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핑크빛 캠퍼스 라이프 (5)
* * *
챙
황시연이 나가고 난뒤, 검이 부러지지 않자 이번엔 랠리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몇분째야?”
“23분 13초…?”
“그 전에는?”
“각각 34분, 43분.”
현재 그녀들의 전적은 각각 1승 1패였다. 조금씩 조금씩 레이즈가 밀어붙이는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하인젤 또한 굳건히 버티면서 서로 팽팽한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팅 티잉…!
중간에 다른 동아리에서 연습하던 공이 날아와도 두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피하고는 계속 검과 검을 잇는다.그녀들의 랠리가 계속되자, 보고싶었음에도 어쩔수 없이 훈련을 계속해야 되기에 자리로 돌아간 사람들이 이 진귀한 광경을 두고 제대로 집중할수 있을리가 없었고, 그 덕에 자꾸 이리저리 공이 날아오는 것이었다.
문제는 코치나 감독들도 이쪽을 바라보기 바빠서 자기 선수들이 무슨실수를 하는지 못보고 있었다는 거지만.
계속해서 이어지는 랠리, 펜싱복이 그렇게 편하지 않을텐데도, 그녀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계속해서 서로의 검을 받는다. 분명 펜싱은 그녀들이 배웠던 검술들과는 다르다.
아니, 어떤의미로 그녀들은 배운게아니라 익혔다고 하는것이 맞을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넓은 공간을 쓰는 그녀들의 세상과는 달리, 펜싱은 좌우가 한정된 공간에서 검을 주고 받는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무렇지 않은듯, 그걸 해내고 있었다.
비록 정식 펜싱장이 없어, 마룻바닥에 테이프로 표시해둔 구역임에도 아무 불편함 없이 서로의 검을 막고, 휘두르며 서로의 몸에 칼날이 닿기를 바란다.
째애애앵…!
두번째 깨짐이었다.
이번엔 레이즈가 들고 있던 검이 부러진다. 비록 좀 낡았을지언정, 유연한 특성이 어디 가지 않는다. 그런데 휘거나 하는게 아니라, 아예 수십갈래로 산산조각 깨진다라? 이건 하인젤이 검의 중심을 노린것이 틀림없었다.
“…역시 따라하는 구나?”
“단순히 검이 낡은 줄 알았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유연한게 깨질리가 없잖아요? 관리도 잘된편인데.”
역시나, 첫번째 검이 깨지는 것 또한 레이즈가 의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것은 하인젤이 한 것이고.
근데 아무리그래도 이렇게 물건을 막 깨트리면… 물론 그녀들이 이렇게 즐거워하니 내가 지원해주지 못할건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과시용으로 검 한자루씩 날리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다음엔 장비를 막 다루는 짓은 하지 말라고 얘기해야겠다.
“정말… 정말이구나. 영상에서 본 걔네가 맞아…”
아이씨, 깜짝이야. 언제 왔는지, 바로 뒤에서 정장을 입…은건가? 하의는 청바지에 운동화인데, 상의는 셔츠에 마이를 입고있는 기묘한 옷차림의 여성이 자기 머리를 감싸쥐고금새 울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직장인이라 그런지, 가지런히 잘 묶은 포니테일에 옅은 화장에도 불구하고, 눈에 확 띄는 이목구비. 백이면 백 모두가 청초하다고 생각할 외모였다.
‘다만, 이미 내게 있어서 청초의 기준은 현설이가 되어버렸지만.’
아무리 그래도 현설이는 못이긴다.
“아, 그… 여긴 우리 코치이자 감독님이야! 우리 선배이기도 하셔!”
내가 이사람은 누구지…? 하는 표정으로 그 직장인을 쳐다보고 있으니 저 뒤편에서 황시연이 달려오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비슷한게…
“아…그, 그리고 우리 언니기도 해!”
아하… 어쩐지 비슷한 분위기이다 싶었더니 둘이 자매였던거구나?
눈매가 살짝 동글동글하고 또 몸매가…
“크흠…! 안녕하십니까 하인정,나이주 입니다.”
너무 오래봐서 그런걸까? 어느새 하인젤과 레이즈가 내 시야를 차단하면서 코치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어 반가워, 난 황소연이야. 앞으로 너네 코치나 감독을 맡게 될거야.”
