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98화 (98/104)

〈 98화 〉 98 ­ 만트라 대협곡 中

* * *

지하도시 라존. 베톰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범죄 도시였다. 하지만 말이 범죄 도시지 대부분의 도박과 매춘이 베톰 왕국에서 묵인하고 있었다.

버트는 이곳에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마법사의 탑에 소속되었던 큐엘과 재회하고 『밤』 세트 아이템 중 하나를 얻었다. 자잘한 일도 있었지만 게임을 하면서 겪는 해프닝에 불과했다.

“정말 간만에 온 거 같은데 별로 바뀐 건 없네.”

잠복수사 중인 형사나 도박중독증 플레이어, 매춘하는 사람과 길거리에 나앉은 거지. 뭣 하나 달라진 게 없었다. 달라진 거라면 그들을 보는 버트의 시선이었다.

‘이제는 플레이어이인지 아닌지 전부 보이네.’

기껏 해야 무심코 느끼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컸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니 누군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자이든. 라존의 6개의 빛 중 하나이자 버트에게 굴복했던 무력의 지도자였다.

“……오셨습니까.”

“어라, 안녕하세요?”

“안내해드리려 직접 찾아왔습니다.”

“아~ 고맙지만 괜찮아요. 큐엘을 만나러 온 거여서……”

“그래서 온 겁니다. 귀빈을 대접하라고 하시더군요.”

“네?”

버트는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큐엘은 분명 적당한 곳에 가게를 차린 상점 주인에 불과했다. 반면 눈앞의 자이든은 힘도 세지만 제법 높은 지위에 있는 남자로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큐엘이 시키는 대로 한다니, 조금 이상했다. 물론 자이든이 이렇게 버트에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한 번 꺾어본 상대이거니와 루하다와 블랙스타 덕분에 떠받들어지는 건 익숙했다.

궁금한 건 자이든과 큐엘의 관계였다.

“음, 알겠어요. 안내 해주시겠어요?”

“따라오세요.”

자이든이 앞장 서서 버트를 인도했다. 얼마 안가 도착한 곳은 큐엘의 가게였다. 겉모습으로는 크게 변한 게 없었다. 그런데 들어가보니 인테리어가 상당히 고급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버트!”

큐엘은 밝은 미소로 그녀를 맞아주었다.

“연락도 하지 않고 오셔서 자이든을 보냈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아, 만트라 협곡으로 가다가 잠시 들러봤어요. 혹시 저 사람이랑은 무슨 관계인가요?”

자이든은 시선만 주더니 고개만 가볍게 꾸벅이며 자리를 떠났다. 큐엘은 머쓱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버트가 간 뒤로 어쩌다 보니 몇 사람들과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제법 이름 있는 귀족분이신데 제가 쓰는 제품이 마음에 드셨다더라구요.”

“오, 그래요?”

“그래서 그 분이 사교회를 비롯해 다른 분들과의 맥을 터줬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상하 관계가 정해졌더라구요. 저는 거절하긴 했지만 자처해서 제 밑으로 오겠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버트는 그제야 궁금한 게 풀려 고개를 끄덕였다. 큐엘은 웃으며 얘기하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표정을 굳혔다.

“만트라 대협곡으로 가신다 하셨죠? 혹시 용병으로 고용되신 건가요?”

“네? 아, 음. 네, 비슷해요.”

“그렇군요. 최근 베톰 왕국에서 지역 안정화를 하겠다며 각 위험 지역에 병력을 투입 중이거든요. 특히 집중하기로 한 곳이 젠카 사막, 헥실의 무덤, 만트라 대협곡 세 곳입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대협곡은 장기적으로 본다고 들었습니다만…… 원래 하시던 일은 끝나신 건가요?”

큐엘이 알기로 버트는 뭔가를 찾아다닌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버트가 하던 일이 전부 끝나서 이번 일을 수락했다고 생각했다.

“아뇨. 그건 아직…… 일이 조금 지체되어서 그때까지 다른 일을 하려 했던 건데……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길어질 거 같네요.”

“음, 아무래도 그럴 겁니다. 거긴 베톰 왕국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복잡한 곳이라서요. 잘못 하면 생태계가 무너질 수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 개체 하나하나가 강력해요. 거기는 다른 나라에서 엘리트 몬스터라고 불리는 수준이 기본이거든요.”

