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4. 던전 마스터들의 사교 파티
* * *
바르크 백작 영지의 호케트 상회로 이동한 후 릴리를 찾았다.
“목재가 필요한데. 아, 식량도 필요해. 저번에 산 정도만큼.”
“따라오시죠.”
목재와 식량을 대량으로 사려고 하자, 릴리가 나를 창고로 안내했다.
“목재고 식량이고 필요하신 만큼 챙겨주세요.”
그 말대로 아공간에 필요한 만큼 목재와 식량을 직접 넣은 후 대가를 치렀다.
“거래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아, 맥주도 사 오라고 했었지? 근처에 있는 주점에 들려야 하나?
“저, 아르켈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릴리가 나를 불렀다.
“왜 부르시죠?”
“저번에도 식량을 많이 사 가셨잖아요?”
그랬지. 아, 설마 나 때문에 도시의 식량이 부족해지고 있나? 에이 설마 그러겠어. 바르크 백작 영지는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는 도시다. 그에 비해 내가 충당하고 있는 식량을 대략 200인분 정도다. 그 정도 인플레가 만들어지지 않았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호케트 상회는 왕국 전역에 걸친 상회이니 팔 식재료가 부족하면 다른 지점에서 공급받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식량을 사 가시고 게다가 목재까지 이렇게 대량으로……. 주제넘은 질문인 것 같지만,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궁금한 건 그쪽이었나. 뭐 딱히 말해줘도 상관없겠지. 전과 다르게 이제는 마을이 건설되고 있으니 슬슬 비명 숲 근처에 마을이 생기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야 할 시기다.
“그게 말이죠.”
릴리에게 비명 숲에 근처에 마을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마을이요?”
그러자 릴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의인이라던가, 베푸는 삶을 살아간다든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던가, 그런 칭찬은 필요 없다. 나는 그저 내 목적을 위해서…….
“바르크 백작님께 보고는 하시고 진행하고 계신 건가요?”
……제대로 김칫국 드링킹했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보고요?”
비명 숲 근처에 마을을 만드는 건데 보고가 필요한가? 내 물음에 릴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명 숲 안쪽이라면 모를까, 바깥쪽은 아슬아슬하게 바르크 백작님의 영지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그곳에 마을을 만드시려면 당연히 보고하셔야 해요.”
그쪽까지 영지로 취급되는 거였어?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마을을 만드는 건 상관없을 수도 있지만, 정식으로 마을로 인정을 받으려면 보고를 하셔야 해요. 그래야 권역 아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곤란한데.
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지금 건설 중인 마을은 상당한 수입이 생길 거다. 모험가들이 많이 찾아올 거고 드워프가 제작한 장비도 판매할 계획이니까.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마을에서 그 정도 수익이 나오면 바르크 백작에게 눈도장이 찍힐 수도 있다.
“물론 세금을 내야 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요.”
아니 오히려 인정을 받고 세금을 내야지. 그래야 백작이 마을에서 수입이 생겨도 좋아할 거 아니야.
“혹시 백작님과 만날 방법이 있을까요?”
“그럼 저희 쪽에서 접견 요청을 해드릴게요.”
오, 그래 주면 감사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아마 지금 접견 요청을 한다고 해도 시일이 필요할 거예요. 백작님께서는 바쁘신 몸이니까요. 한, 사흘 정도 후에 즘에 다시 방문해주시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화를 끝마치고 상회 밖으로 나왔다.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설마 이런 식으로 귀족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게임 속의 귀족이라는 것들은 상당히 저열했었는데 말이야.
아, 맞다. 바르크 백작이라면 그렇게 큰 문제는 없겠구나. 그 남자는 뼛속까지 무인이니까, 허례허식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거다.
“그럼 주점에 들려서 맥주를 사 가면…….”
그 순간 품속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빨리 던전으로 돌아오라는 신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었는데 왠지 굉장히 바빠진 느낌이다.
* * *
용왕 세르플레타는 조금 긴장된 마음으로 어떤 용의 둥지에 들어섰다. 분명 세르플레타는 용의 정점에 선 용왕이지만, 지금 찾아가는 용은 그녀에게도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자이로니아님.”
둥지의 주인을 확인하자마자 세르플레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앞에는 거대한 황금색 용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응? 세르 왔구나.”
자신을 세르라 애칭으로 부름에도 용왕 세르플레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기에.
“아프텔 아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는 알아봤니?”
세르플레타가 자이로니아를 찾아온 이유는 며칠 전, 자이로니아가 갑자기 아프텔의 마력이 사라졌으니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보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용의 상식으로써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이로니아의 둥지가 아프텔의 둥지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대륙의 끝과 끝의 위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떻게 이곳에서 아프텔의 마력이 사라졌음을 느끼고 자신에게 알아보라고 시키겠는가.
