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6. 주변 여자들이 이상하다(2)
* * *
“응? 왜 대답이 없어?”
위험하다. 지금의 레베카는 굉장히 위험해. 조금만 건드려도 터질 것 같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기질적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저 모습을 도대체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저 눈이 어째서 바르바라와 겹쳐 보이는 걸까.
꿀꺽.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눈 돌리지 마. 날 바라봐.”
조용하나 강압적인 음색에 나도 모르게 레베카와 시선을 마주 보았다.
아, 역시 바르바라와 비슷한 눈이다.
“레베카님.”
“그래, 말해봐.”
“나디아가 춤을 추는 분들을 부러워하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속이 안 좋아서 나랑 춤추기는 싫었는데, 다른 여자는 괜찮다는 소리네?”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럼 뭔데.”
수틀리면 죽는다. 아니, 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레베카 곁에 있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너무 과한 반응이기는 하다. 레베카는 부하를 아낀다. 그런데 내가 나디아를 위해서 춤을 권유한 것에 저렇게 반응하는 이유는 뭐지?
사실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기는 하다. 다만 그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지.
“레베카님의 차림새가 너무 야해서.”
“응?”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이다.
“레베카님과 춤을 추면 제가 흥분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서 거절했습니다.”
보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는데 저기에 닿는다고 생각하면 진짜 가슴이 철렁인다고. 레베카가 내 입장이었다고 하더라도 분명 똑같았을 거다.
“흐응. 그래서 거짓말을 한 거야?”
“네.”
그러자 레베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우선 무표정을 풀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뭉클한 감촉과 함께 제 질량을 뽐내는 무언가가 내 가슴에 닿았다.
“내가 이러면 흥분돼?”
닿았어. 내 가슴팍에 레베카의 저 거유가 닿고 있다. 그것도 살짝 닿은 수준이 아니라 레베카의 가슴이 뭉개질 정도로 강하게 닿고 있다.
고개를 살짝 내린 순간, 눈이 돌아가고 말았다. 물방울 형태의 가슴이 꽉 눌려서, 타원형을 그리고 있다.
거유는 뭉개지면 이런 형태가 되는구나?
“푸흡.”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자 레베카가 그런 나를 비웃듯이 웃었다.
그래 웃어라, 웃어. 나도 지금 내 반응이 얼마나 바보같은 지 알고 있다. 그냥 얼어붙어서, 아무 것도 못하고 레베카의 가슴만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나 웃기겠어.
하지만 이건 동정 모쏠 아싸 찐따가 견디기엔 너무 힘든 자극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 네가 그런 표정은 짓는 건 처음 봐.”
지금 내 표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웃기리라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거짓말을 했구나? 그렇게 내 가슴을 쳐다만 보고 있을까 봐? 그렇지?”
그래, 맞다.
마족들이 춤추고 있는 한복판에서 이런 꼴이 날까 봐 쪽팔려서 필사적으로 거절했다.
“왜 대답을 안 해?”
그 이상 가슴 들이대지 마! 멈춰! 폭력 멈춰! 그래, 이건 폭력이다. 나를 뇌사 시킬 수 있는 폭력이야! 그러니까 멈춰!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역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지?”
젠장, 그걸 내 입으로 직접 들어야 시원하겠냐! 내 자존심은 아예 신경도 안 써주는 거야?
“……맞습니다.”
“정확히 대답해야지.”
이 년이 진짜. 아니, 그만. 그 풍만한 가슴으로 협박하는 거 멈추라고!
“춤을 추는 중에 저도 모르게 레베카님의 가슴을 바라볼까 봐 필사적으로 거절했습니다.”
잘 가라 내 자존심. 자 이제 됐냐? 만족해?
“후후후.”
그래 아주 만족스럽게 웃고 계시는군. 젠장.
“아르켈.”
레베카가 내게서 떨어진다. 동시에 가슴을 짓누르던 보드라운 감촉도 사라졌다.
다행스럽다가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 건 남자의 본능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슬퍼진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조금은 이성이 돌아왔는지, 조금 전 자신의 태도가 조금 과했다는 것을 인지한 건가?
레베카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아직도 그 눈에 남아있는 광기를 확인한 순간 나는 내 생각이 틀렸음을 확신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전부 너 때문이야.”
여기서 내 탓을 한다고?
“원래 나한테 밖에 관심이 없었잖아.”
다시금 입가에 그려졌던 미소를 지우고, 레베카는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나한테 관심도 안 주네?”
“바빴으니까요…….”
마을을 만드느라 무진장 바빴으니까.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던 것도, 그 전까지 바빴던 나를 위한 포상인 것도 있었다.
그리고 레베카도 분명 내가 바빴다는 것을 있다. 심지어 눈으로 직접 마을이 건설되는 장면도 봤었잖아.
“예전에는 아무리 바빴어도 내가 먼저였잖아.”
