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99 만트라 대협곡 下
* * *
마스터.
그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노리는 2가지의 목표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귀족. 그건 안정적인 수입과 부의 상징이었다. 샬론 백작위에 있는 골드로츠가 그 대표격이었다.
마스터는 명예의 경지였다. 그 위치에 도달하기만 해도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그 대표가 이모탈 중 최초로 마스터의 이름을 딴 어쌔신 마스터 에니스트였다. ‘그림자를 쫓는 별’이 대변혁을 일으킨 건 그녀가 있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난다 긴다 하는 3대 정보 조직이 단 한 명 때문에 판도를 바꾸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녀의 값어치는 증명되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완성된 세트 아이템이 주는 강력한 효과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모탈이 아닌 마스터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그것 역시 세트 아이템과 비슷했다. 특정 지역에서의 업적을 수집해서 하나로 모은다면 좋든 싫든 마스터에 도달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베톰 왕국이 품은 마스터들 중 하나인 나이트 마스터 가르지아였다. 그는 모든 나라에서 이름난 기사 12명과 대련을 나누었고 전부 승리했다. 최종적으로 젠카 사막에 있는 강한 기사의 영혼과 맞붙어서 나이트 마스터에 올랐다.
그 다음 아펠릭 백작 루크림. 그는 1000일 동안의 수련으로 컴뱃 마스터에 올랐다. 몇 톤에 이르는 돌을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몇 번이고 굴리거나 폭포 아래에서 잠들지 않고 몇날 며칠을 버티기도 했다. 하나 같이 초인에 이르러야 가능한 수련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수 백 일 동안 벌였고 마지막 날에는 단단한 용비늘을 맨손으로 격파함으로서 마스터를 증명해냈다. 심지어 마스터가 되고서도 수련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마스터 자격에서 박탈당할 일은 없었다.
쩌엉
루크림의 권. 그의 주먹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냥 가볍게 내질렀지만 그걸 막으려는 버트의 손바닥에 상당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그래서 버트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강해.’
버트는 저릿거리는 손을 털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상대해온 인간체 중 손에 꼽을 정도로 강했다. 그건 셀기디어나 엔실라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였다.
탓
그러나 상대는 버트였다. 지금 단일 개체 중 그녀를 꺾을 존재는 없었다. 설사 신을 죽였던 스터그라 해도 그녀를 어쩔 수 없었다. 루크림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버트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오호?”
루크림도 바보는 아니었다. 다른 병사들은 루크림의 갑작스럽지만 가벼운 일격에 놀라고 있었다. 버트가 뒤로 밀려나는 걸 보며 경악했지만 루크림은 아니었다.
막았다. 그 역시 2왕자 라킨이 보았던 걸 똑같이 보았다.
버트는 정확히 루크림의 타격점을 흐릴 수 있었다. 이미 그가 주먹을 내지른 시점에서 손을 올려 방어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 정도 동체시력과 반응속도를 가진 강자가 피하지 못한다? 그것도 어쭙잖게 방어를 하고 밀려난다?
한 번의 공격. 루크림은 호기심이 무럭무럭 솟았다.
거물이다.
그는 라킨이 보는 눈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본래 라킨과 그의 병사들이 왔어야 할 자리에 버트가 온 것일 테지.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가볍게 할 상대가 아니었군 그래.”
루크림은 손을 털며 웃었다. 버트는 머쓱한 미소를 보였다.
루크림은 고양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녀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피부를 저릿하게 만드는 압력이 대단했다. 언젠가 느껴 보았던 블랙스타의 교도와 마주하며 느꼈던 강렬함과 비슷했다. 아니, 지금이 좀 더 끈적하고 소름 끼쳤다.
이만한 살기라니. 협곡에서 만났던 몬스터 중 보스 몬스터조차 그에게 위압감을 주지 못했다. 그런 그가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펠릭 백작님?”
병사들은 루크림이 긴장하는 걸 깨닫지 못했다. 드래곤을 포함하여 웬만한 몬스터를 맨주먹으로 두들겨 패는 걸 보았다. 그런 그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긴장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루크림과 버트가 합을 주고 받기 시작할 때 그런 생각은 달라졌다.
“어, 어?”
“어?”
