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97 만트라 대협곡 上
* * *
라킨의 시험. 그건 아주 간단했다.
공격에 반응하면 살려주고 아니면 사살한다.
이 과격한 시험은 이모탈을 상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그의 검에 베여 죽었다. 그래서 이게 시험인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어느 누구도 반응할 수 없었다.
그가 검을 휘두른 순간은 너무 빨랐다. 공격했다는 걸 알아차려도 직전에 멈출 거라는 건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대로 베어버렸다. 지상에서 만난 ‘사냥꾼들’의 길드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공격한 걸 알아차렸지만 검이 목에 지척까지 온 걸 알지 못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응?’
달랐다.
뭔가…… 달랐다.
붉은 머리의 기사는 검을 뽑기도 전에 반응한 눈치였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검을 뽑았다.
그 찰나의 순간 살기가 느껴졌다. 그건 지금껏 라킨이 겪은 그 어떤 기세도 비빌 수 없었다. 잠깐이지만 몸에 경직이 일어날 정도로 강렬한 기운이었다.
그래도 검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잠깐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폭발적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라킨의 눈에 보인 건 버트의 희미한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분명 피했다.
아니, 피해야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검의 경로를 벗어난 버트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검 끝이 목을 스칠 정도. 분명 그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라킨은 검을 멈추었다. 반 발짝 앞으로 나서며 목을 벨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호기심이 일었다. 지금까지 라킨의 시험을 마주하고 무사한 이모탈은 다섯 손가락에 꼽았다. 그 중 하나는 역으로 라킨에게 반격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처럼 검의 경로를 벗어났다가 살짝 걸칠 정도로 다시 들어오는 건 처음이었다.
1초도 안 되는 시간. 라킨은 검을 뽑아 버트의 목을 치기 직전에 멈추었다. 동체시력이 뛰어난 황금궁사조차 라킨이 검을 휘두르고 멈춘 것까지만 보았다. 라킨이 보았던 이변을 보지 못했다.
“저, 저기……!”
누리가 놀라서 말했다. 그러자 병사 2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라킨은 버트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검을 거두며 말했다.
“이름은?”
“실버트리…… 친구들은 버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빨리 마무리 짓고 돌아오도록.”
“그 말씀은……?”
“20분. 그 후에는 우리가 진입한다.”
“아, 네! 알겠습니다! 빨리 가요!”
버트는 다급하게 돌아서며 말했다. 누리와 황금궁사는 라킨을 한 번씩 보다 버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그들이 헥실을 물리친 장소 너머로 가는 동안 라킨은 턱을 괴었다.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라킨은 버트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에게 내던져진 살기. 그건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그만한 살기를 뿜어내는 자가 어찌하여 목을 그냥 내줄 뻔했는가.
이모탈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다른 의미로 죽는 걸 싫어했다. 분명 그들의 불사성은 효용성이 있고 몹시 귀찮았지만 그 덕분에 지배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무엇보다 특정 방식을 이용하면 이모탈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이상 그들을 통제하는 건 문제 없었다.
그런데 버트는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몸을 던졌다. 검을 견딜 정도로 몸이 튼튼해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죽음을 각오했다?’
이모탈 중 죽음에 초연한 이들도 많았다. 그렇다고 자살을 하거나 목숨을 내던지는 이들이 흔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았다.
누가 봐도 버트의 반응은 이례적이었다.
‘그게 아니면……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버트의 생각이 어떻든 라킨에게는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정답은 이후에 찾으면 된다.’
라킨은 검을 수납하고 병사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20분 후 진입한다. 이 무덤을 정리한 뒤에는 만트라 대협곡으로 이동한다.”
*
버트의 도박은 반쯤 성공했다. 그녀가 우려한 건 라킨의 돌발행동에 대응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지나치게 자신을 내보이면 눈에 띈다. 그러면 이후에 할 일에 영향이 갈 게 분명했다. 버트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다. 커프스 골렘을 상대할 때나 그 전부터 조절했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버트에게는 데이터가 없었다.
플레이어들의 평균값. 랭커들의 수준. 그 어떤 것도 버트에게 입력된 건 없었다. 파티 플레이 횟수가 한 자리 수인 그녀에게는 어려운 처사였다.
그래도 라킨의 공격이 상당히 빠르고 위협적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걸 손쉽게 피해버리거나 막게 되면 큰일이 벌어지란 것도 알았다.
베톰 왕국이 거의 최종 지역인데 그곳의 왕자가 벌이는 공격이었다. 적당히 자존심을 챙겨주고 자신의 안위까지 지키는 타협점.
어느 정도 당해준다.
