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96 헥실의 무덤 下
* * *
철걱
버트가 발을 내디딘 곳이 조금 가라앉았다. 버트는 즉시 검을 세우며 정면을 보았다.
“신성.”
누리는 간단한 주문으로 자신과 황금궁사를 반투명한 장막으로 감쌌다.
츠르릇
바닥에서 벼락이 솟구쳤다. 벼락은 장막을 뚫지 못했다. 버트의 몸에도 별 피해를 주지 않았다.
“후우……!”
버트는 먼지를 털 듯이 벼락을 털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일단 함정은 네 종류가 끝인 거 같네요.”
계단 아래로 들어선 이후로 몇 가지 함정이 그들을 반겨주었다. 그 중 하나가 지금처럼 발판을 밟았을 때 마법이 쏘아지는 함정이었다. 속성은 각기 달랐지만 12개 가량의 함정이 여러 방향에서 마법을 발동시켰다. 그때마다 지금처럼 간단히 넘기거나 막아냈다.
이외에도 언데드가 몰려들거나 지형이 움직이며 공격하는 함정, 독침이나 독가루를 뿌리는 함정 따위가 있었다. 그들이 돌파한 함정만 해도 거의 마흔 개는 넘었다. 층이 바뀌고 몇 군데는 빠르게 돌파하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버트는 심각한 얼굴로 돌아보며 말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서려 있었다. 처음 검은 동굴을 돌파했을 때처럼 게임의 즐거움이 솟구쳤다. 거의 잊고 있던 재미였으니 흥미가 솟구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유기적인 파티 플레이! 근딜과 원딜, 힐러의 조합으로 던전을 돌파하고 있었다.
‘감동적이야.’
판타지아를 시작한지 반 년이 넘어가는 데 난생 처음 게임처럼 하고 있었다. 버트는 검을 든 손을 부르르 떨며 환희에 빠졌다.
그리고 이 모습을 누리와 황금궁사가 지켜보았다.
‘뭐하는 놈이지?’
‘이상한 사람이야.’
그들도 게이머인만큼 눈썰미가 있었다. 베타테스터였던 그들의 눈에 버트의 강함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를 대할 때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전체적인 신체 능력도 강했다.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그녀가 ‘스킬’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스킬을 안 쓰고도 후반 지역에서 활약한다? 특히 황금궁사는 그 점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간간이 나타나는 언데드들은 지상에 있던 것들보다 강했다. 그런데도 버트의 검격은 무뎌지지 않았다.
강하다.
이 정도면 랭커 중 최강이라 불리는 공대장과 견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그녀의 스펙만 본다면 웬만한 랭커랑 비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걸까.
은거기인은 많았다. 당장 올 클래스 매지션 라이벨이나 어쌔신 마스터 에니스트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름을 안다고 해도 랭커들처럼 유명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버트는 너무 뜬금없었다.
‘의도적으로 숨겼다.’
황금궁사는 그녀를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알려지지 않는 건 드물었다.
현질? 아무리 돈을 때려부어도 이 정도로 강해지는 건 힘들었다. 그건 판타지아의 시스템 때문이었다.
강해도 죽을 수 있다.
약해도 죽일 수 있다.
스테이터스가 있을지언정 절대적이지 않다.
이 규칙을 절대 벗어나지 않았다. 비싼 아이템을 둘둘 둘렀어도 급소를 찔리면 죽었다. 설사 템빨을 받는다고 해도 전투 센스까지 커버되는 건 아니었다. 판타지아에도 보정 시스템이 있지만 어설픈 강함은 육체와 괴리감을 불렀다. 활을 쓰는 황금궁사만 해도 그걸 절실히 느꼈다.
보정은 보정일 뿐이다. 아무리 좋은 활과 화살을 써도 기본이 나쁘면 잘 맞지도 않고 데미지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건…… 연기인가?’
버트는 강하다. 이건 부정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녀의 반응이었다.
던전을 진행할수록 종종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보였다. 전투의 환희라고 보기에는 적들이 맥없이 쓰러졌다. 그렇다고 겁을 먹었다기에는 앞으로 잘 나아갔다. 뭐든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 덕분에 황금궁사는 물론 누리 역시 혼란스러웠다.