루크림이 거리를 좁히더니 가볍게 주먹을 뻗었다. 버트는 놀랐지만 이번에는 차분히 몸을 틀어 피했다.
그러자 루크림이 뻗은 주먹을 거두면서 팔꿈치를 쭉 뻗어왔다. 버트는 명치를 노리는 팔꿈치를 두 손으로 막아냈다.
2번의 공격이 막힌 루크림은 팔꿈치를 아래로 내리며 어깨를 디밀며 돌진했다. 버트는 그냥 몸으로 받아내려 했지만 첫 공격을 떠올리고 반 발짝 물러났다. 타격점을 흐리며 피할 생각이었다.
루크림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마저 연계로 이어나갔다. 한순간 상체가 둥글게 말리나 싶더니 허리와 하반신이 빠르게 뒤를 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버트의 머리 위로 루크림의 발뒤꿈치가 내리 찍혔다.
“흣!”
버트가 고개를 뒤로 뻗었다. 앞의 연계 공격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발의 궤도에 있던 머리칼이 일부 끊어지고 갑주가 찢겨나갔다.
예상치 못한 공격이다. 지금까지 버트는 이런 식의 연속 공격을 당해본 적이 없었다. 여러 번 공격을 이루기 전에 끝나거나 한다고 해도 지금처럼 몸을 빠르고 희한하게 쓴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반응 속도로 피한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머리에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버트는 루크림이 발차기를 하며 물구나무를 한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그걸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쐐액
버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앞발차기를 날렸다. 루크림은 그 자세로 공격할 줄 몰랐다.
그리고 그게 그렇게 강할 줄도 몰랐다.
“훕!”
루크림은 팔을 굽힐 여유도 없이 손가락 힘만으로 물구나무를 선 채 뒤로 튕겨졌다.
후웅
버트의 발이 지나간 궤적에 바람이 일었다.
“방금 소리…… 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그 소리는 병사들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버트가 작정하고 휘두른 발길질이 내는 소리…… 거기에서 묵직한 바람 소리가 났다.
루크림은 곡예를 넘으며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다시 땅을 딛고 섰을 때 루크림의 입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버트는 자세를 바로 잡고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달려가서 휘두른다는 생각을 하며 발에 힘을 주었다.
쩌억
발돋움한 자리가 음푹 패였다. 버트가 사라졌다 생각한 순간 루크림의 눈앞에 나타나 주먹을 뻗고 있었다.
루크림은 배를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주먹을 보고 있지 않았다.
버트의 눈. 그녀의 눈은 타격점을 향하고 있었다.
‘배가 아니다.’
루크림이 두 손을 움직였다. 주먹이 노리는 건 가슴 윗부분! 팔이 접히는 정도와 손목이 틀어지는 것, 마지막으로 시선으로 공격을 예측할 수 있었다. 지금 버트는 어퍼컷으로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빗나가면 턱을 노리려는 게 뻔히 보였다. 괜히 컴뱃 마스터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루크림이 예상치 못한 단 한 가지.
‘어?’
주먹이 다가오는 찰나의 순간 그건 점점 거대해졌다. 원래 루크림의 계획은 버트의 주먹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버트의 조잡한 계획이 담긴 주먹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루크림은 다급한 표정으로 두 팔에 버트의 손목을 끼웠다. 그리고 상체를 옆으로 젖히며 주먹의 경로를 바꿨다.
후웅
버트의 주먹이 루크림의 턱을 스쳤다. 그 순간 아주 사소한 충격이 타고 올라가 루크림의 뇌를 흔들었다.
“억”
루크림은 버트의 주먹을 비껴나가게 하는 데 그쳤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꺼지려는 의식. 뇌진탕으로 실신하기 직전, 루크림은 주먹을 뻗었다.
탁
버트의 주먹은 빗나갔다. 루크림의 반격은 버트의 반댓손에 가볍게 막혔다. 그것이 공수 교대의 끝이었다.
털석
루크림은 쓰러졌고 버트는 얼빠진 얼굴로 병사들을 보았다.
“배, 백작님!”
“세상에!!”
“아, 음…… 죄송해요……?”
버트는 멋쩍은 얼굴로 병사들을 보았다. 병사들은 눈치를 보다 백작을 부축했다. 먼저 싸움을 건 백작이 먼저 쓰러질 줄은 몰랐다. 그것도 컴뱃 마스터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버트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철퍽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몬스터다!”
