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 게임 속 히든 보스가 되었다-9화 (9/99)

〈 9화 〉 2. 마을을 만들어봅시다(5)

* * *

“대왕님 앞으로는 부디 체통을 지켜주십시오.”

소란을 무마시킨 후 소락의 저택 안으로 들어온 순간, 공주님은 제 아버님께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공주님의 설교를 듣기로 했다.

“아버님은 이 왕국의 왕이십니다. 아버님께서 체통을 지키셔야 아래 드워프들이 아버님을 공경합니다.”

공주님의 입장도 어느 정도 공감하거든. 왕이라는 자가 버선 발로 그렇게 뛰어오면 쓰나.

뭐, 그렇다고 소락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수천 년 묵은 고룡을 상처 하나 없이 쓰러트린 마족이 찾아왔으니 저렇게 뛰어나올 법도 하지.

“저번에도 그렇습니다. 왕이라는 분이 직접 건설 현장에 나서시다니요.”

생각해보니 이게 전부 내 탓이네? 만약 공주님이 내가 아프텔을 처리한 자라는 걸 알았다면 소락에게 저런 설교를 하지는 않았을 거다.

“크흠.”

왠지 소락에게 미안함 마음이 들기도 하고, 이대로 내버려두면 설교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헛기침을 했다.

“아.”

그제야 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공주님은 제 입을 가리더니.

“죄송합니다, 손님을 앞에 두고 제가 망측한 짓을 했습니다.”

곧바로 내게 사과를 했다.

“미안하구나, 애야. 내 너무 반가운 마음에 그랬단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소락은 곧바로 공주님께 사과했다. 하는 말을 보니 진짜 소락의 딸이 맞는 모양이다.

“지금은 경비대 대장으로써 대왕님과 마주하는 중입니다. 확실하게 불러주십시오.”

우와 딱딱하다. 딱딱한 태도가 드워프의 갑옷 수준이야.

“미안하네, 마리 대장.”

이름이 마리였구나?

“손님 앞에서 무례를 저지른 점 다시 한 번 깊이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괜찮습니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마리가 자리를 떠나자마자 소락은 제 옥좌에 눕듯이 주저앉았다.

“고생했어. 괜히 내가 그 용을 처리했다는 걸 비밀로 해달라고 해서.”

“아닙니다. 아르켈님께서 그리 하라고 하셨으면 그렇게 해야지요.”

으음? 나는 잠시 소락을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내게 겁을 먹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나한테 굉장히 순종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아차! 아르켈님 앞에서 감히 상석에 앉다니.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소락이 자신의 옥좌에 나를 앉히려고 하자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됐어. 거기 앉아 있어.”

뭐야, 이거 무서워. 왜 저러는 거야. 실로 부담스러울 정도다. 단순히 무서워서 내게 상석을 양보해주는 낌새가 아니야. 이런 느낌을 어디서 받은 적이 있는데 어디였더라?

잘 모르겠다. 아마 아르켈의 기억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싶어.

아무튼, 왠지 경비병 놈들이 내게 저지른 무례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이라도 하는 순간 소락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내가 착해서 운 좋은 줄 알아.

“그런데 왜 그런 모습이십니까?”

응? 아. 내가 사람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한가 보다.

“일이 있어서 사람으로 변장 중이야. 이 숲 밖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드는 중이거든.”

“아하. 인간을 양식 하시려고 하시는군요. 옛날에 마족들이 인간을 먹는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이건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야?! 그거 완전히 잘못된 선입견이잖아!

“아니야!”

나는 소락의 말을 급히 부정했다. 내가 사람을 먹는다고? 그럴 리가 없잖은가. 물론 아르켈의 몸은 사람을 먹을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사람을 먹는 마족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야.”

진짜 마족인 레베카나, 늑대인간인 나디아도 인간을 먹지는 않는다. 애초에 나는 마족도 아니고.

게임 내에서 인간을 먹는 마족이 나오기도 하니 딱히 소락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내가 사람을 먹는 모습을 상상하니 거부감에 치가 떨렸다.

