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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15화 (15/99)

〈 15화 〉 4. 던전 마스터들의 사교 파티(5)

* * *

하급 마족이 대마왕을 목전에 두고 감히 무릎을 꿇지 않았음에도 그냥 넘어간다고? 뭔가 있다.

대마왕은 느긋하고 자유로운 성격이라서 내가 결례를 저질렀음에도 넘어갈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뒤에 있는 일곱 마왕까지 내 결례를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뭔가 있다.

시각상의 정보로만 치면 대마왕은 그저 아름다운 여성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를 바라보면 기분이 나빠지는 걸까.

“내가 있으니 너희끼리 즐기기가 어렵겠구나. 그럼 나는 이만 퇴장해보도록 하마.”

대마왕이 걸음을 옮긴다. 그에 맞춰 일곱 마왕 역시 그녀를 따라 홀에서 퇴장했다. 그런데도 마족들은 대마왕에게 경외를 표하듯 한동안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마족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대마왕님 여전히 아름다우셨어.”

“그러게.”

레베카와 리첼은 무언가에 홀린 듯 몽롱하게 대화를 이어나간다. 주변의 마족들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저렇게 떠들 생각인 거야.

“아르켈님.”

“아까 무릎 안 꿇고 계셨죠?”

아, 들켰나? 하긴 나디아는 나랑 같이 맨 뒤에 있었으니까.

“응.”

굳이 부정할 것도 없다. 다른 마족에게 들켰으면 모를까, 나디아면 그다지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날 빤히 바라보는 거지?

“왜 그렇게 쳐다봐.”

“신기해서요.”

“뭐가 그렇게 신기한데?”

“저나 여기 계신 마족 분들을 포함해서 마계에서 태어난 모든 종족은 대마왕님을 흠모하기 마련인데, 아르켈님은 전혀 그러지 않으시네요.”

마계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정신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태어난 사람이고, 이 몸뚱이는 아포디미아의 왕이다.

다시 말해 나랑 마계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거지.

하지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기에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레베카님께는 비밀로 해줘.”

“……알겠습니다.”

뭔가 탐탁지 않다는 듯한 반응이네.

“그럼 난 잠깐 근처 좀 돌아다니고 올게.”

정보도 얻을 겸 홀을 돌아다녀 볼 생각이다. 우선 가장 먼저 얻어야 할 정보는 ‘주인공’이 현재 어디 있냐는 거다.

아직 튜토리얼도 진행하지 않았더라면, 튜토리얼에서 등장하는 마족이 죽지 않았을 거다.

죽지 않았으면 그럼 당연히 이 자리에 있겠지.

“있네.”

조금 돌아다니다 보니, 튜토리얼에서 등장하는 마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녀석이 아직 이 자리에 있다는 건 아직 신전 쪽에서 주인공을 발견하지도 못했다는 뜻이 된다.

내 생각보다 훨씬 느리다.

시기를 생각해보면 이미 주인공이 등장했어도 이상하지 않은데 왜 신전은 아직도 주인공을 발견하지 못한 거지?

“설마.”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은 게임 속의 세계이나 게임 보정이 사라진 세계다.

그래서 신전에서 아직 주인공을 찾지 못한 거다.

“흐음.”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그건 조금 곤란했다. 사실 다른 마족은 주인공에게 토벌을 당하든, 말든 딱히 상관없다.

하지만 저기 저 녀석만큼은 예외다.

내가 시야에 넣고 있는 마족은 홀로 앉아 우아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등 뒤에는 촉수와 같은 날개를 달고 있는 저 마족의 이름은 라바나알.

두 번째이자 마지막 확장팩의 최종 보스이며, 나아가 이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마족이다. 그리고 동시에 마왕급에 달한 마족 중 한 명이었다.

저 녀석만큼은 주인공의 손에 죽어야 한다.

반드시 인간의 손으로 죽여야만,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다는 신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게임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이종족 동료가 라바나알의 막타를 치는 순간 게임 클리어가 아닌 게임 오버다.

그래서 라바나알의 막타를 치기 위해 체력을 계산하면서 싸우던가, 그게 아니면 인간 동료들만 데리고 갔었다.

“우리끼리 모였으니 던전 이야기도 좀 해보자고!”

화기애애 이야기꽃을 피우던 홀 사이에 어느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이건 또 무슨 소동이람? 라바나알을 보는 것을 관두고 눈을 돌리니 그곳에는 한 남자 마족이 탁상 위로 올라가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저 남자 마족은 당연히 내가 아는 얼굴이다. 게임에서는 리첼보다 훨씬 빨리 죽는 놈이었다.

이름이 분명.

“나 밀리안은 현재 프찬타 왕국의 기란다 공작 영지라는 곳 옆에 생겨난 던전을 배정받았다.”

그래 분명 밀리안이라는 이름이었지.

“던전은 매일 모험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어서 너무 바빠. 사실 오늘 모임도 안 오고 싶었을 정도다.”

“나는 론델 왕국의 수도 옆에 던전이…….”

