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배하는 히로인이 없는 이야기!-9화 (9/37)

〈 9화 〉 하인젤 (1)

* * *

“적습!!! 적습... 커억!”

새벽에 일어난 일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까, 뭔가 이상함을 느낀 보초가 수풀에 숨어있던 적을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적들의 선발대는 우리의 야영장에 들어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기상!! 기사앙!! 불을 먼저 밝혀라! 천막이던 침낭이건 상관없다! 시야부터 밝혀라!”

나는 다급히 소리지르며 병력을 집결시키려 노력했다. 하필이면 주군과 동맹 사령관 사이에서 분란이 일어나 대다수의 병력이 빠진 어수선한 틈을 파고 들다니. 아니, 누가 보더라도 적의 입장에선 기습하기 가장 쉬운 상황이었다. 내가 예상했어야 했는데, 내가 조심해야 했는데... 하지만 이미 적들의 검은 우리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다.

“하인젤...! 적들의 수는 확인 되었는가!”

어느새 흉갑과 검을 챙겨든 주군께서 내게 밀착하며 속삭이셨다. 명확한 답을 드리고 싶었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을수밖에 없었다.

“젠장...! 승리가 코앞이었거늘...! 베르뎅 그 녀석, 분명 적과 내통했을게 분명해!”

주군이 입술을 짖씹으며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려 하시자 나는 감히 그 손을 재빨리 막았다.

“주인이시여, 지금은 조금이라도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할때입니다. 제 겉옷이 어두우니 제 것을 입으시고 그 옷을 제게 주십시오.”

대륙제일검이면 뭐하겠는가, 현재로선 겨우 자조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내리치려는 주군의 팔을 막는 것 외에는 할수 있는게 없는데. 그렇기에 나는 그저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을 할 뿐.

“하인젤. 너는 내가 바보로 보이더냐.”

하지만 주인께선 이런 모른척 넘어가줄수 있는 속임수를 용납하지 않으셨다.

“여기 남아 아군이 퇴각할 시간을 가장 많이 벌수 있는것도, 가장 생존할 확률이 높은 것도 저입니다. 지금도 저들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부디 빠른 결단을.”

가장 앞서서 적의 방패들을 부수고, 날아와는 화살을 꺾고, 가장 뒤에서 겁먹은채 소리만 지르는 지휘관을 베는게 아닌, 고작 주군이 퇴각할 시간을 버는 것. 그것이 현재 내 위치이요, 현실이었다.

“하인젤...! 그대는 그대가 얼마나 귀중한 전략자원인지 모르는 것인가! 나는 ㄷ...”

주군이시여, 부디 한낱 노예에 불과하던 제가 당신의 지엄한 신체에 손을 댄것을 용서하소서...

“차라. 주군을 모시거라.”

내 제자이자 부관이 주인을 들쳐메는것을 확인하고 나는 주군의 망토를 두르고 검을 집어들었다. 나의 검이 아닌, 주인의 애검을.

‘손에 익진 않지만... 주군이 몸을 피하는 시간을 버는데는 충분하겠지.’

“저곳이다! 골드르크의 사자 알렉이 저곳에 있다!!!”

저들중에 꽤나 밤눈이 좋은자가 있구나. 쐐액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화살들을 몇개 쳐내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어차피 야간에서의 화살은 단순히 견제용일뿐, 진짜는 그 다음이다.

사아악!

아무소리없이 습격자들이 내 사방에서 달려들어온다. 훈련을 잘 받은 정예병들만 보낸 것인가.

‘하지만 이정도로는 부족하다. 리처드’

지금의 기습을 예상했던 것처럼 아까의 적습을 예상했더라면 조금더 주인의 곁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인데. 나는 왜이리도 둔하단말인가.

“검을 들고 돌진하지마라! 창으로 둘러싸고 다가오지만 못하게 해! 리처드 경께서 직접 오고계신다!”

그래, 리처드. 너 정도는 되어야 나를 막을수 있지. 어느 병사의 명령대로 습격자들은 더 이상 무모하게 검을 베어 오는대신 창날을 나에게 찌르며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한다. 저놈, 너무 힘을 실었어.

“으아아악!”

곧바로 창대를 잡아당겨 빈틈을 만들었다. 창의 사정거리가 긴것은 사실이나 끝의 부분만 피해 창대쪽으로 파고들면 막대 그 이상도 아니다.

”재... 재집결ㄹ 크르륵...!”

방금 베어넘긴 놈의 검을 집어던져 명령을 내리는 놈 먼저 처리한다. 그리하면 지금처럼 이놈들은 불나방 같이 사리분별 못하고 내게 달려드니.

푸욱!

“크읍...!”

제길...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아군을 찌르면서 나까지 찌르다니. 하지만 아직은 안된다. 리처드를 베지 못하더라도 시간, 조금이라도 더 이놈들을 잡아두어야만 한다.

“으아아아아앗...!”

이미 가슴팍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생환은 불가능 그렇다면 이놈들이 조금더 나를 바라보게, 나에게 신경을 쓰게 만들기 위해 나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흥... 되도 않는 연극이군.”

하지만 그것도 얼마가지 않아 내 바로뒤에서 무언가를 찌르고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처드.”

“하인젤. 아무 보잘것 없는 노예출신 기사. 골드르크의 수준을 알만하군. 되었다, 얼굴은 반반하나 지금은 이년 보다 알렉 그놈이 우선이다.”

나를 애워쌌던 병력들이 리처드 그의 말에 단숨에 사라져 간다. 아아... 결국 나는 저들의 발목 하나조차 붙잡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털썩...! 나는 온몸의 힘을 빼며 그저 주저 앉아 기도할수밖에 없었다.

