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104화 (104/104)

〈 104화 〉 104 ­ 키런 왕국 中

* * *

“황금늑대들이 탄압받고 있어.”

그림자를 쫓는 별. 판테스 왕국의 부 지부장인 에니스트의 말에 정보원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 부분은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선지 키런 왕국의 지부와 연락이 원활하게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알카이드 나이트 넨피스 후작을 필두로 대부분의 황금늑대가 투옥됐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정보야. 문제는 그 다음이지.”

니스가 지도를 펼쳤다. 그녀가 가리키는 건 키런 왕국에 포함된 각 요새들이었다.

“로아흐 평원 쪽은 누즐라 요새밖에 없어. 북쪽에 걸쳐진 미스타 언덕에 있는 스칼론 요새는 규모가 작아. 남쪽에 있는 알타 구릉지 근방에 있는 시르막 요새는 입지적으로 로이첸 왕국만 경계할 수 있어. 근데 왜 이 세 곳에 병력이 집결되겠어?”

니스는 세 요새의 위치에 붉은 마킹을 했다.

“특히 남단의 시르막 요새에는 군마가 이동하고 있어. 여차하면 누즐라 요새랑 연계해서 총공세를 벌일 수도 있어.”

니스는 전쟁이 터질 거란 걸 확정짓는 말투였다. 그건 다른 정보원들도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니스가 누구인가. 어쌔신 마스터이자 이번 조직 개편에서 큰 활약을 한 전설이었다. 종종 생각지도 못한 정보를 들고와 정보전의 판도를 뒤바꾸기도 했다. 그 뒷배경에 미래의 눈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이자 전 가이람 백작인 휴트가 있단 건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은 조직 내에서도 몇 명밖에 알지 못하는 극비 중의 극비였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니스의 신묘한 정보력에 감탄밖에 할 수 없었다. 이따금 이모탈끼리 통한다는 특수한 정보망이 아닐까 추측도 했지만 그건 다른 이모탈이 증언하면서 아니란 게 확인되었다.

그래서 니스는 굴강의 괴물이 되었다.

죽일 수 없는 암살자. 대륙을 아우르는 정보꾼. 거기에 정보계에서 뜨거운 감자인 블랙 남작과의 인맥!

심지어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그녀가 베타테스터란 게 알려지면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판타지아,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유명인이 된 그녀는 말 한 마디로 누구 하나는 가볍게 작살낼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니스의 발언은 가볍지 않았다.

키런 왕국은 전쟁 준비 중이고 판테스 왕국을 치려 한다! 이제 이 문장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어차피 혼란을 줘봤자 소용없어. 중요한 건 우리가 이 사이에서 얼마나 줄타기를 잘 하냐는 거지.”

“하지만 전쟁 정보는 미래의 눈이 독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가 가세를 한다고 해도 주고받는 정보는 미비하고 지금 정보망도 반쯤 마비되었습니다. 여기서 줄타기를 잘못 하면 저희 정보망만 드러나고 본전도 못 찾을 겁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인맥이 있어. 최우선적으로 마비된 정보망을 복구하고 키런 왕국과 판테스 왕국 두 나라 사이를 조율하는 걸 목표로 잡아.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려면 고될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별자리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이미 보고하고 명령 하달을 하는 거니까.”

니스는 정보원들에게 품에서 꺼낸 두루마리와 골드 몇 닢을 건넸다. 그림자를 쫓는 별의 수장인 별자리의 직인. 그리고 금화의 개수에 따라 정해진 암호. 두루마리 속 내용과 금화를 대조만 해본다면 니스의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전쟁의 명분은 키런 왕국에 있어. 아마 블랙 남작의 가신이 왕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걸로 트집잡을 거야. 재수 없으면 로이첸 왕국이나 아드레이 왕국에서도 전쟁에 가세할 수도 있으니 보안에 특히 신경 써.”

“예.”

“해산.”

니스의 한 마디로 정보원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직후 니스는 시선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

“나는 잘 모르겠소만 왕이 단단히 미친 거 같구려.”

벽이 열리며 나타난 건 휴트였다. 니스의 반려자이자 미래의 눈의 수장은 자신의 할 일을 하면서도 아내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치다니?”

“황금늑대들을 투옥한 것만 봐도 그렇지 않소? 그들은 키런 왕국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오. 스스로 상징을 내려버리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오. 하물며 기사의 나라에서 그런 짓을 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가신을 핍박하는데 어느 기사가 따르겠소?”

휴트는 껄껄 웃으며 두루마리 하나를 내밀었다.

“성과가 나왔나 보네?”

