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101화 (101/104)

〈 101화 〉 101 ­ 이름 없는 산 中

* * *

버트는 르메톨로를 꽁꽁 묶어 루크림에게 전달했다. 루크림은 벙찐 얼굴로 있다가 순식간에 멀어져가는 버트를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이쪽 일만 해결하고 라이의 소식을 기다리면 될 거야.’

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멜그라우가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멜그라우는 근육이 터질 듯한 팔뚝을 과시하는 듯 팔짱을 끼며 서있었다. 버트는 다시 한 번 그가 엄청난 육체파라고 실감했다.

“장소를 옮기자고 하셨죠?”

“그래. 가자.”

멜그라우는 먼 곳을 가리켰다. 거긴 협곡에 들어서면서 봤던 산이었다.

그가 몇 번의 도약으로 협곡 위로 뛰어 올랐다. 버트는 그림자로 이동할까 하다가 그가 이동한 방식을 따랐다. 몇 번 움직여보니 어디를 딛고 어떻게 차올려야 할지 금방 감이 잡혔다. 그렇게 산 아래까지 이동하니 그 근방은 제법 넓은 평지였다. 갑갑했던 협곡의 풍경을 벗어나니 눈이 개운해지는 기분이었다.

“바로 시작하지.”

“네? 시작 하다뇨?”

“응? 그야 못 다한 싸움이지.”

멜그라우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원하지도 않는 싸움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이러면 꼭 버트가 원했는데 변덕을 부린 것 같지 않은가!

멜그라우는 버트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지 실실 웃었다.

“그때 영 찝찝했어. 백신들이 개입하고 여럿이서 짓밟아대는 꼬라지가 개운치 않았단 말이야.”

“그래서 지금 승부를 보시겠단 건가요?”

“그래. 비록 그때에 비해서는 비늘도 상하고 힘도 없지만 충분하다. 그때의 너와 내가 싸우든, 지금의 너와 내가 싸우든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테니까.”

멜그라우는 두 주먹을 부딪치며 말했다. 가볍게 맞부딪친 거 같은데 그 충격으로 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왔다.

“그러니 한 판 부탁하지.”

“싫어요.”

“엉?”

“사실 리아주크는 여기에 없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완벽하게 부활한 건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네가 쓰는 힘은……”

“리아주크한테서 잠깐 빌렸을 뿐이에요. 본인은 이 자리에 없어요.”

“어디에 있지?”

“지금은 쉬고 있어요. 아직 몸이 다 모이지 않았거든요.”

“그래, 그런가? 그 몸은 어디 있는데?”

버트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멜그라우를 노려보았다.

“찾는 걸 도와주려는 거야. 정 뭣하면 백신들을 제지해줄 수도 있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요? 아니, 왜 이제 와서 그러시는 건데요?”

“말했잖아. 그 싸움이 개운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그런 것 뿐이야.”

버트는 그 말에 눈에 힘을 주었다. 멜그라우의 심상으로 침투하려는 순간 그가 손을 들었다.

“뭐하는 거야?”

“진심이에요?”

“그게 궁금해서 정신을 투영한 거냐?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무모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왜요?”

“네가 아무리 마신의 대리인이라고 한들 드래곤의 정신 세계와 연결되어 멀쩡할 거 같아? 애초에 가능하다고 해도 쉽게 보여주지 않을 거야.”

“찔리는 게 없으면 보여주셔도 되잖아요.”

“보여주기 싫다면 어쩔 건데.”

“그럼 저도 리아주크의 위치, 다음 육신이 어딨는지 말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방해를 해도 신경 안 쓸 거구요.”

버트는 당돌했다. 그렇다고 못할 말을 한 건 아니었다. 지금 그의 목적은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마신을 처단하는데 도왔던 그가 왜 이제 와서 부활을 도우려 하는 것인가. 차라리 스터그처럼 진실을 깨우치고 속죄하려 한다면 모를까…… 마냥 싸우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멜그라우는 그런 버트의 단호함에 입맛을 다셨다.

“뭐, 어쩔 수 없구만. 부활하면 다들 알게 될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야겠어.”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순순했다. 버트의 목적은 그를 쫓아내는 게 아니었기에 돌아서려는 그의 두터운 손목을 붙잡았다.

“저기.”

“왜?”

“사실, 아빠의 부탁도 있어서 온 거예요.”

“아빠……?”

“스터그가 제 양아빠예요.”