‘대리 계정일리도 없지. 망막 스캔에 뇌파까지 검사한다는데…… 그럼 왜 싸우고 덜덜 떠는 거야? 게임이 안 맞는 건가? 아니면 진짜 즐거워서 버틸 수 없는 건가?’
그들로서는 이 막강한 존재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한 스펙을 얻기까지 게임적인 경험을 쌓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스킵하고 엉뚱한 짓거리(?)만 하다가 처음으로 정상적인 경험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서 오는 기쁨을 헤아릴 수 없었다.
1년도 안 된 캐릭터가 랭커와 견준다? 그렇게 두 사람의 혼란과 오해는 쌓여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버트는 이 순간을 만끽했다. 언데드들은 냄새나고 징그러웠지만 파티 플레이라는 기쁨에 묻혔다. 물론 아예 이질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많이 무뎌졌네.’
몬스터라고 해도 그 본체는 인간이었다. 썩어 문드러진 피부나 골격만 봐도 그것들이 인간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키런 왕국으로 향할 때 공격했던 플레이어들이나 그 외의 인간형 적들도 떠올랐다.
인간형 적을 처치하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다른 희열에 감춰질 정도로 감각이 무뎌졌다.
‘동기화랬지.’
버트가 경계하는 건 이 순간의 감각이 현실로도 전해지는 것이었다. 이러다 현실에서도 무슨 짓을 벌이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러지 않을 거라고 자신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어떨지 몰랐다.
‘근데 외견이 변했단 건 혹시 다른 것도 가능해지나? 마기도?’
버트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아가다 거대한 문과 마주했다. 버트가 앞장서서 문에 손을 댔다. 그러자 녹색빛이 흘러나왔다.
상당한 맹독……! 언데드조차 단숨에 녹여버릴 극심한 독이었다. 그런데도 버트는 멀쩡히 서있었다. 기도를 외우려던 누리조차 입을 벌리며 바라보았다.
끼이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건 내려온 층수만큼 거대한 공동이었다. 집 몇 채는 들어갈 법한 돔 구조물에는 큰 덩치의 언데드가 있었다.
“커프스 골렘……!!”
“기도.”
누리가 경악해서 소리쳤다. 황금궁사는 차분히 말하며 세 종류의 화살을 꺼냈다.
커프스 골렘은 언데드 계통 몬스터 중 최악으로 손꼽혔다. 단단한 주제에 마법도 잘 먹히지 않았다. 신성 마법도 생각 외로 먹히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4미터 남짓한 크기로 약한 개체로 보였다.
“작네……?”
버트는 무심결에 한 마디 던졌다. 분명 커프스 골렘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었다. 악몽의 성에서 본 건 2배에서 3배 정도 거대했고 훨씬 투박한 느낌이 강했다. 반면 눈앞의 녀석은 조잡했다.
크오오오!!
골렘은 사람 몸통만한 주먹을 내질렀다. 표적은 당연히 가장 가까이 있는 버트!
“꺼트리는 빛을 태워라! 불사르는 저주를 꺼뜨려라!”
누리가 두 손을 뻗으며 동시에 두 가지 기도를 외웠다. 하나는 버트에게 걸린 축복을 잠깐 강하게 해주는 기도, 다른 하나는 커프스 골렘의 모든 능력을 낮추는 기도였다.
이어서 황금궁사가 골렘의 가슴에 세 종류의 화살을 쏘았다.
「금속을 녹이는 화살」 「유니콘 화살」 「폭염살」
골렘의 단단한 장갑을 약하게 만들고 그 부분을 꿰뚫는다! 이어서 내부부터 터뜨리는 화살을 쏘아냈다.
쩌엉
하지만 골렘의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폭발에 휩쓸렸을지언정 녀석은 꿋꿋하게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주먹은 버트를 후려갈겼다.
“미친”
황금궁사는 추가로 화살을 매겼다. 그러다 시위를 당기려다 말고 버트를 보았다.
“어?”
누리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골렘은 강하다. 단단한만큼 그 힘도 괴랄했다. 분명 버트는 공격에 적중됐고 두 사람은 후속 조치를 취하려 했다.
그런데…… 버트가 움직이지 않았다. 분명 정면에서 얻어맞았으니 날아가거나 나뒹굴어야 했다.
