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하인젤 (2)
* * *
“도련님...! 도련님 기침하실 시간이에요!”
누군가 옆에서 작게 소리치는 소리에 나는 꾸물꾸물대며 찬찬히 눈을 뜨니 내 옆에서 연갈색의 머리를 두갈래로 땋은 겨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가 내게 허리를 숙이며 외치고 있었다.
“으음... 멜... 나 더자고 싶은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빙의 초기라 그런지 내 입에서 자연스레 말이 나온다. 목소리가 맑고 높았다.
“정말...! 오늘은 시장을 보러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아홉번째 생일은 맞아 겨우 허가받은 첫 외출이시면서!”
아홉살...? 정황상 내가 ‘사자심왕 이야기’라는 만화의 주인공인 알렉으로 빙의한것은 맞는것 같은데 설마하니 아홉살일줄은 몰랐다.
‘이거 정말로 오래걸리겠는데...? 현설이 외로우면 어쩌지...’
[아, 걱정하지마 현실보다 여기가 시간흐름이 빠르거든.]
이번에도 지잉 소리를 내며 주머니쪽이 울리기에 핸드폰을 꺼내 신의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고보니 이거 핸드폰같은거 걸리면 큰일나는거 아닌가? 사자심왕 이야기는 마법같은게 있는 판타지라 아티팩트 같은거로 봐줄라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동영상의 배속기능을 킨것 처럼 시야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래서 이런 것도 할수 있지. 사실 이것도 꽤 최근에 얻은거라 조절이 잘 안될수도 있다.]
오, 이러면 생각처럼 오래 걸리지는 않겠는데?
신의 도움으로 나는 흔히 있는 아침식사나 나갈준비 같은 과정을 전부 건너뛰고 순식간에 메인 이벤트인 영지에서 일정 기간마다 열리는 시장에 도착해있었다.
아, 처음에 아홉살이라길래 왜 그런가 의아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의미있는 시간대였다 바로 지금이 내가 이 작품의 비극의 히로인인 하인젤. 그녀와의 첫 만남이기 때문이었다.
“자,자 여러분! 모두 한번씩 보고 가세요! 힘좋고 아름다운 노예들이 이번에 새로 들어왔답니다! 범죄자들이긴 하지만 교육을 철저히!한데다 마법각인으로 위해를 끼치지도 못하니 어서어서 보고 가세요!”
분명 저 노예상. 주인공이 호기심에 갔었던 저 노예상에서 주인공은 그녀를 발견하고 구매하게 된다. 성적호기심이나 미모에 반한게 아닌 주인공 치트키인 상태창으로 그녀의 재능을 보아서였다.
애초에 주인공 알렉은 전형적인 고자 주인공이었다. 진짜 멍청한건지 이 악물고 모른척 하는건지 자신을 향한 히로인들의 구애나 고백에도 항상 못들은척, 우정의 표시라는둥 개소리를 지껄이며 요리조리 회피하는 쓰레기였다.
‘근데 왜 나는 상태창 이런게 안보이지.’
[내가 있는데 그런게 굳이? 괜히 그런거 만드는데 힘쓰는게 더 아깝다. 그거 생각보다 힘 많이들어.]
음... 하긴 제일 사기급 스킬이 여기 있는데 그런건 필요가 없지. 이제 슬슬 어릴적의 귀여운 하인젤을 보기위해 노예상에게 말을 걸었다.
“나, 노예 한번 보고 싶은데 괜찮지?”
처음엔 꼬마애의 목소리가 들리자 살짝 인상을 찌뿌렸던 그가 내 옷의 상태를 보고 한번, 내뒤에서 검손잡이에 손을 댄채 따라오는 호위 둘을 보고 또한번. 두번에 걸쳐 그의 미소가 밝아졌다.
“아이고오...! 당연합죠, 도련님. 무엇을 원하십니까? 잘 놀아주는 노예? 아니면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들어주는 노예? 그도 아니면... 이거?”
그가 내게 굽신거리며 신나서 말하다 마지막 즈음에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새끼손가락을 들고 흔들며 말했다. 살짝 마음이 동하려다가 기다리고 있을 현설이를 생각하니 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런건 돌아가서 해도 상관없다. 쾌락만을 위한 것보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게 훨씬 기분좋으니 굳이 여기서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건 하인젤이니까...’
노예상의 안내를 받으며 점차 깊은 곳까지 들어가니 자극적인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철창안에서 나를 간절히 바라보았지만 현설이의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손보다 못한 자극이었기에 무시하고 계속 둘러보았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기... 난 내 또래 친구가 될만한 애를 찾고있어.”