“슬라임 개체 확인! 수비 태세로 전환! 백작님을 우선적으로 보호해라!”
언젠가 윙던 숲에서 보았던 유체와는 달랐다. 고개를 들어야 윗부분을 확인할 수 있는 거대한 민달팽이였다. 녀석은 산성 액체를 뚝뚝 흘리면서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버트를 보고 있었다.
“저희가 처리 하겠습니다.”
“으음……”
버트는 머쓱한 얼굴로 검을 뽑았다.
“백작님이 일어나면 할 얘기도 있으니까, 제가 처리할게요.”
그 모습에 병사들이 긴장된 얼굴로 보았다. 그들도 만트라 대협곡에서도 거의 전방에서 싸우는 베테랑들이었다. 웬만한 상황에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검을 들고 있는 여인은 아펠릭 백작과의 박투에서 이겨낸 강자였다.
꿀꺽
누군가 침을 삼켰다. 버트가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싸울지 기대하는 눈치였다.
버트는 검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러더니 슬라임에게 다가갔다.
단칼에 벨까?
그것도 아니면 단숨에 꿰뚫을까?
모두의 시선이 쏠려있는 그때 버트가 검을 살짝 들었다.
톡 톡
“여기 있으면 안 돼. 저리 가.”
“엉?”
“허?”
“으엉?”
병사들 모두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것도 그럴 게 눈앞의 슬라임은 보통 몬스터가 아니었다. 단순히 크기만 봐도 엘리트 몬스터에 견줄 수 있었다.
그런데 검으로 베는 것도 아니고 툭툭 건드리며 훈육?
더 황당한 건 슬라임의 반응이었다. 녀석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리더니 벽면을 타고 협곡을 타고 올라갔다. 녀석이 위로 올라가서 모습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병사들은 꼼짝 못하고 바라보았다.
“주변에 다른 몬스터는 없을 거예요. 지금 옮겨두시는 게 좋아요.”
“아, 알겠습니다. 정찰조 인원 반으로 줄이고 복귀해서 휴식하라고 해!”
“네!”
그들은 눈치가 빨랐다. 버트가 벌인 기이한 현상에 의문을 표하지 않고 기회를 붙잡았다.
*
“끄응……”
루크림은 생각보다 일찍 깨어났다. 그는 미리 파둔 굴 중 한 곳에 눕혀졌다.
“물과 식사를 두었습니다.”
“그 여자는?”
“슬라임을 쫓아내고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슬라임을? 이 근방에서 나오는 녀석들이면 전부 위험할 텐데……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4분 정도입니다.”
“……4분만에 쫓아냈다. 역시 굉장하구만. 여기로 오라고 좀 전해라.”
“알겠습니다.”
병사는 밖으로 나가 버트를 불러왔다.
“가야 할 때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했지?”
“아, 네.”
“무슨 일인지 묻지는 않겠다만 네 전력은 높이 산다. 네가 빠진다면 그 공백이 커진다. 그래서 최대한 붙잡을 수밖에 없어.”
“안정화를 위해서 필요한 게 뭔가요?”
“최대한 빨리 해결하려는 마음가짐은 좋다만 보스 개체는 호락호락하지 않아. 마스터라 인정을 받는 이들도 쉽사리 대항하기 어려운 게 보스 개체다.”
루크림은 뚜둑 목을 풀며 일어났다.
“그런데도 너에게는 기대를 걸고 싶구만. 이모탈이니 목숨이 아깝지는 않을 테니 한 번 정도는 싸워보는 건 어때?”
그 말에 버트는 솔직하게 대답할지 고민했다. 자신은 다른 이모탈과 달리 여기서 죽으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말. 그걸 말하려고 했지만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정확히 몇 마리가 있고 어떤 녀석들이 있는지 몰라요. 제가 이런 쪽으로는 귀가 어두워서요.”
“흠.”
루크림은 턱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지금 우리가 요격할 상대는 강철비늘의 칼가르, 벼락갈기의 르메톨로. 각기 보스 몬스터로 판명된 개체들이다. 협곡의 중심부로 가기 위해서는 이 두 몬스터의 영역을 넘어가야 해.”
