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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24화 (24/99)

〈 24화 〉 8. 아르켈 소토르프

* * *

“루이나 공은 어떻게 하고 싶은가. 프라울 왕국으로 가겠다는 마음이 변함없다면 보내주도록 하겠네.”

고개를 돌려 루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조금 전까지는 루이나가 프라울 왕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막상 그녀가 진짜로 프라울 왕국으로 간다고 한다면 나는 웃으면서 보내줄 수 있을까?

프라울 왕국으로 가는 순간, 아마 루이나의 죽음은 확정이다. 파스칼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그렇게 내버려두는 게 옳을까? 루이나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과 이대로 내버려둬야 스토리가 제대로 진행된다는 두 생각이 서로 충돌한다.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아르켈 님만 괜찮으시다면.”

응? 왜 갑자기 내 이름을 말하는 걸까.

“가끔이라도 좋으니 저도 가르침을 받고 싶어요.”

아, 머리가 아파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인공의 행보를 위해서는 루이나를 프라울 왕국으로 보내는 게 맞다.

주인공이 성장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파멸한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세계가 파멸을 맞이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루이나를 보내고 싶지 않은 걸까. 아까까지는 루이나가 프라울 왕국으로 가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한 주제에.

육성해보고 싶다.

게임에서 루이나는 주인공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내 입맛에 맞춰서 육성할 수가 없었다. 과연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그녀의 한계를 보고 싶었다.

“오, 그렇다면 좋은 방법이 있네.”

좋은 방법이 있다고?

“루이나 공이 내 기사단에 들어오는 거야. 그럼 가끔 아르켈님이 오시면 자네를 지도해줄 수 있지 않은가.”

야, 숟가락을 올리는 실력이 대단하네. 저 정도는 해야 백작을 해먹을 수 있는 건가.

“좋은 방법인 거 같네요.”

루이나 넌 또 왜 백작의 말에 설득되는 건데.

아니 뭐, 상관없나. 사실 주인공이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는 내가 구해주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그때까지 루이나를 키워서 파스칼의 손에 죽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만들어놔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르켈님은 제 제안이 어떠신지요.”

나이 먹은 아저씨가 그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력을 중요시하는 사람답게 루이나를 기사로 맞이할 생각에 신난 건 알겠는데, 그런 눈빛으로 같은 남자를 쳐다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루이나가 원할 때 기사를 그만둘 수 있으면 나도 상관없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루이나 공은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어 할 테니까요.”

응? 그건 또 무슨 뜻이람?

“흐음.”

“아차.”

루이나가 헛기침을 하자 백작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이해하고는 이마를 쳤다.

“이런 개인 사정은 말하지 않는 게 좋았겠군요. 죄송하지만, 제가 말한 건 잊어주십시오, 아르켈님.”

이 사람이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잊어달라고 하다니.

그래도 루이나가 말하기 곤란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으니 캐묻는 건 지금 당장은 캐묻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알았어. 그러면 신분은 언제쯤 만들어지지?”

“곧바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백작 권한으로 적당한 신분을 만들어드리지요.”

“좋아.”

권력 남용인 것 같기는 하지만, 나야 앞으로 곤란할 일이 없으니까 좋다.

“지금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여기로 오겠어. 그 시간에는 내 가르침을 받고 싶은 놈들은 전부 모여 있으라고 해.”

“감사합니다. 그럼 마을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응? 건설 승인과 세금 면제로 이야기가 끝난 거 아니었어?

“마을은 공식적으로 제 승인을 받았고, 우선 개척지로 취급하고 노동력을 좀 보낼까 합니다. 물론 지원금도 필요하겠지요.”

아. 그런 느낌의 이야기를 하자는 거였어? 그나저나 노동력과 지원금이라. 지원금은 딱히 필요 없기는 하지만, 받으면 좋기는 하다.

노동력은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드워프들이 도와주고 있기는 하지만, 노동력이 아직 부족한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기는 하지.”

“그럼 마을의 자세한 위치를 알려주시면, 인부들을 모아서 파견하겠습니다.”