엘리트 몬스터. 보스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엘리트 몬스터로 지정된 게 랑그라 밀림에서 만난 ‘검은 비늘’과 라피에 초원의 ‘화이트슈트’였다. 인터넷에서도 엘리트 몬스터의 위험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몇 번 보기도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단순한 버트조차 그들의 강함을 모를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보통 수준이라니.

“심지어 거기에는 아직까지 토벌하지 못한 보스 몬스터가 상당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개체는 수 십 종이고 그 중 몇 개체는 토벌이 완료되긴 했어요. 근데 그 중 반은 아직까지 분석 중이고 나머지 반은 건드릴 엄두조차 못 내고 있죠.”

“굉장하네요. 그래서 장기적으로 본다고 한 거네요?”

“네. 이모탈들이 만든 길드에서도 그곳을 수시로 공략하고 있긴 해요. 하지만 새로이 나타나는 개체 때문에 안정화가 되지 않고 있죠.”

“으음.”

버트가 알기로 만트라 대협곡은 최종 사냥터였다. 그랬기에 지역 자체에 대한 공략은 끝났으나 거기에서 나오는 몬스터는 끊이지 않는 듯 했다. 조금 더 파고 든다면 출현하는 보스 몬스터의 패턴이나 형식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건 플레이어들이 인터넷으로나 공유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베톰 왕국에서는 분석에 그치고 있었다.

“확실히 위험하겠네요.”

“그러니 강자가 아니라면 이모탈을 투입하는 거예요. 하지만 웬만한 강자는 목숨이 아까워서 지위를 얻고 몸을 사리고 이모탈은 정보를 감추거나 다른 소리를 하죠. 그래서 아직까지 진척이 없었던 거구요.”

큐엘은 문서를 적어내렸다.

“제가 알기로 협곡에는 베톰 왕국의 마스터 중 하나가 투입됐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곳에도 왕국병이 있지만 본격적인 안정화 작업에 나선 건 그 사람이라 들었어요. 여깄습니다. 혹시 모르니 후원자분의 가명으로 추천서를 썼으니 라존에서 필요한 것들을 받아가세요.”

“앗, 고마워요. 저번에 주신 옷이랑 기구들도 아직 다 못 썼는데……”

“아닙니다. 버트가 제게 주신 거에 비하면 하찮죠. 원래 인사 차 방문을 부탁 드린 건데 다행이네요.”

“……근데 제가 준 거요?”

“아, 영상을 정련해서 버트의 모음집을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어쩌다 보니 다른 곳에서 버트의 사진집을 비롯해 각종 창작물을 공급 받게 되었습니다. 한눈에 버트란 걸 알겠더군요.”

“네?”

버트는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래서 큐엘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2등신 피규어나 브로마이드, 각종 캐리커쳐 굿즈들이 보였다. 로디아 마을에서 종종 나돌던 것들인데 설마 여기까지 와있을 줄 몰랐다.

“이건……”

“생각 외로 인기가 많으셨나 봐요. 베톰 왕국의 어르신 한 분도 좋아하신다더라구요. 신상이 나올 때마다 구매하신다니까요. 그래도 이곳을 싫어하는지 후원까지는 안 하셔서 좀 아쉬워요.”

“아…… 하…… 그래요? 근데 정말 별의 별 게 다 나왔네요.”

버트가 최근에 본 건 검집에 그려진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테이블 덮개나 팔토시, 쥘부채, 반장갑 등 다양했다.

“필요하면 나눠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너무 자기애가 강해 보여서.”

버트는 손을 내저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만 가볼게요. 추천서 고마워요.”

“아, 죄송해요. 할 일이 있으신데…… 혹시라도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그렇게 버트는 큐엘과의 만남을 끝내고 대협곡으로 향햘 여정을 마쳤다. 큐엘이 준 추천서로 받은 건 식량 정도. 애초에 왕자의 명령으로 이동하는 것이었으니 지원은 충분했다.

“가볼까.”

*

만트라 대협곡.