그러나 눈앞의 용은 수천 년을 살아온 고룡 아프텔조차 아가로 취급하는 최고룡이었기에 세르플레타는 그녀의 말을 성실히 따랐다.
“둥지가 완전히 비어있었습니다. 아마도 봉변을 당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아프텔의 둥지를 확인한 순간, 세르플레타는 공포의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아프텔의 마력은 느껴지지도 않았으며, 둥지에 있어야 할 보물도 모두 사라져있었다.
“그렇구나.”
가벼운 한 마디, 그러나 그 안에 느껴지는 분노는 천지가 격동할 것만 같아 세르플레타는 몸을 떨었다.
“아프텔을 건드린 자가 누구인지 알아볼까요?”
“아니 내가 직접 알아볼래.”
최고룡의 선언에 세르플레타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마왕급 마족이라고 하더라도 건드릴 수가 없다는 최고룡의 성질을 건드리다니.
세르플레타는 마음속으로 아프텔을 건드린 이가 진심으로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 * *
“마계에서 던전 마스터들끼리 모이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
대충 볼일을 끝내고 던전으로 돌아오자마자 레베카는 나를 부른 용건을 말했다.
잠깐만. 던전 운영 중에도 마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였어?
아니 그것보다.
“던전 마스터가 그렇게 쉽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건가요?”
이때까지는 혹시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항상 던전에 남아있었잖아.
“모임 때는 대마왕님께서 던전 출입을 막아두신다고 들었어.”
던전 입구를 막아둬?
“설마 던전 입구에 결계가 생깁니까?”
“응, 그렇다고 하더라.”
들려오는 대답에 마음속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 자하드’의 몇몇 던전은 시스템상 특정 조건을 만족하거나 시간이 지나야만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이 있다. 그런 던전들은 입구에 결계가 있어서 들어갈 수조차 없다.
게임을 할 때야 게임이니 이런 기믹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계가 설마 던전 마스터들의 모임 때문에 생긴 거였다니.
그래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이라면 모를까, 시간이 흘러야만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은 조금 이상하기는 했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마족들의 사교 모임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니……. 진실을 아니 왠지 허탈하다.
“그래서 같이 갈 거지?”
“예.”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르켈이야 레베카와 지내기 위해 마계에 있었다지만, 내 기준에서 보면 마계는 새로운 필드였다. 새로운 필드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
“좋아.”
애초에 이 던전에 나랑 나디아말고 다른 사람이 없잖아요. 사람이 아니라 마족과 늑대인간이지만.
“나디아도 같이 갈 거지?”
“네, 레베카님.”
“그럼 따라와.”
레베카의 뒤를 걸어가고 있으니, 그녀의 옆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크면 이렇게 뒤에 있어도 가슴의 윤곽이 보이는구나.
하하하하……. 진짜 터무니없긴 하네.
애써 레베카의 옆가슴을 보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걸었다.
우리의 걸음이 멈춘 곳은 욕망의 관이 있는 던전의 끝이었다. 당연히 욕망의 관은 텅 비어있는 상태다. 축제가 시작된 지 몇 달이 흘렀음에도 말이야.
왠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 레베카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욕망의 관이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음을 신경 쓰는 눈치였다.
그래도 예전처럼 히스테릭하지 않은 건 마을이 점차 제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만 기다리면 모험가들이 던전에 찾아올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일 거다.
“레베카님…….”
나디아는 그런 레베카를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레베카가 좋아서 이런 위치에서 던전을 운영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마족끼리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해서 자신이 원하는 던전을 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작위로 배정됐을 뿐이다.
그녀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운도 실력이라고 말하면 딱히 할 말이 없지만.
“난 괜찮아.”
애써 괜찮다고 말하는 눈에 다 보인다.
“자, 그럼.”
레베카가 손짓하자 숨겨졌었던 비밀 문이 열렸다. 와, 이런 게 있었어? 나조차 몰랐던 비밀 문이다. 아무래도 게임에서 구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내가 몰랐을 리가 없지.
문 안쪽에는 포탈이 넘실넘실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걸로 끝. 넓은 방이 있는 것도 아니다.
“들어가자.”
저 포탈로 들어가면 마계로 넘어갈 수 있나 보다. 마계라, 거긴 또 어떻게 생겼을까.
“네.”
레베카가 먼저 포탈로 향하고, 나디아가 힘찬 대답과 함께 그녀의 뒤를 따른다. 나는 잠시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일말의 기대감과 함께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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