마을의 위치를 알려준 후에도 마을에 파견할 경비병이라던가, 도로를 어떻게 깔아야 하는 가에 관련해서 바르크 백작과 계속 이야기를 했다.

“좋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르켈님 쪽이 손해인 것 같지만, 우선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도로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더니 저런 반응이다.

사람들이 고생해서 도로 공사를 할 바에야 그냥 골렘을 사용할 생각이라서 내가 하겠다고 한 건데.

“그러면.”

음? 또 이야기가 남았어?

“마르도켈 자작을 포함한 몇몇 귀족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 그 이야기가 남았었구나.

“원하신다면 목을 베겠습니다만.”

살벌한 소리를 하고 있네. 물론 나도 그런 사회의 기생충 같은 놈들을 살려두는 건 딱히 바라지는 않지만.

그래도 역시, 지금 당장 처리하는 건 별로일 것 같다.

“일단 저지른 비리와 관련된 정보를 모아서 내게 주겠어? 당한 사람들이 직접 복수할 수 있게 해주고 싶거든.”

그런 놈들이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비리를 캔 후에 당한 사람들에게 직접 복수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부패한 귀족들을 처리해버리면 내 마을 사람들이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버릴 거 아니야.

천천히 내 마을을 발전 시켜서 고향보다 훨씬 살기 좋다는 인식이 박힌 후쯤에 처리하는 게 좋지.

“알겠습니다.”

“이걸로 이야기는 끝이지?”

“예. 신분증은 금방 만들 수 있습니다만, 인부들을 파견할 때 같이 보낼까요?”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그럼 나는 먼저 일어나볼게.”

대충 이야기도 끝났고, 이제 다시 던전으로 돌아갈 시간인가. 아, 레베카와 또 어색하게 마주 봐야 할 것을 생각하니 조금 껄끄럽긴 하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루이나.”

“네, 아르켈님.”

루이나에게 손을 흔들어준 후 응접실에서 나왔다.

* * *

던전에 돌아온 후 레베카에게 향했다. 어색하다고는 하지만, 내 상사이니까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할 필요가 있다.

“레베카님.”

“들어 와.”

문을 열고 레베카의 방으로 들어간 순간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베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따.

아, 어색해 미치겠네.

“근처에 있는 도시의 영주에게 마을 건설을 허가받았습니다. 덤으로 노동력도 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마을이 더 빨리 완공될 예정입니다.”

“그래.”

지금 이 맥빠지는 반응은 뭘까. 평소라면 조금만 기다리면 던전에 사람들이 올 거라면서 신이 났을 텐데.

게임 속 레베카는 강력한 힘으로 정정당당하게 주인공에게 맞섰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당당했다.

그래서 확장팩이 두 편이나 나온 후에도 레베카가 최고의 보스였다고 말하는 게이머들도 있었을 정도다.

나도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긴 하다. 아름답고, 당당하며 그 정도로 강력하고 다양하고 어려우면서 동시에 재밌는 패턴을 보여준 점만 생각했을 때 레베카는 최고의 보스였다.

그런데 지금 이 맥빠진 모습은 뭐야.

“아르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처음부터 네 마음을 받아줬다면 어땠을까?”

내가 레베카에게 지금 당장 고백하면 레베카와 이어질 수 있겠지.

저 나약한 마음을 이용하려고 든다면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레베카님. 그 말은 레베카님이 제게 마음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나요?”

지금 레베카를 차지하면 내가, 게이머들이 마음에 들어 하던 당당한 레베카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말 제게 마음이 있으신가요? 잘 생각해보세요.”

내 생각에 레베카가 이리도 내게 집착하는 이유는 애정결핍에 의한 갈증 때문이다. 항시 받고 있던 애정을 못 받고 있으니 안달이 난 것이겠지.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르켈이 너무 과하게 레베카를 신경 썼던 탓이 크다.

“모르겠어. 네가 다른 여자랑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나. 나디아랑 말하는 것만 봐도 화가날 정도인 걸.”

이건 좀 증상이 심각하다.