하지만 버트는 굳건히 서있었다. 밀려나지도 않았다. 그걸 알아챈 순간 버트가 녀석의 두터운 손목을 감싸 안았다.
“흡……!”
버트가 힘을 주며 잡아당기자 골렘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은 골렘이 앞으로 기우뚱거리자 버트의 몸이 앞으로 쏘아졌다.
푹
그녀의 검이 골렘을 꿰뚫었다. 황금궁사가 흉부에 맞췄던 부분이었다.
콰작
한순간 골렘이 움찔 떨며 몸을 비틀었다. 본능적으로 내부의 핵을 지키려는 듯 했지만 이미 검이 꿰뚫은 뒤였다.
그르륵
골렘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다. 그러다 두 팔을 확 펼치더니 버트를 끌어 안았다.
“으웃”
버트는 힘으로 골렘을 뜯어내려 했다. 그러나 몸을 감싸는 화사한 빛에 더 힘을 주지 못했다.
누리의 기도였다. 몸을 보호하는 빛이 골렘의 포옹을 저지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씨앗이 힘을 삼키지 않았다. 뒤이어 버트의 얼굴 옆으로 화살이 날아왔다. 끝이 뭉툭한 화살은 골렘의 머리를 후려쳤고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버트는 그 틈을 노리고 압박에서 벗어났다. 골렘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마워요!”
버트는 해맑게 웃으며 검을 들었다. 누리는 그 미소에 손을 흔들어주었다. 다만 황금궁사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저 건너편을 보았다. 그제야 버트도 고개를 돌렸다. 골렘이 막고 있던 건너를 바라보니 흐릿한 형체를 볼 수 있었다.
황금궁사는 누리를 보았다. 누리는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차례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럼……”
누리가 기도를 외울 준비를 하자 흐릿한 형체가 덩치를 키웠다.
[ 묘를 침범하지 마라! ]
묘지기 헥실. 그의 본체는 지하에서 사념을 키워나간 유령이었다. 그의 쩌렁쩌렁한 외침에 지하가 흔들렸다.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질 정도였으니 세 사람에게 전해지는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상태 이상 걸렸나요!”
“위축 됐다.”
“전 괜찮아요!”
“위축…… 히든은 푸는 데 조금 걸려요!”
“지켜 드릴게요!!”
버트가 황금궁사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거대화한 헥실은 머리를 쥐어 뜯으며 몸부림쳤다.
[ 무너뜨려주마!! 니리스의 무덤을 파헤친 대가를 치러라!! 나의 저주를 받아들여라!! 네놈들의 혼을 뭉쳐 모든 산 자를 짓밟을 것이다!! ]
헥실이 포효하자 사방에 희끄무레한 기운이 소용돌이 쳤다. 그 사이 기도를 외운 누리가 황금궁사의 상태 이상을 풀어주었다.
“조심하세요. 히든 상태이상을 걸었다는 건 최소 엘리트 몬스터. 재수 없으면 보스급 엘리트로 산정될 수 있어요!”
“알겠습니다!”
“주의하지.”
그렇게 버트 파티는 헥실의 실체와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이 싸우는 동안 지하로 침입하는 이들이 있었다.
*
베톰 왕국의 2왕자 라킨. 그는 말에서 내려 병사 열 명을 대동한 채 지하로 내려갔다.
그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단 하나. 현 왕위 계승자인 1왕자의 명령 때문이었다.
헥실의 무덤은 요충지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곳을 지금까지 방치했던 건 영토로서의 가치도 없었고 국경선으로 두기에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냥 두는 게 다른 나라의 침범을 막기 유용했다.
그러나 정책이 바뀌었다. 1왕자는 왕국 곳곳에 있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로 했다.
그 중 첫 번째가 젠카 사막. 미친 정령들이 난리를 치는 이곳은 사시사철 피가 마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이름으로는 피로 젖어있는 사막이라 불렸다. 그 어떤 생명체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는 이곳은 나이트 마스터 가르지아가 출정했다. 그리고 퍼스트 제네레이션 길드 역시 고용했다.