“그럼 왜 인간 마을을 만들려고 하십니까?”

어……. 어떻게 말해야 하지? 잠깐만, 굳이 내가 마을을 만드는 목적을 숨길 이유가 없구나? 소락이 어디 가서 말을 하지도 않을 것 같고.

사실을 전부 말하기로 마음먹고 내가 이 근처 던전에서 사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어째서 던전에 있는지, 마족이 왜 던전을 운영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줬다.

당연히 내가 마족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숨겼다. 힘을 숨긴 채 레베카를 따르고 있다고만 이야기 했을 뿐이다.

“던전에 사람이 와야 한다니……. 마족들의 축제는 흥미롭군요.”

내 말이. 왜 굳이 이런 축제를 벌이는지 모르겠다. 축제라는 건 모두가 즐거워야 하는데 말이야. 마족이라는 놈들은 축제의 사전적 의미를 모르나?

당장 레베카는 던전 위치가 너무 구석진 곳이라 히스테릭한 상태잖아. 물론 조금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뭐 됐어. 이제 본론을 이야기할 차례다.

“그래서 모험가들이 거점으로 쓸 수 있는 마을을 만들려고 하는데 집 같은 걸 지어줄 기술자가 없어서…….”

“그렇다면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소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을 걷어붙였다.

“제가 직접! 지금이라도 당장!”

이대로 내버려두면 곧바로 마을 쪽으로 달려갈 기세다. 나는 급히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깐!”

성격이 왜 이렇게 불같아. 아니 그전에 왜 이렇게 충성심을 보이는 거야. 아기 때부터 키워온 강아지도 이 정도 충성심은 보이지 않겠다.

“니가 직접 나서면 니 따님이 뭐라고 할 게 뻔하잖아.”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에 체통을 지키라고 그렇게 설교를 들었잖아. 하아, 마리 공주 당신의 설교는 전혀 먹히지 않았습니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요.

“아하, 그렇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야기를 하니까 들어는 준다.

“그럼 저희 왕국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는 녀석들을 보내겠습니다.”

오, 통이 크다. 그러잖아도 왕국 재건에 힘을 써야 할 시기인데 냉큼 그렇게 인력을 보내주겠다고 하니, 정말로 고마워.

“그럼 나야 고맙지. 보수는 어느 정도면 될까?”

“아닙니다, 보수라니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소락.”

소락이 양손을 저으며 보수를 거부하는 모양새를 취하자 나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뭔가 위협하는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저건 좋지 않다. 지금 당장 말해주지 않으면 또다시 저렇게 말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겠지.

그래도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건 조금 주의해야겠다. 소락이 몸을 떨고 있는 모습에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조금 밝게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너희 왕국은 이제 막 다시 일어서려고 하고 있잖아. 그런 와중에 나한테 인력을 보내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보수가 필요하지 않을까?”

“끄응.”

소락이 침음을 삼켰다. 내 말이 옳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서 보수를 받는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어 아무 말도 못 하고 고민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앞으로도 너와 오랫동안 잘 지내고 싶어.”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럼 더더욱 나한테 보수를 받아야지. 언젠가, 너 혹은 네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아무런 보수도 없이 나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질 수도 있잖아.”

수직 관계는 아래에 있는 이들이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지 않는 이상 언젠가 골이 생긴다. 내가 썩은 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패키지 게임만 해왔던 이유도, 온라인 게임에서 그런 꼴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물론 소락이 내게 얼마나 순종적인지는 지금의 대화를 통해 잘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드워프들은? 아무리 왕의 명령이라지만 인간의 말을 따르는 것에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특히나 이곳의 드워프들은 더더욱 그렇겠지.

“내가 원하는 건 네 충성이 아니야. 나는 너희 왕국과 내가 만들 인간 마을 사이에 교류를 원해.”

드워프 왕국에 와서 어렴풋이 든 생각을 입 밖에 냈다.