혹시 어린 노예는 판매용이 아닌가 싶어서 이리 말하니 곧바로 반응이 왔다.
“아하...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어린애들은 원칙상으로 거래 금지라... 하지만 뭐... 경우에 따라 저희쪽으로 오는 노예도 있긴 합니다만...”
그냥 돈달라는 소리를 돌려 말하고 있기에 호위에게서 돈주머니를 하나 받아 건냈다. 주머니를 받은 상인 씨익 웃으며 왔던 길과는 아예 정반대로 나아갔다.
끼이익...
녹슨 철문이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리니 그제야 안에 모여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여자아이. 회색 머리빛의 그녀가 똑같은 머리색을 가진 그녀와 똑닮은 미소년을 끌어안고 있었다.
‘남매인가? 애초에 소설이 주인공이 17살 성인이 된후의 이야기라 하인젤의 출신만 간략히 적혀있었기에 저 소년의 정체를 알수가 없었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또 몇편씩 못알아봐서 고구마 먹이지 말라고.]
응? 몇편? 그게 뭔소리...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면 문득 궁금해 지는것이 하이젤의 동생? 누나?의 재능이었다. 주인공이 하이젤만 데려왔으니 그녀는 재능이 없는건가?
[아니, 오히려 더 해. 알렉이 그녀를 못알아 본건 당시 알렉이 볼수있는 재능의 최대치보다 그녀의 잠재력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후에 단 스물둘의 나이로 대륙 제일검으로 불리는 하이젤이었는데, 그녀를 능가하는 재능이라면 도대체 얼마나 강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 두명. 데려갈래 마법각인이나 목줄은 필요없어.”
내가 그 두아이를 가리키며 상인에게 말하자 그는 잘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두 소녀는 벌벌 떨기 시작하였다.
“아아... 그런 용도시군요 알겠습니다. 제가 증거하나 없이 뒤처리 까지 해드릴수 있는데, 그건 어떨지...”
“...! 제, 제가 잘못했어요! 제, 제가 다 감당할테니 동생만은...!”
상인이 입을 열어 뒤처리니 뭐니 같은 소리를 하자 짧은머리의 소녀가 새하얗게 질린채 내게 다가와 무릎꿇고 손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뭐지, 알렉의 인상이 그렇게 험상궂게 생기진 않았던것 같은데. 그녀가 빌며 무릎으로 내게 다가오려 하자 호위병이 앞으로 나와 그녀를 막아세웠다.
“무엄하다. 감히 누구신줄 알고 손을 대려 하느냐.”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 제발... 저는 괜찮으니 동생이라고 고문은 하지 말아주세요...!”
엥? 고문이라니? 갑자기 그녀가 땅에 머리를 찧으며 빌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에? 고문이라니, 갑자기 고문이 왜나와.”
그러자 노예상과 두 미소녀는 물론 호위병들까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엥? 뭐지? 나 뭐 실수했나??
“저기... 보통 각인과 목줄조차 필요없다는 건 그냥 고문하고 가지고 놀다가 버릴 일회성 유희거리이다 라는 의미로 쓰입니다만...”
서로 얼마간 눈치를 보다가 호위병이 용기를 내어 조그만 목소리로 내게 말해주니 그제서야 난 내 실수를 깨달았다.
[큭큭큭... 이 쓰레기 자식! 저 두 소녀를 괴롭히다 죽이려 들어! 난 풉... 너에게 실망했닼ㅋㅋㅋ]
덧붙여 신이 놀리듯 보낸 문자는 안그래도 창피해하는 나에게 더 큰 추격타를 날렸다.
“아...아니 난 그럴 생각이 아니라, 퓨... 그냥 부드러운 가죽목걸이만 채워줘...”
나는 뒤늦게라도 변명하려 했으나 이미 오들오들 떨고있는 두 미소녀를 보니 이야기가 길어질것 같아 그냥 노예상 밖으로 나섰다.
“저기, 이 닭꼬치 맛있는데 먹을래?”
““...!””
“오오! 이 옷들 너희한테 어울릴거 같은...”
““히익..!””
[이거 완전 겁먹었는데? 그러니까 행실을 좀 바로하지]
‘아니 그게 그런의미인줄 내가 알았겠냐고,,,’
첫단추를 이거 너무 잘못 끼워버렸다. 내가 그녀들에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얻기위해 무슨짓을 하던 그녀들은 의심이면 다행이요, 되려 겁을 먹어버리기 일수였기에 문제였다.
“하아... 그냥 돌아가자...”
노예 두명이 다시 움찔거리는 것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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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신님이 빨리감기를 사용해주었다. 대충 백작인 아버지께 생일축하를 듣는 동시에 노예두명의 근원을 물으셨고 나는 시중겸 호위인력을 내손으로 키우고 싶었다고 대답한것이 기억났다.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럼 내 생일선물인걸로 생각하겠다고 하셨다.