그래서 버트는 서서히 베어오는 그의 검을 보고 무심코 피하려던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적당히 목이 스칠 정도로만 조절했다. 이러면 아직 숨긴 힘을 들키지도 않고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라킨의 검이 멈췄다. 오히려 버트의 그런 대처가 눈에 띄었다. 버트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뿌듯해하며 헥실이 지키고 있던 마지막 문을 열었다.
“과연 뭐가 있을까……!”
“방금까지 그런 일이 있었는데……”
“보상은 중요하다.”
황금궁사는 누리의 걱정스러워하는 말에 한 마디로 대답했다. 지금 그도 버트의 기분에 공감하고 있었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낡아빠진 문 너머의 공간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그리고 벙찔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집이었다. 곳곳에 나무 가구가 놓여있는 주거 공간이었다. 그것도 혼자 사는 게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 사는 듯한 집이었다.
“어……”
버트는 먼지 하나 쌓이지 않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하며 액자가 얹어진 탁상. 조잡해보이는 침대와 옷장. 방금까지 전투를 벌였던 헥실이 머무는 곳이라고 믿어도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보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거…… 사진이네요.”
누리는 액자에 든 사진을 보며 말했다. 남녀의 사진. 하나는 모르는 여성이었지만 다른 한 명은 명백히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헥실.”
황금궁사는 액자 속 남자를 보며 말했다. 버트도 그의 말을 듣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럼 여긴 헥실의 사는 집이겠네요.”
“살았던 곳일 거예요.”
버트의 말에 누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안은 지나칠 정도로 깨끗했다. 이곳은 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살려고 만든 곳을 보존한 거 같았다.
“찝찝하군.”
황금궁사의 간결한 한 마디는 그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헥실의 뒷배경을 모르는 건 버트뿐이었다. 그런 버트조차 이 내부의 상황을 보고 무슨 일인지 알아차렸다.
“음…… 그냥 갈까요?”
황금궁사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모습에 누리와 버트도 내부를 뒤졌다. 옷장을 열고 침대 밑도 확인하고 서랍장까지 보았지만 특별한 건 보이지 않았다. 버트는 묘한 눈으로 옷장을 보고 있었지만 굳이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내부 수색을 했다.
그러던 중 황금궁사가 무언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액자를 들더니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뒤에 적힌 글자를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게 적혀 있었네요? 어디…… 아모르 아테누스.”
누리가 그걸 읽자 액자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나왔다. 빛은 사방팔방 흩어지나 싶더니 옷장에 스며들었다. 낡은 옷장 안에 백금과 청색 금속으로 이루어진 보석함이 놓여 있었다. 방금까지 없었던 상자가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숨겨 놨군요.”
“와……”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다 황금궁사가 먼저 손을 뻗어 상자를 열었다.
끼익
화사한 빛. 상자에 있던 건 수수해보이는 목걸이였다. 가운데 박힌 푸른 보석을 빼면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버트가 얼핏 보았을 때 그저 그런 목걸이였지만 황금궁사에게는 아니었나보다.
“맙소사.”
황금궁사가 감탄하며 누리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누리는 그의 반응을 보고 각오하고 본 건 데도 감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누리의 눈에 보이는 건 목걸이에 붙은 각양각색의 옵션이었다.
마법 저항력에서부터 각종 상태이상 저항력, 주문 술식의 강화, 방어력. 자잘한 스테이터스 상승은 물론 보기 드문 행운의 옵션까지 달려 있었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옵션 가장 아래에 달린 ‘???’가 서넛은 달려 있었다.
밝혀지지 않은 옵션. 이건 상황에 따라 대박이 날 수도 있고 쪽박일 수도 있었다. 도박 형식으로 붙는 게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효과이기에 주변 상황이나 아이템의 이름, 아니면 구성 재료를 통해 유추가 가능했다.
『헥실의 추억이 담긴 목걸이』
그리고 보존된 듯한 공간. 헥실이 부리던 망령의 힘. 그것만 본다면 절대 좋은 옵션이 나올리 없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목걸이의 나머지 옵션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이 정도면 랭커들도 탐낼만한 극상의 아이템이었다.
누리는 이번에 버트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버트는 목걸이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누리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그녀의 덤덤한 반응은 황금궁사와 누리가 계속 품고 있던 의문을 증폭시켰다.
“……별로인가요?”
“네? 아, 아뇨. 그냥 저한테 목걸이는 안어울려서요. 이미 찾고 있는 세트 아이템도 있고요.”
버트의 변명은 생각보다 적절했다. 안 어울린다는 건 어색했지만 세트 아이템이란 말에 두 사람 다 납득했다.
