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하인젤 (8)
* * *
다시금 정신을 차렸을 땐, 레이즈가 나를 죽부인처럼 다리까지 감은채로 껴안는 바람에 몸을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녀가 깰까봐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표현이 아니라 그냥 순수하게 그녀의완력을 이길수가 없었기에 나는 몸을 일자로 뻗은채 가만히 있을수 밖에 없었다.
깜빡 깜빡
…그리고 조금씩 꼼지락대는 나를 하인젤이 근처에서 똘망 똘망한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아뇨, 그냥 아까부터 주머니가 자꾸 이상한 소리를 내길래 확인해 볼까 말까 생각중이었어요.”
아, 저거 분명 신이 내게 보내는 문자일텐데. 아까 내가 한창 그녀들에게 얻어 맞을 때부터 저렇게 울려댔으니 얼마나 많은 메시지가 와있을지 궁금했다.
속박된 상태였어도 위팔이랑 다리가 결박되어있던 거지, 아래팔의 자유는 그대로 였기에 주머니 쪽을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꺼내보려 하지만… 끄응, 잘 되지 않는다.
“이쪽 주머니에 가지고 있으신 건가요? 제가 꺼내드리겠습니다.”
내가 방금 전 고백 비스무리한걸 한 탓인지 하인젤이 한층 내게 공손하고 극진해졌다. 어어.. 근데 그거 보면 안되는데…
“자, 잠…!”
물론 그녀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우연히 내 한드폰의 화면을 보게 되었고, 그 직후 그녀의 평소완 달리 약간 웃음기를 가지고 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더 싸늘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 현설? 보고싶다 엉 엉…?”
조졌다…! 내가 다급히 몸을 버둥거리며 하인젤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뺏으려 노력해 보지만, 내 신체가 자유로울 때에도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기는 요원한데, 팔다리의 자유마저 제한 당하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으으… 아, 알렉님 일어났어? 헤헿… 미안, 내가 너무 과했지?”
오히려 내 버둥거림에 레이즈의 잠이 깨버렸다. 그녀는 깨어나자 마자 방긋 방긋 웃으며 내게 몸을 부벼왔지만, 나는 순순히 기뻐할수가 없었다.
“주인님, 이건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런 편지가 맞습니까?”
곧 하인젤의 말을 들은 레이즈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워대면서 무슨 일이냐는 듯 나와 하인젤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리곤 이내 분위기를 파악한 듯 나를 껴안던 몸을 풀고는 조용히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몸의 자유를 찾았으나, 홀가분해진 느낌은 커녕 무거운 돌을 얹은 듯 알수 없는 압박감들이 내 몸을 짓눌렀다.
슬쩍 눈치를 보니 평소의 그 밝게 방실방실 거리던 레이즈도 무척 가라앉아있었다.
“어... 음, 그게 말이지 그게…”
뭐라 해야 될까? 솔직하게 까놓아야 되는건지, 아니면 이 순간을 모면하기위해 거짓을 해야되는지 분간이 잘 가지않았다. 내게 답을 알려줄 핸드폰 또한 그녀들의 손에 들려 있기에 순수히 내 결정에 달린 일이었다.
“그… 후우… 맞아. 너네가 생각하는 그런거.”
결국 선택한 것은 솔직하게 밀고 가는 것이다. 그녀들이 나랑 하루이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가족같은 관계를 넘어서 비뚤어진 소유욕이 나에게 향해 있었으니 거짓을 말한다 한들 전부 들킬 것 같았고, 또 그녀들에게 나는 너희 것이 아니다. 라는 인식을 줄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생각보다 그녀들의 반응이 꽤 격렬했지만.
“으득... 아까 백작님이 말씀하셨던 그 약혼 상대인가요?”
하인젤의 입가에서 주르륵하고 한줄기 핏방울이 흘러내리는게 보였다. 당황한 내가 다가가며 입가에 피를 닦아주려다가 멈칫했지만, 그녀가 내 손을 쳐내거나 하는 일은 다행히 없었기에 그나마 깨끗한 옷가지로 그녀의 입가를 슥슥 닦아주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을 가져와 보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다만 입가에 흐르는 핏방울을 닦아내니 이젠 눈가에서 눈물이 방울졌기 때문이었다.
