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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하는 히로인이 없는 이야기!-32화 (32/37)

〈 32화 〉 핑크빛 캠퍼스 라이프 (3)

* * *

이미 정신을 잃은 하인젤을 먹어치우려 드는 민달팽이를 떼어놓고 나서야 그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야... 내가 좀 격하게 하긴 했구나.

그녀들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차를 몰아 인적이 드문 학교부지의 뒤편에 있는 산으로 온것은 신의 한수였다.

이 산은 현재 우리학교 야구부나 축구부는 물로 탁구부 같은 운동계 동아리나 학과들을 위해 야외 운동장은 물론, 실내체육장들도 즐비해있었는데 이 수많은 시설들을 만드느라 길이 좀 많이 생겼다.

만약 여기가 아니라 아까 그 주차장에서 했으면 분명히 들키고도 남았을거다.

"헤우으으으..."

저 정신 못차리고 꾸물대는 좀비를 봐라. 분명 들키고도 남았을 거다.

그래도 레이즈는 비교적 정상이었기에 그녀를 하인젤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니 얼마안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리곤 같이 뒷정리를 했다.

환기도 좀 시켜야 될 것 같아서 창문을 열어두고 그녀들을 안에 눕혀놓고 나는 산의 풍경을 구경했다.

'후우... 막상 혼자 학교 다닐땐 아무 느낌도 안들었는데 이렇게 되니 같이 산책해도 좋을 것 같네.'

이제 봄이 얼마 안돼서 그렇지 조금만 지나면 데이트 코스로 좋을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데이트코스로 유명한데 나만 모르고 있던가.

"어라? 선배, 여긴 어쩐일로?"

상념에 빠져 있느라 누군가 오는 것도 몰랐다.

"어? 어어?! 아, 시연이구나 하하하하. 날씨 참 좋다 그렇지...?"

"...? 왜 이렇게 당황하세요...?"

그거야 바로 뒤에 나랑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낸 애들이 있으니까 그러지...

"킁킁... 그런데 뭐 이상한 냄새나지 않아요? 벌써 봄인가...? 왜 이렇게 밤꽃냄새가 나는거야."

시연이의 말에 또 다시 내 몸이 척추반사급으로 움찔거렸다.

킁킁,

내몸에서 그렇게 냄새가 나나...?

"음... 난 잘 모르겠는데? 니가 좀 예민한가보다 하하하하..."

"뭐, 그런가 보죠. 아 참, 선배 지금 시간되시죠? 아까 정확히 언제 보자고 말을 안하긴 했는데..."

딱히 별다른 일정이 없긴했다. 애시당초 오늘 강의도 오전에 그 지뢰 하나였고, 또 점심을 먹기엔 애매한 시간이라서 마침 딱 비는 시간이었다.

다만 걱정되는 거라면...

'과연 얘가 나랑 무슨 말이 하고싶어서 그러는 걸까?'

아니, 애초에 저번학기 때만 하더라도 그냥 인사나 겨우 나누던 애가 갑자기 사적인 만남을 요청한다? 이건 뭔가 쎄했다.

뭐 얘가 나한테 반했다거나 그런거 아니냐고? 그럼 더 경계해야 된다. 애시당초 내가 바뀐거라고는 자신감 조금이랑 저 차밖에 없는데 만약 쟤가 나한테 반한거다?

그럼 매우 높은 확률로 내 돈을 보고 온다는게 내 가설이다.

'뭐, 얘가 그럴애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만약 그런 애라면 매우 실망할 것 같았다.

"어어. 그래 지금 잠깐은 시간 될 것 같은데. 근데 왜?"

내가 같이 가주겠다는 의사를 표하자 그녀가 드물게 밝은 미소를 짓는다.

"앗! 그럼 혹시 가입한 동아리 있으세요?!"

아 뭐야. 동아리 납치였구나. 나는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얘가 그렇게 못된 애 일리가 없지.

"그... 혹시 생각이 없으신...가?"

내가 김빠졌다는 반응을 보여주니 눈앞의 펭귄이 눈을 데구룩데구룩 굴리며 내 안색을 살핀다.

