 레베카는 방향을 그쪽으로 틀었다. 그리고는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앙증맞은 발가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차가워서 기분 좋아.”
레베카가 발을 호수에 담그고 물장구를 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은은히 빛나는 밤하늘 아래 물방울이 튀겨 위성의 빛을 한 아름 머금어, 한 폭의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아.
“아르켈도 어때?”
그럴까?
레베카의 제안에 따라 나 역시 호수에 발을 담갔다.
“기분 좋지?”
“예.”
그 말을 끝으로 레베카는 한동안 말없이 물장구를 치기만 했다. 마치 생각을 정리하듯이. 나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아포디미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르켈.”
“생각이 좀 정리되셨나 보군요.”
생각이 정리됐으니까 나를 불렀겠지.
“응.”
레베카가 매우 진중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지금부터 할 말은 그녀 나름대로 결론을 낸 것이겠지.
“생각을 해봤는데, 나는 아르켈을 좋아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레베카 플락이 아니라, 레베카를 봐준 건 아르켈이 처음이었으니까.”
어? 이렇게 돌직구로 고백해올 줄은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아르켈의 청혼을 거절한 건, 조금 놀려주고 싶었던 것 같아. 가문 이유도 사실 핑계였어.”
조금 슬픈 듯한 웃음이 왜 이렇게 안타깝게 느껴질까.
“네가 언제까지고 나를 봐주리라 믿고 응석을 부린 거였어.”
(레베카님을 향한 제 마음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아르켈의 기억이 부상한다. 첫 청혼 때 아르켈은 그렇게 말했다. 그래 마음이 변치 않는다고 말해놓고, 지금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이건 누구의 잘못인가. 아르켈? 레베카? 그것도 아니면 나? 누구의 잘못도 없다. 그저 서로 엇갈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죄책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널 다시 반하게 만들 생각이야.”
은은한 빛 아래, 소악마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사냥감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을 한 레베카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쓰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레베카에게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싶어서 조금 놀랐어.
“각오하는 게 좋을걸?”
“부디. 살살해주시길.”
이쪽은 아르켈의 기억 때문에 이미 너덜너덜하다고.
“아, 생각도 정리됐겠다, 할 말도 다했으니 이제 돌아갈까?”
“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신발을 신을 때쯤이었다.
살기?
뒤쪽에서 살기가 느껴져 고개를 돌린 순간,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찾, 았, 다.”
소녀는 께름칙하고 소름 돋는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 순간 소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오빠였구나? 오빠밖에 없어. 오빠가 내 아이를 죽인 거지? 그렇지?”
분명 대마왕 바르바라가 경고했던 그 용이다.
“다른 건 괜찮아. 아이를 죽였어도 딱히 상관없어. 보물도 괜찮아. 다 줄 수 있어.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제법 유쾌하다는 투로 즐겁게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였을 뿐.
이내 굳은 얼굴로 그 희고 여윈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는.
“그 검만은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감히 더러운 마족 주제에, 마족의 손으로 그 검을 만지지 말았어야지!”
동시에 흉포하디 흉포한 함성이 지천을 뒤흔들었다.
“전부 멸해줄게, 내 소중한 것을 건드렸으니, 너의 소중한 것도 전부 앗아가 주도록 하마. 그것이 나, 자이로니아의 뜻이니라.”
소녀의 섬섬옥수가 비늘로 뒤덮여 흉측하게 변해간다. 작았던 몸이 찢기고 찢겨, 마침내 용이 지상에 제 모습을 보였다.
“검……. 설마 그 성검!”
“아는구나? 그 검은 지금 어디 있지? 아니, 지금 당장 말하지 마. 괴롭히고, 또 괴롭혀서 죽기 직전에 어디 있는지 들을 생각이니까.”
이건 좋지 않다.
“더러운 손으로 그 검을 만졌으면, 그만한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어?”
“우리를 건드리면 마족 전체를 건드리겠다는 뜻이야. 그걸 알면서도 그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건드린 건 너희가 먼저 건드렸어.”
고룡을 죽인 건 나니까, 건드린 건 확실히 마족이 먼저 건드린 셈이긴 하지.
“그리고 건드리면 뭐 어때서.”
용이 가소롭다는 듯, 콧바람을 내쉰다.
“마왕들도 감히 함부로 날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는데, 나를 감히 어찌하겠다는 걸까?”
저번에 상대했던 용과 격이 달라. 그렇기에 위험하다.
“아르켈.”
레베카가 나와 용 사이를 가로막는다.
어째서?
