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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14화 (14/99)

〈 14화 〉 4. 던전 마스터들의 사교 파티(4)

* * *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춘 곳은 언덕 위에 세워진 성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성이다. 지구에서도 게임에서도 이 정도로 큰 성은 본 적이 없다.

저렇게까지 크면 감탄보다는 저기를 청소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내리시죠 레베카님.”

마차 문을 열고 내리려고 하는 레베카를 에스코트해준다. 그 후 나디아까지 에스코트해준 후 마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마차 행렬이 아직 이어지는 중이었다.

“레베카!”

누군가가 반가운 목소리로 레베카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게는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리첼!”

짧은 초록색 머리카락, 노란색 눈동자, 염소의 뿔같이 휘어있는 두 개의 뿔, 마지막으로 등 뒤에 달린 한 쌍의 박쥐 날개까지.

익숙하다고 느낄 만도 했다. 서큐버스 리첼, 게임 초반부에 들어가는 던전의 보스였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보스이니 당연히 약하다. 하지만 특유의 귀여운 외모 덕분에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제법 있었다.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레베카는?”

“나도 그럭저럭 잘 지냈어.”

리첼과 레베카가 친구 사이였었구나?

“안녕하세요, 리첼님.”

“나디아도 안녕!”

아, 인사해야 하는 거였어? 나는 나디아를 리첼을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

리첼은 게임 초반부에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의 보스다.

주인공과 리첼이 가장 빨리 만날 수 있는 루트를 탔을 경우 네 번째, 가장 늦게 만나는 루트를 탔을 경우에는 열 번째로 마주할 수 있는 보스다.

참고로 ‘던전 자하드’는 본편에서만 공략해야 하는 던전이 50개가 넘어가는 걸 생각하면 초반부에 만나야 하는 마족임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아직 주인공에게 토벌당하지 않을 것을 볼 때 아직 주인공은 그 초반부조차 넘기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았던가.

“너 아직도 레베카 곁에 있었어?”

또 저런 반응인가. 레베카를 따르는 부하들과 똑같은 반응에 머리가 조금 차가워졌다.

아무래도 아르켈은 레베카의 친구들에게조차 평가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도대체 주변 관계에 얼마나 무관심했던 거냐.

“당연히 레베카님의 부관이니 곁에 있어야죠.”

“어?”

뭔데, 그냥 대답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놀라?

“레베카 얘 이상해.”

리첼은 내게 삿대질까지 해가며 제 놀람을 표현했다. 아니 그냥 대답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까지 놀라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평소라면 그냥 예, 하고 말았을 놈이 그리 길게 말을 해주다니.”

아, 그거 때문에 놀란 거였냐. 마음 속에서 한숨이 절로 나온다. 아르켈 너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야.

고작 대답 좀 해줬다고 마족이 저렇게까지 놀라다니.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설마 곧 있으면 죽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오히려 네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산다고 해도 이 몸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거다.

“아니면 드디어 분수를 깨닫고 레베카를 향한 마음을 포기.”

“실례야, 리첼.”

“아, 응…….”

정말 적절할 때 말을 끊어주네. 레베카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리첼의 놀람은 한동안 계속됐을 거다.

그런데 묘하게 레베카의 기분이 나빠 보인다. 그건 왜일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는가?”

뭐야 이 느끼한 목소리는?

“하아.”

얼마나 느끼하냐면 레베카가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숨을 내쉴 정도다. 더군다나 레베카의 기분이 아까보다 더 나빠 보였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본 순간 눈이 찌푸려졌다. 리첼과 마찬가지로 이 녀석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얼굴이다.

파스칼 프라이노멘. 당연히 ‘던전 자하드’ 본편의 보스 중 하나다.

한 가지 특별한 점이 있다면 스토리 상 주인공이 처음으로 공략에 실패하는 던전의 보스라는 점이다.

그것도 그냥 실패하는 수준이 아니라, 주인공은 파스칼의 손에 의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료를 잃게 된다.

그런 이유로 파스칼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보스였다.

내 실력이라면 기초 장비로도 잡을 수 있는 보스인데, 스토리 상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곳에서 잃는 동료도 나름대로 굉장히 좋아하는 아이라서 더더욱 싫었다.

“너랑 상관없는 이야기야 파스칼.”

잘한다, 레베카. 지금 레베카가 한 말은 꺼지라는 의미를 내포한 명백한 축객령이다. 나도 저 얼굴을 딱히 보고 싶지 않다.

“그래? 그렇다면야.”

그러나 파스칼은 여전히 유들유들한 태도를 일관하며 자리를 떠나지 않는 모습이 역겹게 느껴진다.

“그나저나 던전은 어때 레베카?”

마치 상대의 약점이라도 찔렀다는 마냥, 비열한 웃음을 짓는 저 꼴을 보니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하자. 한 대 때리는 순간, 억하고 죽을 놈이다.

“너! 내가 일부러 말 안 하고 있었는데!”

“난 괜찮아, 리첼. 잘 돼 가고 있으니까 그쪽 걱정이나 해.”

레베카가 침착하게 응수했다. 저럴 수 있는 까닭은 내가 세운 계책 덕분일 것이다. 만약 내가 아니었더라면 과연 레베카가 저렇게 침착하지 못했겠지.

“그리고 분명 꺼지라고 했는데 왜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걸까?”

“이 몸이 싫다고 한다면?”

“그럼 내가 가지 뭐. 가자, 애들아.”

