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95 헥실의 무덤 中
* * *
묘지기 헥실의 무덤.
세 나라의 국경에 위치한 이 매립지는 본래 세 나라의 전쟁터였다. 판테스 왕국이 크게 후퇴한 전쟁이자 스카이 왕국의 지형적 이점을 뼈저리게 알린 곳이기도 했다.
척박한 토양. 변화무쌍한 기후. 무덤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명의 마법사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헥실 크레조. 그는 한 때 아크메이지이자 리치였던 귀르디의 수제자였다. 그만큼 헥실이 가진 힘은 대단했다. 오죽하면 무덤지기를 자처하던 그를 포섭하기 위해 각지에서 스카웃을 하려 했을까.
당연히 결과는 참패. 헥실의 뜻은 완고했다.
그렇다고 모두가 그를 놔주지 않았다. 그들은 귀르디의 일을 꼬집으며 헥실을 견제했다. 마법사의 탑 소속도 아니었고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그에게 모두의 견제를 막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문제는 그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단 점이었다.
“묘를 훼손하다니.”
헥실은 분노했다. 그가 무덤지기로 돌아선 계기. 바로 아내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묻힌 무덤에 도굴한 흔적이 있었다.
모두가 이 일에 발뺌했다. 아직까지 범인이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뭐가 됐든 외부인의 침입으로 아내의 무덤이 파헤쳐졌다. 그것만으로도 헥실은 모두를 증오하기 충분했다.
매립지는 단숨에 언데드의 땅으로 변모했다. 곳곳에서 좀비를 비롯한 언데들이 끊임없이 솟아났다. 그건 귀르디가 모두를 절망에 빠뜨렸던 대마법 {타르타로스}와 유사했다. 이걸 공략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포기했다.
우선 언데드가 너무 많았다. 3대 공략불가 지역 중 하나인 악몽의 성처럼 언데들이 계속 밀려왔다. 신성 마법으로 퇴치는 될지언정 정화할 수 없었다. 그걸 분석하려 했지만 어느 누구도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다 헥실 자체의 힘도 강했다. 보스 몬스터로 분류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보스급의 엘리트 몬스터로 분류되었다. 라피에 초원의 거대한 하얀 늑대 화이트슈트와 비슷한 취급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퇴치 가능.
헥실 역시 화이트슈트처럼 처리에 이점이 없어서 국가에서 나서지 않았을 뿐이었다. 특히 세 나라의 국경에 있단 점과 땅이 좋지 않다는 점이 한 몫 했다.
방치하는 것보다 토벌하는 게 더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헥실의 무덤은 언데드 연습 정도로 쓰는 무대가 되었다. 어느 누구도 이 강력한 존재를 물리치려고 나서지 않았다. 당시 보스 헌터와 같은 길드도 더 강한 보스 몬스터를 잡아야 했고 퍼스트 제네레이션은 구태여 힘을 쓸 필요가 없어서 가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방치되었던 이곳에 한 무리의 사람이 나타났다.
“여기부터 헥실의 영역이에요.”
한 명은 검은 수녀복의 여인이었다. 판타지아답게 눈부신 미모의 여인은 ‘누리’라는 이름의 플레이어였다. 알게 모르게 라이벨과 엮여있는 그녀는 바닥을 만지며 말했다.
그녀의 곁에 있는 건 거대한 황금색 활을 비껴든 후드의 남자였다.
황금궁사. 그는 이름에 걸맞는 무기를 들고 다녔다. 그를 따르는 이들도 황금궁사처럼 활을 메고 있었다. 그들은 황금궁사가 소속된 길드 ‘사냥꾼들’의 길드원들이었다. 그들이 이 자리에 온 이유는 황금궁사의 부름이 있어서였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는 건가?”
그는 무심하게 물었다. 누리는 흙을 바스라트리며 돌아보았다.
“네. 저희가 이동하고 합류하던 시간까지 계산해보면 이틀 내로는 올 거예요.”
“혹시 모르니 덫이라도 깔고 있지.”
황금궁사는 턱짓했다. 길드원 중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남은 다섯 명의 길드원은 화살 하나씩 꺼내 시위에 걸었다. 그리고 주변으로 흩어졌다.
“엘프 팀이라고 했나요?”
“……그래.”
“그리고 근접 무기를 쓰는 쪽이 드워프 팀……?”
“……맞다.”
“도구를 손봐주는 쪽이 호빗 팀이라고 들었어요.”
“……그렇지.”