“주인이시여... 부디 나를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나를 위해 눈물을 낭비하지 마시옵...”

이내 단 한음절조차 내뱉을 힘도 없어진 나는 생각할수 밖에 없었다.

‘신이시여... 부디 저와 주인님을 지켜주시옵소서...’

[그리되리라]

아마 마지막 순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기분탓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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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며칠간 나는 현설이를 데리고 놀이공원, 쇼핑, 영화관등 일반인들이 흔히 가는 데이트 장소로 데이트를 다녔다.

“연예인일때는 이런 곳 자주 못 갔거든~”

물론 이 세상에서도 연예인이 될뻔했다. 난 요즘같이 연습생들이 넘쳐나는 시대에도 길거리캐스팅이 남아있단걸 알 수 있었다. 현설이가 한결같이 ‘관심 없어요~ 게다가 남자친구도 있고.’

라고 대답하자 그들은 잠시 나를 훑어보다가 동시 캐스팅 조건도 걸길래 살짝 기분좋긴했다.

그래서 데이트 동안 한껏 싱글벙글해져 있는 나를 본 현설이가 귀엽다며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덮쳤고, 몇번의 뜨거운 시간을 보낸뒤 우리는 서로 나란히 누워 필로우 토크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 쳐도 너는 이제 연예인 별로야? 저쪽에선 탑스타 찍자마자 여기로 온건데 아쉽진 않어?”

“음... 솔직히 아쉽긴 한데 어차피 신인은 연애가 불가능이야. 금지가 아니라 불가능. 안그래도 이제 나말고 다른 녀...이 아니라 여자들도 네 곁에 생길텐데 이렇게 꼭 붙어있어야 안뺏기지.난 공유는 해도 줄생각은 없다고.”

아쉽지 않냐 물으니 현설이는 살짝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어쩐지 나를 탓하는 것 같기도...

[그만큼 자기를 봐 달라는 거다.]

싶다가도 장인어른의 말씀에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달라붙으며 재롱을 떠니 그녀가 꺄르르 웃으며 내게 입을 맞춰 주었다.

‘장인어른... 만만세...!’

[그럼 이제 슬슬 준비하자?]

...어쩐지 이런 사소한 거에도 조언을 해주나 싶었네

나는 반사적으로 현설이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현설아 그... 신께서 말하시길 이제 슬슬...”

멈칫!

“...응! 맞다, 이제 자기도 준비해야지. 얼른 갔다와? 늦게 오면 삐질지도 모른다?”

현설이가 환히 웃으며 내게 말해주었지만 난 그녀의 표정이 순간 얼어붙었단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밝게 웃으며 저렇게 명랑한척 배웅하는걸 보니 역시 명배우는 명배우구나 싶었다.

“..현설아, 진짜 진짜 고마워... 그리고 항상 사랑해.”

내가 그녀를 꽈악 끌어안으며 대답하니 그녀도 나를 마주안아주며 대꾸해주었다.

“정말... 눈치 하난 빨라가지고... 그래도 눈치 없는 바보 멍충이 둔감왕 보다는 낫네! 여자 잘꼬시겠다. 잘 하고와♡ “

정말로 마지막 인사라는듯 그녀는 내게 진한 입맞춤을 남겨주었다. 그리고 그게 내가 본 마지막 색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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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뜨니 저번처럼 아무것도 없은 새까만 공간속에 나 혼자만 덩그러니 있었다.

[이번엔 말했다시피 지난번처럼 쉽지도, 금방 걸리지도 않을거야.]

‘에, 기왕 해주는거 쉽게쉽게 가면 안되요? 어차피 이거 그 신적 파워 강화 뭐 그런거 같은데 너좋고 나좋은거지.’

솔직히 현설이 보고 쉽다고 하니까 조금 기분이 나빴지만 신이라는 절대자의 입장에서 너무 많은 이해를 바라는 것도 쓸데없는 감정소모였다. 그래서 그냥 좀 기분나쁘라고 비아냥 대기는 했다.

[예전부터 눈치는 좋다니까... 그래, 니가 히로인을 구해줄수록 내 신적 능력이 좋아지는 건 맞지. 다만 없던게 생기는게 아니라 원래 있던 걸 좀더 잘쓸수 있게 되는거 뿐이다 임마.]

‘그러니까 아무튼 쉽게 해주면 좋잖아요?’

[니가 게임모드 깔때 그 모드의 세세한 수치나 모델링을 바꿀수 있냐? 비슷한 거야. 저번엔 내가 그 세계를 만든 신이니까 가능한거지 이번건 다른 작가가 쓴 세상을 구현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나중에 내가 숙달되면 모를까 아직 난 설명서 그대로 따라하기도 벅차 임마.]

성경이나 경전 같은걸 보면 꽤 난해한 구절들이 몇가지 있는데 우리 신님은 그런거 없이 이해하기 쉬운 눈높이 맞춤 설명을 해주시는게 참 마음에 들었다.

[괜히 어려운 말쓰며 가오부릴 필요 있나? 귀찮게 그런거 안한다.]

참 성격 마음에 드는 신님이다.

‘그러고 보니 신님은 왜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고 또 왜 하필 나를 고른걸까?’

[첫번째는 그냥 심심해서 두번째는 전에도 설명하지 않았나? 그냥 니가 쓴 메일이 존나게 절절해서? 아무튼 할말은 다했으니 이제 가라.]

에... 이런 혼잣말까지 대답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라고 생각하며 나는 또 다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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