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4. 던전 마스터들의 사교 파티(2)
* * *
포탈을 타고 넘어가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평범한 방이었다. 아니 평범하다고 하기는 뭐하지.
바로 옆에 포탈이 마나를 넘실넘실 뿜어내고 있고, 화려한 장식들이 가득한 방이니까.
하지만 기대했던 풍경은 아니었다. 마계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이 방에는 창문 하나 없어.
“오셨습니까, 레베카님.”
늙은 마족이 고개를 숙이며 레베카를 환대해줬다. 아르켈의 기억에 따르면 이쪽은 레베카가 태어난 가문, ‘플락’가의 집사다.
“잘 지냈어 베르?”
흐음, 마족에게도 가문이라는 게 있구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조금이지만 흥미가 느껴졌다.
“이 늙은이야 잘 지냈지요. 그저 레베카님이 계시지 않아 섭섭했을 뿐입니다.”
“언니들이랑 오빠들은?”
“바쁘시기에 오지 못하셨습니다. 주인님과 사모님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렇구나.”
베르의 대답에 레베카는 조금이지만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나디아도 잘 지냈는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니면 일부러 모르는 척해주는 것인지 베르는 곧바로 나디아에게 이야기하며 화제를 돌렸다.
“예 베르셀리우스님.”
베르셀리우스, 줄여서 베르는 플락가의 집사이며 나아가 나디아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런 단편적인 기억은 떠올려도 그다지 머리가 아프지 않네.
내가 모르는 기억들이 머릿속에 속속 들어와서 조금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것 뿐이지.
“네놈도 왔구나.”
이제 내 차례인가? 이질적인 감각 때문에 그다지 입을 열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가볍게 고개만 끄덕여줬다.
그러자 노집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네놈은 아직도 예의가 주입되지 않았느냐? 레베카님과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놓고?”
예의고 뭐고, 아르켈은 레베카만을 섬겼다. 더군다나 겉모습만 따지자면 베르 쪽이 나이가 많아 보이겠지만, 실상 아르켈 쪽이 나이가 더 많다.
물론 이건 아르켈을 제외하면 전부 모르는 사실이지만.
“레베카님도 어찌 이런 불손하고 태생도 모르는 미천한 마족 놈을 데려가셔서는!”
그래도 너무 반응이 날카롭지 않나? 아, 설마 그건가. 레베카의 선택을 받지 못해서 마계에 남겨진 게 분한 건가?
“그래도 차는 베르보다 잘 타잖아.”
“크윽.”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차 수행을 하지 않은 것이 제 일평생의 한입니다.”
그런 걸 일평생의 한이라고까지 말하지 말아줘.
“레베카님!”
일전에 기억 속에서 봤던, 레베카를 따르는 마족들이 속속 등장한다. 한 마흔 명 정도 되나?
1:40의 경쟁을 뚫다니 아르켈도 나름대로 고생했겠구나.
“베르, 사교 모임에 가야 하니까 준비 부탁해.”
레베카는 대충 마족들과 인사를 끝내고는 제 목적을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나디아도 따라오려무나.”
“네 베르셀리우스님.”
베르와 함께 레베카와 나디아가 나가자마자 방에 모였던 마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렸다.
왜 이런 시선을 보낼까.
“레베카님을 잘 보좌하고 있는 거겠지?”
“뭘 물어봐, 이 무능한 놈이 레베카님을 잘 보좌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레베카님이 이 녀석을 돌봐주고 있는 거지.”
아, 이 녀석들도 베르랑 마찬가지로 내게 시기와 질투를 보내고 있는 거구나.
뭐랄까, 귀찮다.
대답해줄 가치도 없어. 여기 있는 녀석 중에선 아까 나간 베르를 빼고는 그다지 강하다고 느껴지는 녀석도 없다.
아르켈의 기억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 있는 놈들은 이름을 알아둘 가치고 없다.
“이봐, 왜 대답이 없어?”
너희가 갔으면 보좌는 무슨, 히스테릭한 레베카에게 매일 시달리느라 스트레스로 죽어버렸을 거다. 아니, 그보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기분이 나빠지는 게 아르켈의 기억 때문인 건 알겠는데 어째서 기분이 나쁜지는 잘 모르겠어.
“이 조그마한 뿔 하나밖에 없는 하급 마족 놈이 건방지게!”
이 마계에 아르켈의 기억을 건드리는 존재가 있다. 그게 누구지? 조금 머리를 혹사해서 아르켈의 기억을 뒤져봐야 하나?