누리는 눈을 데굴 굴렸다. 그는 상당히 말주변이 없었다. 듣기로는 공대장처럼 클로즈베타 때부터 즐겼던 유저라고 했다. 과묵하기로는 둘 째 가라면 서러울 입담으로도 유명했다. 오죽하면 모든 매체를 통틀어 황금궁사의 발언을 모아도 30초를 넘기지 못했을까. 그나마 다행인 건 질문을 던지면 답을 해준다는 점이었다.
누리는 어색함에 괜히 손을 꼼지락댔다. 길드에 대해 물어보면 뭔가 이것저것 대답을 해주며 대화의 물꼬가 트일 거 같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괜히 말문을 열었나 싶었던 누리는 목적지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에 크게 이상할 게 없는 장소였다. 누리와 같은 고위 성직자가 아니라면 이상함을 깨닫지 못할 땅이었다. 누리는 그 땅을 무심하게 지켜보다 황금궁사를 보았다. 앞서 말했듯이 과묵하기 그지없는 인물인 만큼 인간관계도 척박했다. 클로즈 베타 테스터를 비롯하여 구면인 이들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금 그와 함께하는 것도 태공의 소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최초의 마스터 이모탈인 에니스트의 연락도 있었다. 물론 누리가 여기에 온 건 두 사람 때문이 아니었다.
라이벨.
지금 이곳에 다른 조력자를 보낸 사람이자 헥실의 무덤을 치워 달라 부탁한 남자. 우연으로 얽히고 얽혀서 남다른 관계가 되었지만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
‘하여간 겜돌이 자식. 여지를 줘도 못 받아 먹어.’
누리는 입을 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러다 길드원 하나가 황금궁사 곁에 떨어지는 걸 보며 시선을 돌렸다.
소곤소곤.
황금궁사는 고개만 끄덕였다.
“누가 온 건가요?”
끄덕.
“혹시 다른 길드에서 올 리가 없겠죠. 라이가 보낸다던 조력자인가봐요.”
누리는 몸을 단정히 하고 길드원이 왔던 방향을 보았다. 얼마 안 가 붉은 머리칼에 새까만 갑주를 입은 여인이 걸어왔다. 그녀를 본 누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입가를 꿈틀거리다 환하게 미소지었다.
“안녕하세요. 라이의 소개로 오신 분인가요?”
“네? 아, 네. 실버트리라고 합니다. 버트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누리. 성직자입니다. 이쪽은 황금궁사고 저 분들은 여기 황금궁사님의 길드원 분들이세요.”
“앗, 반갑습니다.”
버트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누리 역시 미소 짓고 있었지만 황금궁사는 위화감을 느끼는지 누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일단 소수 정예란 느낌으로 모집했어요. 원거리 딜러 한 분과 근거리 딜러 한 분. 이렇게 한 명씩 요청했습니다.”
누리는 버트와 황금궁사를 향해 말했다.
“우선 언데드 격퇴 이후 무덤 중심에 자리 잡은 묘지기 헥실과 전투를 치를 거예요. 힘 자체는 강하지 않지만 언데드가 계속 몰려오고 갖가지 상태 이상을 건다는 점을 유의해주세요. 혹시 저주에 저항력이 어느 정도 되시나요?”
황금궁사는 손가락을 2개 폈다. 누리는 그게 20퍼센트 정도 저항할 수 있다는 뜻으로 확인하고 이번에는 버트를 보았다. 버트는 흠칫 놀라더니 머뭇거리다 두 손을 들었다. 그녀가 펼친 손가락은 7개. 그걸 본 누리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아.”
버트는 눈치를 보다 손가락을 하나 더 늘렸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궁사 님께는 저저(저주저항), 상저(상태이상 저항) 계통의 축복을 걸어드릴게요. 버트 님께는 다른 강화 축복을 우선적으로 걸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누리는 두 손을 모았다. 희미한 빛이 감돈다 싶더니 두 사람에게 스며들었다.
{저주를 삼키는 빛} {독거미의 혼} {특급 근력 강화} {질긴 피부} {깨어난 이성} {굳센 의지} {날렵한 반사 신경} {희미한 신성의 벽} {마력을 거부하는 기운} {어둠을 밝히는 불꽃}
수 십 개의 축복이 깃들었다. 황금궁사는 제법 놀란 티를 내며 손을 쥐었다 펴보았다. 이제까지 누리와 같은 성직자는 없었다. 있다고 해도 이 정도로 강한 축복을 여러 번, 그것도 단시간에 내릴 수 없었다.