우리의 두 메이드와 악수하는 황소연 코치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게 눈에 보였다. 그러면서 또 입은 활짝 웃고있는게 마치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팬의 느낌이다.
“그데 그… 호구는 언제까지 쓰고 있을거니…?”
아, 그러고보니 이제 칼도 다 부러져서 대련도 더 못한다. 호구를 쓰고 있을 이유가 없었지만,
“굳이 우리가 젖은 모습을 수현이 말고 다른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라고 레이즈가 대답한다. 과연 그녀들이 과연 땀에 젖었을까라는 의문도 의문이지만, 그보다 나한테 저렇게 기특한 말을 해주는게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저렇게 콕 찝어서 내 이름을 말한다는 건…
“…”
“…”
역시나 레이즈가 내쪽을 바라보며 보이진 않지만 눈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그와 거의 동시에 누군가 내 손을 잡는 듯한 감촉도 느껴지기 시작하는게, 보나마나 현설이랑 레이즈가 한창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거겠지.
고래사이에 낀 나는 뭐… 괜히 말실수 했다가 어느 한쪽에 상처가 될까봐 가만히 쥐죽은 듯 눈치만 봤다.
“어…그, 그래? 그, 뭐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 뭐… 하하하. 아! 너희도 새로 온 애들이니? 잘부탁해!”
다행히 눈치가 없는건지, 눈치가 좋은건지 황수연코치가 그녀들의 시선 한가운데로 끼어들며 나와 현설이에게 자기소개를 하면서 소리없는 싸움이 끝났지만, 아직도 서로 은근슬쩍 견제하는게 하루 빨리 내 계획을 실행시켜야겠다. 아까 차에서 넷이서 할때도 별 거부감이 없었으니 할수 있지 않을까?
“네, 안녕하세요. 3학년 차수현입니다.”
“안녕하세요 3학년 이현설입니다.”
아까까지 신경전을 벌였다고 믿을 수 없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감독의 ‘아~ 니가 걔야?’라는 눈빛이 더 이상했다.
아까 레이즈의 말이 아니라 뭔가 전부터 들어와서 지겹다는 그런…
‘에이… 설마.’
진짜 아니겠지? 혹시나 싶어 하트앱을 열어보려했지만, 생각해보니 신도 부재중이니 하트앱도 작동할리가 없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을 느끼며 코치의 인솔하에 구석에 있는 펜싱부 부실로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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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단체이던 간에, 성과가 있는 산하기관을 밀어주는게 어찌보면 당연하다. 실적을 내지 못하는 곳에도 지원을 해주지만, 그것도 희망이 있는 경우.
“…하하… 전에는 몰랐는데 막상 들어오니까 조금 좁지…? 자, 펜싱이 뭐냐면…”
황소연의 설명을 듣다보니, 현재 기현대 펜싱부는 폐부 위기인 곳이었다. 성과도 못내는 데다가 이제는 사람도 없어서 폐부위기. 그렇게 되니 당연히 부실도 이렇게 구석지고 좁은 곳을 배정받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이치였다.
얼마나 좁냐면, 캐비닛은 그렇다 치더라도, 회의용 책상과 의자에 앉으면 사람 지나다닐 공간도 없는 정도? 하지만 또 부실의 짐의 많은 것도 아니라, 그냥 공간 자체가 좁은거였다. 어떻게 짐을 버려서 공간을 만들수도 없는 물리적 한계였다.
뭐… 우리 여성진에겐 오히려 좋은 것 같지만.
조물조물~
좁다는 물리적 한계를 이용해서 지금 내 양 옆엔 하인젤과 현설이가 딱 달라붙어 있었다. 아까 갑자기 부실 문앞에서 뭔가 가위바위보를 하는가 했더니 이거였나?
덕분에 현설이랑 하인젤은 방실방실 웃고있지만 하인젤은 다소 뚱한 표정이었다.
