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100 이름 없는 산 上
* * *
보스 몬스터.
지금까지 공략되거나 잡힌 보스 몬스터는 적지 않았다. 분명 보스 몬스터의 위용은 대단했지만 그렇다고 범접하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공략이 불가능하다면 3대 공략불가 지역처럼 진즉 이름이 알려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단독으로 잡기 쉬운 것도 아니었다. 엘리트 몬스터조차 수하로 거느리는 괴물이다. 정말 세세하게 짜여진 공략과 장비가 아니라면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 불문율을 깬 것이 바로 ‘공대장’이었다. 그는 판타지아에서 가장 많은 공략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깨지 못한 도전, 바로 보스 몬스터 단독 사냥에 성공했다. 그것마저도 수하들을 유인하고 일 대 일 구도로 만든 뒤에야 성립된 것이지만 대부분 그 성과에 혀를 내둘렀다. 질시가 심한 이들은 자신도 그게 가능하다고 말하며 나섰지만 아직까지 그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만큼 보스 몬스터는 강했다. 랭커 중 으뜸이라 불리는 공대장이 그 정도로 애를 먹었으니 모두가 섣불리 덤비지 못했다. 그래서 드러커스의 미로 사태 때 셀기디어를 높이 산 것이다. 그 강한 공대장과 싸워 이겼으니 말이다. 라이벨 역시 단독은 아니었지만 레이드 몬스터인 메두사에게 결정타를 먹였으니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최종 사냥터인 만트라 대협곡에서 보스 몬스터와 대치 중인 인물이 있었다.
“앗”
쩌엉
르메톨로는 날개를 퍼덕이며 벼락을 쏘아냈다. 사람 몸뚱이만한 굵직한 벼락 세례. 직격하는 순간 가루가 될 정도로 괴랄한 전력이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피할 여력은 있었다.
탓 탓
버트는 날개에서 빛이 응집되는 순간을 기억했다. 그리고 천방지축으로 뿜어지는 벼락의 경로를 예측하고 최대한 빈틈을 찾아내며 뛰었다. 그래봐야 안전한 곳은 손바닥 몇 개 정도가 끝이었다.
버트가 그 좁은 곳을 유연하게 빠져나오는 모습은 르메톨로의 두 눈에 새겨졌다. 녀석은 날개를 두어 번 퍼덕이며 투레질했다.
푸르릉
당황스러웠다. 벼락 세례를 얻어맞고 버티는 건 그와 같은 격의 존재 뿐. 버트와 같이 자그마한 것들은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푸히힝!
르메톨로가 앞발을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그러자 주변 대기에 정전기가 일었다. 조금씩 안개가 끼면서 협곡 내부가 점점 뿌옇게 변했다.
그렇게 시야가 차단된 버트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소리. 퍼더덕거리는 소리. 분명 녀석의 날갯짓이었다.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의 들리지 않을 조용했다.
티딕
버트는 피부가 따끔해서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피했다.
쩌엉!
푸른 전기가 버트가 있던 곳을 지나갔다. 그러더니 안개 전체로 전기 충격이 일어났다.
직격은 피했다. 그러나 그 후에 일어난 전기 충격은 피하지 못했다.
빠자작
단 몇 초 만에 전신으로 번져나가는 충격. 이가 뜨겁다고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충격이었다. 푸른 전기를 직격했다면 이것보다 더 괴로웠을 게 분명했다.
“후읍!”
버트는 다급하게 체내에 마기를 둘러 전기를 가라앉혔다. 전기와 상쇄된 마기는 남은 건 피부로 스며들었다. 잔여 마기로 혹시 모를 추가 공격에 대비한 것인데 이건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쩌억
르메톨로가 안개를 가르고 날아왔다. 녀석의 육중한 체중과 단단한 앞발굽이 버트의 팔뚝을 강타했다.
“끄읏……!”
버트는 그대로 앞발에 맞고 나뒹굴었다. 르메톨로는 날개를 두어번 퍼덕이며 뒤로 날아가더니 다시 안개 안으로 숨었다.
버트는 숨을 고르며 팔을 내려다보았다. 퉁퉁 부어올랐다. 뼈에 금이 간 것 같지만 그래도 버틸만했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앞을 보니 다시 푸른 전기가 일었다.
