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화 〉 2. 마을을 만들어봅시다(3)
* * *
며칠 동안 사람들을 모았다.
이미 남의 것을 빼앗는 쪽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하는 질 나쁜 녀석들은 쫓아냈고, 순수하게 보금자리가 있었으면 하는 이들만 받다 보니 모인 사람들은 백 명이 조금 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최소 인구는 만족한 셈이다.
내 생각대로 사람을 모으는 데 공헌한 에디가 이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조촐한 캠프가 세워졌고, 내가 임시로 나무벽을 만들었다.
모인 이들의 식량은 내가 직접 도시로 가서 사 왔다. 아마 당분간은 계속해서 식량을 공급해줘야 할 거다.
문제는 집을 만들 기술자가 없다는 거다. 건설 자재야 상회에서 사 오면 되지만, 기술자가 없다는 것이 뼈가 아팠다.
그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하나 고민하던 중에 레베카의 호출 때문에 우선 던전으로 돌아가게 됐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베카님.”
“차 마실 거야. 타줘.”
아니 이 여자는 겨우 그런 이유로 날 부른 건가? 이쪽은 지금 네 고민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데.
하아.
“알겠습니다.”
머릿속에서는 한숨이 튀어나왔지만, 입 밖으로는 불평이 나오지 않았다. 이게 전부 아르켈의 기억 때문이다. 아르켈은 레베카에게 반했다. 그녀 때문에 동포를 속인 채, 지상을 멸망시키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그런 아르켈이기에 레베카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썼다. 지금 내가 레베카가 마실 차를 타는 이유도 아르켈이 그녀가 마실 차를 언제나 직접 탔기 때문이다.
“다과도 부탁해.”
“예이.”
먹을 것은 마계에서 무한정 가져올 수 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만약 먹을 것에도 인간의 욕망이 필요했더라면, 생활 환경이 엉망이 됐을 것이다.
마법으로 물을 끓여 차를 타고 다과를 꺼낸다. 일말의 행동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르켈이 수없이 해왔던 행동이기 때문일 것이다.
차를 타는 과정에서 풍겨오는 차의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 차가 상당한 고급품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하긴 아르켈이 레베카가 아무 차나 마시게 내버려 둘 놈이 아니긴 하지.
“여기 있습니다.”
“땡큐. 어? 니 몫은 왜 안 타왔어?”
아차. 차를 마실 때는 항상 같이 마셨었지. 아르켈의 기억에 따르면 레베카와 차를 마시는 시간은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때만이 유일하게 아르켈과 레베카가 평등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으니까.
“오늘은 차를 마실 기분이 아니라서요.”
지금 내 몫의 차를 타는 건 조금 이상할 것 같으니까 일단 얼버무리자.
“흐응. 별일이네?”
내 말에 레베카가 눈을 가름하게 뜨고는 이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그녀가 날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건 아마 기분 탓일 거다.
“아까 뭘 좀 많이 주워 먹어서요.”
“그렇다면야 뭐.”
어깨를 으쓱인 레베카는 그제야 찻잔에 손을 댔다. 좋아, 일단 어떻게든 넘어갔다.
“후우, 맛있어.”
“감사합니다.”
레베카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다과에 손을 뻗었다.
“역시 일주일에 한 번은 차랑 다과를 먹어야 사는 것 같다니까.”
다과를 먹는 모양새에는 평소의 품위가 사라져있었다. 조신하게 먹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크게 다과를 한 입 베어물고 입가심으로 차를 마신다.
칠칠치 못한 저런 모습도 전부 아르켈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나저나 가슴이 크니까 과자 부스러기가 가슴에 테이블이 아니라 가슴 위에 떨어지는구나. 어마어마하네.
“닦아줘.”
어딜 닦아달라는 거야? 내가 그저 눈을 껌뻑이자 레베카는 제 윗가슴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가리켰다. 아니, 아르켈 너 평소에 그런 것까지 직접 해줬어?
아니 그것보다 그 도도하던 여왕님은 사라지고 왜 이렇게 어리광을 부린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가슴에 손을 대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뭐해. 평소엔 바로바로 해줬잖아.”
