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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20화 (20/99)

〈 20화 〉 7. 주인공의 동료와 만나다

* * *

사교 파티가 끝이 난 것도 대략 일주일이 지났다.

그때부터 나와 레베카의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내가 말을 걸려고 해도 레베카 쪽에서 피한다.

그래 뭐, 이렇게 될 줄은 알았다.

문제는.

“빡대가리.”

레베카와 서먹서먹해진 것도 문제인데 나디아까지 저러고 있다는 거다.

“상사를 향한 존경은 말아 먹었어?”

“이런 빡대가리를 상사로 둔 기억은 없습니다.”

나디아는 내가 레베카와 잘 됐으면 싶은 건가.

그거야 뭐 개인적인 취향이니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상사를 계속 빡대가리라고 부르는 건 선을 좀 많이 넘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예전처럼 일은 하지 않으셔도 되니, 레베카님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 낫다 싶을 정도예요.”

“하아.”

그럼 이 던전은 회생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나마 나 때문에 어떻게 돌아가기 시작하려고 하는 중인데.

“지금이라도 고백하시면, 레베카님이 바로 넘어갈 텐데, 진짜 빡대가리.”

“나라고 그걸 모르겠냐?”

현재 레베카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것쯤은 안다. 여기서 내가 레베카에게 청혼한다면 그녀는 주저 없이 받아 줄 것이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어요?”

“비겁한 짓이잖아.”

“비겁? 뭐가 비겁해요.”

레베카가 과연 아르켈을 사랑할까? 그저 애정결핍에 의한 집착이 아닐까? 그런 개인의 사정을 이용해서 레베카에게 고백해서, 그녀를 취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

당연히 옳지 않다.

그래 나도 안다.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이 동정 모쏠 찐따 새끼의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적어도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더군다나 나 자신이 레베카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그저 그녀가 위태롭다는 이유로 고백하는 건 할 짓이 못 된다.

“모르면 됐어.”

모른다면 설명해줄 생각은 없다. 내 상황과 사정을 구구절절 읊을 정도로 절박하지는 않으니까.

“나갔다 올게.”

“자, 잠깐! 왜 비겁한데요!”

“잘 생각해봐.”

계속해서 내게 소리를 지르는 나디아를 내버려둔 채, 던전 밖으로 나왔다.

딱히 대화를 나누기 싫어서 피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있으면 바르크 백작과 접견할 시간이었다.

“길었어.”

백작 한 명 접견하자고 일주일이나 소요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나마도 백작이기도 하고 호케트 상회의 지부장인 릴리의 입김이 닿아서 평민과 만나주는 거지, 후작이나 공작이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아니 바르크 백작에 한해서는 릴리의 입김이 없더라도 만날 수 있기는 했겠지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르켈님.”

호케트 상회 근처로 순간이동을 한 후, 상회로 들어가자 릴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하담?

“백작님과의 접견에 문제가 조금 생겼어요.”

“문제? 무슨 문제요?”

분명 오늘 접견을 허락하겠다고 했었는데, 지금 와서 문제가 생겼다니.

“실은 백작님께 아르켈님을 소개할 때 상당한 실력의 모험가이시라고 소개했었거든요.”

아, 대충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이해했다.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백작님께서 아르켈님의 솜씨를 보고 싶으시다고 하셨어요.”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바르크 백작가는 수십 년 동안 아라엘 왕국의 국경을 지켜왔다. 때문에 무력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이건 당연히 바르크 백작도 마찬가지다.

“역시 또 그놈의 골렘을 상대해야 하는구나.”

평민이 바르크 백작을 만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바르크 백작의 가신이 만든 골렘 세 채를 혼자서 상대하면 된다.

그 정도 실력이면 백작은 충분히 자신을 만날 자격이 있다고 여겼다.

당연히 게임에서도 존재하는 이벤트다.

솔직히 귀찮은 이벤트여서 넘어가고 싶었다.

이 이벤트는 단순히 골렘 세 채를 파괴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골렘에 표시된 과적을 정확히 노릴 수 있느냐를 시험하는 거다.

플레이어의 컨트롤을 시험하는 이벤트이기에 주인공을 아무리 잘 키워놨다고 해도 아무짝에 쓸모없다.

그래서 릴리의 힘을 빌어 넘어갈 수 있으면 넘어가려고 했던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나.

“알고 계시는군요. 하긴 백작님의 시련은 우리 왕국에서 제법 유명하니까요.”

알기만 할까. 그 이벤트를 수백 번은 넘게 경험해봤다.

“괜찮으시겠어요?”

“예.”

시련 후의 상황이 귀찮은 거지, 시련 자체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 상관없다.

“하긴 아르켈님의 실력 정도라면 충분하겠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어요. 그럼 가시죠.”

“예.”

