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5. 대마왕 바르바라
* * *
율리히 플락. 레베카의 아버지이자 칠대 마왕 중 한 명이다. 그리고 지금은 심부름꾼으로서 나를 대마왕이 있는 곳까지 안내해주고 있다.
사실 아르켈이 레베카에게 청혼을 했다는 점이 약간 와 닿지 않았었다. 하급 마족이 후계자가 아니라지만, 귀족에게 그것도 칠대 마왕의 핏줄에게 청혼했다?
죽여도 이상하지가 않다. 그러나 플락 가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아르켈을 내버려뒀다.
어째서인가 하면, 그것은.
“율리히.”
“예, 아르켈님.”
공손한 목소리로 답하는 마왕의 목소리가 어지러이 내 귓가를 훑고 지나간다.
조금 전 마왕의 자식 중 한 명인 파스칼에게 깔봐졌는데 지금은 마왕 중 한 명이 내게 공손히 대하는 것이 어색하기 그지없다.
결론을 내보자면, 대마왕과 칠대 마왕은 아르켈의 정체를 알고 있다.
생각해보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르켈이 마계에 잠입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마왕들은 모르겠으나, 언뜻 느껴졌던 대마왕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으니까.
그렇다는 건 아르켈이 마족으로 잠입해서 레이첼을 모실 수 있던 것도 대마왕, 그리고 율리히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레베카한테는 관심이 없나?”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사실 역시 웃기다. 제아무리 율리히가 아르켈의 정체를 알고 있다지만, 따지고보면 몇십 년 전 처음 본 수상한 남자다.
그런 남자가 딸을 좋아하니, 직설적으로 말하면 스토킹을 하겠다고 했는데 허락했다고? 아버지 된 입장에서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율리히는 그것을 허락했다.
“예.”
냉정하게 말하는 것에 조금 질리고 말았다. 율리히 플락은 레베카에게 정을 느끼지 않는다. 정확히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래, 그럼 됐어.”
아르켈의 기억이 조금씩 부상한다. 원래부터 율리히가 저런 성격은 아니었다. 무려 서른 명의 자식을 낳은 마족이다.
그것도 첩도 없이, 단 한 명의 부인과 사랑을 나눠 낳은 게 서른 명이다. 감정이 없으면 절대 그럴 수가 없다.
(율리히는 부인이 죽은 후에 감정을 잃었다.)
기억 속에서 대마왕의 목소리가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그래, 사랑하는 부인을 잃은 후 율리히는 감정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칠대 마왕이나 되는 마족이 어떻게 부인을 잃었는가.
(부인은 레베카를 출산하는 중에 죽었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지. 마계 최고의 잉꼬부부가 그런 식으로 이별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나.)
율리히에게 있어 레베카는 제 어머니를, 사랑하는 부인을 죽이고 태어난 자식일 뿐이다. 물론 율리히는 레베카를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할 수 없을 뿐이다.
그렇기 마왕은 언제나 레베카를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 그런데도 올곧게 자란 여자. 그것이 레베카 플락이었다.
“하아.”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너 때문에 불편해.
하지만 율리히가 잘못했다고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다. 저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니까. 더군다나 율리히가 부모로서 노릇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른 자식에게 해준 만큼은 해줬다.
그저,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르켈의 기억 속의 대마왕이 그렇게 말했으니 맞는 거겠지.
참고로 플락의 다른 자식들은 모두 관직을 가지고 있다. 관직을 가진 마족과 마왕들은 축제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니 플락 가문에서는 레베카만이 유일하게 축제에 참가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사이에 거대한 문앞에 멈춰선 율리히는 그 문을 열면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너도 수고했어.”
문의 안쪽으로 들어가, 조그마한 테이블 근처에 앉아 손을 흔드는 대마왕의 모습을 본 순간 다시금 기분이 나빠졌다.
“어서 오거라, 아르켈.”
“오랜만이다, 바르바라.”
대마왕 ‘바르바라 유벨’과 이렇게 빨리 재회가 될 줄은 몰랐다.
성큼성큼 걸어 나 역시 테이블에 놓인 의자에 착석했다. 테이블 위에 간단한 다과가 놓여있었다.
“따라줄까?”
“됐어.”
기분이 나빠서, 나도 모르게 퉁명하게 말하고 말았다. 이 정도 미인을 앞에 두고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지 모르겠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분명 아르켈의 기억과 관련된 거겠지 싶기는 하다만,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러지 말고 한잔하지 그러느냐. 분명 홀에서 많이 먹었을 것이니 소화에 도움이 되는 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루비와 같이 빛나는 붉은색 눈동자에는 확고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한사코 거절한다고 해도 계속해서 차를 권유하겠지.
“그럼 줘.”
“후후, 알겠노라.”
겨우 차 한잔 가지고 계속 실랑이를 당할 바에야 그냥 마시고 말지.
바르바라는 손수 내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줬다.
“기뻐해도 좋다. 내가 직접 차를 따라주는 것은 오로지 아르켈 그대뿐이니까.”
“시종을 부를 수 없어서 그러는 거잖아.”
아르켈의 정체는 어디까지나 비밀이다. 처음 대마왕과 일곱 마왕을 만났을 적, 아르켈은 그 점을 확고히 명시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는 평소처럼 시종을 부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 매정하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냥 기뻐하면 될 것을.”