“겁먹은 건 알겠는데, 그럴 시간에 도망쳐.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빨리 던전으로 돌아가서 마계에 알려.”
겁을 먹었다고?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 몸을 숙인 채 덜덜 떨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이러는 이유는 겁을 먹어서가 아니다. 그저, 그저.
“도망? 내가 그걸 허락해줄 리가 없잖니.”
“무, 무슨!”
사방에 결계가 처지자 레베카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이로써 도망칠 길도 없어진 셈이다.
“우선 이 여자 마족부터 처리할까? 볼 일이 있는 건 오빠뿐이니까.”
용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린다. 그 위세가 마치 산이라고 해도 무너트릴 것 같아.
“마족의 아이야. 네 나약함을 한탄하거라. 그리고 재해 앞에서 그 어떤 생명체도 평등하다는 것을 알아라.”
그제야 내 망설임도 끝이 났다.
“야.”
레베카의 앞에 서서 용을 바라보았다. 저 용이 이 자리에 온 것은 나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누가 누굴 죽인다고?”
아르켈의 기억과 동화하여 슬픔을 느낀다. 좌절을 느낀다. 그리고 분노 역시도.
지금 힘을 보이면 레베카가 나를 낯설게 바라볼 것을 안다. 레베카와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어. 나를 배제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그리 된다면 던전 운영에도 차질이 생기겠지. 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면 당연히, 나는 죽을 것이고.
그럼에도 나는 힘을 발휘한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레베카가 죽으니까. 그 꼴은 보고 싶지 않아서.
“자, 잠깐만! 아르켈 저건 마왕님들도 어떻게 못 하는 용이야! 뭘 어떻게 하려고 그래!”
고개를 돌려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내가 힘을 보인다면 레베카는 어떻게 생각할까. 무서워할까? 내가 누군지 수상해 할까?
내가 마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존재 자체가 거짓이었다고 느끼고 실망할까?
그래도 이미 지키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이제 망설임은 없으니 상관없어.
“뭐야, 오빠. 자기 여자는 지키겠다는 뜻?”
“그렇다면?”
“마족 주제에 인간답게 굴지 마. 역겨우니까.”
비웃음과 함께 섬광이 날아들었다.
“쯧, 최대한 고통을 주고 죽이려고 했는데.”
“뭘 끝났다는 듯이 말하고 있어.”
“뭐, 뭐야!”
당황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이 정도로 나를 어떻게 하려고 했다면 실망인데.
“아르……켈?”
등 뒤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지금은 신경 쓰지 않는다.
“너 평범한 마족이 아니구나!”
“도마뱀 년이 누굴 죽인다고?”
내가, 이 몸이 전력을 보이면 그 무엇도 아닌 도마뱀이 감히, 감히.
“겨우 네깟년이. 나 아르켈 소토르프가 반한 여자를?”
나, 아포디미아의 왕 아르켈 소토르프가 반한 여자를 죽인다고 말해?
“네년이 한 말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지금부터 보여주마.”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후회하게끔 하여주마.
* * *
“네년이 한 말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지금부터 보여주마.”
자이로니아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건 그때였다.
남자 마족의 이마에 달려있던, 마족을 상징하는 뿔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몸은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이 분위기, 이 느낌. 어디선가 겪어본 적이 있던 이 소름 끼치는 기운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가 겁을 먹었어?’
인정할 수 없었다. 용왕조차도 고개를 숙이는 자신이 겁을 먹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선 안 될 일이란 말이다.
그러나 저 모습은 도대체 무엇인가.
등 뒤에 이형의 아우라를 품은 채 허공에 떠오른 저 모습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살기를 머금은 황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본다.
감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만으로 필시 분노를 해야 하는데 어찌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가.
‘아.’
이윽고 힘의 파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금씩 세게, 조금씩 거칠게.
“대가를 치러라.”
거대하게 몸집을 불리며 태산처럼 거대해져 가는 힘의 파도에 자이로니아는 과거 선조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때, 온 대륙을 통일한 제국이 있었다. 한때, 모든 종족은 단 하나의 종에게 복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조가 보여줬던 것은 고대 제국의 파편 하나. 그 파편만으로도 자이로니아는 겁을 먹었었다.
바로, 지금과 같이.
저것이 그때 보았던 것과 같음을 깨닫는 것은 순간 자이로니아는 깨달았다. 저것이, 저분이, 그 어린 마음에 트라우마가 남았을 정도로 무서웠던 힘의 파편을 만들어낸 존재들의 후예라는 것을.
그것을 안 순간.
“제가 죄송했습니다!”
평생 도도히 천공을 날아다녔던 드래곤은 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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