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레이즈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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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그러니까 현실의 나인 '차수현'이 아니라 이 세상속의 '알렉 골드르크'의 집은 대게 무슨 일이 없는 한 저녁식사는 가족 구성원들끼리 항상 같이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물론 그것은 오직 '구성원'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다시 말해 하인젤과 레이즈는 내가 식사를 하는동안 뒤에서 내가 멀리있어 손이 닿지 않는곳에 있는 음식을 가져와 준다거나, 수저를 떨어뜨리면 교체해 주는등의 시중을 하는게 우리 집안만이 아닌 사회 전체의 규칙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고? 그거야 골드르크 백작께서 굉장히 무의미한 이야기들을 내뱉어서 내 현재 입장이 곤란해졌기 때문이지.
"알렉, 너도 이제 다 컸는데 아까 낮에 내가 한 이야기는 생각해 보았니? 알다시피 우리 가문의 위세가 높아져서 그런지, 공작님에게서도 혼담이 들어왔단다. 너도 알지 않느냐, 프로즐 공작의 공녀가 그렇게 품행이 바르고 아름답다던던데."
물론 나는 아버지인 백작의 말에 곧바로 부정을 표했다. 나는 아직 그러고 싶지 않다는 둥, 이미 정해둔 여인이 있다는 둥. 분명 원작에선 이런 이야기가 오가긴 하는데 그건 나중에 전란의 직전에서 우리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설마 벌써 시작된건... 그럴리는 없다. 작중 전쟁의 불을 지핀건 왕과, 그의 아들 왕세자가 동시에 병이라곤 하지만 독살로 의심되는 죽음에 의해 시작되었으니 아직 평화로울 지금 전쟁이 시작할리가 없었다.
뭐지? 지금 이 상황은? 그것보다 하인젤씨, 그... 자꾸 스프를 더시는 손이 떨려서 다 흘리는데요...
골드르크 백작 또한 하인젤이 스프를 흘리는 광경을 보았지만 별다른 기색없이 말을 이었다.
"호오, 마음에 둔 여성이 있다라... 그게 누군지 알려줄수 있겠니? 혹시 뭐... 없다거나, 아니면 막 여러명이라거나..."
그제야 나는 저 백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수염에 가려져서 모를 수 있겠지만, 아주 약간 아주 약간이라도 올라가 있는 걸 보아 저 양반, 분명히 지금 알고 저러는거다.
하지만 하인젤과 레이즈는 지금 저 말에 정신이 팔려서 그의 덫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뒤에서 내게 눈총을 보내며 말해!! 라고 압박을 주고 있었을 뿐이었지.
허허허... 아버지, 저한테 왜 그러시는 겁니까. 여기서 한명만 고르면 저 나머지 한명한테 죽어요...
하지만 아버지란 사람은 여기서 한술 더 뜨기까지 한다.
"왜 말을 못하지? 설마 거짓이었던 거냐? 허허... 그럼 일단 만나라도 보는게 어떠겠니?”
“아버지! 죄송합니다만, 아니 이미 알고계시겠지만 전 이미 이 둘과 평생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예, 저 나쁜놈인거 맞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이 둘 행복하게 해줄 생각입니다. 그러니 허가해 주십시오. 아니, 허가해 주지 않으신다면 집을 나갈 각오도 되어있습니다.”
우물쭈물거리면서 시간 끌어봤자 그녀들의 실망감만 커질 것 같았기에 그냥 질러버리기로 했다. 뭐,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정말로 쫓아낸다 그러면 뭐… 받아들여야지 별수 있나. 다행히 내 대답이 썩 나쁘진 않았는지 뒤에서 느껴지던 위압감이 좀 사그라들었다.
“하하하하! 그래, 역시 사내라면 그렇게 당당해야지. 아들아, 솔직히 말이다? 너 하는거 보고있으면 머리를 후려쳐주고 싶었단다.”
역시 백작은 우리 관계를 다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자꾸 고의적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이니 답답해서 아침에 커다란 폭탄을 주고 간 것 같았다. 뭐,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으니 좋은게 좋은거겠지.