아.
레베카의 눈이 다시금 차가워졌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레베카의 상태가 조금은 나아졌다는 생각이 지워지고 말았다.
“아까 리첼하고 있을 때도 그래. 평소에는 나한테 먼저 뭘 마실지 물어봤으면서, 왜 내가 두 번째였을까?”
그러고 보니 그때 분명 리첼이 놀랐었지. 그리고 레베카의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나빠보이기도 했었다. 그게 설마, 그런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어?
“……레베카님의 친우 분이시니 부관인 입장에서 리첼님을 먼저 챙기는 게 맞는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구나.”
들려오는 대답에 소름이 돋는다. 분명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임에도 어째서 소름이 끼치는 것일까.
“그게 맞는 판단이기는 하지.
이해해줬구나!
“그런데 왜 나는 그게 싫을까?”
……아니었네.
“정상적으로 생각하면 네 말이 맞아. 그런데 네가 맞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나는 그게 싫네?”
아, 이제는 내가 생각했던 가능성이 옳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저 모습을 보고도 모르면 그건 병신이지, 병신.
“나보다 일이 먼저인 너를 보면 짜증이 나. 다른 여자를 먼저 챙기면 화가 나.”
현재 레베카는 명백히 질투 중이다. 그리고 내게 집착 중이기도 하고.
사실 웃긴 상황이기는 하다. 레베카와 아르켈은 연인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아르켈은 연인 관계가 되고 싶어서 레베카에게 청혼했으나, 그녀는 청혼을 거절했다.
그러니 질투와 집착을 보이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레베카의 성장 과정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레베카님.”
레베카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다. 그리고 처음으로 귀족으로서의 레베카가 아니라, 순수하게 레베카라는 여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한 남자를 만났다.
그랬던 남자가 어느 날부터 맹목적이지 않게 되었을 때, 불안함이 느껴졌을 거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에.
저 심보는 고약하다.
마음을 받아주지도 않았으면서 마음이 떠나가니까 집착하다니.
“응?”
“제 청혼을 거절하신 건 레베카님이십니다.”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굳이 레베카에게 인지시켜주지 않아도 되는 말이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는 말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레베카는 계속 저런 이도 저도 아닌 상태를 유지하려 들 것이기에 말했다.
“아.”
그래, 아르켈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레베카다. 그것도 귀족의 입장 때문에 아르켈과 혼인을 조금도 고려해보지 않고 칼같이 거절했다.
그런데 질투와 집착을 보이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잖아.
“그래, 그랬지.”
레베카가 눈을 감고 제 얼굴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죽은 동태눈과 같았던 그녀의 눈에 다시금 빛이 돌아왔다.
“미안, 아르켈.”
제 행동이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아차린 레베카는 고개를 떨구고 내게 사과했다.
“나디아도 미안. 부러워하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네. 내가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아르켈이랑 한 곡 출래?”
“아, 아니요,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아니야. 그렇게 해도 돼. 아, 곧 노래가 끝나겠네. 난 가볼게.”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레베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아프다.
바르바라도 그렇고, 레베카도 그렇고 심지어 메르넬라도 그렇고 내 주변 여자들은 왜 이렇게 꼬이고 꼬였을까.
“왜 아르켈님이 한숨을 쉬세요. 한숨을 쉬고 싶은 건 저라고요!”
뭐야, 왜 그렇게 날 노려봐? 지금 한탄을 해야 하는 건 나다.
그렇지 않아도 낮에는 메르넬라한테 시달렸었고, 조금 전에는 바르바라한테 시달리다가 이제는 레베카한테까지 시달렸다고.
“이 빡대가리.”
나디아는 그 말을 남기고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왜 저래.”
나디아까지 포함해서 내 주변 여자들이 이상하다.
* * *
“진짜 깨끗하네.”
아프텔의 둥지를 살펴보던 자이로니아의 눈빛에 불길이 일었다. 아무것도 없다. 보물도, 무기도 없는 용의 둥지 답지 않은 장소다.
다른 건 다 필요 없다. 그와의 소중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그 검만 있다면 무엇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직접 이곳에 온 것이었고, 그래서 검이 사라진 것 역시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맡겨놓는 게 아니었어.”
몇 달 전 모종의 이유로 둥지를 비워야 했었다. 그 때문에 소중한 검을 아프텔에게 맡겨놨다.
자이로니아보다 약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고룡 중에서는 제법 강력했던 아이였기에 믿고 맡겼다.
그리고 결과가 이것이다. 아프텔의 기운은 사라졌고 성검 역시 그 흔적을 감췄다.
“어떤 놈의 짓인지 모르겠지만.”
자이로니아는 실로 오랜만에 제 마음속에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찾아내면, 죽는 게 더 낫다는 것이 뭔지 몸소 알게 될 거야.”
그리고 가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용은 제 분노를 숨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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