이렇듯 이 세상의 노예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행위였다. 죄를 짓고 노예가 되는만큼 벌을 받는다는 인식이었기에 그런걸수도. 어린애까지 노예가 되는것은 연좌제의 일종이었으나 그 누구도 불공평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꼬르르륵...
내가 침대맡에 등을기대어 누워있자 내방 한쪽벽에 나란히 서있는 두명의 미소녀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아까 날 깨우러 온 멜은 아니고 하인젤과 그녀의 자매였다.
”하아... 그러길래 아까 내가 사줄때 무서워하지 말고 그냥 배고프면 얘기하지.”
하지만 다시 내가 입을 열자 다시한번 움찔거리며 몸을 움츠리는 모습에 화가 났다.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별짓 안할거라고 했음에도 저러니 화가 안날수가 있는겠는가. 그래서 짜증을내며뭐라 하려던 찰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인젤을 보니 그녀의 최후가 생각나 소리지를수가 없었다.
“후... 저기, 난 나쁜사람이 아니라... 아니다, 됐다. 너흴 왜 데려왔냐고? 그냥 친구하려고 데려왔다. 각인이나 목줄은 내가 친구되고 싶다고 티내고 싶었던 거지 별 뜻은 없었어. 하지만 너희가 자꾸 그러면 난 그런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있어. 알겠어? 그러니까 그냥 친구로 생각하라고. 안그럼 밥도 안주고 놀지도 못하게할거야.”
어린애들에게 논리적인 말을 해봤자 얼마나 통하겠는가. 그래서 나도 그냥 애들처럼 떼쓰기로 했다. 이게 통할지는 의문이었으나 이미 당근작전은 실패했으니 어쩔수 없지.
“하... 하지만 저희는 노예인데...”
그러고보니 계속 저 짧은 머리의 소녀만 대답하는데 저 소녀가 누나인건가? 다음에 한번 물어봐야겠다.
“그게 무슨상관이야, 내가 너희랑 친구하고 싶다는데. 아니다, 명령이야 너희 나랑 친구해.”
내가 대놓고 떼쓰자 그녀들이 안절부절 못하고 내 눈치를 살피지만 나는 꿀릴게 없었기에 당당히 고개들고 있었다. 둘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침음을 흘리며 고민했지만 얼마뒤 멜이 빵과 수프를 들고오니 그것도 얼마 못가 음식을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멜은 내 식사도 같이 들고왔는데, 내가 특별히 생일이라는 걸 핑계로 평소보다 맛있는걸 많이 달라했으니 들고 오느라 고생좀 했을 것 같다.
“맛있겠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지금은 아까 낮과는 달리 지금은 어느정도 긴장이 풀린데다가 입에 이미 음식이 들어가니 참던 배고픔도 다시 날뛰는 상황이다. 낮에는 내가 먹던 닭꼬치라 거부했다고 쳐도 지금은 따로 담아져 덜어 먹을수 있게 되어있으니, 이렇게 잘구운 고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누구도 참기 힘들 것이다.
“하인젤...! 그러면 안돼, 지금 우리가 먹는 것만해도 감지덕지해야지, 잘못하면 큰일나!”
“...레이즈, 그치만 친구라고 했으니까 말 정도는 할 수...”
하인젤이 입술을 삐죽이며 불평하자 레이즈가 딱콩!하고 딱밤을 먹였다. 저 머리가 짧은 소녀의 이름이 레이즈였나 보다. 그보다 알아서 이렇게 넘어와 준다면 나야 환영이지.
“음? 왜 그래, 당연히 우린 친구니까 같이 먹을수 있지. 자, 너희도 이리와, 앉아서 같이 먹자.”
그녀들은 지금 원래 내가 커피나 차같은걸 마실때에 쓰는 협탁에 앉아서 먹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인스타감성 카페의 테이블 같은 구조기에 먹기 굉장히 불편할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멜이 두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지만 뭐, 내가 갑인데 어쩔건데.
반면에 지금 나는 침대에 앉아 간이 테이블을 끌어다 식사를 하고있었는데, 내가 같이 앉으라고 하는 건 즉 내 침대위에 걸터 앉으라는것과 다를바가 없는 것이었다. 그걸 아는 멜은 미치고 팔짝뛰겠다는 모습이었지만 그녀들은 이런 예절을 모르기에 우물쭈물하면서도 음식의 유혹에 못이겨 슬금슬금 다가왔다.
무심코 그 모습이 경계하는 아기고양이들 같다는 생각을 한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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