“아, 근데 아까 말했던 공작님의 딸은 만나줘야겠다. 지금 왕궁에 뭔가... 벌어지는 것 같거든. 넌 총명한 아이니 내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거야 그렇지?”
역시, 이미 뭔가 벌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상식적으로 전쟁은 하룻밤사이에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만화에선 골드르크 가문이 정보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정보의 수집이 늦었을 뿐이고, 그 탓에 하인젤이 검술을 처음 배운 것도 작중에선 지금 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마스터라는 국가 전략무기급 전력을 둘이나 가지고 있는 우리 가문은 원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 정보가 넘쳐났고, 그 만화에서보다 조금 더 일찍 준비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곧 하인젤의 생존확률이 높아졌다는 뜻이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분명 리처드 또한 아직은 미숙할 것이었다. 그러니 싹수가 노란 새싹은 일찍이 잘라내야지.
이 선택으로 원작의 삼파전 구도가 사라지고, 두 진영간의 전면전으로 변해 전쟁이 더욱 끔찍해질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건 하인젤. 아니, 하인젤과 레이즈의생존여부였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쓸데없이 질투의 불꽃을 피워대는 두 메이드의 정신을 차리게 하는 거겠지.
‘아니... 이미 내가 어? 허락도 받고, 그냥 거래적 관계로 공녀 만나는 것 뿐인데 너넨 왜 그러는거야.’
둘이서 어떤 말도하지 않고 조용히 두손을 모은채 뒤에 서 있었지만, 몸만 그렇다 뿐이지 그녀들이 은근슬쩍 뿌려대는 기운은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백작이나 다른 사용인들이 아무렇지 않은 걸 보아 그들이 참고 있는 거거나... 아님 하인젤과 레이즈가 이 공간에서 딱 나만 있는 곳에 기운을 뿌려댈 정도로 마나 조작이 섬세해졌다는 거겠지.
개인적으로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얘네가 바보도 아니고 감히 가주인 백작에게까지 위압을 가하겠는가.
“흠흠.”
내가 고의로 포크를 떨어트리자 뒤에 기립해있던 하인젤이 조용히 그걸 주우러 왔다. 그리고 나는 그틈을 타, 그녀의 한쪽손을 꼬옥 잡고 메만져 주니, 나를 짓누르던 압박이 절반정도 줄었다.
레이즈또한 이 광경을 보고있었기에, 슬그머니 다가와선 멀리있던 음식을 가져오면서 한쪽 손을 내게 뻗었다.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는게 너무 귀여워서 처음엔 좀 놀려줄까 했지만 이내 레이즈의 본성을 떠올리곤 장난칠 생각을 접었다.
‘그래, 해줄거면 둘다 해주고 장난칠거면 둘다 쳐야지. 한 쪽만 가지고 그러다가 피볼라.’
결국, 그 식사 내내 두 사람은 내 곁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엇이던 구실을 찾아 내 곁을 맴도니 처음엔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던 백작도 나중에 가선 기겁하며 다음부턴 그냥 다같이 식사하던지, 아니면 우리끼리만 끼니를 챙기라고 꾸중을 들었다. 예절교육도 좀 다시 받으라면서.
‘하긴... 나같아도 저녁먹는데 왠 커플이 옆에서 대놓고 꽁냥거리면 화 날거 같긴해.’
...그러고 보니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이때쯤 들어와야 되는 신의 태클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주인님, 이제 저흰 그만…”
“주인님~ 나 이제 오늘부터 주인님이랑 같이 자도 되?”
내 방에 도착하니, 평소처럼 하인젤이 고개 숙이며 물러나려 했지만, 그 틈새를 레이즈가 파고 들어와선 나를 올려다 보며 묻는다.
아까는 누나인척 하더니, 얼마나 지났다고 애교를 부려오는 걸 보면 기가 막히거나 어이가 없어야 되는게 정상인데, 그런 레이즈가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는걸 보니 나도 단단히 빠졌나보다.
“그럼 들어갈게용~ 얏호~!”