이곳은 라존으로 가면서 언뜻 본 적이 있던 지형이었다. 대협곡이란 이름에 걸맞게 만트라의 크기는 엄청 났다. 멀리서 보았던 전투마을 메일드로우는 우습게 삼킬 정도였다. 그런 협곡 주변에서 살아가는 몬스터들은 하나 같이 강력했다. 심지어 협곡 근방의 몬스터도 평범하지 않았다.

“1대대 방어 대형으로! 2­C 상황이다!”

“예!”

무장한 병사 수십이 침착하게 거대한 방패를 들어 진형을 만들었다. 그들이 상대하는 건 마차만한 크기의 멧돼지였다. 그것도 한 두 마리가 아니라 예닐곱 마리가 한 번에 몰아치고 있었다. 그것들의 피지컬은 압도적이었다. 심지어 머리도 좋았다.

쿵!!

다섯 마리가 방패진에 코와 엄니를 부딪쳤다. 하지만 녀석들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진형의 뒤에 숨어있던 한 마리가 무리를 가르고 방패진 한가운데를 때렸다.

콰작­

“크흑……!”

병사 하나가 버티다 못해 뒤로 밀려났다. 그 틈을 노리고 멧돼지가 머리를 디밀었다.

스각­

그러자 명령을 내리던 지휘관이 창을 쥐고 휘둘러 녀석의 눈을 공격했다.

뀌에에엑!!

멧돼지는 그대로 뒤로 물러났고 방패진은 기합을 내더니 동시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방패를 밀고 있던 멧돼지들이 한 차례 밀려났다.

“1대대 수비 대형으로!”

그들은 방패를 앞세우며 허리춤에서 무기를 꺼냈다. 짧은 창이라 생각했던 것은 철걱거리며 길어지더니 2미터가 넘는 창으로 변했다.

“전투 준비!”

그렇게 병사들과 멧돼지들의 일사불란한 싸움은 버트의 눈에 새겨졌다.

“저게 저거노트란 몬스터구나. 근데 알고 있던 것보다 더 크네.”

버트는 만트라 대협곡이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먼 거리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연히 병사들은 버트의 존재를 느끼지도 못했다. 손톱보다 더 작게 보이는 거리에서 보고 듣는데 누가 알아챌까. 아무리 베톰 왕국의 병사라고 한들 초인의 영역에 들어선 건 아니었다.

버트가 감탄하고 있으니 루하다가 그림자에서 대답했다.

[ 맞습니다. 관찰해본 결과 협곡 근방은 모든 짐승과 몬스터가 비정상적으로 성장해있습니다. 아마 그 늑대들도 이곳에서 자랐으면 훨씬 강해졌을 테지요. ]

버트는 그 말에 협곡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시선을 멀리 두었다.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흐름. 협곡에 집중되는 강렬한 힘이 몬스터와 짐승을 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아마 이 판타지아에서 가장 강한 힘이 모여드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그저 다가가기만 하는 데도 피부가 저릿거렸다.

“굉장하네.”

버트조차 그렇게 말을 할 정도였으니 다른 이들은 어떨까. 누군가는 협곡의 웅장함에 기가 죽었고 누군가는 협곡에서 뻗어 나오는 힘에 위축 당했다. 그만큼 이 지역은 큰 인상을 주었다.

“꼭 실수로 만들어진 거 같아.”

아마 이곳에 국가가 세워졌다면 최강의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베톰 왕국이 이 땅을 품고 있기에 최강국이라 불리는 게 아닐까. 여러 생각이 오가는 동안 전투가 일어나는 곳이 가까워졌다. 저거노트들과 격전을 벌이던 병사는 주변 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만이 아니더라도 근방에서 종종 전투가 일어났다.

“탱님 어그로 빠져요!!”

“힐! 힐! 제발 힐! 개딸피!! 제발! 힐! 히이이일­!!”

“딜 몰아야 해요! 지금!!”

협곡이 거대한 만큼 그 주변 역시 넓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있었고 그 중에는 플레이어도 있었다. 그들의 외침과 팀 플레이를 보고 있자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초심자 마을에서부터 시작해 사람들이 기피하는 곳만 다니다 보니 지금과 같은 활기는 보기 드물었다. 어느 곳에서는 사냥을 끝내고 서로 피드백을 주고 받거나 전리품을 나눠갖고 있었다.