마스터의 자격 요건. 다름 아닌 세트 아이템을 전부 모으는 것이었고 거기에 다른 아이템이 낄 자리는 없었다. 물론 대부분의 세트가 좋은 건 아니었고 지금 이 목걸이를 거절할 효과는 드물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버트의 강함은 설명되지 않았다. 누리는 몰라도 황금궁사에게는 그것만큼 좋은 설명이 없었다.
“그럼 일단 아이템 배분을……”
“3천 골드.”
황금궁사의 담담한 한 마디에 누리와 버트가 그를 보았다.
“최소 호가라 생각한다. 아래 옵션을 제하고도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
누리도 그의 의견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엄청난 옵션의 아이템은 상상 이상의 값어치를 가졌다. 특히 좋은 옵션의 악세사리는 웬만한 아이템의 몇 배의 값을 가졌다. 목걸이나 반지는 직업이나 상황을 불문하고 누구라도 낄 수 있었다. 그리고 판타지아 특성 상 목걸이를 팔에 두르거나 해도 효과를 볼 수 있었으니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그랬기에 황금궁사는 물론 누리도 이 목걸이를 탐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쓰는 게 아니라도 비싼 값에 팔거나 현물 거래만 해도 상당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버트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아직까지 골드를 현찰로 바꾼 적도 없거니와 가진 골드를 일일이 세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이 말한 금액을 지불할 수 있단 것만 생각했다.
“천 골드.”
버트가 말했다. 황금궁사와 누리가 황당한 표정으로 보았다.
“2명이서 천 골드씩 나눠갖고 나머지 한 명이 갖는 건 어때요?”
“방금 한 말 못 들으셨어요……? 3천은 최소에요. 잘 하면 5천, 아니 그 이상을 받을 수도 있다구요.”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하는 거니까 최소 금액으로 나눠갖고…… 한 사람이 가지는 거죠.”
“무슨 의미냐는 거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이득이 있단 거지?”
버트는 눈을 데굴 굴렸다.
“파티 플레이를 한 기념……?”
“후우.”
황금궁사는 진심으로 한숨을 뱉었다.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를 제안이었다. 누가 이걸 덥썩 문단 말인가.
“버트 님은 같이 파티를 맺은 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 이상한가요?”
누리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고민했다. 황금궁사는 그녀가 답을 내놓을 때까지 기다렸다.
“저는 좋아요. 그러면 버트 님은 입찰하지 않으실 거죠?”
“네.”
“어리숙해.”
황금궁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누리는 고개를 가로 젓더니 ‘주머니’에서 천 골드 뭉치를 꺼내 두 사람에게 건넸다.
“제가 직접 착용하고 싶어요. 버트 님이 말한 그 인연이란 것도 재밌고요. 궁사 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황금궁사는 버트를 보았다. 순진무구한 눈빛. 누리와 짜고 치고 이런다고 보기에는 너무 어리숙한 눈빛이었다. 기대에 가득 찬 눈은 자신의 뜻에 동조하기를 바라는 거 같았다.
실상 이걸 내칠 수도 있었다. 이런 대박은 ‘보스헌터’ 길드에서도 드물다고 했다. 하물며 갑작스레 짜인 파티는 어떨까.
“나는 끼지 않을 거다. 그래도 탐나는군.”
“그러면 궁사 님이 가지시면 돼요.”
누리는 황금궁사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그는 짙은 한숨과 함께 목걸이가 아닌 골드 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나중에 이런 기회가 온다면 내가 가져간다.”
“좋을대로 하세요. 버트 님은요?”
“저는 괜찮아요.”
버트는 누리가 내민 주머니를 받았다. 누리는 그 자리에서 목걸이를 착용했다. 그리고 몇 번 자신의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귀속 저주나 강제 패널티는 없네요.”
“다행이군. 그럼 돌아가지.”
*
라킨은 약속한 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버트 일행이 돌아오는 걸 보자마자 손짓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척 보기에도 그들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무사할 거 같지 않았다.
그걸 본 버트는 라킨을 보며 말했다.
“저…… 한 가지 부탁 드려도 될까요?”
“뭐지?”
버트의 돌발행동! 누리와 황금궁사는 긴장한 얼굴로 버트를 보았다.
“너무 어지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방금 갔다 와보니 저기에 헥실이란 사람이 추억을……”
버트는 말을 하면서 움츠러들었다. 라킨이 서늘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간직해놓은 거 같은데……”
“추억? 뭔 소리지?”