“뭐­”

멜그라우의 표정은 다채롭게 변했다. 처음에는 황당해하더니 그 다음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다가 잠시 후 헛웃음 몇 번. 마지막으로 심드렁한 표정으로 버트를 보았다.

“그래서, 무슨 부탁으로 왔는데?”

“자세한 건 말하시지 않았어요. 그저 당신도 허무해하고 있을 거라 해서……”

“허무? 허무하긴 하지.”

멜그라우는 굵직한 집게 손가락으로 버트의 손목을 집었다.

“어설프게 자란 꼬맹이를 유린하고 이기진 못할망정 대등하게 싸워버렸으니 하무할 수밖에.”

“꼬맹…… 이요?”

“우리에 비하면 나이는 많을 테지. 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건 미성숙한 존재였어. 그러니 꼬맹이지. 스터그는 뭔가 더 깊은 걸 본 거 같지만 알 게 뭐야. 그저 신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나약한 존재에게 무너진 건 변함이 없는 데 말이야.”

멜그라우는 버트의 손을 떼내고 몸을 슬쩍 숙였다. 그것만으로도 버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그래서 어설픈 싸움을 끝맺을 생각이다. 리아주크 그 녀석이 진짜 부활할 줄은 몰랐지만 상당한 희소식이로구만. 이렇게 된 거 상자도 못 열게 막아야겠어.”

“그거면 되나요?”

“그거? 뭐? 싸우는 거?”

“네.”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못했다며?”

“제가 있어요.”

“너…… 흠.”

멜그라우는 심드렁했다.

“난 너의 각오를 몰라. 나를 죽일 각오를 하고 덤빌 수 있겠어?”

“죽여야 하나요?”

“서로 죽일 기세로 싸워야지. 그게 아니면 싸움이 아니야.”

멜그라우는 커다란 주먹을 그러쥐며 말했다.

버트는 그의 고집 아닌 고집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종종 이런 싸움광들이 있었다. 게임으로 치면 PVP에만 미쳐있는 플레이어나 다름없었다. 새삼 자신을 기습했던 플레이어들이 떠올라 표정이 안 좋아졌다.

“그럴 각오가 됐다면 싸워보자고. 난 내 전력을 다할 거다. 그것만 알아두라고.”

그 말에 버트는 고민했다. 상대를 완벽히 측정하지 못했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다. 언뜻 본 수준만으로도 무투파인 루크림을 압살하고도 남았다.

애초에 상대는 드래곤이었다. 엔실라와의 싸움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난전이 예상됐다. 무엇보다 리아주크의 이름을 걸고 싸우는 거나 다름없었기에 고민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은 루하다가 풀어주었다.

[ 그릇의 선택이 곧 마신의 선택입니다. 그건 마신의 추종자인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

‘……고마워.’

버트는 손을 쥐었다 펴며 힘을 점검했다.

“전 괜찮아요.”

“좋아.”

드래곤과 마신의 그릇. 이름 없는 산 아래 둘의 싸움이 성립되었다.

*

젠카 사막.

버트가 대협곡으로 들어설 때 쯤 누리와 황금궁사는 공대장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막의 안정화를 위한 전투를 치르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2왕자의 병사들과 함께 왔다고 해서 분위기가 달라지거나 하지 않았다.

그만큼 사막의 열기와 살기는 최고조였다. 조금만 벗어나면 모래 속에 숨은 정령이 산 사람을 시체로 분쇄하거나 날카로운 바람을 쏘아내는 정령이 산산조각 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대장은 누리와 황금궁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따로 사냥 간다고 하지 않았어?”

공대장의 질문에 황금궁사는 고개만 끄덕였다. 누리는 슬쩍 거리를 두었다. 그들의 숨막히는 대화에 낄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 유명한 공대장이었다. 괜히 눈밖에 나거나 하면 귀찮아졌다. 누리도 손꼽히는 랭커 성직자라고 해도 공대장의 명성을 따라갈 수 없었다.

“다행이네. 너희 길드랑 보스 헌터 두 곳에서 협동사냥 제안이 왔을 때 어쩔까 싶었거든. 알잖아. 한쪽은 사냥이 존나 재미가 없고 다른 한쪽은 리스크가 큰 거.”

공대장은 떠벌떠벌 잘도 떠들었다. 둘이 아는 사이라더니 일방적인 대화임에도 어색함이 없었다.

“하여간 그거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같이 사냥하게 돼서 다행이네. 다른 놈들은 아직도 꽁해있냐?”

끄덕.