그러고보니 저 올려서 동글게 묶은 머리랑 똥글뱅이 안경에 귀염상이 아기 북극 펭귄을 연상케한다.

'동아리라...'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동아리는 내 로망이긴 했다. 일본의 스포츠 만화들도 즐겨 보았던 나이기에 처음엔 환상을 가졌지만 막상 가보니 술만 먹어대는 곳이었지.

하지만 아직도 그런 로망은 남아있었다. 뭐, 황시연이 얘기하는 동아리가 그런 동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냐, 관심은 가네. 한번 가보자."

지잉지잉~

이현설: 모야 ㅡ3ㅡ 둘이 뭔얘기 하는고야 ­ㅅ­

신이 당분간 잠수를 탔지만 이 문자기능은 아직도 작동하고 있었다.

살짝 뒤를 보니 검은색과 두개의 회색 동그라미가 언뜻 보인다.

'아 진짜 귀엽기는 큭큭.'

나:동아리 권유 받음 ㅋㅋㅋ 너네도 몰래 미행하다가 들른 척 들어와 봐.

나는 현설이에게 문자를 보내곤 신나서 아장아장 앞장서 걷는 아기펭귄의 뒤를 쫓았다.

.

.

.

"오오~ 그 동아리 관심없으세요? 저희 야구부가..."

"괜찮습니다."

"아, 그럼 그냥 사적인 관심이 있어서 그런데 번호라ㄷ..."

"핸드폰 없습니다."

물론 이건 나와 황시연과는 관련없는 대화다. 아니 나한테는 조금 있나?

막상 우리는 그냥 여유롭게 건물을 지나는데 저 뒤에서 우릴 따라오는 현설이랑 두 메이드가 신나게 구애를 받고 있었다.

뭐, 지금 학기 초이고 하니 동아리 홍보하는 건 좋다. 근데 왜 자꾸 사심을 섞는 거람.

물론 그런 사심 전부다 쳐내고 있긴 하지만.

이런저런 동아리 부실들을 전부 지나쳐서 간 곳은 구석에 있는 한 8평 될까 말까한 공간이었다.

그나마도 캐비닛들 때문에 겨우 벤치 하나 들어갈 공간을 남겨두고.

'여긴 뭐야? 펜...?'

"하하... 짜... 짜잔~ 우리 기현대 펜싱부에 온것은 환... 환영합니다아~"

"..."

휙 휙 휙

내가 아무 반응을 안하자 황시연이 애처롭게 좌우로 벌린 두 팔의 손목을 돌려가며 일명 '반짝 반짝'을 해보지만 그래도 이 애처로운 분위기가 사라지진 않았다.

"그... 다른사람은?"

부실이 좁긴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창 모집에 열올릴 지금 이 시기에 아무도 없길래 물어봤더니.

"..."

황시연이 대답을 피한다.

설마 없어? 아무도? 아니 그럼 이 동아리 어떻게 남아...

아. 그래서 나한테 물어본 거구나? 폐부위기에 빠져있으니까 머릿수라도 채운다고.

어쩐지 우물쭈물하면서 계속 시선을 피하는 아기펭귄이 귀여워졌다.

"""안녕하세요~"""

"앗...! 그 어서오셋...!"

아, 혀 깨물었다 얘.

뒤에서 들려오는 인삿말에 황시연이 다급히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뛰쳐나오며 말하다가 혀를 깨문 것 같았다.

"아... 그, 안녕하세요?"

그나마 대학에 대해 뭐라도 아는 현설이가 대표로 말하자 황시연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이 자기 안경마냥 크게 떠진다.

"아... 그 아까 그... 편입생 분, 맞죠?"

그리고는 기억이 난건지 화악 표정이 밝아지다 또 금새 다운되서는 주저하며 말한다.

흠... 어째 나랑 연관되는 사람들은 죄다 표정이 다채로운 것 같다. 내 여자들은 뭐, 만화나 소설속 인물이라 그렇다 쳐도 황시연 얘는 오리지날 휴먼인 만큼 이러기 쉽지 않을텐데.

"아... 그 뒤에 여성분들도 그... 저희랑 같은 전자과... 맞으시죠?"

하지만 그런게 뭔지 모르는 하인젤이랑 레이즈는 눈만 끔뻑끔뻑이고 있다.