“아까 싸울 때도 그렇고…… 뭔가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던 걸 그리워한 거 같아서요. 그러니까……”
“전원 정지!!”
방으로 진입하려던 병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라킨은 버트에게 한 발 다가갔다.
“그러니까 베톰 왕국의 영역을 함부로 점거한 마법사에게 추억이 있고, 그가 한 것처럼 우리가 더럽혀선 안된다 그 뜻인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조금 듣기 그럴 수 있긴 한데…… 비슷하죠……?”
“거기서 뭘 찾았지?”
버트는 그 말에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거짓이냐 진실이냐. 누리는 이미 제 값을 주고 아이템을 가졌다. 라킨이라면 그걸 가져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고민하던 찰나 누리가 자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들어보였다.
“이겁니다.”
“목걸이? 그것 외에는 없었나?”
“네. 보존되어 있는 내부를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만 보석함에 담긴 목걸이 외에는 없었습니다.”
라킨은 누리의 답변을 듣고 턱짓했다. 병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갔고 보석함 하나를 그에게 가져왔다.
라킨은 보석함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마법이 걸려있군. 그래. 그 목걸이는 마법사의 추억 중 핵심이란 건가?”
라킨은 버트를 보며 말했고 버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가져간다. 그러면 네가 말한 더럽힌다는 뜻과 상통하지 않나? 어쨌든 보존해야 할 추억에서 일부를 가져갔으니까.”
갑작스런 논파. 버트가 입을 까딱이며 대답하지 못하니 라킨이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내부 탐사, 던전 탐험, 지형 정찰, 지역 순회, 그런 허울만 좋은 말로 포장하던 이모탈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지?”
라킨은 보석함을 병사에게 던져주었다.
“네가 말한대로 추억을 비롯한 것들이 무너진 게 있다. 베톰 왕국이 만트라 협곡에서 건너오는 드래곤과 싸우기 위해 건설했던 31망루. 최초로 젠카 사막의 이상 현상을 관측했던 마슐리카 첨탑. 베톰 왕국에 헌신한 귀족들을 안치한 루델린 영묘. 최초의 나이트 마스터의 검을 전시해둔 오스트 박물관. 그곳을 비롯하여 갖가지 기념비적 문화재와 유산이 훼손되었다.”
라킨은 버트의 눈을 직시했다.
“지금처럼 좋은 ‘아이템’을 먹는다든지, 업적을 달성해야 한다든지, 최초의 명예를 얻겠다든지, 온갖 헛소리를 지껄이며 짓밟고 무너뜨렸다. 물론 그것도 과거의 일이지. 수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이모탈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최강의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하니 그들도 설설 기더군. 오만하고 겁이 없는 건 여전하지만 말이야.”
라킨은 그렇게 말하며 누리를 보았다.
“너희 이모탈이 했던 짓과 내가 하려는 일. 그게 다를 게 있다고 생각하나?”
“그…… 렇게 말하시니…… 다를 게 없긴 하네요.”
버트는 멋쩍게 웃으며 옆으로 물러났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방해라고 한다면 그 목걸이를 가져간 것도 방해다. 그것까지 돌려줘야 하겠다면?”
버트는 누리를 돌아보았다.
“……죄송해요. 혹시 가능할까요?”
누리는 버트와 라킨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나직하게 한숨을 뱉으며 목걸이를 풀어 내밀었다.
“여기요. 아직 숨겨진 힘은 해석하지 않아서 몰아요. 그래서 이게 위험해질지 더 나아질지 장담할 수 없어요.”
누리의 말에 라킨은 목걸이를 보았다. 그러다 다시 버트에게 시선을 두었다.
“딱히 반박하지 않는 군?”
“왕자님 말씀이 딱히 틀린 게 없으니까요……? 저희가 하지 않았다고 해봐야 변명일 뿐이고 그걸 옹호해봐야 궤변일 뿐이니까요.”
“그런가.”
라킨은 보석함에 시선을 두었다.
“거래를 하지. 목걸이는 가져가도 좋다. 여기도 더 건드리지 않겠다.”
“거래요……?”
“우리 일을 도와줘야겠다.”
*
결과적으로 누리와 황금궁사는 젠카 사막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들은 라킨에게 고액의 보상금을 약속받고 떠났다.
다만 버트는 그들과 다른 길로 향했다.
만트라 대협곡!
판타지아에서 최종 지역이라고 불리는 극악무도한 필드로 향하게 되었다. 어차피 버트로서는 크게 나쁠 일이 없었다. 아직 라이에게 연락도 안 왔거니와 스터그의 부탁도 들어줄 수 있었다.
“그래도 잘 풀려서 다행이다.”