두 번째는 만트라 대협곡. 수많은 드래곤 때문에 위협적인 이곳은 컴뱃 마스터 아펠릭 백작이 출정했다. 이곳은 모든 대륙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곳이었으니 장기적인 안정화를 추진하기로 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헥실의 무덤. 이곳은 젠카 사막처럼 당장 처분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여기를 처리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다른 나라로의 공격 거점. 특히 이 척박한 땅을 보급로로 만든다면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스카이 왕국이나 숲지에 둘러싸인 살리마 왕국을 공략할 수 있었다. 물론 아무런 피해 없이 무덤을 점령했을 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사상자가 생겨난 채 무덤을 정리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게 됐다.
“헥실에 대한 정보는 그게 끝인가?”
“예, 그렇습니다. 3대 정보조직에서 흘러나온 정보를 종합했을 때 공통점이 있는 건 그 뿐이었습니다.”
“본체가 아닐 수 있고 지하에 진짜가 있을 거라고 유추한 곳은?”
“미래의 눈 뿐이었습니다.”
“1왕자께 해당 내용을 전달하고 거래 규모를 조절하라 일러라.”
“네.”
라킨은 거만한 어투로 말했다. 병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지금 그들은 위험한 지역에 온 것치고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것도 그럴 게 베톰 왕국이 괜히 최강국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라킨이 데려온 병사들만 해도 다른 곳에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전 대륙에 선전포고를 했던 셀기디어조차 이곳에 노스페라투 기사들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베톰 왕국 역시 그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괜히 최강국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서쪽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만한 규모의 땅을 지배하는만큼 군의 양과 질이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라킨은 그들 위에 군림하는 왕자였다. 타고난 태생도 있었지만 스스로가 단련을 게을리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의 무력이 약할 수 없었다. 그저 마스터의 수준에 오르지 못했을 뿐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갖추었다. 만일 왕위가 힘으로만 결정되었다면 그가 따놓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랬기에 라킨은 물론 그를 따르는 병사들도 태연했다.
“먼저 들어온 것들이 있다더니 요란스럽게 싸우는 군.”
라킨은 이미 발동된 함정이나 박살난 언데드들을 둘러보았다. 한 방 한 방이 깔끔한 일격이었다. 검도 그렇고 머리를 꿰뚫은 투사체도 그렇고 상당한 실력자였다.
‘황금궁사란 녀석인가.’
라킨은 랭커들은 어느 정도 알아보았다. 들어가기 전에 이모탈 길드원 하나를 처분할 정도로 이모탈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강자들은 예외였다. 어느 정도 힘만 있다면 유용하게 쓰는 게 좋았다. 그러니 좋은 말이 될 수 있는 랭커들은 알아두는 게 좋았다.
‘그럼 다른 하나는 어쌔신 마스터인가?’
라킨은 조금 기대감을 갖고 나아갔다. 계속 바닥 아래에서 들리는 굉음만 본다면 격전을 벌이는 듯 했다. 이 정도면 헥실이 사전에 알아본 것 이상으로 강하고 내부를 토벌 중인 길드원들도 만만치 않게 강하다는 소리였다.
라킨은 머릿속에서 이모탈 길드들을 하나둘 떠올리고 분별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짚이는 길드가 없었다. 그나마 라킨이 인정한 퍼스트 제네레이션 길드는 대부분 젠카 사막에 있었다. 그 외에는 보스 헌터나 동족상잔 길드 정도만 알았다. 심지어 그것마저도 아는 정도였다. 퍼스트 제네레이션처럼 전원이 특정 부문에서 정예가 아니라면 기억할 가치가 없었다.
그렇다면 신흥 길드가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쿠르릉
라킨의 상념은 진동과 함께 흐려졌다. 뭐가 됐든 직접 마주하면 될 일이었다. 얼마 안 가 그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
버트 파티는 온 신경을 집중하며 전투에 몰입했다. 거대한 헥실은 직관적이지만 치명적인 공격을 자주 벌였다.
스치기만 해도 강력한 마비에 걸리거나 순식간에 얼어붙는 혼령이 쏘아졌다. 어느 때는 문에서 나왔던 독처럼 지독한 맹독 가스가 흩뿌려지기도 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지독한 저주가 내려지기도 했고 방향감각과 육체의 제어권을 상실하는 정신 나간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그야말로 상태 이상의 덩어리였다. 만일 누리가 틈틈이 상태이상을 풀어주지 않았다면 전멸했을 것이다. 버트조차 앞으로 달려가다 바닥을 향해 나자빠질 정도였으니 다른 두 사람도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파란 유령! 냉기에요!”