레베카가 한 손으로 턱을 괴자 내 고민은 짧게 그치고 말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저 거대한 두 덩어리의 유혹을 내가 무슨 힘으로 거부할 수 있겠어.
급히 냅킨을 꺼내서 레베카에게 다가갔다. 내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 거다. 내 인생에 저런 거대한 가슴에 손을 댈 기회가 실제로 찾아오게 될 줄이야.
그저 윗가슴을 가볍게 터치하며 다과 부스러기를 털어냈을 뿐이지만, 손에서 뭉클한 촉감이 전해져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에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킬 정도다.
와, 이건 귀하네요. 진짜 좋아요.
“후우.”
이대로 가다가는 시종일관 레베카의 윗가슴을 만지고 있을 것 같아서 과자 부스러기를 털어낸 후 급히 떨어졌다. 저건 마약이다. 그저 조금 손을 댔을 뿐인데도 촉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왜 그렇게 멀리 떨어지는 거야? 허리는 왜 그렇게 숙이고 있고.”
“생리 현상입니다.”
“생리 현상?”
“그런 게 있습니다. 지금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으, 아르켈은 도대체 평소에 레베카를 어떻게 대했길래 내가 자기 가슴을 만졌어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 이놈은 저 가슴을 만졌는데도 아무런 감흥도 없었어? 이 정도 힘이 있으면 그냥 눈 딱 감고 덮칠 만하지 않아? 고자 새낀가?
아니, 그건 아닌데.
며칠 전 화장실에서 확인해본 결과 아르켈의 아들놈은 굉장히 준수했었다.
“그래 뭐.”
다행히 레베카는 내 말대로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한 모양이다. 후우, 반야심경, 반야심경.
“그런데 며칠 전에 급히 나간 건 왜 그랬던 거야? 그러고 나서는 한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조금 걱정했어.”
아, 그 이야기를 지금까지 안 했네.
“숲 밖에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 생각입니다.”
“마을?”
레베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와 함께 가슴이 흔들렸다. 행동 하나하나가 남자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수준이구나.
전면 수정이다. 저건 귀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저건 해로운 거야. 진짜로.
일단 냉정함을 되찾기 위해 소수를 세자. 회사 생활은 해본 적이 없지만, 레베카와 내 관계가 상사와 부하직원이라고 생각해.
아, 조금 괜찮아졌네.
“예. 저희 던전에 사람이 찾아오기 힘든 이유는 주변에 도시가 없어서잖아요. 그럼 모험가들이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마을을 만들려고 합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아?”
“자연적으로 마을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맞지만, 제가 개입할 거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아. 그래서 인간 모습으로 변장한 거구나?”
“예.”
“용캐 그런 좋은 방법을 떠올렸네?”
그래. 그런데 갑자기 니가 겨우 차를 마시고 싶다고 나를 불러서 그 계획이 늦춰지는 중이란다. 알았으면 이만 나를 놓아주지 않을래?
“칭찬해줄게.”
레베카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아니 일부러 멀리 떨어졌는데 이렇게 다가오면…….
레베카가 다가오는 모습에 급히 뒤로 물러서려고 했지만, 코를 간질이는 달콤한 향기에 나도 모르게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가만히 있는 사이 내 곁에 온 레베카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레베카에게는 단순히 나를 칭찬을 위한 행동이겠지만, 내 경우는 다르다.
가슴이 너무 큰 나머지 내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붙은 것만으로 그녀의 거대한 가슴이 내 몸에 닿고 있다.
“큭.”
그 감촉을 느낀 순간 나도 모르게 뒤로 떨어지고 말았다. 평생 모쏠 동정 아싸 새끼한테 이런 자극은 굉장히 해롭다고!
“왜 그래? 평소에 이 정도 접촉은 아무렇지도 않아 했으면서.”
그 말을 듣고 나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일단 아르켈은 고자인 게 확실하다. 아들 놈이 준수하다지만, 정신적으로 고자인 게 확실해.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접촉을 아무렇지도 않아 했을 리가 없다.