빠직
버트가 몸을 바닥에 밀착시켰다. 그렇게 하니 푸른 전기의 영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한순간 안개를 타고 번지는 푸른 전류가 참으로 예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 괜찮으십니까? ]
루하다가 물었다. 버트는 발굽에 맞은 팔을 벌벌 떨며 끄덕였다.
[ 언제든 말씀하시면 처분하겠습니다. ]
‘괜찮아. 아직 괜찮아.’
버트는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를 들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르메톨로가 지나가려는 순간 버트가 가볍게 위로 뛰어올랐다.
푸륵?
르메톨로는 뒷다리에 붙은 버트를 보며 날갯짓을 했다. 그 안에 담겨있는 번개가 버트의 등을 때렸다.
“아야……!”
버트는 온 힘을 다해 다리를 끌어안으며 한 손을 빼냈다. 손끝에만 집중된 마기는 그대로 녀석의 허벅다리를 찍어버렸다.
푸히잉!!
르메톨로의 번개는 충분히 강했다. 그만큼 육체도 강인했다. 털가죽은 웬만한 마법을 튕겨내고 검도 잘 들지 않았다. 그런데다 하늘까지 날아다녔으니 경쟁 상대는 상당히 적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무언가가 살을 뚫고 들어오는 격통에 익숙하지 않았다.
르메톨로가 날뛰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펄떡이던 녀석은 갑자기 전신이 백색으로 물들었다.
츠츠츳
버트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손을 놓았다. 상공 수 십 미터 위였지만 착지는 문제없었다.
탓
그렇게 바닥에 내려앉고 위를 보니 새하얀 빛이 뿜어졌다.
파지직 파직
르메톨로에게서 뿜어진 빛은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빛이 사그라졌을 때 녀석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공할 위력의 번개! 주변 모든 것을 분쇄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세간에서는 ‘백광’이라는 기술로 불리며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발악 패턴’으로 유명했다. 체력이 일정량 깎일 때마다 벌이는 기술로 피할 시간은 충분하지만 좁은 곳에서 벌인다면 누구라도 즉사할만한 파괴력이었다.
다각
이 이후에는 방전 상태가 되어 박투 모드에 들어갔다. 버트는 눈을 비비적대며 다가오는 르메톨로의 거체를 노려보았다. 녀석은 당장이라도 들이받을 기세였다. 그리고 그 기세 그대로 달려들었다.
투두두두
르메톨로의 돌진은 빨랐다. 몇 번 발을 구르나 싶더니 순식간에 버트의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버트는 심호흡을 하고 두 팔을 벌렸다. 그러더니 르메톨로와 몸을 부딪치며 힘싸움에 들어갔다.
차자작
르메톨로의 몸이 버트와 부딪쳤다. 버트는 더 버티지 못하고 뒤로 2,3미터는 밀려났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푸릉?
르메톨로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버트는 온몸에 힘을 주며 버티더니 반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트드득
푸히잉!!
르메톨로의 몸이 살짝 뒤로 밀렸다. 녀석은 그걸 느끼자마자 격하게 투레질을 했다. 버트가 밀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역으로 밀리고 있었다.
꾸국
르메톨로의 뒷발굽과 버트의 발이 협곡에 발자국을 새겼다. 만트라 대협곡의 지형은 몬스터들이 강한만큼 지형 역시 단단했다. 작정하고 곡괭이로 내리쳐도 잘 깨지지도 않아서 도구의 날만 상했다. 그런 땅바닥을 순수하게 힘으로 뚫어버리고 있었다.
말과 사람의 씨름. 게임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보기 힘든 드문 광경이었다.
“후웁 훕”
버트는 숨을 고르며 허벅지와 팔에 힘을 주었다. 자제하는 느낌 없이 조금씩 힘을 내니 르메톨로가 앞으로 밀려나갔다. 녀석이 분노에 차서 투레질을 해댔지만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측정에 불과했다. 마신의 힘을 능숙하게 쓸 수 있는 지금 르메톨로 정도는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적당히 약한 개체’가 필요해서였다.
앞으로 눈앞의 보스 몬스터 말고도 진짜 드래곤만큼 강한 상대도 나타날 것이다. 좋든 싫든 지금 느끼는 감각보다 격렬한 걸 느낄 수도 있었다. 라이가 앞으로 하나 남았다고 말했으니 그 하나에 필사적으로 가드가 세워질 게 분명했다.