“왜… 왜 갑자기 울어…”
그에 내가 당황해 안절부절 못하자 그녀가 방울져 떨어지던 눈물이 이젠 넘쳐 흐르기 시작했다.
”끄윽… 끄흡… 아… 아닙니다 주인님. 그냥…”
그리곤 고개를 돌리며 나를 살짝 밀어내었다. 아주 약하게, 저렇게 밀어서 바람이나 일으킬수 있을까 싶은 손짓이었지만, 나는 그 손짓에 충각대로 두들겨 지는듯한 충격을 받으며 털석 쓰러지고 말았다.
‘아… 이렇게 상처 주려던 건 아닌데…’
해봤자 나에게 화를 내면서 추궁해 올거라는 생각과 달리 그녀는 그 슬픔과 분노를 쏟아내는 대신 자신의 속으로 묵히는 것을 선택해버렸다. 나는 방패를 들어 막아낼 준비는 했지만, 저 방어막을 뚫는 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그러한 행동은 내게 너무 당황스러웠다.
“…이현설, 이현설… 못 들어본 이름인데. 주인, 그 아이는 어떤 사람이야? 그 아이의 어떤 점이 좋았던 거야?”
그래… 내가 생각했던 반응은 이렇게 레이즈처럼 밀고 들어오는 공격이지 저렇게 숨어버리는 반응은 상정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밀고 들어오는 공격에도 나는 제대로 된 준비를 하지 못 했나 보다.
“응? 걔의 어떤점이 좋았던 거야? 걔한테는 있고 나한테는 없던 매력이 뭐야?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이렇게 발전했는데…”
그녀의 밀고 들어오는 정도는 내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심했다. 아니, 어쩌면 준비하고 있었다는 내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일 수도…
“하… 하하… 이럴 거면 아까 그런 소리는 왜한거야? 이렇게 배신할 거면서 왜 우리에게 희망을 준거야?”
…아니다, 준비 같은건 의미가 없었다. 그냥 내 생각 자체가 글러먹었던 거다.
질투를 고쳐? 하... 세상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언어의 폭력은 없을 거다. 내가 그녀들의 소유가 아니야? 아니, 그녀를 내 소유라고 생각한 건 나였다. 그녀도 감정이 있는데, 사랑을 속삭여 주던 사람이 알고보니 이미 연인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해를 바란다니. 이건 그냥 쓰레기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건 그녀들의 성질에 관한게 아니었다. 그냥 나에 대한 문제였지.
“근데 그거 알아…? 나, 아니 우리 주인님 포기 못해, 아니. 포기를 왜해? 아내 둘,셋 있다고 결혼을 더 못하는 것도 아닌데.”
레이즈가 도망가지 말라는 듯 시선을 피하던 내 얼굴을 부여잡고 자신을 보게 만든다.
”우리, 포기 못해… 아니 안해. 저 밑바닥에 있던 우릴 주워와 여기까지 올려놓고 그냥 그걸로 끝이라고? 하하하, 한 사람의, 아니 우리 인생을 맘대로 바꿨으면 그 책임을 져야지.”
레이즈, 그녀의 맑게 반짝거리던 그 갈색 눈동자는 내 얼굴로 만들어진 그림자에 드리워져, 그 끝을 예상할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나도, 너흴 포기할 생각없어.”
그 가라앉은 빛 하나 없는 눈동자에 나는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간신히 변명을 내뱉었다.
그리고 내 대답이 마음에 든건지 그제야 그녀가 그 어둡던 눈을 감으며 활짝 웃었다.
“응, 그거면 됐어 알렉. 우린 니거니까, 그 손에 꽉 쥐고 우릴 풀어놓으려 하지마.”