“나 원 참. 솔직하게 말해주도 지랄이래. 나 같은 친구 어디서 못 구할 텐데 말이야.”

도리도리.

“넌 아니라고 생각 하냐? 야, 너도 나랑 같은 부류잖아. 게임 NPC에 알랑방구 끼는 거 싫어하고 과몰입 오그라들어서 싫어하잖아.”

끄덕.

“그래서 너도 그렇게 말주변이 없는 거겠지. 어휴, 클베 유저 중에 제대로 하는 건 너랑 나밖에 없다. 그지? 랭커도 죄다 옵베 출신이고. 거기 성직자 님도 그렇고 말이죠?”

“예? 예? 아, 하하.”

누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황금궁사가 과묵해서 불편하다면 공대장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어서 불편했다. 어떻게 이런 상극의 사람이 서로 지인인지 의문이 들 때, 누군가 공대장에게 다가왔다. 척 보기에도 키가 작아 보이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누리는 그녀가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퍼스트 제네레이션 길드의 서브 마스터, 유진희.

공대장이라는 그림자가 있어도 존재감이 사라지지 않는 플레이어. 오죽하면 그녀의 다른 별명을 ‘부대장’이라고 불렀을까. 다만 유진희 본인은 그 별명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무표정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정보 취합 됐어요. 그리고 업무가 많이 밀린 거 같으니 저는 이제 돌아갈게요.”

“그래, 수고했어. 나중에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유진희는 대답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공대장은 혀를 쯧쯧 찼다.

“하여간 귀염성 없다니까.”

“잘 해라.”

“기껏 한다는 얘기가 그거야? 어이구, 참으로 고맙습니다.”

누리는 공대장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판타지아 제 1의 길드에서 나올만한 대화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단 사실을 간과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목적지는 헥실의 무덤이 끝이어서 갑작스러운 계획 변경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나중에 라이 그 녀석한테 술이나 진탕 얻어 마셔야겠네.’

그렇게 젠카 사막은 몇 번의 전투와 휴식을 거쳤다. 이후 라킨 2왕자가 합류했을 때쯤에 버트는 멜그라우와 조우하였고 그와 주먹을 맞대게 되었다.

*

쩌엉­

멜그라우와 버트의 주먹이 격돌했다. 한 번의 부딪침으로 주변에 소닉붐이 일어났다.

멜그라우는 입꼬리를 당기며 웃었고 버트는 심각한 얼굴로 주먹을 보았다.

강하다. 아마 육체파로서는 정점이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멜그라우의 스테이터스는 900대에 육박했다. 이는 드래곤 중에서도 겨룰 자가 없는 수준이었다.

버트는 그보다 약했다. 그런데도 그의 힘에 밀리지 않았다. 팔과 주먹을 감도는 마기 덕분이었다.

꾸구국­

핏줄이 불거지는 힘싸움. 어느 한쪽이 밀리는가 싶다가도 앞으로 밀어냈다. 두 사람은 주먹을 맞대고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엄청난 박력이 터져 나왔다. 근육의 펄떡임만으로 심장이 떨릴 거 같았다.

극강의 힘겨루기! 누구도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터프한 줄다리기였다.

쿠직­

아슬아슬한 균형을 무너뜨린 건 지반이었다. 만트라 대협곡의 일부라고는 하나 경계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땅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음푹 패였다. 멜그라우는 잠깐의 흐트러짐을 놓치지 않았다. 주먹이 잠깐 떨어진 순간 그 거대한 주먹이 버트의 팔 사이로 파고 들었다.

빠르다.

굵직한 것이 날렵하게 움직이기까지 했다.

쐐액­

버트의 얼굴에 바람이 불었다. 주먹이 먼저 닿기도 전에 주먹의 속도와 힘에 밀려난 바람이 먼저 닿았다.

그 순간 버트의 머릿 속에서 떠오른 건 장풍이었다. 주먹이 닿지도 않았는데 밀려난 공기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쩡­

짓눌린 공기층이 터졌다. 멜그라우의 주먹은 버트의 눈앞에 당도했다.

소닉붐……!

그의 주먹은 음속을 뛰어넘었다. 그 증거로 공기가 터지는 소리는 버트의 얼굴에 주먹이 꽂히고 나서야 들렸다. 버트는 그대로 얼굴을 얻어맞고 몸이 뒤로 넘어갔다. 뒤이어 멜그라우의 반대쪽 주먹이 그녀의 배를 타격했다.