‘저게 진짜 기분이 나쁜건지, 아니면 연기인지 모르겠단말이야…’
그래도 저걸 가만히 둘수는 없어서 손이라도…
조물조물~
두손다 현설이랑 하인젤이 만지작 거리고 있어서 그건 불가능하고, 눈이라도 계속 마주쳐주니 그제야 조금 기분이 풀린건지, 평소처럼 은은한 미소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
레이즈와 마주하던 시선을 이제 슬 다른 곳으로 돌리니 황시연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들킨걸까? 그래도 지금 책상 밑으로 손잡고 있고, 현설이랑 하인젤이 평소처럼 내 어깨에 볼을 부비고 있지도 않은데?
“…선배는 주변에 여자가 좀 많네요?”
얼마나 바라봤을까, 황시연이 대뜸 저런말을 해온다.
“어…? 갑자기 그건 왜?”
그리고 그 말은 무슨 버스터 콜 마냥 우리 애들의 시선을 한순간에 황시연에게 꽂히게 만들었다. 내가 당황하면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지만, 황시연은 우리 애들의 눈빛을 받고도 긴장한 기색 하나없이‘흐응~ 아니에요.’라는 반응을 보이며 시선을 돌려 다시 한창 펜싱에대해 설명해 주는 황소연 코치에 집중한다.
“아, 그 장비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그… 우리 동아리가 지원금이 좀 적어서… 거의 내 사비를 들여서 운영하거든…? 그래서 당분간은 장비가 안나올수… 애들아…? 우리 시연이가 뭐 했니…?”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들의 시선은 황시연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되려 내 손을 잡고있는 그녀들의 손힘이 더 강해지고, 레이즈 또한 은은한 미소가 아닌, 반쯤 감은 무표정한 눈으로 황시연을 쳐다본다.
그렇다고 황시연이 그녀들에게 겁먹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무심히 앞을 보던 그녀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피식 웃으며 눈빛을 교환해 준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거지? 아니, 분명 황시연은 그런 기미도 안보였는데…
황소연 또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는지,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아, 그 장비는 뭐가 좋나요? 저희 장비는 저희가 살게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 그, 그래? 근데 한두푼이 아닌데… 그, 그럼 번호좀 줄래? 내가 괜찮은거 몇개 보내주…”
황소연의 말 한마디. 그저 번호 좀 달라는 그 한마디에 이번엔 여성들의 시선이 오소소 황소연에게 꽂힌다.
“언니? 그건 내가 따로 선배한테 보내드릴게. 언니는 이제 슬슬 직장에 돌아가야 되지 않아?”
“어…? 어? 아니 나 반차 냈…”
빠아안~
“어… 가봐야 될것 같네 하하… 애들아? 그… 동아리 온거 환영하고 잘 지내보자…?”
…도망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시선이긴 하지. 솔직히 내 여자들이 하인젤을 제하곤 평소에 잘 웃고다녀서 그렇지, 한명은 악역도 마다하지 않았던 대배우고 한명은 늑대라 곰과도 싸워온 검의 달인이다. 그런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바라보면 저절로 그 상황을 벗어나지 않고 못배긴다.
나야 어차피 계속 볼 사람들이니 왠만하면 바라는대로 해주는 거고. 다른사람은 뭐… 지금처럼 도망치겠지.
하지만 이 시선을 버티고 있는 사람이 한명 있었다.
여자들도 시선만으로는 안되는 걸 알았는지, 드디어 본격적인 견제를 시작했다.
“…수현아 우리 이제 갈까? 코치님이랑도 만났고 설명도 다 끝났는데.”
현설이가 그리 말하며 눈짓을 두 메이드에게 보낸다. 원래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듯 하면서도 서로 견제하는 사이였는데, 황시연이라는 외세의 침략이 나타나서일까? 두 메이드도 순순히 현설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 그럼 저희 다같이 회식하는거 어때요 선배? 아, 그러고 보니 선배는 술 별로인가? 전에 같이 술마실때 참…”
하지만 저 외세의 침략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도 기억못하는 옛날일을 가져오며 배우와 두 메이드를 도발한다.
아니 진짜 뭐지…? 얘 갑자기 왜이러는 거야? 내가 눈치도 없는 것도 아니고, 전에는 이런 기색도 안보여줘 놓고는…
“…그래요, 회식 갑시다.”
도발에 넘어간 하인젤의 말 한마디에, 이후 벌어질 광경이 벌써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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