버트의 기감은 수 십 킬로미터에 있는 모든 일을 인식했다. 그걸 하나하나 읽다 보니 어느 샌가 협곡 초입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니 정비 중인 사람들이 보였다. 한 명 한 명이 약해보이지 않았다. 각자 소속이 다른 건지 비슷한 옷을 입은 이들도 있었고 서로 다른 복색의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공통적인 건 버트의 모습을 보고 호기심을 가졌단 점이었다.

“저런 녀석이 있었나?”

“붉은 머리…… 모르겠는데?”

“뭣 모르고 찾아 왔다기에는 주변이 만만치 않아. 우연인가?”

“귀족가 자제일지도 모르지.”

“베톰에서 협곡 정리를 한다 했었나? 그럼 3공작의 자식 아니야?”

“하기사, 아직까지 공작가 정보는 안 풀렸지…….”

그들은 수군거리며 버트를 곁눈질했다. 버트는 플레이어로 보이는 이들을 보다 익숙한 무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톰의 정규군이 입는 무장. 헥실의 무덤에서 2왕자 라킨이 이끄는 병사들과 같은 복색이었다. 그들을 보니 한 명이 다가왔다. 그 모습에 플레이어들의 수군거림은 커졌다.

“뭐야, 저 녀석들이 왜 움직여?”

“설마 베톰의 숨겨진 전력인 거 아니야?”

“혼자라는 건 분명 실력자란 거겠지. 아, 퍼·제일 수도 있겠다.”

“거기 명단은 이미 쫙 퍼지지 않았나.”

“비밀 멤버인 거지!”

병사는 품에서 문서를 꺼내 버트와 대조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한 번 꾸벅 숙이고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지나가란 듯한 반응이었다.

버트는 슬쩍 눈치를 보다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더 신경 쓰지 않고 병사들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러자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2왕자 님께서 아펠릭 백작 님과 합류 하시는 대로 일을 시작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비용 청구는 최종적으로 락콘 후작님께 전달되나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저나 부관인 클람 남작 님께 말씀 하시면 됩니다.”

병사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버트에게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전부 전달했다. 버트는 말없이 그를 따라가면서 드높은 협곡의 높이에 고개를 꺾었다.

위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보이는 건 거대한 산. 그것마저도 큰 언덕처럼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협곡이었다. 마치 거인이 거대한 흙더미를 손가락으로 훑기라도 한 듯한 형태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협곡의 안으로 향할수록 압박감은 짙어졌다. 길을 안내하는 병사의 걸음걸이가 느려졌음은 물론 곳곳에서 느껴지는 살기도 강해졌다. 버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웬만한 플레이어들이 이곳을 최종 사냥터로 지목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지금처럼 베톰의 훈련된 병사조차 위축될 강력한 기세가 있었다.

캬학­

그 다음은 협곡 내부의 몬스터는 가장 약한 녀석조차 최소 엘리트 이상이란 점이었다.

“응?”

버트는 땅바닥에서 솟구치며 덤벼드는 녀석을 보았다. 털이 부숭부숭 나있고 발톱은 칼처럼 예리한 거대한 두더지였다. 성인 남자만한 덩치의 두더지는 송곳니와 함께 날카로운 발톱으로 버트를 향해 덤벼들었다.

병사가 그걸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임프 종은 두더지처럼 생겨서 땅속을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다. 대놓고 보이는 슬라임이나 가고일 다음으로 위험한 게 바로 임프였다.

그러나 의심하지 않았다.

2왕자 라킨이 보낸 인물이다. 녀석이 버트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이었어도 병사는 잠깐 불안해할지언정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 녀석이 버트의 어깨를 깨문 그 순간 검집에 손을 올렸다가 천천히 내렸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어야 하는 게 정상이었지만 달려들기 전에 하반신이 날아가버린 녀석에게 그럴 기회는 없었다.

“우와, 놀래라.”

버트는 피가 질척하게 묻은 몸을 털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감상평은 고작해야 놀랐다 정도. 베톰 왕국에서조차 전력을 기울이기를 망설이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나오는 말이라기엔 너무 보잘 것 없었다.