“해당 인원들은 PK 요격대로 만들었소. 코노야로를 선두로 운영자를 찌를 비수가 되고 있소.”

“급여는 계속 지급해줘. 그들 중 몇 명은 지금 써야 할지도 몰라.”

“어디에 쓰려는 것이오?”

“아직 확정 난 건 아니지만 만일 키런의 왕이 정말 미쳤고 이상한 이유로 전쟁을 벌인 거라면…… 별동대로 쓸 거야.”

“암살이라면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게 낫지 않겠소?”

“암살이라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니스는 히죽 웃으며 그가 건넨 두루마리를 펼쳤다.

“구출 임무.”

*

“난처하게 됐군.”

뮬러 7세. 그는 릴본 자작과 함께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키런 왕국이 벌이는 행동은 전쟁 준비나 다름없었다. 군사 훈련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규모는 물론 훈련 역시 전투적이라는 보고가 있었다.

이게 싸우자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뮬러 7세는 버트에 대한 대처가 미숙한 게 문제였나 싶었다. 하지만 샬론 백작의 방문은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듣자 하니 선물도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전쟁 준비를 한단 말인가.

“그래! 블랙스타의 교주가 로디아 마을에 와있다고 하지 않았나?”

“안타깝게도 그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수를 써도 잡을 방도도 없거니와 키런 왕국이 그때 맞춰서 공격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끄응……”

“우선 귀족들을 소집해야겠군. 우리도 키런에 맞춰 군사 훈련을 빌미로 병력을 배치하는 수밖에……”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러면 전언을 전해두겠습니다.”

“그렇게 하라.”

자작은 그대로 물러나려다 말고 검을 뽑으며 달려들었다.

당혹한 표정과 손길. 뮬러 7세는 본능적으로 자작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챙­

뮬러 7세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고 자작은 방금 그가 있던 자리를 검으로 겨누었다.

“웬놈이냐.”

“그림자 늑대. 폐하의 전언을 가지고 왔다.”

그의 형태는 인간과 같았다. 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먹으로 물들인 것처럼 새까맸다.

“그림자 늑대라고?”

자작은 여전히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짙은 살기를 흘려보냈다.

“감히 폐하께 알현을 청하지도 않고 갑자기 나타나 무슨 무례냐!! 이번에도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보낸 건가!”

“아니. 내가 모시는 분은 키런 왕국의 위대한 기사 바틸카스 뿐이다.”

“키, 키런에서 암살자를 보내?”

뮬러 7세는 3가지 이유로 놀랐다. 첫 째는 키런 왕국이 생각보다 빠르게 행동했다는 점이며 둘 째는 암습을 싫어하는 그 나라에서 암살자를 보냈단 점, 마지막으로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나타날 정도의 실력자가 있단 점이었다.

그 어느 것도 키런 왕국에 해당되는 게 없었다. 하물며 그림자 늑대라니? 판테스 왕국이 아무리 약소국이라고 하나 다른 나라의 강자나 암조직을 모를 수 없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로 격차가 심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암살자가 아니다. 난 영예로운 그림자 늑대의 기사 11호다.”

“명예로운 기사가 이런 기습을 벌이는 건가!”

“기습이라? 난 분명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나타났다. 오히려 위대한 기사의 휘하 단원을 만나는 데 예를 갖추지 않는 쪽이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오만했다.

그러나 자작은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그가 괜히 왕실 기사단장이 된 게 아니었다. 상대의 힘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강하다. 이길 수 없는 건 물론 뮬러 7세를 지키며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자작은 불편함을 드러내면서도 신중하게 검을 겨누었다. 그러면서 주변을 신경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걱정 마라. 여긴 나 혼자 왔으니까. 지금은 그저 전언을 가져왔으니 안심해라.”

“전언?”

“폐하께서는 평화를 원하신다.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고 키런의 산하에 들어 위대한 대륙 통일에 이바지하라.”

자작은 물론 뮬러 7세도 분개했다. 그저 미사여구가 덕지덕지 붙었을 뿐 밑으로 들어오란 뜻이었다.

이 얼마나 뻔뻔한 제안이던가. 어느 누가 이걸 선뜻 받아들일까.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어쩌겠는가.”

“무슨 대답을 하든 상관없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니까.”

11호는 서서히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자작은 그 모습을 보고서도 한참 동안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호위대가 미처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정면대결을 펼쳤다면 열에 아홉은 제가 불리했을 겁니다.”

릴본 자작은 침통한 어투로 말했다. 뮬러 7세는 현기증이 나는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뱉었다.