버트는 한숨을 쉬며 마차에 늘어졌다. 지금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는 만트라 대협곡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하고 있었다. 누리와 황금궁사는 이전에 헤어졌고 지금 버트 홀로 몇 개나 되는 게이트를 타고 있었다. 덕분에 중증 텔레포트 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나마 지금 향하는 곳이 마지막이라고 하니 다행이었다.
[ 그릇의 포용력에 감탄한 것이죠. ]
‘전혀 아닐 걸.’
버트는 속으로 웃으면서 창밖을 보았다. 세트 아이템 때문에 잠깐 찾아온 베톰 왕국. 설마 그곳의 왕자에게 직접 임무를 하달 받게 될 줄이야. 문득 큐엘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고 기한도 넉넉했으니 한 번 쯤 방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하도시 라존. 세트 아이템 중 하나가 있던 그곳으로 다시 가보기로 했다.
*
라킨은 젠카 사막으로 향하면서 부관에게서 받은 문서를 확인했다.
“몇 달 전에 이곳을 방문하였다고?”
“네.”
라킨은 무심하게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스카웃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따져 보면 임시 고용이지.”
부관은 호기심이 들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즉흥적으로 이모탈을 고용하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것도 가차없이 이모탈을 베어 넘기는 라킨이 그런 것이다. 병사들의 보고를 들어보면 이모탈이 그가 하려는 걸 막아섰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라킨은 목을 베지 않고 멈췄다고 했다.
뭔가 있다.
그저 그게 끝이었다.
아무리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고는 하나 1왕자 다음 가는 권력자였다. 스스로 계승권을 포기하고 충성을 맹세한만큼 그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그런 왕자의 뜻에 의문을 표하거나 호기심으로 말을 붙일 수 없었다.
“흠.”
라킨은 문서를 부관에게 넘겼다.
“젠카 사막 안정화는 어느 정도 진척됐지?”
“퍼스트 제네레이션에서 2할 정도 안정시켰습니다. 각 지역마다 다섯에서 여덟 조각으로 나뉜 정령핵을 조합하면 일부 정령을 되돌릴 수 있다고 합니다.”
“2할? 그럼 이제 다섯 지역을 진정시켰단 건가?”
“그렇습니다. 한 지역은 지금 진행 중이라고 하니 곳 여섯 지역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군.”
라킨은 심드렁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특이한 이모탈들. 비단 버트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반응도 독특했다. 특히 그가 눈여겨 본 건 보석함의 존재였다.
분명 목걸이를 가져갔다. 그게 가치가 있는 물건이란 건 라킨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보석함을 두고 간 걸까?
보석함의 가치는 못해도 천 골드 이상! 함을 이루는 재료도 재료지만 세공된 솜씨나 각인된 마법 전부 최상급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목걸이만 가져갔는가.
무지해서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멍청했다면 앞서 한 행동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가치에 연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목걸이를 가져간 행동 때문에 설명하기 어려웠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보상을 바라는 건 보통 이모탈과 같다. 하지만 마지막 양심 때문에 보석함까지 가져가지 않았다.’
이모탈들은 지독한 욕심쟁이였다. 조금이라도 값이 나가는 물건이다 싶으면 전부 가져갔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가치 있는 건 전부 사라졌고 가치 없는 건 전부 박살났다. 그런 행동 덕분에 100년의 유물들이 망가졌고 조잡한 금 세공품은 도둑맞았다.
그러나 그들은 보석함을 가져가지 않았다. 라킨의 추측대로 액자에 담긴 사진이 그들의 양심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 덕분에 라킨이 목걸이를 뺐거나 목숨을 취하지 않았다.
“혹여 사막에 사정이 있는 자의 유물이 있다면…… 그걸 존중해야겠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정치 싸움으로 몰락한 헥실과는 상황이 다를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녀석은 따지고 보면 민간인. 비록 언데드가 되어 영토 일부를 점거하였다고는 하나 그 앞의 일을 묻어둘 수는 없겠지. 전후 사정은 확실히 알아야 처분을 정할 수 있다. 사정이 딱하다고 무작정 옹호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라킨은 무심하게 부관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군을 이끌고 포섭한 이모탈 둘과 합류해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가르지아의 명령을 따라라.”
“알겠습니다.”
“나는 왕성으로 돌아간 뒤 참전하겠다.”
“예.”
라킨은 홀로 말을 돌려 방향을 바꾸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라킨은 세 명의 이모탈을 떠올렸다. 그 다음 판테스 왕국과 키런 왕국의 이모탈 귀족을 떠올렸다.
‘한 번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End.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