“따스한 계절의 빛이여……”
버트는 헥실이 뿜어내는 유령을 보며 소리쳤다. 누리는 즉시 기도를 외웠고 황금궁사는 「성수를 머금은 화살」을 매기고 쏘아냈다.
[ 크학!! ]
유령은 황금궁사를 향해 쏘아졌다. 버트는 유령에게 붙기 직전에 검을 휘둘렀다. 아주 조금이지만 궤도가 틀어졌고 황금궁사는 몇 걸음 걷는 것으로 유령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유령은 크기가 작아질 때까지 끝없이 빙글거리며 따라왔다. 그리고 헥실은 유령을 하나만 쏘아내지 않았다.
헥실은 다섯 종류의 영혼을 쏘아냈다. 그러나 이미 상태 이상을 예방한 누리가 새로운 기도를 외우면서 세 영혼을 지워버렸다. 2개의 영혼은 버트가 몸으로 부딪쳤다. 그러자 영혼의 크기가 조금 줄어들었다. 속도 역시 느려졌다. 그래서 황금궁사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누리가 방어막을 세워서 방비할 수 있었다. 덕분에 황금궁사는 추가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 크하악!! 깨어나라……! ]
헥실이 괴로운 소리를 내며 포효하더니 반투명한 기사들을 소환했다. 수 십 구의 유령기사들은 대열을 갖추고 사방에서 버트 파티를 향해 전진해왔다.
“소환 패턴이에요!”
“두 곳 막아볼게요!!”
“신이시여”
누리는 다급하게 손을 모아 기도를 읊었다.
{잊힌 신의 은총}
모든 언데드를 부정하고 살아있는 것들에게는 축복을 내리는 빛의 땅이 펼쳐졌다. 하지만 유령기사들은 생각보다 강했다. 지상의 언데드들과 달리 눈에 띄게 느려지지도 않았고 피해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큰 걸 쓰지. 지켜라.”
“네!”
황금궁사는 ‘주머니’에서 화살들을 촤르륵 뽑아냈다. 버트는 검을 가로로 들더니 가장 근접한 기사 대열을 향해 전진했다.
쾅!
유령인데도 물리력은 있었다. 버트가 온 힘을 다해 부딪치자 기사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그 후 버트는 핀볼처럼 근접하려는 기사 대열을 향해 번갈아가며 부딪치며 가까이 오는 걸 저지했다.
[ 전율하는 영혼이여! ]
헥실이 머리를 뜯으며 소리쳤다. 그의 비명이 공동을 울렸다. 듣는 사람에게 큰 혼란을 주는 포효였다. 다행히 누리가 간발의 차로 혼란을 막아주었고 황금궁사는 스킬을 쓸 준비를 끝낼 수 있었다.
촤르륵
황금궁사가 활을 높이 들었다. 시위에는 수 십 발의 화살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급할 때가 아니라면 자제하는 스킬. 그리고 황금궁사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한 스킬!
“혜성의 무리.”
버트는 다음 기사 대열에 덤비는 것도 잊고 황금궁사를 보았다.
그건 황금색 폭죽이었다. 잠깐 반짝이나 싶더니 여러 빛줄기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렇게 쏘아진 빛나는 화살은 폭발하듯이 흩어지더니 유령기사들과 헥실을 향해 쏘아졌다.
슈슈슉
기사들은 각자 다양한 부분에 화살이 꿰뚫렸다. 이미 기사를 꿰뚫은 화살이 다른 기사에게 꽂히기도 했다. 수 십 발의 빛의 화살은 살아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주변 적을 초토화시켰다.
[ 카학!! ]
헥실 역시 화살에 맞았다. 성수를 머금은 화살은 치명적이지 않아도 착실하게 헥실을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번이 결정타였다. 헥실이 마법을 외우다 말고 피해를 입은 거라 그 피해는 더 컸다.