근육이 꿈틀거렸다. 숨이 가빠오고 몸이 땀으로 젖었다. 머리에 열이 집중되고 긴장으로 목이 땡겼다.
이 감각. 마기를 최소화하면서 느낄 수 있는 한계. 그러나 가장 또렷하게 느껴지는 건 녀석을 끌어 안고 느껴지는 박동이었다.
“끄읍……!!”
버트는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돌덩이 같은 르메톨로의 근육에 손가락이 파고 들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녀석의 거체에 몸이 깔려버릴 수도 있었다.
꾸드득
버트는 이 지루한 힘싸움을 끝내기로 했다. 녀석을 밀어낼 힘을 두 팔에 집중하고 그대로 옆으로 틀어버렸다.
쾅!
앞으로만 나아가던 르메톨로는 버트의 경로에서 벗어나 벽에 부딪쳤다. 살벌한 소리가 터졌지만 녀석은 터프하게 고개를 돌리며 투레질 했다.
파지직
그 사이 힘을 회복한 건지 몸 주변에 전기가 튀었다. 르메톨로는 콧김을 뿌리며 버트를 향해 앞발굽을 내리 찍었다.
전격이 더해진 공격. 직격하면 당연히 위험했고 막아도 전격을 각오해야 했다.
버트는 차분히 흐름에 몸을 맡겼다. 판타지아에 있는 보정 시스템. 그건 육체와 세계에 있는 규칙을 최대한 부드럽게 섞어주었다. 다만 버트는 이미 동기화가 되어 있는 데다 점점 시스템에서 벗어났기에 이걸 다르게 해야 했다.
아펠릭 백작. 그와의 접촉으로 얻어낸 기억과 경험을 떠올렸다.
탓
발굽이 닿기 직전 버트의 손등이 녀석의 발목을 쳐냈다.
짧고 강한 끊어 치기. 강력한 육체 능력에 기술이 더해지니 르메톨로의 공격이 빗나갈 수밖에 없었다.
쾅!
르메톨로는 그대로 바닥을 찍었다. 버트는 그 사이 자세를 낮추며 녀석의 품 안으로 파고 들었다. 버트가 잠깐 살펴본 바로는 녀석의 날개 쪽만 주의하면 번개 공격을 맞을 일이 없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다리에 들러붙었을 때 그 부분에 집중해서 공격했어야 했다.
이 판단은 나쁘지 않았다. 르메톨로는 버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려 했다. 평소대로라면 발굽으로 공격한 뒤 날갯짓으로 번개를 뿌리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런데 지금 녀석의 공세가 무너졌다. 버트가 벌인 변수 때문이었다.
그렇게 날아오르려는 순간 르메톨로의 뒷다리가 붙잡혔다. 버트가 전력으로 끌어안은 것이다. 르메톨로의 육중한 몸을 띄우려면 가볍게 해야 했다. 당연히 마법적인 간섭이 있어야 했다.
현 르메톨로의 체중은 평소의 15분의1 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서 발굽으로 공기를 찍고 날개 밑으로 기류를 만들며 여러 마법을 뒤섞음으로서 비행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첫 단계에 발목이 잡혔다.
그리고 첫 단계가 문제가 되었다.
후웅
넘어간다!
평소보다 가벼워진 르메톨로는 버트의 힘에 저항할 수 없었다. 거대한 말의 몸통이 점점 뒤로 넘어갔다.
상상치도 못했고 겪어본 적도 없는 상황! 르메톨로는 당황해서 체중을 원래대로 돌려버렸다. 이건 명백한 실수였다. 체중이 가벼워진 탓에 몸이 들린 게 맞았지만 넘어가기 직전에 해버린 게 문제였다.
본래 체중이 더해진 엎어치기. 그건 가벼워졌을 때보다 가공할 위력의 파괴력을 만들어냈다.
꽝!!
르메톨로는 머리부터 거꾸로 낙하했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바닥에 금이 쩍쩍 갔다. 르메틀로는 잠시 뇌진탕을 받으며 시야가 흔들렸다. 몸에 두르고 있던 전기도 잠시 사라졌다.
“후우……!”
버트는 숨을 들이키며 펄쩍 뛰어올랐다. 르메톨로도 버둥거리며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몇 번 비틀거리는 걸 보면 충격이 상당한 모양이었다.
버트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자세를 잡고 녀석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쩌억
푸히힝!!