다만 버트의 반응은 심심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축복은 전부 뱃속의 씨앗이 삼켜버렸다. 애초에 축복이 걸린 것 이상으로 많은 강화 효과가 붙어 있어서 쓸모가 없었다.
누리도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버트를 보았다. 나름대로 축복에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반응은 황금궁사보다 격렬하면 격렬했지 얌전하지 않았다.
‘그냥 놀라서 그런 거겠지.’
누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지금 중요한 건 아무 생각없는 라이가 보낸 이 원군과 함께 무덤을 정복하는 일이었다. 그 후 라이에게 이것저것 따질 생각이 더 컸다.
“대규모 축복도 가능하지만 짧은 시간에 표적을 퇴치하는 걸 목표로 잡았어요. 소수 정예라면 축복을 몰아주기도 편하고 훨씬 강한 걸 걸어줄 수 있어요.”
버트는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이런 식의 파티 사냥을 한 적이 없었다. 기껏 해야 초반에 라이나 니스와 늑대를 잡은 게 끝. 그것도 솔로 플레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벌인 일이라면 칼라 해변에서 레이드를 뛴 게 끝이었다.
그러니 이런 파티 플레이가 새로웠다. 무엇보다 그녀가 전위를 맡게 되었다. 혹시나 싶어 검은 갑주를 둘렀는데 딱 들어맞은 것이다.
누리는 버트가 들떠있는 걸 보며 이제 축복을 실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황금궁사와 버트에게 몇 가지 주의점을 내놓았다. 그래 봐야 특별한 상태 이상에 걸렸다면 즉각 말하고 황금궁사를 위주로 지킨다는 정도였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네! 좋아요!”
끄덕.
*
헥실의 무덤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낡은 돌담장과 여기저기 부숴진 무덤 수 십 개 정도 뿐이었다. 다만 곳곳에서 솟구치는 언데드 때문에 넓게 느껴졌다.
파사삿
버트 일행이 발을 내딛는 순간 무너진 무덤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땅 곳곳에서 좀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피핏
그러나 좀비들은 머리를 내밀 때마다 즉각 박살났다. 황금궁사의 속사는 빠르고 정확했다. 황금빛이 반짝인다 싶으면 이미 좀비들의 머리가 사라져 있었다. 버트가 두 사람을 지킬 시간도 없이 좀비들이 무너졌다.
‘우와……’
버트는 곁눈질을 하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아직 다크나이트들이 제대로 싸우는 걸 보지 못했기에 황금궁사의 활 솜씨만으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버트! 앞!!”
누리는 그런 버트를 지켜보다 소리쳤다. 언데드는 어디서든 튀어나왔다. 당연히 그들이 딛고 있는 땅에서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버트의 발 바로 앞에서 좀비 하나가 튀어나왔다. 워낙 순식간이었고 누리조차도 다급히 회복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격동하는 생명의 힘이여, 이 빛과 함…… 어?”
좀비는 버트를 덮치기도 전에 두 동강이 나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게 조각난 좀비의 머리는 황금궁사의 화살이 꿰뚫리며 마무리됐다.
버트는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전진했다. 누리는 방금 자신이 뭔가 잘못 봤나 싶었다.
절대 이 정도로 강한 축복이 아니었다. 분명 반응 속도와 몸의 민첩함을 늘려주는 축복을 걸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기본적인 능력치가 되어야 강해졌다. 무엇보다 버트에게는 다른 축복을 우선해서 걸어줬기에 날렵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을 참격을 벌였다? 백 번 양보해서 황금궁사가 뭔가를 했다 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버트를 지나쳐야 했을 뿐더러 그의 병기로 좀비가 반 토막이 날 수 없었다.
‘마신의 씨앗. 그저 동기화만 되고 끝이 아니란 건가?’
누리는 라이에게 들은 얘기를 토대로 백방으로 알아보았다.
가상현실이 현실에도 영향을 미치는가?
그에 대한 답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 그러나 그 확률이 몹시 희박했다. 심지어 인체를 바꿀 정도로 극심한 영향을 끼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 논문을 뒤져보고 클로즈 베타 테스터, 오픈 베타 테스터는 물론 관계자까지 찾아 물었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누리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버트를 노려보았다.
‘게임에서도 강해진다면 운영진에서도 조치를 취할 텐데…… 무엇보다 리아주크는 게볼라이아처럼 배척 받아서 사라진 신이 아니었나? 블랙스타의 위명이 드높다 한들 사라져버린 신을 다시 되돌리진 않을 거 같은데.’