“나도 론델 왕국 쪽이야. 위치는 바이어스 공작 영지 쪽!”

밀리안의 말 한마디에 의해 마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젊은 마족들만 저러고 있을 뿐이다.

중견급 마족부터는 젊은이들의 재롱을 보며 웃고 있거나, 무례하다는 듯 눈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다.

“나 발락 에포스는.”

중후하고 멋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조용했으나 이곳에 있는 모두가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발락 에포스. 파스칼 프라이노멘과 함께 ‘던전 자하드’의 본편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 마족 중 한 명이었다.

“현재 에일리안드 왕국과 론델 왕국의 국경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어느 정도로 강하냐면 게임 내에서 두 번째 관문이라고 불릴 정도다. 저 녀석을 잡지 못하고 결국 던전 자하드를 접은 뉴비들이 수두룩했었다.

다시 말해 젊은 남자 마족 중에서는 손가락에 꼽을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

머릿속에 ‘에포스’와 관련된 아르켈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사브니 ‘에포스’ 조금 전 대마왕과 함께 등장했던 일곱 마왕 중 한 명이다.

심지어 발락 에포스는 사브니 에포스의 직계였다.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핏줄이 제법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조금 구석진 곳이라 인간이 별로 찾아오지 않는다. 때문에 던전 발전은 아직 미미하나, 제법 괜찮은 미끼를 구했기에 그걸로 인간들을 유인할까 생각하는 중이다.”

초기 보상을 미끼라고 부르는구나. 하긴 마족들 입장에선 사람들을 던전으로 꼬시는 물건이니 초기 보상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미끼라고 부르는 쪽이 옳겠구나.

“그 괜찮은 미끼라는 게 뭔데? 마계에서 가져간 물건은 아니겠지?”

제법 적대적인 말투네. 하긴 축제라고 하지만, 결국 경쟁이다. 경쟁을 이기려고 부정을 저지르려는 놈들도 수두룩할 것이고.

물론 내 생각에 발락은 그럴 녀석이 아니다. 하지만 칠대 마왕 중 한 명의 자식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녀석들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아니다. 내 미끼가 무엇인지 본다면 내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을 거다.”

“그럼 보여줘봐.”

“그렇게 하지.”

발락은 아공간을 열어 무엇인가를 꺼냈다. 나는 저기서 무엇이 나올 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지금 꺼내려는 물건이 발락의 던전이 토벌된 이유이기 때문이다.

“뭐야, 그건. 그냥 커다란 하얀색 보석이잖아.”

그냥 커다란 하얀색 보석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저건 발락이 꺼낸 보석은 아주 커다란 다이아몬드다.

뭐, 그렇게만 생각하면 저 마족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 다이아몬드가 같는 의미는 보석 따위가 아니다.

“그냥 보석이 아니다. 이것은 에일리안드 왕국의 국보다.”

그래, 저 다이아몬드는 에일리안드 왕국의 초대 국왕이 남긴 보석. 왕가의 상징인 국보다.

“내 부관이 에일리안드 왕국의 국보를 훔쳤다. 이걸 이용하면 인간들의 관심이 내 던전 쪽으로 쏠리겠지.”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 실제로 저 보석이 던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에일리안드 왕국의 국왕은 보석을 찾아 달라는 의뢰를 내게 된다.

왕의 의뢰에 수많은 모험가가 발락의 던전에 도전했으나 공략은 당연히 실패로 돌아갔다.

일이 그렇게 되자 에일리안드 왕국은 그 당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주인공에게 개인적으로 던전 공략을 의뢰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이제 내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했겠지.”

“……그래.”

당연히 이해할 수밖에 없지.

저 보석은 인간 왕국에서 훔친 것이다. 마계에서 가져간 물건이 아니니 당연히 부정한 짓은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파스칼 너는 어떻지?”

발락의 물음은 평범했으나, 나는 저 말에 조금의 경쟁의식이 깔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이 몸은 그냥저냥 잘 지내고 있다만.”

파스칼 프라이노멘. 발락과 마찬가지로 칠대 마왕 중 한 명의 핏줄을 타고난 마족이다.

저 재수 없는 자신감은 제 실력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혈통에 긍지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던전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돌아가고 있다.”

발락과 다르게 파스칼의 던전은 제법 괜찮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 괜찮은 자리지 좋은 자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파스칼은 발락보다 형편이 좋았고, 파스칼은 레베카보다 좋은 상황이다.

“아직 이 몸의 부관이 구해놓은 미끼를 얻은 녀석은 없지만. 던전의 초반부만 공략해도 어느 정도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똑똑하네. 파스칼의 생각은 내 생각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

결국, 미끼는 미끼다. 초기 보상은 굳이 던전을 완전히 공략해야 얻을 수 있게끔 할 이유가 없다.

사람의 욕망으로 금이나, 보석, 무기 같은 것을 사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던전에 들어가기만 해도 어느 정도 보상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만 사람들에게 심어놓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욕망의 사이클이 알아서 돌아가기 시작할 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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