“내 일찍 후세를 두지 않은 게 한이구나. 이대로면 제 명에 못 살겠어.”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폐하. 판테스 왕국을 이 이상 끌어올릴 수 있는 건 폐하 뿐입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릴본 자작. 그나저나 정말 당돌하구만. 이건 거의 선전포고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혹여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짓거리를 했는지 물어봐야겠어. 각 나라에 키런 왕국의 이상 행동에 대해 물으라 이르게.”

“예, 알겠습니다.”

릴본 자작은 호위대를 따로 불러내어 뮬러 7세를 경호하게 했다. 뮬러 7세는 자작이 떠난 뒤에 미간을 누르며 고민했다.

‘혹여 전쟁이 일어난다면 다른 나라에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 그게 아니면 우리가 가진 전력으로 부딪쳐야 하는가.“

판테스 왕국과 키런 왕국은 체급 차이가 있었다. 단순히 군사력만 놓고 본다면 3배 이상 차이가 났다. 심지어 질적 차이도 간과할 수 없었다. 가장 무서운 건 키런 왕국의 기사들을 필두로 이루어진 기마병들. 안타깝게도 판테스 왕국에는 군마가 상당히 적었다. 전부 보병들로만 구성되었고 그들 중에서도 기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전쟁에 대해 구체적으로 모르는 뮬러 7세가 보기에도 불리한 싸움이었다.

‘허나 우리에게는 약간의 변수가 있다.’

블랙 남작. 버트를 대신하여 자리 잡은 그 여인은 확실한 실력자였다. 판도를 뒤집을 정도는 아닐지라도 큰 조력이 될 것이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임시 호위로 있었던 검은 기사 리실버만 해도 든든할 것이다.

‘남은 건 다른 나라의 태도다.’

키런 왕국이 다른 나라에도 똑같은 짓을 했느냐. 했다 치면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냐. 이제 중요한 건 이것 뿐이었다.

*

뮬러 7세의 예상은 반 정도 맞았다.

키런 왕국이 보낸 그림자 기사들은 곳곳에 선전포고를 가했다. 거기에는 아드레이 왕국과 베톰 왕국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력 차이를 떠나 모든 나라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한들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키런 왕국의 선언은 당연하게도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가장 강한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강한 나라의 선전포고가 어디에 먹힐까. 베톰 왕국과 아드레이 왕국, 스카이 왕국에는 씨알도 안 먹혔다. 약소국인 로이첸 왕국조차 그들의 제안에 콧방귀를 뀌었다. 그나마 아직 병세를 이기지 못한 살리마 왕국만이 우려를 표했다.

그들이 놀란 건 이 수법을 이미 아드레이 왕국이 썼단 것. 그리고 키런 왕국이 그만한 실력자를 갖고 있단 점에서 감탄했다.

어찌 됐든 이로 인해 키런 왕국은 구설수에 오르게 됐다. 아직까지 그들만이 알고 있기에 상관 없었지만 키런 왕국 곳곳에 숨어있는 ‘벌떼’ 소속 플레이어들이 묘한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키런 왕국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이건 니스가 예측한 것처럼 플레이어들 역시 키런의 행보를 추측하고 있었다. 다만 여러 정보를 바탕으로 결론을 낸 니스와 달리 그들의 추측은 단순했다.

“슬슬 국가 간 전쟁도 할 때가 됐지.”

“맞아, 너무 평화로웠어. 언제까지 몬스터만 잡을 거야?”

“요즘 레이드도 레이드 같지 않아.”

그들이 바라는 건 자극이었다. 정세를 보는 게 아니라 그저 일이 터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키런 왕국에 이목이 쏠렸다. 이때를 노린 방송인이나 정보 조직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렇게 키런 왕국의 전쟁이 기정사실화가 되면서 바빠진 건 운영부서였다.

“뭐 들은 거 없어?!”

“벌떼에서 들어온 정보는 계속 메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6번 파일도 정리가 끝나는 대로 추가로 보내겠습니다!”

“키런 왕국 병사들 얼마나 이동했는지도 첨부해서 감시과로 보내!”

“야! 정보!! 왜 다른 나라에도 선전포고했단 거 안 써놨어!!”

“여기도 지금 비상이야!! 군사 머릿수 세느라 골 아프다고!!”

“정치 쪽 손 비는 사람 여기 좀 도와줘!”

“야 너, 너! 그리고 신입! 가서 경제 쪽에서 해달란 것만 몇 개 만져줘!”

운영부장 고경태는 시끌벅적한 부서에서 홀연히 서있었다.