"...이게 뭔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 한군데에 시선이 꽂혀있는 거였다.

"어...? 아, 이게 그 펜싱이라는 건데!..."

두 메이드가 흰색 보호장구를 입고 펜싱용 칼을 휘두르는 사진을 가리키자 황시연이 신나선 설명하기 시작한다.

"뭐야...? 너 여기 가입하게? 쟤네 실력 알면서...?"

현설이가 그 틈을 타 내게 붙으며 작게 소근거린다.

"뭐 어때, 재밌잖아? 두근 거리기도 하고. 나도 저쪽가서 검좀 배웠으니 좀 하지 않을까?"

내가 자세를 잡고 슉슉, 칼을 휘두르는 자세를 잡자 현설이가 꺄르르 웃는다.

어, 나 방금 그거 진짜로 배운건데.

살짝 상처받을 것 같았지만 현설이가 저렇게 밝게 웃고 있으니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졌다.

"…그래서 이게 펜싱의 규칙들이랑 상세 개요야! 어때, 우리 동아리에 흥미가 좀 생겼어?"

아기 펭귄의 으스댐에 두 메이드, 아니 소드마스터가 드물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한다.

""그거 꽤 재밌겠네"요"

덤으로 나도 살짝 놀래켜 주기 위해 여기서 한숟갈을 얹었다.

"혹시 여기 사람들이 쓰던 장비 없어? 직접해보면 더 흥미가 생길 것 같은데."

내 말에 펭귄이 눈을 뒤룩뒤룩 굴리다 두 소드마스터의 합세에 부실내에 대부분을 차지하던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

.

.

챙! 채채챙! 키이잉!

"와... 시발 뭐냐? 국대임?"

"야, 우리 체대 펜싱전형 있었냐?"

"아닐걸...? 저거 그냥 동아리로 아는데...? 근데 그것도 요 근래 다 떨어져나가지 않았나?"

애당초 원래는 우리끼리 좀 즐기자고 한쪽 구석에서 자그맣게 하던 게 어느새 다른 운동이나 연습을 하던 사람들이 그녀들의 싸움에 넋을 놓고 하나둘 구경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체육관의 한 가운데까지 와버렸다.

"하하하! 하인제... 하인정! 너 은근 슬쩍 50프로로 하는 거같다?"

근데 중요한 건 저 눈에 겨우 간당간당 보이는 공방이 그녀들끼리 평소의 30프로 정도만 실력발휘하자고 했던 거라는 거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도발한다면서 웃고 넘기지만...

'으... 일이 너무 커지는데? 저러다 승부욕 발동해서 전력내 가지고 광검 뽑으면 어쩌지...?'

주변에서 너도나도 영상을 찍어대는 와중에 그렇게 되면 큰일이었다. 그나마 호구를 쓰고 있어서 얼굴 노출은 안되겠지만...

"하...! 나이주 언니야말로 자꾸 은근슬쩍 힘 실어요? 질것 같나보죠?"

그녀들이 신나가지고는 서로의 이름을 불러대며 도발한다는게 문제였다.

하긴... 저쪽에선 매일같이 검들고 살다가 여기와선 갑자기 평화롭게 살려니 좀이 쑤시겠지.

칭! 치잉! 채애앵! 쨍그랑!

그리고 이 미친 10여분간 서로 단 한대도 용납하지 않은 결투는 장비의 노후화로 한쪽 검이 깨지고 나서야 끝이났다.

"에이잉... 아쉽네. 흥 그래도 이걸로 112승 112패 1무 맞지?"

"...제가 1승 더 많지 않았나요?"

정작 당사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반응이었지만.

"와... 시발 와... 진짜 미친 욕밖에 안나오네. 10분 간 서로 한대도 안맞은거야?"

"야 야, 이거 무조건 조회수 백만이다. 당장올려!"

이걸 지켜보던 관중은 아니었다.

당장 처음부터 캠코더로 모든 걸 담아내던 황시연은...

"제발... 제발 저희 펜싱부에 들어와 주세요!"

"우와... 수현아 나 저거 실물로는 처음봐."

그랜절을 박으며 하인젤과 레이즈에게 빌고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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