주전자의 주둥이에서부터 차가 점점 쏟아져, 이윽고 찻잔에는 차가 넘실거릴 정도로 가득히 담겼다. 그런데도 차는 단 한 방울도 테이블 위에 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표면장력을 이용한 묘기를 다 보게 되네. 단 한 방울만 더 담았다면 분명 차가 쏟아졌을 거다.
“자, 마셔보아라.”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차를 권하는 모습에 눈이 찌푸려졌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마시라는 건지.
당장 찻잔을 건드리기만 해도 차를 흘릴 게 눈에 보이는데.
그런 생각 하는 중에도 내 몸은 본능적으로 찻잔을 잡고는 단 한 방울의 차도 흘리지 않으며 여유롭게 들어 올렸다.
내가 했지만, 도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맛있네.”
“그렇지? 갈 때 찻잎을 좀 챙겨주도록 하마.”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감상평을 들려주자, 바르바라가 기쁘다는 듯 웃는다. 그 모습은 실로 어여쁘기 그지없음에도 내 기분은 어째서 이리도 나쁜가.
생각해보니까 대단하네. 지구에서는 이런 미인이 눈앞에 있었으면 눈을 마주 볼 생각도 못 하고 찐따처럼 고개나 숙이고 있었을 텐데.
지금은 기분 나빠하면서 냉정하게 바르바라를 바라보고 있잖아.
“축제는 어떤가. 즐거운가? 레베카랑 진전은 있나?”
“하나씩 물어봐.”
“그럼 축제는 즐거운가부터 들려줬으면 좋을 것 같다.”
이 축제가 즐겁냐고 물어본다면…….
“어, 즐거워.”
아르켈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즐겁다.
‘던전 자하드’의 후속작을 플레이하는 것 같고, 지구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눈에 담는 것에 벅찬 감동을 느꼈으니까.
“그대조차 즐길 정도라니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레베카와는 조금 진전이 있었느냐?”
“있겠냐?”
내 대답에 바르바라가 다시 한 번 웃는다.
“그래, 그대는 그렇게 느끼겠구나.”
“무슨 뜻이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냥 넘어가도록 하여라. 혹여 묻는데 그대가 사랑하는 여자의 심정을 다른 여자에게서 듣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하아. 그래 넘어가자.”
뭐라 할 말이 없네. 나는 아르켈이지만, 아르켈이 아니다.
레베카에게 호감을 느끼고는 있지만, 아르켈마냥 미친놈처럼 레베카만 바라볼 수준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기도 좀 그렇다.
“그래서 고작 그런 걸 물어보려고 부른 거야?”
“그렇다만.”
대마왕이 이런 시시한 잡담을 하자고 불렀던 거였어?
“그럼 돌아간다.”
바르바라와 대화하는 것은 거북하다. 기분이 계속해서 나빠져. 나를 부른 용건이 없으면 다시 홀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다려 보아라.”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바르바라는 곧바로 그 행동을 만류했다. 아무래도 할 말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래서 왜 날 불렀는데.”
“그거야 당연히.”
바르바라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녀의 미소는 조금 전과 같으나, 전혀 다른 미소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웃음이지만, 그 안에 담긴 영겁의 광기가 내 감각을 훑듯이 지나갔다.
“나를 죽여줄 마음이 생겼는지 궁금해서 부른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광기가 뒤섞인 붉은 눈이 나를 주시한다. 그 눈에 깃든 절망과 부정의 세월이 도대체 얼마나 길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
아. 이제야 내 기분이 나쁜 이유를 알겠다. 이건, 동족 혐오다.
“꼴을 보아하니 아직 날 죽여줄 마음은 들지 않았나 보구나. 참으로 참담하도다.”
눈앞의 여자는 너무 오래 살았다. 아르켈도 영겁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바르바라 역시 그에 비견될 정도로 오래 살았어.
자신을 죽일 정도로 강한 이가 존재치 않는다. 너무 강하기에 자살조차 할 수 없어. 그렇기에 자신이 바라지 않았음에도 영겁을 홀로 부유했다.
아르켈과는 다르다.
아르켈은 혼자서 영겁의 세월을 버티지 않았으며, 레베카를 만나기 전에도 살아갈 맹목적인 목적이 있었으니까.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저 존재하기에 홀로 영겁을 살아온 이가 과연 맨정신으로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아.”
아르켈이 사랑 때문에 레베카에게 미쳐있었다면 바르바라는 자신의 죽음이라는 이유로 아르켈에게 미쳐있다.
서로 다르나, 비슷하다. 동족 혐오가 들지 않는 게 이상하다.
계속 기분이 나빴던 이유가 동족 혐오 때문이었다니.
“아까부터 한숨이 너무 잦구나.”
너 때문이잖냐.
율리히도 그렇고 바르바라도 그렇고 왜 한숨을 쉬게 만드는 장본인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아참, 그대여.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뭔데.”
“그 성검을 어디서 얻었는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성검? 아, 아공간에서 성검을 뽑았을 때 느껴졌던 시선은 바르바라의 것이었던 모양이다.
“고룡의 둥지를 털어서 얻었는데.”
“고룡? 고작 고룡의 둥지에 있었다고?”
내 대답에 바르바라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