내가 별다른 부정을 표하지 않고 웃음만 짓고 있으니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레이즈가 나를 다시한번 꼭 안아주고는 내 침대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
그렇게 나와 하인젤 단 둘이 남게 되었는데, 딱 보니 하인젤도 레이즈처럼 나랑 같이 잠을 자고 싶어하는게 보였다. 하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게, 분명 체면 때문에 자신이 직전에 말했던 말을 번복하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러면 또 내가 도와줘야지. 솔직히 그냥 여기서 어 잘가~ 하면서 문을 닫으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간 내가 그녀들의 속을 썩인것도 있기에, 한번 봐주기로 했다.
“하인젤, 나는 너랑도 같이 자고 싶은데.”
내가 하인젤의 손을 잡고 당기니 별로 큰 힘이 아님에도 불과하고 빙판길에 올라서 있는 것 마냥 쑤욱하고 딸려온다. 그러면서도 부끄러운건 아는지 얼굴을 붉히는 게 너무 사랑스러워서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니 그녀도 조금은 솔직해 지기로 했는지 나를 마주안아 왔다.
아니, 마주안아 오는걸 넘어서 자신의 소중한 곳을 내게 은근슬쩍 비비기까지 했다.
‘어, 어? 그냥 순수하고 잠을 같이 자고 싶다는 거였는데?’
근데 뭐... 슬쩍 뒤를 돌아보니 레이즈도 어느새 옷을 벗고 이불로 아슬아슬하게 가린채 고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니 꼭 순수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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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알렉 골드르크라고 합니다.”
그리고 며칠뒤에 나는 백작의 요구에 따라 프로즐 공작가의 딸과의 혼담을 가지게 되었다. 말이 혼담이지 사실상 서로간의 의중을 파악하는것에 중점을 둔 만남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하인젤과 레이즈는 불안했는건지 자신들이 꼭 따라오겠다고 떼를 설득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것 같았다. 원래 이런자리에선 서로를 믿는다는 의미로 호위를 데려가지 않는게 예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들은 어디까지나 내 시종이긴 하지만…
당연히 마스터를 시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상대측도 마스터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며 흔쾌히 허락해 준게 다행이었다.
“네! 저, 저는 메이 프로즐이라고 해요!”
뭐, 물론 그 걱정은 기우였지만. 이 세상의 배경이 중세라는 걸 잊고 있었다. 중세에선 나이차이가 굉장히 많이 날수가 있었지... 상대로 나온 프로즐 공녀는 확실히 아버지의 말대로 어여쁜 아가씨였다. 아니, 어여쁘게 자랄 것같은 아가씨였다. 메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는 중학생이나 겨우 될법했는데, 처음에 든 생각은 이 꼬마가 나와 이야기나 제대로 할수 있을까였다.
뭐, 다행히 상대 쪽도 시중을 빙자한 집사로 보이는 대리인 한명이 대신 왔기에, 실무적인 대화는 전부 그와 하게 되었다. 프로즐 공작가는 현 국왕의 외가, 즉 왕비의 가문으로 전형적인 왕당파였다.
“그러니까... 골드르크 측은 국가에 분명히 충성한다는 입장이시군요.”
뭐, 나중가선 우리는 국가에 충성하며 국가는 곧 국민이다는 논리로 왕족을 통수치긴 하지만... 일단 아직은 세상의 인식은 국가=왕 이었기에 거짓을 말한적은 없다.
“…우와! 그거 어떻게 한거에요? 그 반짝 반짝?”
우리가 이렇게 세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동안 한쪽에선 하인젤과 레이즈가 마나로 온갖 형상을 만들며 공녀와 놀아주고 있었는데. 어떻게 마나로 마법같은 것도 아니고, 무슨 눈 뭉치는 것마냥 저런 형태를 만드는 건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는 형태는 커녕 오라 같은거 뿜어내는 것도 불가능 한데.’
뭐, 애초에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이 몸의 원주인에게 코딩된 대로 따라하는 거라 크게 기대를 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건 어쩔수 없었다.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으세요 공녀님?”
음, 처음엔 하인젤이나 레이즈가 공녀를 만나서 예전처럼 위협하거나 하면 어쩌지 라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저렇게 놀아주는걸 보면 그건 기우였던 것 같...
“그럼 알려드릴테니 저희 주인님, 그러니까 알렉님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실수 있나요?”
...아니... 꼬마애한테 까지 그럴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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