루크림은 스크롤을 건넸다.
“두 개체에 대한 정보는 거기에 전부 적혀있다. 외견에서부터 특성, 지금까지의 행적들을 한 번 보고 고민해 봐.”
“아, 네. 감사합니다.”
버트는 스크롤을 펼쳐 내용을 읽었다. 거기에는 두터운 갑각을 두른 지네와 번쩍대는 갈기털의 말이 그려져 있었다.
“한 쪽은 마법 내성이 높고 다른 한 쪽은 물리 내성이 높다……. 체격 자체가 큰 것도 있고 피지컬 자체도 강하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
“무리를 짓는다는 점이다.”
보스 헌터.
그들은 버트가 스크롤을 읽는 동안 만트라 협곡의 다른 구역에서 무리를 짓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그리 강해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 전부를 합쳐도 세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팬티 차림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낡아빠진 무기나 무기라고 불리기도 이상한 것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여기 신입이 누구지?”
처음 말을 하던 길드원 하나가 질문했다. 그러자 각기 정비를 하고 있던 수 십의 인원 중 몇몇이 손을 들었다.
“보스 몬스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레이드 몬스터보다는 한 단계 아래지만 격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한 신입에 말에 보스 헌터 길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녀석에게만 집중하고 보스 몬스터의 무리를 간과하는 점이 많다는 거다. 멸치똥따개.”
“그래, 나다!”
그는 투구 하나에 반바지만 입고 있었다. 그런데 들고 있는 무기가 범상치 않았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나무 몽둥이…… 근데 그게 사람 몇 명을 합쳐놓은 크기였다.
“저 녀석은 힘 스텟으로는 압도적 1위인 ‘귀신도끼’와 견줄 수 있는 힘캐다. 보스 몬스터 하나와 힘겨루기를 해서 박빙으로 승부를 낸 적도 있지. 그 녀석 이름이 뭐였지?”
“진정한 피닉스 카르담이었다!”
“녀석과 일 대 일로 어느 정도까지 갔었어?”
“음, 한 피 절반은 깐 거 같았지.”
“결정적인 사망 원인은?”
“쫄몹에게 쳐맞아 죽었다.”
“피닉스 계통의 몬스터들은 알다시피 나방이다. 그리고 죽여도 본체가 까는 알까지 처리하지 않으면 다시 부활해서 빠르게 성장하여 되살아나지. 그런 카르담이 이끄는 피닉스 무리는 하나하나가 보잘 것 없는 일반 몬스터지만 그 수가 수 천에 이르러서 보스급 엘리트 몬스터로 취급 받았다.”
멸치똥따개는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보였다.
“그래도 거의 잡을 뻔 했으니 거기에 의의를 둬야지! 안 그래?”
“대답해줘서 고맙다. 아무튼 보스 몬스터에 대한 공략은 많지만 아직까지 잡히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무리들 때문이다. 베톰 왕국에서도 병력을 일정 이상 투입해야만 처리할 수 있을 정도지. 개중에는 카르담처럼 무리에 특화된 보스 몬스터도 있으니 실질적으로 몬스터와의 일 대 일이 아닌 전쟁이라고 보는 게 맞다.”
길드원은 칠판을 들어보였다.
“우선 우리가 잡을 두 머리의 드래곤 알터&크레그. 각기 다른 특성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 우리가 보았을 때를 기준으로 왼쪽 머리 알터는 물리성에 저항력이 높고 오른쪽 머리 크레그는 마법성에 저항력이 높다. 그리고 각기 강한 부분도 다르다. 알터의 경우 피부와 콧잔등이 유달리 단단한 반면 크레그는 뿔과 아래턱, 목 뒤쪽이 질기다. 가장 자주 보이는 패턴으로는 앞발 휩쓸기와 특수기 반달 긁기가 있는데”
길드원은 10분 가량 녀석에 대한 특징을 설명했다. 하나하나 새겨 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졸면서 꾸벅이거나 딴청을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설명이 끝날 무렵 길드원은 다른 주제를 꺼냈다.