“최근 청혼하지 않고. 좀 변한 거 아니야?”
아니 설마, 레베카한테 청혼했었냐. 아르켈의 기억을 떠올려본 결과, 레베카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르켈은 레베카에게 청혼했다. 그것도 수없이 많이. 물론 레베카는 항상 아르켈의 청혼을 거절했다.
그럼 그거야? 결혼하기 전까지는 순결을 유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거야?
아, 맞네. 이 무슨 이 시대의 순정남이자 로맨티스트인가. 이 정도 힘을 가지고 있는 놈이 이런 순수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그래도 네가 정신 차리고 일해줘서 다행이야. 차 타주는 거 말고는 쓸모가 없어서 데려온 걸 조금 후회하고 있었는데.”
“데려와 주신 것은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던전을 운영하는 마족은 단 한 명 부하 마족을 데려올 수 있다.
그리고 아르켈의 기억에 따르면 마계에 레베카의 부하는 많다. 그중에서 선택된 것이 바로 아르켈이다.
당연하지만 능력으로 뽑힌 것은 아니었다.
아르켈은 힘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그런 아르켈이 레베카의 부관으로 뽑힌 이유는 레베카의 말마따나 그녀에게 차를 타주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최근에 너무 변한 것 같아서 조금 섭섭해.”
섭섭하다, 인가?
나는 레베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녀가 말한 섭섭함의 감정은 별것 아닐 거다. 그저 자신을 잘 따르던 동물이 어느 날 자신을 따르지 않게 된 것에 섭섭함을 느끼는 정도겠지.
하지만 섭섭함을 느끼는 시점에서 내가 아는 것과 다르게 아르켈의 사랑이 단순히 일방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저도 정신을 차려야지요. 우승하셔야 하잖아요.”
레베카는 모종의 이유로 이 축제에서 우승하기를 원한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나 역시 던전을 운영하는 걸 즐기고 싶다. 지금 상황이 게임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이 정도로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 컴퓨터로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전력을 다하면 ‘아포디미아’에서 침공이 시작될 테니까 최대한 자제할 생각이긴 하지만.
아무튼, 죽을 걱정이 없기에 나는 지금 상황이 ‘던전 자하드’의 후속작을 플레이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이 던전을 최대한 발전시켜서 주인공과 맞붙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이 던전은 끝까지 공략되지 않아도 딱히 문제가 없지 않을까? 어차피 주인공이 반드시 공략해야 하는 던전은 두 번째 확장팩에서 등장하는 최종 보스의 던전 뿐이니까.
주인공이 최종 보스를 토벌하지 못하면 세상이 멸망한다는 설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간 마을을 만드는 건 어디까지 진행됐어?”
“이제 겨우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천천히 진행해봐야죠.”
건설 기술자가 없는 게 조금 흠이기는 하지만. 도시에서 노동자를 구해와야 하나? 그건 조금 사양하고 싶은데.
일단 마을이 제대로 완성되기 전까지는 도시에 존재를 공개하고 싶지 않았다.
떠돌이들이 모여 있는지라 타인에게 적대적이기도 하고, 에디와 같이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어?”
“딱히 없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인상이 나빠 보이는데? 말해봐, 혹시 내가 도움을 줄 수도 있잖아.”
“사실은…….”
나는 솔직히 건설자가 없어서 마을을 만드는데 조금 문제가 생겼음을 실토했다.
“그쪽은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네.”
하긴 그렇겠지. 레베카는 마족 중에서도 귀족이니까, 그런 험한 일은 잘 모를 테고. 할 수 없나, 도시에서 임금을 지불하고 기술자를 데려오는 수밖에.
“아 맞아. 저번에 거래한 드워프 왕국 쪽이랑 이야기해 보는 건 어때?”
“어?!”
잠깐. 왜 잊어버리고 있었지? 드워프는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안에서 장비를 제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건설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종족이었지.
그래, 드워프하면 기술력이잖아.
“감사합니다, 레베카님! 급히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해.”
등 뒤에서 레베카가 손을 흔들어주는 것조차 모른 채 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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