“아펠릭 백작 님께서는 7구역에 계십니다. 지금이 2구역이고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걸어가면 나타날 겁니다. 각 구역마다 자동방어 장치를 건설해두었지만 지금처럼 습격이 없을 거라 단정할 수 없습니다.”

병사는 덤덤하게 말했다. 그것도 그럴 게 여기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몬스터도 있었지만 외부에서 유입되어서 강해지는 부류도 있었다. 그래서 협곡 주변에 배치된 병사들의 임무는 몬스터가 나오는 걸 막는 게 아니라 들어가는 막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땅속을 헤집고 다니는 임프나 데스웜의 경우 개체수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날아드는 건 관측하면 되고 땅을 딛는 건 막아서면 되지만 이것들은 기습 당하지 않는 게 다행인 수준이었다.

다행히 임프의 습격 이후 추가 공격은 일어나지 않았다. 3구역, 4구역까지 이동은 어렵지 않게 끝났다. 종종 병사들이나 플레이어들이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모습도 보였지만 도와주지 않았다. 그건 그들만의 일이었고 버트에게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였다.

털컹­ 철컹­

병사가 말한 자동방어 장치를 구경하려는 것도 한 몫 했다. 얼핏 보면 철갑을 두른 거한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은 싹 비어 있었다.

리빙아머라고 불리는 자동 사냥 개체. 주문 술식을 부여하여 조종하는 갑옷이었다. 움직이는 갑옷의 형태는 다양했다. 지금처럼 주기적인 토벌 혹은 저지가 필요한 곳에 투입하면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그 중 최고는 ‘듀라한’이라 불리는 모델이었다. 몇 모델들은 일부 손실이 일어나면 작동을 멈췄다. 내부에 큰 충격을 버티지 못하는 모델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듀라한 모델만큼은 머리가 날아가도 멀쩡히 기동하며 몬스터를 저지했다. 그 사이 베톰의 병사들이 확실히 마무리 지었다.

“신기하네요. 이러면 베톰 왕국이 강하다고 알려진 건가요?”

“베톰 왕국의 전력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리빙아머는 불필요한 인력 소모를 줄이는 용도입니다. 나이트 마스터가 이끄는 하늘 기사단, 에글러 공작 각하께서 이끄는 심록의 마법사단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습니다. 키런 왕국의 황금늑대 기사들도, 살리마 왕국의 마법사들도 그들에게는 한 수 접어줍니다.”

병사는 제법 자부심을 가진 듯 했다. 버트는 몰라도 베톰은 이름난 강국이었다. 이 나라에 대해 모르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랬기에 버트의 이런 질문은 일종의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마스터라 불리는 강자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저희 뿐입니다.”

“굉장하네요.”

분명 버트가 기억하기로 니스가 마스터 직함을 따기 위해 고생했다. 제법 게임을 잘 하는 니스가 어려워할 정도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체감됐다. 판타지아에 섞여들수록 이곳에서 이름을 널리 떨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았으니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2왕자님께서 추천하신만큼 눈이 높으시겠지만 그렇다고 베톰 왕국을 얕잡아보시는 건 곤란합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베톰의 백성들은 이 나라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죄송해요. 다음부턴 발언에 주의할게요.”

버트의 솔직한 사과는 역으로 병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저 자긍심을 알리고 주의를 줄 뿐이었는데 사과까지 받을 줄 몰랐다. 그렇게 7구역까지 도달할 때까지 병사는 민망한 기분을 만회하려는 건지 협곡과 베톰에 대한 여러 사실을 알려주었다.

특히 곧 만나러 가는 아펠릭 백작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들어서 전부 외울 정도였다.

나이가 지긋하지만 아직까지 현역인 컴뱃 마스터. 몸을 쓰는 전투라면 경지에 이른 희대의 강자. 강골인 룩손 공작조차 한 수 접어줄 정도의 외골수이자 극렬한 무장. 단신으로 엘리트 몬스터들을 처치하고 보스 몬스터를 저지할 수 있는 투사.

루하다가 소리 소문없이 다가오는 몬스터를 위협하거나 제거하는 동안 병사의 설명은 끊이지 않았다. 얼마나 설명에 집중했는지 지금까지 몬스터가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 못할 정도였다.