버트가 좀 특별한 존재였다면 운영진이 심어둔 이벤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러면 대체 무엇 때문에?’
누리는 다른 생각을 하다 어느 새 좀비 무리를 뚫고 목적지에 도착했단 걸 깨달았다.
유독 음산한 기운이 주변을 감돌았다. 이건 묘지기 헥실이 뿜어내는 죽음의 기운이었다.
[ 누가 무덤을 더럽히는가. ]
누더기를 걸친 비쩍 곯은 마법사. 낡은 지팡이를 짚고 있는 노년의 마법사는 눈을 부라리며 일행을 노려보았다.
핏
황금궁사는 잽싸게 화살을 날렸다. 좀비의 머리를 날린 화살과 똑같은 「성수를 바른 화살」이었다. 그것도 한 발이 아닌 세 발을 쏘아냈다.
츠즈즛
화살은 헥실에게 닿지 않았다. 화살은 투명한 벽에 꽂힌 것처럼 헥실을 관통하기 직전 멈추었다.
황금궁사는 그 정도는 예상한 건지 침착하게 새로운 화살을 꺼냈다.
「용린살」
황금궁사가 가진 화살 중 3번째로 강하고 값비싼 화살이었다. 그가 시위에 화살을 메기자 헥실이 지팡이를 들었다.
“어둠을 먹는 자여.”
아주 간단한 영창이었다. 버트는 물론 누리와 황금궁사도 그의 영창이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스르륵
곳곳에 시꺼먼 불길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들의 적은 헥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에엑
땅에서 솟구치는 좀비들. 주변을 날아다니는 유령들. 달그락거리며 다가오는 해골들.
언데드 무리가 그들을 포위했다.
버트는 황금궁사의 앞을 막아서며 검을 겨누었고 누리는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버트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정면의 언데드를 검으로 휩쓸었다. 그러다 누리 쪽으로 가려는 순간 누리가 고개를 저었다.
“빛을 토해내어라. 화려함을 속일 눈부신 섬광을…….”
검은 불길이 일행을 덮치기 직전, 누리에게서 뿜어진 빛이 불을 꺼뜨렸다. 누리는 쉬지 않고 기도했다.
“신이시여. 어둑함을 삼켜버린 땅을 게워내고 화사함을 덧그린 대지를 하사하소서. 희망을 잊은 이들에게 깨달음을 주옵시고 절망을 잊은 이들에게 꾸지람을 내리시어 신도들을 성지로 이끄소서.”
경건함. 영창은 이전과 다를바 없었지만 그녀에게서 뿜어진 신성한 빛이 주변을 밝혔다. 일행 주변의 수 미터의 땅이 빛으로 물들었다. 그보다 더 넓은 땅은 옅은 빛이 감돌았다.
버트는 눈을 굴려 슬금슬금 기어오는 좀비들을 보았다. 좀비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해골들은 삐걱거렸고 유령들은 괴로워했다.
“언데드들은 제가 막고 있을 테니……”
황금궁사는 대답 대신 화살을 쏘아냈다. 화살은 이번에도 헥실에게 닿지 않았다.
하지만 투명한 벽은 뚫렸다. 헥실은 빠르게 지나치는 화살을 곁눈질 하며 황금궁사를 쏘아보았다.
“이 놈……”
황금궁사는 말없이 새로운 화살을 꺼냈다. 투명한 벽을 뚫고 지나가며 화살이 흔들렸다. 그 바람에 벽을 뚫고도 헥실을 맞추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 맞춘다.
누리의 기도는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언뜻 보이는 언데드의 숫자만 백 개체. 전부 쓰러뜨린다고 해도 다시 살아나는 걸 가정하면 수 천이 와도 모자랐다. 그런데 누리의 기도 한 번으로 그들이 무력화 되었다. 혹시라도 빛을 뚫고 오는 언데드가 있다 하더라도 버트가 검으로 마무리를 지었기에 문제없었다.
황금궁사가 할 일은 단 하나.
헥실을 꿰뚫는 것!
핑
프슉
“크학!!”
화살은 가슴 위쪽을 관통했다. 헥실은 괴로운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고 황금궁사는 다음 화살을 준비했다.
“기도로 마무리 할 수 없나?”
누리는 황금궁사의 덤덤한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어요. {잊힌 신의 은총}은 꽤 넓은 범위에 적용 돼요. 하지만 헥실에게는 안 먹히고 있어요. 이전 도전자들도 신성 마법이 먹히지 않았다고 했어요. 그러니 마법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어요.”