“이건 이 정도로만 설명하고 그 다음 녀석의 무리에 대해 설명하지. 우선 마법 졸개가 있는데 녀석들은 알터와 같은 진홍색 비늘을 가졌다. 이들은 한 분대에 약 20마리, 총 다섯 분대로 나뉘어져 있으며……”
무리에 대한 설명은 거의 1시간가량 이어졌다. 녀석의 무리가 제법 큰 것도 있었지만 보스 몬스터에 대해 브리핑할 때처럼 상세히, 심지어 지휘관 개체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고 있었다. 여기서 주의깊게 볼 점은 방금까지 하품을 하거나 지루하게 듣던 사람들 전부 이것만큼은 경청하고 있었다. 반면 보스 몬스터를 집중적으로 듣던 이들은 슬쩍 눈치를 보며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길드원은 칠판을 내리고 말했다.
“지금까지 판타지아에는 수많은 보스 몬스터가 있었지만 레이드 몬스터는 손에 꼽아. 가장 최근에는 칼라 해변에서 메두사라는 레이드 몬스터가 있었지? 녀석은 앞서 상대했던 레이드 몬스터들에 비하면 한참 포스가 적어. 그 이유가 뭘까?”
“무리들 때문이지.”
“맞아.”
멸치똥따개가 즉각 대답했다. 길드원은 손가락을 딱딱 튕기며 주의를 끌었다.
“악몽의 기사 레이드. 그건 타락한 기사들이 정말 강했지. 리치 귀르디. 녀석은 플레이어조차 가리지 않고 전부 되살려서 부하로 부렸어. 케르베로스…… 이건 녀석 주변의 키메라들도 굉장히 강했어. 반면 메두사 레이드 때는 어떤 잡몹들도 없었지. 무리라고 생각했던 바다뱀들은 녀석의 다리였었어. 물론 올 클래스 매지션의 활약도 돋보이긴 했지. 그래도 다른 레이드와 비교하면 박력이 약한 건 변함없어.”
길드원이 손뼉을 짝 쳤다.
“그러나 보상은 확실하다. 가장 박력이 없는 레이드 몬스터인 메두사조차 전 대륙적으로 키메라 연구와 흑마법을 부흥시켰고 올 클래스 매지션을 탑주의 위치로 올렸다. 보스 몬스터의 결과물도 그렇다. 물질적인 보상이 있는가 하면 좀 더 강해질 수 있기도 하고 명예를 얻기도 한다. 레이드 몬스터에 비하면 적다고 느껴질 뿐, 일반 사냥이나 던전 공략으로는 도저히 얻기 어려운 보상들임은 틀림없다.”
길드원은 모두를 둘러보았다.
“일단 설명은 여기까지. 알터&크레그의 영역까지 이동하자. 가끔 칼가르의 무리가 섞여 나오기도 하니까 조심하고.”
“칼가르의 무리요?”
“그래. 가면서 설명해줄게.”
길드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다른 보스 헌터 길드원들도 이동할 채비를 마쳤다. 그는 앞장 서면서 높이 뻗어있는 협곡을 가리켰다.
“강철비늘의 칼가르. 녀석은 근딜, 원딜, 마딜, 물딜 가리지 않고 난해한 보스야. 생긴 건 그냥 지네지만 뱀과 같은 탄력에 연체동물 같은 유연성을 가졌지. 까딱 잘못 하면 사로 잡혀서 압사 당해. 위니아 평원에서 나타났던 거대 땅뱀이나 랑그라 밀림의 검은 비늘 중 알고 있는 게 있나?”
“검은 비늘 소탕에 갔다가 당했어요.”
“나는 위니아 평원 몰락 시기까지 다 겪었지.”
“음. 녀석들은 전부 보스급 엘리트 몬스터였지. 그것도 피지컬만으로 그 경지에 오른 거야. 근데 칼가르는 그것들의 완벽한 상위 호환이야. 이것만으로도 녀석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겠지?”
길드원은 그렇게 말하다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녀석이 이끄는 무리도 비슷하단 거야. 우로보로스 종의 지네들을 이끌지. 녀석들은 임프 종 몬스터처럼 땅 속을 파고 들어. 문제는 녀석들 중 몇 마리가 땅을 파고 이동하다가 길을 잃고 우리가 공략하려는 보스의 영역으로도 간다는 거야.”
“그럼 싸움이 일어나지 않나요?”
“그렇지. 그러니 아마 운이 좋다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본다뇨? 뭘……”
“사냥이지.”