어떻게 한다. 마법을 쓸까? 아니면 검? 으음, 조금 고민되네.

원래는 피하고 싶었던 이벤트였지만, 막상 경험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설렜다.

신기롭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건가. 게임에서만 경험했던 이벤트를 실제로 경험하게 됐으니까.

이런 기분이 들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내가 직접 접견 신청을 할 걸 그랬다.

“타시죠.”

마차를 타고 백작 영지 중앙에 있는 성으로 향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검을 쓸지 마법을 쓸지 고민하는 내가 있었다.

이번 일로 인해 아르켈이라는 신분이 인간 사회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비명 숲에 레베카 던전이 있고, 비명 숲 바깥에 내가 만든 마을이 있는 이상 바르크 백작과는 주기적으로 만나야 할 거니까.

그러니 첫 단추를 잘 꿰매야 한다.

마을에 모인 사람 중에서 내가 마법을 쓴 것을 본 건 에디와 그의 식구들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대마법사라는 사실을 착실히 숨기고 있다.

그렇다면 역시 왕도는 검이다.

아공간에 있는 무기 중 가장 안 좋은 검을 한 자루 꺼냈다.

“검사셨군요? 전혀 몰랐네요.”

“도시에서는 무기를 집어넣고 다니거든요.”

“아공간이 있으시니 그런 점은 확실히 좋네요. 모험가분들이 검을 차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보면 가끔 무섭거든요.”

확실히 게임이라면 모를까, 인상 험악하고 우락부락한 남자가 자기만큼 큰 검을 들고 다니는 걸 실제로 보면 무섭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겠네.

“도착했습니다, 지부장님.”

마차가 멈추자 내가 먼저 내리고 그 후에 릴리가 내렸다. 그리고 경비병들과 간단히 이야기한 후 성문을 넘어서 연무장으로 안내되었다.

“안녕하세요.”

“오셨군요, 릴리님.”

연무장에 들어오니 골렘을 조종하는 마법사가 우리를 맞이해줬다.

여기서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시험 결과에 따라 달라지겠지. 뭐, 아무리 생각해봐도 시험에 떨어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나저나.

“선객이 있나 보네요.”

연무장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선객이 있는 것 같은데.

“예, 맞습니다. 먼저 시험을 치르고 있는 분이 계시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이런 시기에 누가 백작의 시련을 치르려고 온 걸까?

“역시 굉장한 실력이시군요. 이렇게 빨리 백작님의 시험을 통과하신 분은 처음입니다.”

호오, 그렇게 뛰어난 실력자라고? 한 번 얼굴이나 좀 봐볼…….

“칭찬 감사합니다.”

연무장에서 나온 건 여성.

그 얼굴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나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어찌 익숙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을까.

“루이나…….”

루이나 세라자일.

파스칼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는 주인공의 동료이자, 스승과도 같은 존재다.

“저를 아시나요?”

“아.”

“죄송합니다. 루이나 세라자일님이시죠?”

“네, 맞습니다만.”

루이나가 나를 수상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초면에 대놓고 이름을 말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게임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는 분명 따스한 미소를 짓고 있기에, 저 차가운 표정은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아서 조금 슬퍼졌다.

“루이나 님이라면. 혹시 제가 아는 그 루이나 님이신가요?”

“네.”

릴리가 눈을 크게 뜨고 루이나를 바라본다. 하긴 저렇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지.

루이나는 주인공이 나타나기 전부터 굉장히 유명한 모험가라는 설정이었으니까. 그 실력을 인정받아 신전에서 주인공의 스승이 되어주길 요청한다는 스토리다.

그 전까지는 바르크 백작 영지 근처에 있었구나.

“호케트 상회 바르크 영지 지부장 릴리라고 합니다!”

바로 접객에 들어가는 거냐. 하긴 루이나 정도라면 저럴 만도 하다.

실력 있는 모험가와 친해지는 것은 상인에게 손해될 일이 전혀 없으니까.

“아, 그러셨군요. 그럼 옆에 계신 분은?”

루이나가 다시금 나를 바라본다. 릴리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나를 수상하게 바라보던 표정은 사라져있었다.

“아르켈이라고 합니다. 루이나 님께선 모르시겠지만, 저도 모험가인지라 루이나 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아하. 죄송해요,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할 필요가 있나. 전부 거짓말인데.

“이야기가 끝나셨으면 백작님께 안내해드릴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마법사가 신호를 보내자 루이나를 안내하기 위해 경비병이 찾아왔다.

“먼저 실례할게요.”

그 말을 남기고 연무장 밖으로 나가는 루이나의 짙은 초록색 머릿결이 바람에 휘날린다.

그 모습이 마치 나뭇잎과 같아서, 훗날 나뭇잎처럼 허무하게 떨어지는 너의 목숨과도 같아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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