아니 나중이라면 몰라도 당장은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메르넬라와 통신을 하느라 진이 빠진 게 이제야 조금 괜찮아졌는데 여기서 다시 머리가 아파지는 건 사양이다.
“이 새끼가!”
“아, 좀 닥쳐.”
시기와 질투는 좋다. 하지만 어지간히 짜증 나게 해야지. 명백한 경고와 함께 조금 기운을 담은 것뿐인데 마족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무, 무슨…….”
어째서 자신들이 뒤로 물러난 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기가 느껴졌지만, 고작 ‘아르켈’에게 생명의 위기를 느꼈는지 알지 못하는 거겠지.
그래 그 정도면 됐다. 어차피 얼굴을 오래 볼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그럼 이 저택에서 나가서 마계의 풍경을 눈에 담아볼…….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르켈. 너도 치장해야지. 빨리 나와.”
아, 나도 치장해야 하는 거였어? 그 영감탱이 일부러 나는 지목하지 않았던 거였구나.
“예, 레베카님.”
안타깝지만 마계의 풍경은 조금 뒤에나 볼 수 있을 거 같다.
“하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 혹시 또 애들이 겁줬어?”
레베카의 뒤를 따라 방에서 나오자마자, 그녀는 염려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아니요.”
겁은 무슨. 그냥 귀찮게 했을 뿐이다.
기억이 조금씩 떠오른다. 그 기억을 살펴본 순간 나는 조금 전 마족들의 태도도 문제가 있었지만, 아르켈도 잘못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마족들과는 대화도 나누지 않고, 정확히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오로지 레베카만을 따랐으니까.
더군다나 자신들이 모시는 레베카에게 청혼까지 했다. 하급 마족이 귀족인 레베카에게 그것도 여러 번이나.
뭐야, 마족들이 아르켈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당연한 거였잖아? 괜히 짜증 냈나? 아니 뭐 됐어. 얼굴 많이 볼 사이도 아닌데.
“그럼 괜찮지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예.”
조금 더 걸어가자, 영감과 나디아가 복도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놈이 무슨 치장은 치장. 에잉 쯧쯧.”
아니, 앞에 한 생각은 취소다. 나디아만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 같다.
“베르.”
“하아……. 네놈은 날 따라와라. 레베카님과 나디아는 저쪽 방으로 가시지요. 시종들을 대기하고 있습니다.”
“응 알았어. 조금 이따가 보자, 아르켈.”
“예.”
베르는 나와 함께 여자들이 들어간 방의 옆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남성용 옷과 치장품이 한껏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 앉아라.”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면서도 결국 준비는 해놨구나? 츤데레인가? 남자 츤데레는 극혐인데.
자리에 앉자 영감이 가위를 집어 들었다. 저걸로 날 찌르는 게 아니면 머리를 자르려나 보다.
“시작하겠다.”
눈앞에 있는 거울을 바라보자, 내 머리를 자르는 손이 베르셀리우스의 손이 조금씩 떨리는 게 보였다.
얼굴색도 뭔가 초조하고, 당장 입을 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역시도.
왜 저러는 지 대충 알겠네.
“베르셀리우스.”
베르셀리우스. 지금은 플락 가문의 집사이나 과거에는 마왕급의 강함을 가진 마족이다.
아르켈의 기억에 베르셀리우스의 이름이 각인된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하급 마족임에도 이 정도 마족에게 존대하지 않았다.
“흐음?”
그리고 베르셀리우스 역시 내가 존대를 하지 않는 것을 용인하고 있다.
베르셀리우스가 내 진짜 정체를 알아서가 아니라, 내가 레베카가 아닌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친놈한테 존대를 바라지 않는 현명한 마족이라고 할까?
이렇게 보니까 아르켈은 정말로 레베카한테 미쳐있었구나. 하긴 그러니까 레베카가 죽은 후에 그 지랄염병을 했겠지.
“니가 레베카님이 아닌 다른 자에게 먼저 말을 걸다니 별일이군. 뭐냐.”
그거야 그쪽에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런 거지.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레베카님의 던전 위치가 그렇게 좋지 않아.”
“그래, 그렇다고 하더군.”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레베카를 환대하기 위해 방에 모였던 마족들도 일부러 레베카에게 던전은 어떠냐고 물어보지 않았던 거였다.
레베카에게 물어볼 수는 없으나, 어떻게 일이 돌아가고 있는지는 알고 싶어서 내게 지금 상황을 물어보고 싶었겠지.