쩌억­

이번에도 날렵하고 강력했다. 버트는 그대로 몸이 반이 접혀 바닥을 나뒹굴었다.

“카훕­”

버트는 몇 번 바닥을 구르다 네 발로 엎드렸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격통이 몰려왔다.

풰­

버트는 피가 역류하자마자 뱉어냈다. 속이 뒤집힐 정도로 기분 나쁘고 고통스러웠다. 잠깐이지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이런 아픔이 계속 되면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방이나 버틸 줄 몰랐다.”

멜그라우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다가갔다. 그러자 버트가 땅을 박차고 앞으로 날아 주먹을 뻗어왔다.

멜그라우는 커다란 손으로 그 손을 붙잡으려 했다. 설사 피한다 해도 손목이나 팔목을 낚아챌 심산이었다.

버트의 공격은 정직했다. 붙잡는 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멜그라우는 그러지 않았다. 잡아채려는 순간 손가락이 경직됐다.

지금 잡으면 안 된다.

멜그라우는 손을 살짝 뒤로 뺐다. 그 덕에 타격점이 흐려졌고 버트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버트는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몸을 숙이며 달려들었다.

‘역시.’

멜그라우는 한 발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서 버트의 턱이 도착할 지점에 주먹을 올려쳤다.

쩌억­

타격은 정확했다. 버트의 머리가 위로 튕겨졌고 충격이 뇌를 강타했다.

버트는 어지러움에 속을 게워낼 뻔했다. 그러나 꺾인 고개와는 달리 두 팔은 착실히 제 할 일을 했다. 턱에 맞은 직후 두 팔이 멜그라우의 두꺼운 팔을 끌어 안았다.

꾸득­

“이런.”

아차 싶었던 멜그라우가 팔을 거두려 했다. 그러나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버트가 팔을 안고 힘껏 당겼기 때문이었다.

방금 그가 느낀 위화감. 공격을 막은 순간 지금처럼 그래플링 기술에 당할 거 같았다. 이후 파고 드는 폼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다.

결국 잡혔다.

그렇다고 낙담하지 않았다. 힘이 강한만큼 육체의 내구력도 상당했다. 버트가 마신의 힘을 쓴다고는 하나 그의 피부와 근육을 뚫기는 어려웠다.

버트도 이걸 똑똑히 알고 있었다.

무겁다. 팔을 끌어안은 순간부터 잡아당겨 끌어당긴 지금도 묵직했다. 그러나 지금 버트는 가진 모든 걸 내뿜고 싶었다.

루크림과 접촉한 순간 스며든 기억. 그 안에 담긴 욕망. 전투의 희열!

휘릭­

버트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순식간에 멜그라우의 팔에 들러붙어 그의 팔목을 비틀었다.

“차핫!”

멜그라우는 버트가 들러붙은 팔을 높이 들었다. 땅바닥에 처박은 순간 땅에 작은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꾸득­

버트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을 텐데도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견고해졌다. 멜그라우는 팔이 거대한 돌덩이에 박힌 느낌을 받았다.

“역시 너무 얕봤구나.”

멜그라우는 입가를 비틀더니 팔을 높이 들었다. 다시 한 번 땅에 처박으려는 순간 버트의 몸이 수직으로 뻗었다. 그의 손목을 붙잡고 물구나무를 선 것이다. 이건 그가 팔을 든 순간과 동시에 벌어진 행동이었다.

“엉?”

버트에게 스며든 기억이 최적의 연계를 떠올렸다. 여기서 뒤로 넘어가서 팔을 꺾거나 업어치는 게 보통. 그러나 멜그라우와 같은 괴력과 거구를 지닌 상대에게는 잘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대로 넘어가면서 멜그라우의 머리를 덮쳤다.

몇 초도 되지 않은 사이에 벌어진 기습! 멜그라우의 목에 버트의 두 다리가 휘감겼다. 숨통을 조이는 그 순간 멜그라우의 주먹이 버트의 옆구리에 꽂혔다.

뻑­

“크훕­!!”

잠깐 버트의 힘이 풀렸다. 뼈가 짓눌리고 잠깐 숨이 막힐 정도의 격통……! 그 틈을 노린 멜그라우가 다리를 붙잡아당겼다.

그래도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멜그라우는 몇 번이고 버트의 옆구리를 때렸다.

빠각­ 빡­ 뻑­

같은 곳에 직격하는 묵직한 공격! 숨이 막힐 텐데도 주먹질이 약해질 기미가 안 보였다.

“흐웁!”