“신성을 꿰뚫는 끔찍한 괴창이여. 신을 죽이고 성혈을 머금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라. 그대가 벌인 짓을 속죄하고 신을 대변하는 무기가 되어 천벌을 대표하라. 이 제안이 싫다면 달아나라. 신을 죽인 신살자의 오명을 품고 저 멀리 떠나라. 그렇지 않다면 신의 피를 마시고 꿰뚫어라.”
그렇게 황금궁사가 잡아준 기회는 누리에게 전달되었다. 기도를 외우는 누리의 손 안에서 빛이 뭉쳐졌다. 누리는 그 빛을 쥐고 높이 들어올렸다. 그러자 빛은 거대한 창으로 변했다.
누리가 창을 들어올리더니 던지는 자세를 취했다. 그 일련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신성 대마법, 롱기누스.”
스욱
푸샥
[ 크하악!! ]
창은 정확하게 헥실에게 꽂혔다. 그냥 꽂힌 게 아니었다. 빛이 헥실의 몸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 이럴 수는 없다!! 너희는 니리스의 분노를 억누를 수 없다악!!“
헥실은 절규와 함께 사그라졌다. 이윽고 서늘한 파장이 터져나왔다.
“끝…… 났나……?”
“모르겠어요…… 후아…… 하아……! 아아, 처음 써보는 건데 잘 됐네요……”
누리는 버트의 질문에 대답하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말에 황금궁사가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처음?”
“아는 친구가 알려준 거예요. 그냥 이론만 전수 받아서 실전은 처음 써봐요.”
황금궁사는 묘한 얼굴로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누리는 머쓱하게 웃었다.
“아니, 그래도 신성 마법이니까 위력이 약했어도 먹혔을 거예요. 저도 위험한 상황에서 도박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구요.”
황금궁사는 여전히 시선을 주지 않았다. 누리는 그가 짜증을 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그의 표정을 보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라?”
라킨과 병사들. 그들이 버트 파티를 보고 있었다. 선두에 선 라킨은 뒷짐을 지고 한 명 한 명 훑어보았다. 그는 황금궁사를 알아본 건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군.”
“……누구에요?”
버트는 황금궁사와 누리에게 질문했다. 누리는 뭔가 애매한 눈치였다. 대신 황금궁사가 대답해주었다.
“베톰 왕국의 2왕자, 라킨.”
“……그런가요?”
버트는 무심결에 루하다에게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루하다도 이런 쪽으로 알 길이 없었다. 페이니라면 모를까, 베톰 왕국의 정세는커녕 판테스 왕국의 왕 이름도 몰랐다.
“그런데 수고했다니 무슨 뜻일까요.”
“모르겠다.”
버트와 누리는 라이의 부탁으로 온 것이다. 황금궁사는 태공의 부탁으로 왔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들을 게 아니었다.
그러나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할 일을 우리가 했다는 뜻이겠죠.”
“보상을 주려는 것처럼 보이진 않네요.”
버트는 누리의 말에 대답하며 라킨을 보았다. 라킨은 그들이 자신을 계속 보고 있으니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뭘 하고 있지? 가도 좋다.”
“저기……”
“뭐지?”
버트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말했다. 라킨은 그가 눈을 맞추지 않는 모습에 반응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무슨 뜻으로 수고하셨다는 말을 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버트는 끝까지 시선을 들지 않았다. 라킨은 그 모습에 눈썹을 씰룩였다. 그녀의 언행이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할 강자치고는 너무 비굴했다. 또한 왕자인 자신에게 대하는 가장 적합한 모습이기도 했다.
이모탈이 아닌가?
잠깐의 호기심이 피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강건하게 일처리를 할 그가 버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이곳을 정리하는 건 본래 베톰 왕국에서 할 일. 그런데 그 일을 너희가 대신 하였으니 치하한 것이다.”
“아, 왕자님의 치하를 받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영광을 잠시 미루어야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이 뒤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터이니.”
“곤란합니다.”
“곤란해?”
“예.”
라킨의 심사가 뒤틀렸다.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이모탈이라는 확신만 있었다면 당장 목을 베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건 그녀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 말은 이 일에서 손을 떼라는 거 같은데?”
버트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라킨은 한숨을 뱉었다. 그러다 아주 간단한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그런가.”
라킨은 대답했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