황금궁사는 버트의 뒷모습을 보았다. 지금 여기서 전위를 움직이게 하는 건 도박수.
핑
푸샥
“카학!!”
헥실은 괴로운 소리를 내며 온몸을 비틀었다. 이번에 화살이 꿰뚫은 곳은 옆구리였다. 내장은 빗껴나간 건지 죽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나?”
“……이상해요.”
황금궁사는 다음 화살을 겨누었다. 헥실을 맞춘 2발은 시험을 위한 것이었다.
너무 쉬웠다. 아무리 그들이 랭커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간단한 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악명이 부푼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도 간과할 수 없었기에 황금궁사는 침착하게 끝을 보기로 했다.
퓻
화살은 간단하게 헥실의 눈을 꿰뚫었다. 화살은 간을 보지 않고 정확히 머리를 뚫어버렸다.
헥실은 단말마조차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잡은 건가요?”
“모르겠군.”
헥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죽은 척을 했다기에는 시꺼먼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심하면 안 돼요. 일부러 짜맞춰서 딜로 찍어누른 거지 여기도 만만한 곳은 아니에요. 2페이즈나 함정을 염두에 두어야”
그렇게 말하는 순간 좀비들이 눈을 빛냈다. 방금까지 느릿했던 녀석들이 갑자기 빠르게 덤벼들었다. 황금궁사는 갑작스러운 좀비의 공격에 몸을 틀었다. 녀석이 팔을 할퀴었고 단숨에 녹색빛으로 물들었다.
“폭주……?”
“신성을 덧댄 힘이여. 모두에게 깃들어라!”
누리는 황금궁사가 공격받는 걸 보자마자 모두에게 방어막을 씌웠다. 그 직후 좀비들이 덤벼들었고 방어막을 미친 듯이 두들겼다. 버트는 방어막이 전개되자마자 검을 휘둘렀다. 좀비 셋을 단숨에 토막냈지만 다섯이 덤벼 들었다. 그래서 넷을 베었지만 이번엔 열이 달려들었다.
퍽 빠각
황금궁사는 화살로 좀비를 찍고 발로 후드려 찼다. 누리는 주먹으로 좀비를 으깨면서 황금궁사의 후방을 보호했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좀비들의 기세는 대단했고 강했다. 누리의 {잊힌 신의 은총}으로 약화되었단 게 믿기지 않았다.
“기도는?”
“힘들어요!!”
황금궁사는 아예 활을 넣어두고 단검을 꺼내 좀비를 상대했다. 누리는 기도를 할 겨를도 없이 격투에 집중했다.
서걱 스걱
버트도 검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마기를 쓰지 않는 게 생각보다 큰 패널티였다. 수적 열세보다 그 쪽이 더 체감이 컸다.
“도망쳐요!”
“늦었어.”
황금궁사의 무심한 말에 버트가 시선을 던졌다. 지금 일행을 덮치는 언데드 수만 서른. 아직 더 많은 언데드가 근방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공세도 거세졌다.
“미친”
황금궁사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리를 내질렀다. 좀비 하나가 묘비를 들고 내리찍고 있어서였다.
빠각
스킬을 쓴 건 아니었지만 황금궁사의 발길질이 묘비와 함께 좀비를 날려버렸다. 하지만 큰 동작이었던만큼 좀비 하나가 팔을 물어뜯고 등을 할퀴는 동안 반격하지 못했다.
뻑
그 빈틈을 누리가 메꿔주었다. 누리는 주먹질과 발길질로 좀비들을 쫓아냈다. 그러면서 약식 기도를 섞으며 조금이지만 회복을 도와주었다.
“시체.”
황금궁사는 숨을 고르더니 나직하게 읊조렸다.
“시체요?”
누리는 헥실의 시체를 보았다. 어쩌면 폭주의 원동력일 수도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버트 역시 시체를 보았다. 거리도 조금 있었고 언데드의 공세로 시끄러웠다. 그래도 버트의 오감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탓
버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두 사람과 함께 끝없이 언데드를 물리치기보다 잠시 시간을 내서 언데드를 돌파하는 게 더 빨랐다.
푸샥 서걱
그녀의 선택이 틀린 건 아닌 듯 했다. 언데드들이 갑자기 버트 쪽으로 몰려 들었고 여유가 생긴 황금궁사가 화살을 걸었다.
「마법 먹은 뱀살」
우글거리는 언데드. 그 사이로 보이는 아주 미세한 틈. 그 사이를 본 황금궁사는 시위를 부드럽게 놓았다.