“너희가 무기를 만들어서 마을에 공급해주면 사람들이 너희가 만든 무기를 파는 거지. 그게 싫으면 직접 마을에 와서 무기를 팔아도 상관없어.”

‘던전 자하드’에서 드워프제 무기를 파는 도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그 정도로 희귀한 무기를 파는 마을이라면 사람들이 몰려올 거다.

“나는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방문해서 좋고, 너희는 인간의 돈으로 왕국 재건에 필요한 물건을 사서 좋고. 상부상조잖아.”

물론 거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마을이 어느 정도 발전하면 상회를 만들거나 인수해서 드워프제 무기를 유통할 생각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만든 마을을 도시로 발전시키는…….

아, 이거 마을 운영 시뮬레이션이 아니었지. 나도 모르게 게이머의 혼이 폭주해버렸다.

“크흠. 그렇게 하기 위해선 너와 나 사이는 동등한 관계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분명 문제가 생길 테니까.”

헛기침으로 갑자기 폭주해버린 게이머의 혼을 진정시키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아르켈님을 배신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너는 아니겠지.”

지금의 대화를 통해서 알았다. 소락은 내게 순종적인 것이 아니다. 이건 숭배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아포디미아’에서 받았던 기억이 있다.

죽을 각오를 했던 이를 내가 살려줬다. 멸망 직전의 왕국을 내가 구해줬다. 그리고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 심지어 내 정체조차 숨겨달라고 말했다.

소락에게 있어 나는 신과 같은 존재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 소락이 나를 배신하지는 않을 거다. 그러나 그건 소락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너를 따르는 다른 드워프들이 나를 따르는 건 아니잖아.”

사정을 모르는 다른 드워프들은 달라. 그리고 드워프들이 곧이곧대로 소락의 말을 따른다고 하더라도 내가 착취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왕답게 너희 왕국의 이득을 챙겨야 하지 않겠어?”

사실 내가 굳이 이 사실을 지적할 필요는 없다. 귀찮게 보수에 관해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지고, 드워프들과의 관계에 골이 생긴다고 해도 힘으로 해결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 고룡과 다를 게 없으니까.

착한 드워프에게 상을 준다고 해놓고 그들을 다시금 착취하려고 드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일 수 없기에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아르켈 님은…. 마족 같지 않으시군요.”

이 자식 제법 날카로운데?!

“아, 무례한 발언을 하여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실제로 마족이 아니기도 하고. 물론 소락이 나를 마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 것이다.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마족에게 선입견이 있어서겠지.

“아르켈님의 말씀대로 된다면 확실히 저희 쪽도 이득일 것 같군요. 이 근처에 다른 드워프 왕국이 없다 보니 보물보다도 실질적인 물건 쪽이 훨씬 좋으니까요.”

“그렇지?”

이제야 내 말을 이해해줬구나. 다행이다. 그래도 초기에 이렇게 지적을 해줘서. 아포디미아 쪽은 이제 이런 말을 해도 전혀 들어주지 않을 정도의 단계인데.

잠깐만. 지금 한 생각은 내가 아니라 아르켈의 생각인가? 아니면 내가 한 생각인가.

“그렇다면 보수로는 식량과 질 좋은 광석이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

이걸로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 된 것 같다. 후유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타네.

“실례하겠습니다. 마리님께서 맥주를 올려보내라고 하셔서 가져왔습니다.”

“오!”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이런 타이밍에 맥주가 오다니. 심지어 안주도 먹음직스럽다.

“자, 우리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건배하자고.”

“예.”

소락과 건배를 한 후 맥주를 마셨다.

“캬하!”

목을 자극하는 이 탄산의 느낌이 너무나도 그리웠어. 하아, 맥주는 원샷이 제맛이지. 아, 이제 조금 살 것 같네. 한 잔 더 마실까?

“마음에 드시면 가실 때 조금 가져가시겠습니까?”

“그래 주면 고맙지!”

아공간에 넣어두고 아껴서 마셔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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