“대책은 세웠나? 뭐, 평소의 너라면 그저 가만히 있었을 것 같다만.”
“세웠다.”
이 영감탱이가 날 뭐로 보고.
“뭐? 니가?”
“던전 근처에 인간의 마을을 만들었어. 그리고 도시 쪽에 레베카님의 던전이 있다는 소문을 풀 거다.”
“나쁘지 않아. 아니, 훌륭해.”
그렇지? 내가 보기에는 최선의 방법이었고 내 나름대로 최고의 방법이었다고 자부한다.
“헌데, 무슨 일이냐. 레베카님을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런 관심도 없던 니가 그런 훌륭한 계책을 내놓다니.”
그야 나는 아르켈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말은 결코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기에 침묵으로 응대했다.
“대답해주지 않는다면 그걸로 됐다. 그런데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해주는 거냐. 왜 칭찬이라도 해주랴? 아이고, 잘했다 애송아.”
“안심하라고.”
그 말에 내 머리를 다듬던 영감의 손이 잠시 멈췄다. 그것도 잠시 곧바로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흥. 레베카님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으시다. 나는 일말의 불안함도 느끼지 않았어.”
“그럼 됐고.”
그런 것치고는 손의 떨림도 사라졌고 뭔가 후련한 표정이 된 것 같다만. 지금 그걸 지적하면 저 가위에 찔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 입을 다물기로 하자.
그렇게 영감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고 있던 중.
“지금 사교 모임에 가면 당연히 레베카님을 경시하려는 놈들이 있을 거다.”
이번에는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렇겠지.”
내가 아르켈에게 빙의한 것도 축제가 시작되고 나서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였으니, 축제가 시작된 지 벌써 몇 달이 흐른 셈이다.
이쪽과 비슷하게 아직도 사람이 찾아오지 않은 던전도 있기는 할 거다. 하지만 그런 던전은 보통 고위급 마족이 관리하는 던전이다.
반대로 젊은 마족 중에서 아직도 던전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는 마족은 오로지 레베카 뿐일 것이다. 그런 레베카를 헐뜯으려는 놈들도 분명 있을 거고.
“뭐, 이해했으면 됐다.”
아니 그걸로 끝이야? 레베카를 감싸주라던가, 미친놈이 왠지 문제를 일으킬 거 같으니 주의를 주려는 게 아니라 그냥 그걸로 끝?
뭐야, 진짜 한마디도 안 하네. 아, 모르겠다.
“이제 좀 꼴이 마족다워서 볼만하구나.”
뭘 그렇게 만족스럽다는 듯이 보고 있어.
“평소에도 좀 이렇게 하고 다녀라.”
저건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하던 잔소리랑 완전 똑같은데? 너무 소름 돋았어.
“어디 보자. 이 옷이 어울리겠군. 자 갈아입어라.”
옷까지 갈아입혀 주지는 않네. 나도 그쪽이 고맙지. 다 늙은 영감의 손에 내 몸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거든.
“레베카님과 나디아가 나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라.”
옷을 다 갈아입자, 영감은 나를 저택의 입구로 보이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그리 말했다.
“예이.”
내가 대답하자마자 영감은 쏜살같이 어디론 가로 향했다. 아마 레베카를 보러 간 게 아닐까?
뭐 그건 아무래도 좋다. 나는 잠시 저택의 문을 바라보았다. 이 저택에는 창문이 아예 없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마계의 풍경을 보지 못했다.
저 문만 열면 마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올 거다.
아르켈의 몸에 빙의했던 첫날의 그 감동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문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많이 기다렸지?”
뒤통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와, 이건 다른 의미로 감동이네.
붉은색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적색 드레스를 입은 레베카의 모습은 정말이지, 진짜로, 아름……. 아니 내가 양심이 있지. 저걸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가 없네.
그냥 음란해 보인다. 뭔 가슴을 저렇게 내놓고 있어?
레베카는 던전에서 온몸을 가리는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그 흉부가 강조됐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거대한 흉부를 반쯤 내놓고 있다.
저거 맞아? 사교 파티가 아니라 무슨 다른 파티에 가는 옷차림이 아니야?
아니 그래 뭐, 저런 옷은 지구에서도 몇 번 봤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연말 시상식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저런 옷을 입었으니까.
그때는 노출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 정도 생각에서 끝났지만, 레베카의 경우는 틀려.
저 음탕한 몸에 노출이 심한 의상은 심히 반칙이다.
“왜 대답이 없어? 그리고 고개를 왜 숙이고 있고?”
너 때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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