르메톨로는 괴로움에 몸부림 쳤다. 버트는 주먹 한 방에 그치지 않고 옆구리에 서너 번 더 주먹을 꽂아넣었다.
쩍 쩌억 쩍
그녀의 연격은 확실히 데미지를 주었다. 머리가 어질거려 통증은 반감되었어도 근육이 짓눌리고 내부까지 전해지는 충격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르메톨로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러면서 옆걸음으로 피하는 동작을 취했다.
버트는 자세를 낮추며 다시 따라붙었다. 그 순간 녀석의 뒷다리가 버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녀석은 게걸음을 치면서 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반격까지 노렸다. 하지만 머리에 가해진 충격이 생각보다 컸고 그 덕분에 거리감과 힘 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버트는 뻗어온 뒷다리를 지나 녀석의 사타구니를 가격했다.
빡!
푸히힉!!
이어서 다시 옆구리에 주먹이 꽂히자 르메톨로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푸르릉!!
르메톨로는 비척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반격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버트는 다시 거리를 좁혔다.
이번에는 주먹질이 아니었다. 흡사 곡사포가 포격을 하듯 상체를 낮추고 한쪽 발을 대각선으로 쭉 뻗어올렸다.
빠각
충분한 탄력과 각력이 더해진 발차기. 그건 르메톨로의 속을 뒤흔들 뿐만 아니라 뼈에 손상을 주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남은 힘은 녀석의 몸을 붕 띄웠다.
르메톨로가 침을 튀겨가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녀석은 아직까지 비행할 여유도 없이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몇 미터 날아가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쓰러졌다.
푸르륵
르메톨로는 콧김을 뿜으며 앞발을 디뎠다. 녀석은 머리가 회복된 건지 버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버트는 쭉 뻗은 다리를 거두며 앞머리를 쭉 쓸어 넘겼다.
“됐어. 이 정도면.”
버트는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르메톨로는 커다란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한순간 녀석의 눈에 푸른 안광이 감돌았다.
필살기.
극한까지 몰아붙였을 때 몇 번 쓰지 않는 기술!
육신에 전기 자극을 주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가속한다. 그러면서 르메톨로 자신이 번개가 되어 주변 일대를 날뛰며 초토화시킨다.
그 이름도 {청기린 난동}이라 명명된 고유한 스킬이었다. 지금까지 이걸 목격한 건 베톰 왕국과 몇몇 플레이어가 끝이었다. 그 유명한 보스 헌터 길드에서조차 이 스킬을 목격하지 못했다. 설사 했다고 해도 기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버트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마기를 몸에 둘렀다. 아픔과 육체에 익숙해진 지금 더 이상 괴롭힐 필요 없었다.
한 방에 끝낸다.
푸르릉 푸흐흥
주변 대기가 떨렸다. 푸른 번개는 녀석의 몸 곳곳에서 솟구쳤다.
버트 역시 마기를 피워 올리며 대항했다.
마기와 번개가 서로 충돌했다. 그저 기세가 부딪친 것만으로도 땅이 떨리는 듯 했다.
그리고 둘의 기운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폭발했다.
*
총 두 곳에서 이 폭발을 느꼈다. 하나는 아펠릭 백작 루크림의 진영이었다.
루크림은 찌릿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당혹스러운 얼굴로 동굴 밖을 보았다.
“설마……?”
그는 버트가 강철비늘의 칼가르를 잡으러 간다는 말을 듣고 보내주었다. 어차피 죽어도 되살아나는 존재이니 한 번 쯤 만나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해서 그랬다. 그런데 난데없이 뇌기가 터져나왔다. 심지어 거긴 버트가 간 방향이었다.
분명 칼가르와 르메틀로의 영역은 비슷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직접적인 충돌을 벌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왜냐하면 보스 몬스터끼리 눈치를 보기 때문이었다.
분명 녀석들은 강했다. 그건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싸워 이길 게 아니라면 어설프게 싸웠다가 다른 보스 몬스터에게 집어삼켜질 수 있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 보통 사소한 충돌은 넘어갔다. 그게 아니면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는 것처럼 세력을 불려야 했다.
칼가르와 르메틀로는 그 어떤 징조도 없었다.
‘어쩌면…….’