그때 버트가 팔을 들었다. 그러더니 그의 정수리에 팔꿈치를 찍었다.

“크륵­”

멜그라우의 시야가 잠시 여러 개로 분열되었다. 옆구리를 향하던 주먹이 스쳐지나갔다.

빡­ 빠각­

버트는 그 틈을 노려 정수리를 두 번 더 가격했다. 그러자 멜그라우는 두 손을 올려 버트의 옆구리를 붙잡았다. 그대로 손가락이 살에 파고 들 기세로 힘을 주며 떼어내려 했다.

뻑­

버트는 정수리를 더 때리려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팔꿈치가 미끄러졌다. 공격이 빗나가버린 순간 멜그라우의 손이 버트를 반쯤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으익­!!”

버트는 역류한 피로 질척해진 이를 꽉 물며 버텼다. 그러나 옆구리와 갈비뼈를 압박해오는 아귀힘을 참아내기란 어려웠다.

“으아아아­!!”

버트는 멜그라우의 머리에 자기 머리를 내리 찍었다. 둘에게 동시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고 멜그라우는 앞으로 고꾸라지고, 버트는 뒤로 넘어갔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을 잃고 무너지는 것도 잠깐이었다.

멜그라우는 한 걸음 내디디며 버텼다. 버트는 두 손바닥으로 땅에 착지한 후 가벼운 도약으로 바로 섰다.

멜그라우가 뒤를 돌아보며 주먹을 뻗어 버트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버트는 그의 팔을 쳐내며 그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빠각­ 뻑­ 퍽­ 퍽­

갑자기 이루어진 순수한 난타전. 분명 체급 차이가 있는 데도 박투가 성립되고 있었다.

버트의 주먹이 꽂히고 멜그라우의 주먹이 작렬했다. 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나고 뼈가 박살나는 촉감이 느껴졌다.

무식하기 그지없는 타격이었다. 그러나 승부를 결정짓는 데는 가장 확실했다.

버트의 코에서 피가 터졌다. 멜그라우의 피부에 피멍이 새겨졌다.

버트의 갈비뼈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멜그라우의 근육이 짓이겨졌다.

둘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땀방울보다 핏방울이 더 많이 튀었다. 눈에 띄는 상처는 없지만 타격으로 인해 피부가 울긋불긋 물들었다.

분명 맞고 있는 건 둘인데 흔들리는 건 땅거죽이었다.

뻑­

두 사람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힘겨루기를 할 때와는 달리 주변의 공기가 터져나갔다.

“후욱…… 훅”

“후하…… 흐하……”

멜그라우는 웃고 있었다.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뱃속이 진창이 되어 괴로울 텐데도 웃고 있었다.

버트는 웃지 않았다. 너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그런데도 싸움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이 무슨 희열인가.

아프다.

아픈데도 계속 하고 싶었다. 몸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피가 뜨거워졌다.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뻐근하며 아팠지만 가슴 속 고양감이 모든 걸 상쇄했다.

진짜 죽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버트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이건 마신의 힘을 믿고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었다.

정말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욕망이 피어올랐다. 완전히 끌어내지 않았던 마신의 힘이 넘실거렸다. 그걸 본 멜그라우가 입가를 뒤틀며 웃었다. 그녀에게서 흘러 넘치는 힘……! 그건 리아주크와 마주하며 느꼈던 거대한 힘과 비슷했다.

“좋아. 좋아. 좋아!!”

멜그라우는 가슴을 쿵 때렸다.

“V6­X­D­3­213 봉인.”

모든 드래곤에게 가해진 백신의 금제. 지금 당장 백신이 찾아온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한 순간만이라도 가진 모든 걸 부딪치고 싶었다. 그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신에 근접한 존재와 제대로 맞붙고 싶었다.

그리고……

죽고 싶었다.

“해제.”

멜그라우의 몸이 점점 불어났다. 붉은 비늘이 돋아나고 머리에 뿔이 솟아났다. 버트가 간섭할 때와 달리 멜그라우는 자신의 본체를 되찾아갔다. 그렇게 10미터, 20미터까지 솟구친 머리 높이는 40미터가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무럭무럭 자라난 그의 덩치는 순식간에 버트를 압살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고개를 뒤로 꺾어야 그의 머리를 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이것이 진짜 드래곤. 만트라 대협곡에 있는 몬스터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와 박력이었다.

「 붙어라! 그리고 날 죽여라!! 」

멜그라우가 소리쳤다. 그의 포효는 협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곧이어 버트는 우습게 깔아버릴 정도로 거대한 앞발이 휘둘러졌다.