버트는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를 듣다 비교적 주둔지라는 느낌이 드는 장소에 도착하게 되었다. 벽에 말뚝을 박고 굴을 파서 만든 주둔지는 절벽에서 살아가는 특이한 부족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째선지 불과 연기를 피우지 않던 다른 구역과 달리, 이곳은 거대한 솥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병사가 버트와 함께 다가오니 다른 병사 하나가 다가왔다.

“연창.”

“주역.”

“방문 목적은?”

“2왕령.”

병사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한 손을 들었다. 팔뚝만한 철포를 들고 겨누고 있던 세 명의 병사는 포신을 바로 세웠다.

“2왕자님께서 직접 오신다고 들었는데?”

“협곡 안정화는 장기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젠카 사막으로 먼저 향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카웃한 인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병사는 버트를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해당 절차는 누구에게든 적용됩니다. 설사 2왕자님께서 보내셨다고 해도 예외는 없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실버트리라고 해요.”

“실버트리…… 성은 없으십니까?”

“네.”

“만트라 대협곡에서의 모든 작전에서는 아펠릭 백작님이 최고 상관입니다. 부관은 클람 남작 님이시며 명령불복종은 즉결처분할 수 있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해당 작전은 무기한인만큼 모든 비용 청구는­”

“무기한이요?”

병사는 말을 하다 말고 버트를 보았다.

“예, 그렇습니다.”

“몇 달 안으로는 끝나는 건가요……?”

“만트라 대협곡은 그렇게 쉽게 끝날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젠카 사막이 그 정도 기간이 걸린다고 봐야 합니다.”

버트는 선뜻 알겠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라이가 연락을 하지 않았지만 그 사이 세트 아이템의 위치를 알게 된다면 곧장 가야만 했다. 아무리 오래 머무르고 싶다지만 대놓고 정체되는 건 싫었다.

하물며 이곳은 최종지역이었다. 대답은 신중하게 해야 했다.

“그러면 원하는 때에 언제든 떠나도 괜찮은 건가요?”

“……그건 백작 각하의 재량입니다. 상세한 조율은 백작 각하님께 말씀 드려야 합니다.”

“어림도 없다!!”

우렁찬 목소리. 벽을 파고 만든 동굴에서 허리가 굽은 노인이 걸어나왔다. 그는 한쪽 눈을 부들거리면서 혀를 찼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왔다갔다 하려는 거냐!”

노인은 비리비리하게 생긴 것과 달리 선명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는 가볍게 뛰어올라 버트의 앞에 내려앉았다.

“내가 아펠릭 백작, 루크림이다. 보아 하니 불만이 있는 거 같은데 말이야?”

그는 부리부리하게 뜬 눈을 디밀며 말했다. 버트는 쭈뼛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불만이라기보단…… 언제 가야 할지 몰라서요.”

“가야 한다? 무엇 때문에?”

“그게……”

버트는 선뜻 세트 아이템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모탈을 싫어하는 풍조보다는 뭔가 물욕 때문에 대의를 저버리는 느낌이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가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루크림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너, 이모탈이로구나.”

“네?”

그는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으레 나는 죽음의 냄새. 피를 많이 묻혔지만 영 이상해. 죽음을 넘나드는 괴물이라기에는 피냄새가 옅다. 심지어 그게 살에 배어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죽음의 냄새가 뒤를 따른다.”

루크림은 경멸하는 눈으로 버트를 노려보았다.

“2왕자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너를 여기로 데려온 건지 모르겠으나, 그 분의 뜻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모탈이라는 이름을 믿을 수 없다. 너희 이모탈이 얼마나 생명을 가볍게 여기며 수련을 우습게 여기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저는 그런 적이 없는데요……?”

“쯧쯔, 네가 그러지 않았어도 대다수의 이모탈이 그런다. 10명 중의 9명이 사고를 일으키는데 너라면 누구의 말을 믿을 테냐?”

“……아무래도 많은 쪽이죠?”

“그래.”

루크림은 입맛을 쩝쩝 다셨다.

“2왕자께서 보냈다고 하니 힘을 의심하지 않겠다. 그분의 이름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신용할 수 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느다란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래도 심심하니 한 판 놀아줘야겠다.”

“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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