“사냥이요?”
그들은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멀리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베톰 병사들이 온 건가.”
“아냐. 거리가 멀어. 병사들이 있는 곳이 아니야.”
귀를 기울이던 보스 헌터 길드원 중 하나가 씩 웃었다.
“좋은 구경거리 생겼네. 다들 빨리 가자!”
그가 앞장서서 달려가더니 어느 바위 앞에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빼더니 저 먼 곳을 가리켰다. 그를 따라가던 길드원들은 밖을 보았다.
키에에엑
샤아아악
강철 방패를 든 도마뱀들이 십 수 미터는 되보임직한 지네와 대치하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망토만 가볍게 걸친 도마뱀들이 각기 불과 얼음을 쏘고 있었다.
“저기 뒤에 보이는 게 알터의 마법 분대다. 저기 뿔 하나가 없는 놈이 2분대장 와클라. 크, 녀석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도 쑤시는 구만!”
멸치똥따개는 근엄하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도마뱀을 가리키며 말했다. 길드원들은 거대 지네와 다투는 도마뱀들의 모습에 긴장하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길드인만큼 이곳에 지원하는 이들도, 몸 담고 있는 이들도 단체 사냥의 경험이 있었다. 비단 판타지아 같은 가상현실이 아니라 PC나 콘솔로 하는 게임에도 경험이 많았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도마뱀들의 단체 사냥이 얼마나 체계적인지 볼 수 있었다.
세에엑
샤악
쉬아악
거대 지네의 움직임은 예사롭지 않았다. 분명 머리는 누군가를 향하고 있지만 꽁무니는 다른 녀석을 공격했다. 그러다 가운데 몸통으로 부딪치기도 했다. 분명 한 마리였지만 여러 마리를 상대하는 수준의 난이도였다. 그렇다고 몸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강철처럼 단단한 갑각은 도마뱀들의 검이 잘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도마뱀들은 피해가 없었다. 각 개체들이 강한 것도 있지만 지휘와 임무 분담 능력이 뛰어났다. 지네가 갑작스럽게 발버둥 치며 돌발행동을 벌여도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생각은 비슷했다. 보스 몬스터의 무리이자 만트라 대협곡의 몬스터가 얼마나 강한지 느꼈고 지금 잡아야 할 몬스터 무리가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했다.
“이거 완전 PVP잖아.”
“떼쟁 하는 기분 들고 좋네.”
“크…… 결국 고이고 고이면 PVP로 돌아가는 거지.”
“이래서 저 사람들이 그렇게 긴장 했구만.”
보스 몬스터도 강했지만 그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인간들의 부대였다. 어쩌면 역으로 사냥 당할지도 몰랐다. 지금 눈앞의 지네와 자신들의 위치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움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한 50번 정도 부딪쳐봐야겠어.”
“너는 횟수로 세는 구나? 그럼 나는 5시간으로 해야지.”
“좋아, 저 지네가 사냥 당하는 순간 시작이다.”
“모두 준비.”
그렇게 보스 헌터 길드는 보스 몬스터 사냥의 1단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시각 버트는……
*
“후우.”
버트는 땀을 훔치며 스크롤을 내려다보았다. 가장 먼저 표적으로 삼은 칼가르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쫀 건 아니겠지……?”
버트는 손에 감도는 마기를 갈무리했다. 이제는 마기를 사용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굳이 이걸 쓰지 않아도 싸우는 데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메두사 때 마기를 마음껏 써보지 못한 기억이 떠올라 꾸준히 쓰게 되었다.
이것도 나의 힘이다. 버트는 몸 안을 감도는 마기를 잠재우고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 진 그림자. 천둥 소리.
목표인 칼가르가 아니었다.
시퍼런 날개. 거대한 청백색 몸뚱이. 허공에 발굽질을 하며 나타난 건 날개달린 말이었다.
벼락갈기의 르메톨로. 녀석은 허공에서 투레질을 하며 버트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이 날개를 한 번 퍼덕일 때마다 우레가 터졌다. 커다란 날개 안에서는 먹구름마냥 번개가 일렁였다.
녀석은 도망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버트는 ‘주머니’에서 검을 하나 꺼냈다.
“그 녀석 대신 널 잡아야겠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