쩌억­

앞발은 그대로 버트를 짓눌렀다. 버트는 두 손으로 그의 앞발을 막아내고 심호흡했다.

마신의 힘.

욕망이 끓어오를수록 반응해주었다. 문제는 이 욕망이 전혀 엉뚱하게 발휘되고 있었다.

“후아…… 하아……”

버트의 두 눈이 헤까닥 돌아버린 것처럼 초점을 잃었다. 그녀는 엔실라를 상대했을 때처럼 점점 욕망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게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생각이 심층으로 드러났을 뿐이었다.

버트는 땅속으로 파묻을 기세로 짓누르는 앞발을 보았다. 방금 상태였다면 단숨에 납작해졌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쩌억­

버트의 주먹이 발바닥 한 가운데에 꽂혔다. 그러자 멜그라우의 앞발이 위로 휙 튕겨졌다.

「 크학! 」

버트가 땅을 박차고 수직으로 솟구쳤다. 멜그라우의 거대한 바위 같은 턱에 주먹이 꽂혔다.

빠각­

멜그라우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분명 뇌진탕 따위는 없어야 할 본체이건만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멜그라우의 의식이 잠깐 끊어졌다.

「 카흐흐흐­!! 」

잠깐 흐려졌던 멜그라우의 동공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앞발로 버트를 후려쳤다. 공중에서 낙하 중이던 버트는 꼼짝없이 앞발에 얻어맞고 날아갔다.

쐐애애액­

하늘을 가른 버트의 육신은 이름 없는 산에 충돌했다. 수 십 미터를 날아가고도 힘이 남았는지 버트의 몸이 거의 파묻혔다. 버트는 산에 박히자마자 뛰쳐나와 머리를 털었다.

“하흐흐흐……”

버트도 유쾌하게 웃었다. 그녀의 헤까닥 돌아버린 두 눈에는 엔실라를 향하던 욕망과 비슷한 게 흘러나왔다.

버트는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머리에 온갖 해괴한 망상이 차올랐다.

커다란 손. 저 무지막지한 손에 붙들려 섹스하는 기분은 어떨까?

갑작스럽게 솟구치는 성욕. 온몸이 달궈지고 머리에 열기가 차올랐다. 분명 전투로 인한 고양감이어야 할 터인데 그녀의 정신과 신경에 약간의 오류가 생겨났다.

고통을 억제하기 위한 엔돌핀의 과다 분비. 그로 인해 아픈 데도 웃는 것처럼 버트 역시 타격으로 인한 아픔과 흥분감을 성욕으로 착각했다.

아니 어쩌면 생존 본능과 번식 욕구가 터진 것일지도 몰랐다.

멜그라우는 강했다.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후대를 남기려는 법칙을 일깨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면 암컷으로서 강대한 수컷과 조우하며 본능이 깨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뭐가 됐든 지금 버트는 발정하고 있었다.

“헤헤…… 헤헤헤……”

버트는 산을 박차고 날았다. 앞발에 얻어맞고 날았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검은 빛줄기가 된 버트는 멜그라우의 옆구리에 꽂혔다.

빠르다 느리다의 수준이 아니었다. 멜그라우가 아차 싶은 그 순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빌딩 같은 거체가 옆으로 꺾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멜그라우는 주둥이를 벌리며 고통을 호소했고 버트는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의 옆구리에 올려차기를 갈겼다.

발차기는 정통으로 맞은 게 아니라 옆구리의 끝자락에 맞았다. 체격 차이 때문이었다. 문제는 옆구리 끝에 맞았어도 버트의 발길질에 담긴 거력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멜그라우의 몸이 드릴처럼 빙빙 돌게 되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거대한 드래곤이 허공으로 떠올라 고속으로 회전하는 모습이란……!

멜그라우도 만만치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도 앞발을 휘둘러 버트에게 반격을 가했다. 버트는 앞발에 얻어맞고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더니 다시 멜그라우에게 날아와 그의 팔을 후려찼다.

멜그라우와 버트의 체격 차이 때문인지 싸움이 아니라 탁구를 치는 것처럼 보였다. 자그마한 공을 몇 번이고 튕겨내지만 다시 돌아와 몸을 강타하는 해괴한 탁구!

이름 없는 산에서 벌어지는 드래곤과 마신의 그릇의 전투. 이 모습은 단 세 개체만이 똑똑히 관찰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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