핏
푸각
화살은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날아갔다. 좀비의 팔을 지나 버트의 옆구리를 스치고 헥실의 머리까지 도달했다. 헥실의 머리는 그야말로 산산조각 나버렸고 언데드들은 갑자기 우뚝 멈췄다.
투두둑
유령들은 증발했고 해골들은 무너졌다. 좀비들은 부르르 떨다 나자빠졌다.
“이번엔 진짜 해치웠나요……?”
누리의 질문에 황금궁사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더니 시체를 살피는 버트에게 다가갔다. 황금궁사는 버트를 지나 시체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그러면서 버트를 흘겨보며 말했다.
“귀가 밝군.”
“네? 아, 네. 조금……”
황금궁사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버트가 머쓱해하는 사이 누리가 다가왔다.
“최초로 토벌 성공했네요. 축하드려요.”
누리의 너스레에 황금궁사는 콧방귀를 뀌며 돌아섰다. 그러다 갑자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세요?”
“어……”
버트는 그의 시선에 검을 꺼내 헥실의 몸을 내리쳤다.
콰작
이번에도 무슨 장치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황금궁사는 그 모습을 보고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눈을 부라린 채 다시 두 사람에게 돌아왔다. 그러더니 발로 시체를 슥슥 치우더니 단검을 바닥에 꽂았다.
카각
“황금궁사 님?”
“끝이 아니다.”
“하늘을 거둘 빛이여”
“아니.”
누리가 기도를 외우자 황금궁사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손으로 흙바닥을 치우더니 바닥에 꽂힌 단검을 쥐고 흔들었다.
텅!
그리고 드러난 건 지하통로. 아래를 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계단이었다.
“지하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어요.”
누리가 놀라서 황금궁사를 보며 말했다.
“페이즈2.”
황금궁사는 나직하게 말하고 앞장섰다. 그 모습에 버트는 다급하게 횃불을 꺼내 뒤를 따랐다. 누리 역시 뒤를 따르려다 이상한 기분에 헥실의 묘지 밖을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계단을 내려갔다.
*
일행이 헥실의 묘지 공략을 시작한지 20분 째. 그들이 지하 계단을 발견하고 들어간지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황금궁사가 데려 온 ‘사냥꾼들’의 길드원들은 말없이 주변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혹시 모를 방해를 대비하고 있었다. 공략되지 않는 곳에서의 사냥은 종종 뒤치기가 일어나고는 했다. 이것 역시 그것을 방비한 포진이었다.
숲 곳곳에 설치한 함정. 주요 포인트에서의 은신은 언제든 침입자를 격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문제는 침입자가 전혀 엉뚱한 사람일 경우였다.
~저게 뭐야?
길드원 하나가 바다하피의 깃털을 쥐고 말했다. 그의 말에 다른 길드원이 주변을 보았다.
~저거…… 베톰 왕국의 깃발이다!
길드원들은 말을 타고 있는 스물 남짓의 무리를 보았다. 그들 중 하나는 베톰 왕국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미친.
길드원 중 하나가 무리의 선두를 보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베톰 왕국이 주 무대는 아니었지만 그의 존재를 모를 수 없었다.
베톰 왕국의 2왕자. 나이트 마스터를 휘하에 둔 무장이자 베톰 왕국의 군 권력 3할 이상을 쥐고 있는 강자 중 하나였다. 그 자체의 힘도 대단했지만 가진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2왕자가 헥실의 묘지를 향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베톰 왕국의 라킨 왕자가 왔다! 황금궁사 님한테 알려!
~바다하피 깃털이 안 먹혀!
~아이씨, 일단 막아 세워!
길드원 둘이 모습을 드러내며 앞을 막아섰다. 라킨 2왕자는 덤덤하게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세웠다.
“2왕자 님을 뵙습니다.”
길드원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비켜라.”
“헥실의 묘지는 저희 길드에서 토벌 진행 중입니다.”
“부관. 두 사람은 이모탈인가?”
“예.”
서걱
짧은 대답. 단촐한 행동. 길드원 한 명은 그대로 절명했다.
라킨은 무심하게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남은 길드원을 보았다.
“비켜라.”
길드원은 눈가를 꿈틀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고 해도 사망 패널티까지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라킨 왕자는 말로 해서 들을 인물이 아니었다.
라킨은 그가 비켜서자 다시 말을 몰았다.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헥실의 묘지로 향했고 남은 길드원들은 다급하게 다른 곳으로 연락을 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