루크림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 중 가장 말이 안 되는 가정. 버트가 칼가르가 아닌 르메톨로와 마주쳤고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위기까지 몰아붙여 고유 기술을 발휘하게 했다.
그는 속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았다. 여러 변수를 생각해보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수한 승리를 얻을 거라고 믿지도 않았다.
르메톨로에게는 번개를 쏘아대는 유니콘 무리가 함께했다. 어찌 녀석들을 쓰러뜨렸다고 해도 상당히 지쳤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무리가 소란을 듣고 올 게 뻔했다.
“이봐.”
그의 부름에 클람 남작이 달려왔다.
“예, 백작 각하.”
“가서 정찰 부대 보내서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어이, 루고! 병사 몇 명 데리고 8구역 인근까지 순찰 다녀와라!”
“예!!”
그렇게 명령을 내린 남작은 루크림을 보며 물었다.
“혹여 그 이모탈이 무슨 사고라도 친 것입니까?”
남작은 루크림처럼 폭발하는 기운을 느끼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위험을 알아차렸다. 루크림은 턱을 만지작대며 피식 웃었다.
“혹시나 싶어서 말이지.”
“……혹시나요?”
“만일 보스 개체가 쓰러진 게 확인되면 내 명령이 없어도 그 이모탈을 즉각 확보해라. 명분은 치료와 안정이다.”
“……예, 알겠습니다.”
남작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나타나는 강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심지어 상대는 엘리트 몬스터를 가볍게 쫓아내고 루크림마저 쓰러뜨린 실력자였다. 아무리 허황된 상황이라 해도 성공할 수도 있었다.
남작은 백작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물러났다. 그리고 루크림에게 전달받은 명령을 하달했다.
*
이름 없는 산.
만트라 대협곡 위쪽에 솟아있는 이 높디 높은 산은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강력한 몬스터가 살지도 않았고 자원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감시탑을 세우기에는 너무 험준했다. 애초에 무엇 때문인지 이 근방에는 어떤 몬스터도 살지 않았고 당장 만트라 대협곡이라는 골칫덩이가 있었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된 이름이 안 붙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아주 얄팍한 미신. 그건 이 산에 이름을 붙인 학자들이 전부 의문사를 하거나 은퇴를 했다는 미신이었다.
이 산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저주가 내린다! 그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세월이 쌓은 실례가 많았다. 특히 에글러 공작의 스승이었던 록스톨 마법사의 사례가 너무 강렬했다. 그는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서 이름을 지었지만 거짓말처럼 악재가 겹쳤다. 그 중 최악은 지병이 터져 은퇴를 하는 일이었다.
그 이후로 이 미신은 확신이 되었고 누구도 도전하지 않았다.
그런 산에 빵빵한 근육을 내놓고 서있는 괴한이 있었다.
멜그라우 슬라취 라브테리온.
그는 적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산 중턱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협곡 안쪽의 굴에서 늘어져라 낮잠을 잤을 테지만 요즘 들어 그러지 않았다. 다름 아닌 얼마 전에 찾아왔던 금색 드래곤 샤누흐 때문이었다.
“마신이 부활했다.”
멜그라우는 그가 난데없이 찾아와 던진 말을 곱씹었다. 그러더니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지랄하네, 진짜.”
마신은 죽었다. 백신도 감감무소식이고 별다른 조짐도 없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찾아와서 그의 평온을 흔들어놓았다. 잠을 잘 생각마저 싹 사라졌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정말 가슴 한 켠에 남은 미련이 다시 깨어났다.
멜그라우는 머리를 계속 긁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덩치에 맞지 않는 기운 빠지는 행동이었다.
“마신은 죽었어.”
멜그라우는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인에게 하는 말인지, 그게 아니면 이 자리에 없는 샤누흐에게 다시 강조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마디를 내뱉고 땅을 노려보았다.
그때 힘이 느껴졌다. 비늘이 찌르르 울리는 소름끼치는 기운.
마기다. 이런 건 흔했다. 하지만 뭔가 좀 더 근원적인 자극을 불러일으켰다.
“엉?”
멜그라우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협곡을 노려보았다.
푸른빛이 번쩍이는 지역. 그가 사는 굴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낯설지만 어디선가 느껴본 기운이 감지되었다.
마신이다. 조금 약하긴 했지만 누군가 흉내낼 수 있는 종류의 부류가 아니었다.
“말도 안 돼.”