사실 레베카는 진짜로 아르켈을 좋아했는데,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내가 레베카에게 신경을 덜 써주니까 제 마음을 드디어 깨달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지금도 그래. 모르는 여자 냄새를 묻히고 있어서 몹시 화가 나.”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 정도로 집착하는 건 조금 심하지 않나?

“그런데 너한테 좋아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어. 그렇지 않아도 아버님은 날 바라봐주지도 않으시는데 하급 귀족하고 결혼한다고 말하면 그걸로 끝일 것 같아.”

레베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무서워.”

우울한 말을 하면 할수록 당당했던 그녀의 모습에서 멀어져 간다.

“이대로면 아버님이 앞으로도 나를 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이대로면 네가 나를 다시 봐주지 않을 것 같아서.”

톡 하고 건드리면 무너지겠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저런 매력적인 여자를 나만 의존하게끔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은 옳지 않다.

내가 아르켈이었다면 모를까, 내가 마족이었다면 또 모를까. 나는 사람이기에 남의 심정에 공감하여 기뻐하고 슬퍼하고 죄책감을 느낄 줄 아는 인간이기에.

“너는 어때? 내가 네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으니까 나를 봐주지 않을 거야?”

“저는 평소처럼 당당한 레베카님이 좋습니다.”

레베카의 당당함을 좋아했던 게이머이기에 지금 그녀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

“그렇게 우울해 하고 있으실 시간에 절 다시금 반하게 해보시면 어떠신지요.”

아르켈은 레베카에게 반했었다. 하지만 나는 레베카에게 반하지 않았다. 그저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생각할 뿐.

그러니까 반하게 만들어봐라. 그러면 내가 네게 진심으로 반해서 고백할 수도 있잖아.

“하? 내가, 널?”

“예.”

레베카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그 눈에 빛이 깃든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내가 아는 평소의 레베카다운 모습이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럼 진심이지요. 지금까지는 제가, 레베카님이 제게 반하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으니까. 이번에는 레베카님의 차례이지 않습니까?”

“어이없어. 나더러 하급 마족을 꼬셔보라는 거야?”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냥 평소처럼 하시면 됩니다.”

꼬셔보라니.

레베카가 몸으로 유혹하는 순간 나 같은 모쏠, 아싸, 찐따 동정은 순식간에 함락돼버리고 말 거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다시 말하지만, 전 평소의 레베카님의 모습이 좋으니까요.”

나는 당당한 레베카의 모습을 좋아하니까. 이게 게이머로서 좋아한다는 거라서 좀 문제이긴 하지만.

“건방져. 아르켈 주제에 너무 건방져.”

다시금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레베카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보고 싶었던 당당한 레베카로 돌아와 있었다.

“차 마시고 싶어. 타와.”

“알겠습니다.”

“마을 건은 잘했어. 그럼 마을이 완공되는 대로 이 근처에 던전이 있다는 소문을 낼 거지?”

찻물을 끓이는 도중 칭찬이 들려왔다.

“예.”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마을을 만들었다고 해도 던전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으면 아무짝에 쓸모 없으니까.

“그럼 던전도 미리미리 꾸며야겠네. 조디악님이 주신 욕망을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야겠지. 음, 던전을 꾸미는 건 던전 마스터인 레베카의 역할이니까 옆에서 구경하면서 조언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하나?

“마을 건도 있겠다, 던전 꾸미기도 네가 해볼래?”

“진짜요!?”

그걸 나한테 맡겨준다고? 진짜로? 그럼 완전 최고지! 던전 디펜스 게임 조건이 다 갖춰진 셈이잖아!

“푸흡.”

아, 신이 나서 너무 흥분해버렸나보다. 레베카의 웃음을 보니 흥분했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래도 던전을 꾸미는 것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 꼭 해보고 싶다.

이번에는 공략 쪽 상황이 아니라 막는 쪽 상황에서 최고의 던전을 만들어보고 싶어.

“진짜야. 한 번 해봐.”

내 눈빛을 읽은 건지 레베카는 여유롭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평소의 레베카 같아서 왠지 마음이 놓였다.

“감사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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