레베카가 등을 돌리더니 성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걸음을 옮긴다. 리첼과 나디아는 곧바로 레베카의 뒤를 따랐다.

나도 마찬가지로 레베카를 따라가려고 할 때.

“분수도 모르는 벌레가 아직도 레베카 옆에 있었군.”

작지만, 확실한 분노를 담은 느끼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꿈도 적당히 꿔야지. 네놈이 그런다고 레베카가 너를 바라봐 줄 것 같으냐? 이 몸 정도의 남자가 있는데?”

한 대 쥐어박아 버리고 싶네. 보는 눈만 없었으면 진짜로 한 대 쳐버렸을지도 모른다.

대응하기도 귀찮았기에 그냥 무시하고 레베카를 따라갔다.

그나저나 좀 어이가 없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레베카를 좋아하는 건 알겠다. 그런데 좋아하는 여자에게 망신이나 주려고 하다니.

무슨 초딩도 아니고.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교 파티답게 아름답게 꾸며진 홀이 맞이해줬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술과 음식 역시.

이미 도착한 이들은 그것들을 먹으며 떠들고 있었다. 혼자서 조용히 술을 음미하는 마족이 있는가 하면, 서로 뭉쳐서 웃고 떠드는 마족들도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과 같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순간 머리에 두통이 느껴졌다.

“우리는 저쪽으로 가자.”

“응.”

레베카와 리첼이 비어있는 탁자에 자리를 잡자 나디아가 곧바로 그녀들이 먹을 음식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처를 둘러보니, 나디아처럼 제 주인에게 음식을 옮기는 이들이 있었다.

나 역시 대충 눈치를 보고는 나디아를 도와 탁자로 음식을 옮겼다.

그러다가 탁자를 보니 너무 음식만 가져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실 것도 가져와야겠구나.

“마실 건 뭘로 가져다 드릴까요?”

음식이야 종류가 많으니 대충 가져오면 된다지만, 마실 건 취향이 확실할 수도 있어서 일단 물어는 보기로 했다.

“에? 나?”

내 물음에 리첼은 진실로 당황했다는 듯 눈을 끔뻑였다.

“네.”

그럼 너 아니면 내가 지금 누구한테 묻고 있는데. 확실히 너랑 시선을 마주 보고 있잖아.

“……그럼 화염 와인으로 부탁해.”

화염 와인은 뭐지? 가서 찾아보던가 나디아한테 물어보던가 해야겠네.

“레베카님은요?”

“같은 거로.”

왠지 레베카의 기분이 더더욱 나빠진 것 같은 건 착각인가?

“알겠습니다.”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실 것을 찾으러 갔다. 다행스럽게도 화염 와인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무슨 맛일지 조금 궁금했는데 바로 옆에서 화염 와인을 병째로 마신 마족이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궁금증을 넣어뒀다.

풍경은 지상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이런 특이한 음식이 있는 점에서는 마계 같기도 하다.

그렇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 때쯤이었다.

“대마왕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어느 마족의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시끌벅적했던 홀에 침묵이 내리 앉았다.

홀의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부터 등 뒤에 일곱 마족을 이끌고 천천히 이쪽으로 내려오는 저 마족의 모습을 본 순간 급작스럽게 기분이 나빠졌다.

이 사교 파티에 있는 마족들은 전부 내가 아는 얼굴이다. 당연히 게임에 나온 마족들만 있어서 모를 리가 없다.

반대로 계단에 있는 마족들은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아르켈 기억이 저들이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다.

대마왕과 일곱 마왕. 마계의 정점에 있는 존재들.

“내 아이들아 내가 주최한 모임에 온 걸 환영한다.”

대마왕이 홀에 중앙에 서자 입을 열자 파티에 있는 모든 마족이 약속이라도 한 듯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나는 무릎을 꿇지 않았다.

현재 내 위치는 끝에서도 끝이었기에 딱히 내게 신경 쓰는 마족은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소란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다.

마치 신을 경배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축제가 시작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그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

“어떤 이는 착실히 인간의 욕망을 모았을 것이고.”

암흑보다 더욱 짙은 흑색 머릿결은 마치 비단결과 같았다.

무심코 크림 맛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얀 피부는, 언뜻 보면 창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저 여성에 한해서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이는 그러지 못했겠지.”

보통 마족의 눈과 같이 공막은 분명 거멓다. 그런데 어째서 흑색의 도화지에 덧칠한 듯이 그려져 있는 붉은색 눈동자가 저리도 특별하게 보이는가. 소름 돋게 느껴지기도 하고, 푸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욕망을 모을 수 있는데도, 등한시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마에 세 개의 뿔이 있고, 양옆으로 두 개의 거대하고 곧은 뿔을 단 모습은 그야말로, 초월자의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해도 좋다. 마음껏 이 축제를 즐기려무나. 혹여 목숨이 불타 재가 된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즐기거라.”

조금이지만, 구슬픈 음색이 깃든 목소리에 다시금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이번 모임 역시 즐기길 바란다.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즐기거라.”

여기까지다. 그렇게 말을 끝마친 대마왕은 무릎을 꿇지 않은 나를 바라보며 샐쭉 웃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까닥여 회답했다.

하기야, 모두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데 나 혼자 일어서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지.

그렇게 생각하면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이 있다. 대마왕도, 그리고 그녀의 뒤를 지키고 있는 일곱 마왕도 내가 무릎을 꿇지 않았음에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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