그가 당황한 건 고작 몇 초였다. 멜그라우는 직접 확인하기 위해 산을 달려갔다. 그리고 협곡에 도달하기 직전 강하게 바닥을 차고 뛰어올랐다.
*
버트와 르메톨로의 대치. 승리는 당연히 버트였다. 문제는 르메톨로의 돌발 행동이었다.
푸르릉?
르메톨로는 버트가 발산하는 마신의 기운에 자기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로 뺐다. 본래 {청기린 난동}은 적을 향해 똑바로 달려가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지형지물에 부딪치며 도약하고 가속, 다시 부딪치고 가속하는 걸 반복했다. 그래서 부딪치는 횟수가 10번을 넘어가는 순간 빛줄기 밖에 보이지 않는 게 정석이었다.
그러나 르메톨로는 첫 번째 돌진을 앞으로 쓰지 않았다.
곧장 뒤로 돌아 달려나갔다.
녀석이 조우한 마신의 기운은 너무 거대하고 음습했다. 한순간 달려드는 순간 거대한 늪지대에 빠져 죽을 거 같았다.
본능이 불러일으킨 도주. 드래곤 종과 마주해도 맞서 싸우던 르메톨로가 엉덩이를 보이며 달아났다.
“어?”
버트도 이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놓치지도 않았다.
팟
버트는 녀석이 바닥을 박차고 나아가는 걸 보며 뒤를 따랐다. 청색의 빛이 번쩍이고 그 뒤를 검은빛이 따라갔다. 청색의 빛줄기가 다섯 개가 만들어지며 도주로가 남았지만 검은 빛줄기는 단 하나 뿐이었다.
빠각!
몇 초 만에 수 킬로 미터를 이동한 추격전. 10초도 안 되어서 끝났다. 버트가 르메톨로의 위를 점하고 그대로 내리찍었다. 육체 능력에 마기를 더한 내려찍기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공격력을 보였다.
르메톨로는 그 한 방에 땅에 쳐박히고 실신해버렸다.
“후우.”
버트는 르메톨로의 위에 서서 숨을 골랐다. 본래 목적을 달성했으니 이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 버트의 눈앞에 드래곤 한 마리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몸 곳곳에 돌덩이 같은 돌기가 솟아있는 특이한 형태. 머리 높이만 해도 10미터는 족히 넘는 거대한 덩치.
바위갑옷의 칼라곤. 드래곤 개체 중에서도 보스로 분류된 존재였다. 녀석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버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륵
녀석은 마신의 기운을 접하고도 움츠러 들지 않았다. 버트 역시 녀석이 달아나지 않았으니 빨리 처리하려 했다.
그때 칼라곤이 꼬리를 바짝 세우며 주춤거렸다. 그러더니 잽싸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대신 다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폭발적인 근육. 여지껏 보아온 인간 개체 중 가장 덩치가 컸고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는 남자였다. 그야말로 피지컬의 끝판왕처럼 느껴지는 붉은 머리의 남성은 이를 씩 보였다.
“리아주크. 부활했다더니 정말이었나?”
그의 말에 버트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버트 본인은 마신의 힘을 쓰고 있긴 했지만 아직 리아주크가 완전히 부활한 게 아니었다.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그러나 버트는 그 말을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리아주크는 부활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이 말을 반박하는 건 지금 살아있는 리아를 부정하는 기분이었다.
혹시 싸우게 된다 하더라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상대는 다른 목적으로 찾아온 듯 했다. 멜그라우는 공격적인 태도가 아닌 왠지 모르게 반가워하는 느낌으로 말을 던졌다.
“나를 기억하지 못 하나? 너를 꿰뚫었던 스터그와 더불어 함께 싸웠던 멜그라우다.”
“멜그라우.”
버트는 스터그란 이름과 함께 그의 부탁을 떠올렸다.
허무함에 먹혔다던 드래곤. 워낙 존재감이 독특해서 드래곤임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워낙 드래곤의 마법이 정교해서 그런 건지 의식하지 않는다면 알아내기 어려웠다.
“당신이 멜그라우로군요.”
“기억났다니 다행이군. 우선 장소를 옮기지. 여긴 걸리적거리는 놈들이 많아서 말이야.”
버트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나자빠져있는 르메톨로를 곁눈질 했다.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치워야지. 버트는 양해를 구하고 르메톨로를 7구역으로 옮기기로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