‘이건 이후에도, 앞으로도 일어나선 안될 일이야. 뭐가 잘못 된 거지? 설계과에서 누락된 게 있었나? 아님 관리 팀에서 실수라도 했나?’

경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급변하는 상황에서 대처하는 게 운영부서의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건 급변한다의 수준을 넘어섰다. 물고기가 땅으로 올라와 걸어다니고 사자가 갑자기 하늘을 나는 수준의 변화였다. 갑작스럽고 말도 안 되는 전개였다.

‘뭔가 간섭이라도 했나? 아니, 그랬다면 백신 쪽에서 먼저 감지해서 보고했을 거야. 이상 증세가 아니란 소리인데 키런의 왕이 그런 짓거리를 벌일 조짐은 없었어. 설마 마신의 수족들이 뭔가를 꾸미는 건…… 아냐, 그것 역시 백신이 잡아냈을 거야.’

경태는 뒷목을 주무르며 자신의 앞으로 켜켜이 쌓이는 보고서를 보았다.

‘지금 당장은 이 일부터 수습해야 해. 키런 왕국이 전쟁을 벌이게 둬선 안 돼! 전쟁 컨텐츠는 베톰 왕국이 내정을 끝내고 전 대륙적으로 벌여야 해. 너무 이르다 못해 뜬금없어.’

키런의 왕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걸 억제하려면 힘으로 찍어 누르거나 왕에게 부여된 코드를 바꾸어야 했다.

경태는 고민했다. 그러다 한 가지 방책을 떠올렸다.

‘공공의 적을 만든다.’

미연에 준비 중이던 이벤트들. 그것들 중 하나를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대륙을 뒤흔들만한 시련이 내린다면 아무리 키런 왕국이 무모하다 해도 전쟁을 멈출 것이다. 설사 전쟁을 속행한다고 해도 국가적인 피해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경태는 곧장 일을 처리하기 위해 시련과장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솔란의 탑으로 귀르디의 금서 중 일부를 보내세요. 거기에 있는 큐엘이란 마법사 아시죠?”

“아, 리치의 재림 시련 말인가요? 그건 2년 뒤에 터뜨리신다고 안 하셨나요……?”

“그랬죠. 하지만 지금 키런 왕국의 돌발행동을 막으려면 이게 가장 적합해요. 가장 직관적이고요.”

“음, 알겠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키런 측의 몬스터들 개체 값도 추가로 조정해주세요.”

“네, 그건 생태과장과 얘기해보겠습니다.”

경태는 과장을 보내고 한시름 덜은 표정으로 한숨을 뱉었다.

‘이제 남은 건 이번 사태를 벌인 배후를 알아내는 거다.’

경태는 이를 갈며 백신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리고 1시간도 안 되어 경태는 절망하게 된다. 그가 찾던 큐엘이란 마법사는 마법사의 탑을 나간 지 오래였고 행방도 묘연해졌다. 그리고 이번 키런의 전쟁 사태를 벌인 게 다름 아닌 백신이란 것까지 알게 됐을 때…… 그는 부장실로 들어가 비명을 질렀다.

*

“도망쳐라.”

넨피스 후작. 그는 감옥에 갇힌 수 십의 기사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후작과 같은 황금늑대의 기사였고 임무에서 조장을 맡을 정도의 실력자들이었다. 나머지 황금늑대 기사들은 다른 감옥에 투옥되거나 하는 수 없이 바틸카스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후작의 한 마디로 기사들은 술렁였다. 기사들이 왕을 버리고 어디로 달아난단 말인가. 하물며 군신 관계를 중시하는 키런 왕국의 기사로서 왕을 버리고 달아날 수 없었다. 아무리 왕이 이상하고 미쳤다고 한들 그것마저 포용하는 게 기사도라 배웠기 때문이었다.

“단장님. 아무리 그래도 왕을 버리고 떠날 수 없습니다. 저희는 기사들이고 왕을 모시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이것이 왕을 모시는 건가?”

후작은 근엄한 얼굴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본래 왕을 섬긴다는 건 옳고 그름을 떠나 추앙한다는 게 아니다. 맞는 건 맞다고 하고, 틀린 건 틀리다고 간언할 수 있는 게 신하이다. 그런데 지금 왕께서는 뭔가 이상하시다. 평소에 말씀 하시던 건 잊어버린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계시다. 그저 욕심으로 의욕을 낸다고 볼 수 없다.”

기사들은 후작의 말을 듣고 술렁였다.