꽈아아악
레이즈가 마주잡고 있는 내 손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갔다. 뭐하는 건가 싶어 멀뚱 멀뚱 있으니 그녀가 내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으으윽…”
고통에 내가 인상을 찌뿌리며 손이 퍼지자 내 펴진손을 그녀의 목에 감싼다. 그 모습은…
“응, 우릴 놓으려면, 이렇게 이 손으로 우리의 목을 졸라야 할거야. 그러니까 골라. 평생 우리의 목줄을 쥐고 살던… 아니면 목줄을 졸라버리던.”
그녀의 섬뜩하게 웃는 그 표정은 거짓말같게도 평소와 다를게 하나 없었다.
”사랑해, 알렉 내 모든걸 줄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는 내 손이 떨리는 건 아픔에 의해서였을까, 아니면…
“자! 이제 가서 저 속에 쌓아만 두고 있는 울보를 가서 달래줘.”
평생 놓지 않을것 같던 내 손을 놓아주며 그녀가 말한다. 손이 아려옴에 흘긋 보니, 초승달 모양의 상처가 한손에 4개씩 박혀있었다.
“…으응, 그래야겠지.”
나는 그럼에도 한마디 불평없이 쓰라린 손을 부비며 조용히 하인젤에게 향할 수 밖에 없었다.
“…하, 하인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흔들리는게 느껴진다.
“…네, 주인님.”
하지만 그런 내 말에 대답하는 하인젤의 말 또한 쉰소리가 나며 갈라져 나온다.
“…”
하지만 막상 그녀 앞에 오니 머릿속에서 이것저것 여러 말이 떠오르지만, 내뱉을 말은 하나도 없었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그러니까 언니 부터… 크흥, 언니부터 달래주세요…”
그래도 하인젤은 흐느끼면서도 자신보다 레이즈를 먼저 생각한다. 저런 모습을 보니, 거짓말 같이 긴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 움츠러진 가녀린등을 보니, 내가 해야 될 일이 단 하나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주인님?”
“미안, 미안 하인젤… 내가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만 했는데…”
떨리던 하인젤의 몸이 점차 안정되어가는게 느껴졌다. 이 조그만 몸에서 어떻게 저 힘을 숨기고 있는건지, 그리고 이 가녀린 몸으로 어떻게. 수백의 병력을 상대로 맞설 생각을 했을까.
신이시여… 부디 주군을 지켜주시옵소서.
품에 안긴 조그만 소녀에게서 당당히 적들과 맞서던 기사의 모습이 투영된다.
‘내가 진짜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내 안에 넘처 흐르는 것은 자괴감. 그리고 미안함이었다.
지이이잉
[아니, 니가 품어야 될 것은 그 두개가 아닐텐데?]
하인젤의 손에 쥐인 핸드폰에서 작지만 또렷이 글자가 보였다.
그래, 내가 가져야 할 감정은 사랑이지 이런 감정이 아니다.
“미안, 아니… 사랑해. 내가 비겁하고 쓰레기 같은 놈이란 건 알지만, 그래도 내가 했던 말들은 진심이야.”
그녀를 품에 안은채 귀에 속삭인다. 아까처럼 나를 밀쳐낸다고 해도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몇번이나 계속 속삭이니 흐느끼던 울음이 줄어들며 이내 내 등뒤에서도 꽉 끌어안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크흥… 진짜, 이렇게 나오면 제가 할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잖아요…”
그리고 그녀 또한 내 귀에 한마디 말을 속삭여 주었다.
“제 모든 것은 이미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 말에 다시금 손이 아려지는 게 느껴졌지만,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며 조용히 그녀의 손에 들린 핸드폰을 가져왔다.
…일단은 해결된 것 같지만, 이건 터지려는 둑을 손으로 막는 것에 불과했다.
살랑 살랑~
지금은 하인젤보다 저 뒤에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레이즈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될 것 같았다.
[보내줘?]
그래, 내게 현설이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왜 레이즈가 저렇게 되었는지 알려줘.
그리고 눈앞의 시야가 순식간에 바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