“그렇다고 달아나는 건 불명예가 아닙니까? 차라리 그릇된 왕의 밑에서 처형당할지언정 도망치는 불명예를 안고 싶지 않습니다. 왕을 잃은 기사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의 주장도 틀린 건 없었다. 본래 한 나라를 섬기는 가신들은 처분 당하거나 좌천된다. 하물며 왕을 충실히 섬겨야 할 기사가 왕을 버리고 달아난다면 어디에서 받아줄까. 설사 받아준다고 해도 처분 당한 거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그렇군.”

후작은 눈을 감았다.

“우리는 황금늑대다.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늑대는 늑대답게 죽어야지. 여기서 뒤지면 그저 개죽음이다.”

“예?”

기사들은 잠시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말이 과격한 걸 떠나 평소 언행과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틸카스가 변한 것처럼 그도 변한 게 아닐까란 생각까지 들게 했다.

“난 너희를 개로 키우지 않았다.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으로 때려죽일 때까지 꼬리를 흔드는 개가 아니라 분별력을 가지고 주인을 섬기는 늑대로 키웠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불명예를 안는 게 두려워 죽음을 택한다니? 그렇게 죽어서 섬기는 자가 잘못된 길을 걷는 걸 뒤엣 지켜보기만 할 건가? 그 길이 아니라고, 잘못 됐다는 걸 말하지 못하고 죽을 텐가?”

“그러면 이 자리에 남아 간언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더더욱 도망칠 수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 개죽음일 뿐이라고.”

“그렇다고 해도 남겠습니다!”

“그럼 황금늑대의 단장으로 명하지. 도망쳐라. 특별한 상황에서는 폐하의 명령보다 단장인 나의 명령이 최우선이다. 알고 있을 테지?”

후작은 베수진을 쳤다. 여기서 단장의 명령을 어긴다면 앞서 후작이 얘기한 걸 인정하는 꼴이었다. 잘못된 명령에 거스른다는 건 왕의 그릇된 일에도 저항한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즉, 앞서 그들이 얘기한 기사도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명령을 듣고 달아나기에는 명예가 실추됐다.

“살아남아라. 헛된 죽음을 명예로 포장해서 기억하는 이는 있을지언정 바뀌는 건 없다. 그러나 불명예로 살아남는다면 언제든 기회는 찾아온다. 명예를 되찾건, 그릇된 주인을 뒤바꾸던 기회는 반드시 찾아온다.”

“어찌하여 도망치라고만 하십니까! 차라리 폐하께서 데리고 있는 기사들을 전부 쳐내라고 명령해주십시오! 차라리 그렇게 싸우다 죽고 싶습니다!”

“지금 그런 짓을 해봐야 반역죄로 처형당할 뿐이다. 자네들이 말하던 불명예 중 최악으로 빠지게 되는 거야. 그리고 힘의 차이를 알고 있지 않던가.”

후작의 말에 기사들은 입을 다물었다.

“도망쳐라. 그리고 이건 전부 나의 독단이다.”

“단장님!”

“그렇게 알고 있어라, 골드로츠.”

감옥 밖. 골드로츠는 후작의 말에 말없이 다가왔다.

기사들은 그를 보며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골드로츠 역시 끊임없이 왕에게 간언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갇히지 않았다. 그 이유까지 알 수는 없지만 묘한 괴리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반드시…… 다시 구하러 오겠습니다.”

“그 얘기만으로도 벌써 든든하군.”

“죄송합니다, 단장님.”

골드로츠는 감옥 문을 열었다. 기사들은 후작과 골드로츠를 번갈아 보며 하나둘씩 감옥 밖으로 걸어나왔다.

“단장님.”

기사 중 한 명이 후작을 불렀다.

“남으시는…… 겁니까……?”

“그래.”

“저희도 남을 수는…… 없는 겁니까……?”

“늑대 무리를 책임지는 건 늑대의 우두머리다. 전부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

“단장님……”

“정 남고 싶다면 마음만 두고 가라. 왕에 대한 충성심, 그릇된 이와 싸우고 싶은 투쟁심, 황금늑대였다는 자긍심, 그것들이면 충분하다.”

“……남고 싶습니다. 하지만 단장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개가 아닌 늑대답게 죽기 위해.”

기사들은 하나 같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격식을 갖추었다. 후작은 눈을 감고 숨을 푹 뱉었다.

“가라, 늑대들이여.”

“예.”

골드로츠는 기사들을 인솔하며 자리를 떠났다. 사전에 니스에게서 고지 받은 정보를 토대로 탈출구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을 구출대에게 인도한 후 골드로츠 역시 달아날 것이다.

키런 왕국에서 벌어질 시련. 그 시작점은 황금늑대 기사단의 도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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