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판타지아-94화 (94/104)

〈 94화 〉 94 ­ 헥실의 무덤 上

* * *

“질리지도 않나.”

니스. 그녀는 동굴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기가 찬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건 라이칸들이었다. 녀석들은 니스의 짜증도 모르고 할딱이며 웃고 있었다.

“케흐흐, 어제도 하고 있었다.”

“그저께도 하고 있었지. 크흐흐.”

“지금부터 입 여는 새끼들은 재갈을 채울 거야.”

니스는 서늘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버트와 비교도 안 되는 카리스마! 라이칸들은 킥킥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라이 그 놈은 뭔가를 숨기는 거 같고 버트 이 년은 떡치느라 나올 생각도 안 하고…… 돌겠네 진짜. 이럴 거면 나도 그냥 도피해버려? 조직의 안녕이고 뭐고 그냥……”

니스는 이를 갈며 투덜거리다 라이칸들을 보았다. 녀석들은 자기 주둥이를 손으로 잡고 있었다.

“말해.”

“정 외로우면 같이 가서 하면 되지 않나?”

“그러게 말이야.”

“너희는 정조 관념이란 게 없어?”

“애초에 다른 종족에게 씨를 뿌려 번식하는데 뭘.”

“그리고 그릇에게도 정조가 없는데 우리가 있을 필요는 없지.”

“……틀린 말은 아니네.”

“흐헤헤, 그렇지?”

“맞는 말이야, 맞는 말 그냥.”

니스는 빈 나무통을 꺼내 녀석들의 머리를 번갈아 때려주었다. 호쾌한 울림으로 라이칸들의 머리를 때리는 동안 동굴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소리도 멈춰서 버트가 나오는 줄 알았는데…… 웬걸, 엉뚱한 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시, 시종은 굉장한 거야…… 나, 나는 버트의 시종……”

그건 루하다처럼 시꺼먼 덩어리였다.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좋든 싫든 몸을 한 번 섞어봤으니 누군지 분간은 할 수 있었다.

“넌 뭐야……?”

“나, 나는 어둠…… 버트의 시종이야.”

“그래……?”

니스는 턱을 문지르며 ‘어둠’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머리를 가누지 못하는지 헤롱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라이칸 한 마리가 늘어진 녀석을 집어 들었다.

“이 놈 봐라. 그 덩어리처럼 생겼어.”

“하지만 냄새가 다른 걸. 요정 녀석 냄새가 나.”

“크흐흐, 그럴 리 없잖아.”

“그럴 리 없지.”

마지막 말은 전혀 다른 이의 말이었다. 리어페어리의 수장 슈어드였다.

슈어드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니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를 본 니스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잘도 내 어깨에 앉네. 너도 버트에게 볼일 있어? 미안하지만 이쪽이 먼저야.”

“나는 그저 이 근방에 조성된 숲을 감찰하러 온 거야. 근데 낯익은 기운이 느껴져서 왔는데…… 정령이 왜 여기 있어? 저것들 전부 서쪽에 몰린 거 아니었나?”

“이게 정령이야? 내가 아는 정령은 이렇게 맹하지 않는데.”

니스는 라이칸의 손에서 어둠을 뺏었다. 어둠은 축 늘어져 있었다.

“확실한 건 정상적으로 태어난 건 아니란 소린데……”

니스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말을 멈추었다.

“설마 얘…… 결국 낳았나?”

“낳다니? 무슨 소리지? 그릇을 말하는 건가?”

“결국 안에서 떡치면서 실시간으로 출산을 하는 거면……”

“……종잡을 수 없는 말만 하는 군. 그릇에게 뭔 일이 생겼나?”

“아우씨, 뭐가 됐든 얘가 나와야 아는 건데……”

“대답을 해라, 인간!”

니스는 주저없이 슈어드를 잡아챘다.

“너가 숲에서 나한테 한 짓 아직 기억하거든? 떽떽 소리치지 마라.”

“너도 즐기지 않았어?”

니스는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슈어드는 상상 이상의 압박감에 라이칸을 곁눈질 했다. 라이칸들은 머쓱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더니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여기 온 이유는 발크락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나 싶어서 온 거야. 그것만 확인하면 되니 그릇은 상관없어.”

“발크락은 또 뭐야?”

“성지라고 부르는 공간인데 리아주크와 통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세계지. 아니, 그보다 너희 이모탈이 이걸 모르면 안 되지. 발크락을 모방한 힘을 쓰고 있잖아?”

“그런 거 몰라. 혹시 스크린샷을 말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인벤토리인가.”

“그래, 그래. 뭐가 됐든 이것 좀 놔줄래……?”

“아니…… 말하고 보니 짜증이 나서 말이야. 조금 놀아줘야겠네?”

슈어드는 뭔가 소름이 끼쳐 몸을 떨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요정은 성별이 정해져 있지 않아! 유기 생물과 달라!”

“아하, 그러니까 몽마 여왕이랑 비슷하단 거지? 그 점이 더 열받는 걸.”

“아, 아니 기다려! 뭘 하려고?!”

“난폭한 짓은 안 해. 에로 동인지 같은 짓도 안 할 거야.”

“에로 뭐?! 일단 이거 놔! 얼굴 들이밀지 마!!”

*

그렇게 버트가 루하다와 몸을 섞은지 4일 째 되는 날…… 두 사람은 바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 어떤 대화도 없었다. 그저 버트는 루하다의 품에 안겼고 루하다는 그런 버트를 안고 있었다. 무려 몇 시간 동안 서로의 체온만 느낄 뿐이었다.

아니, 아예 교류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정신이 희미하게 이어져 있으니 언어를 할 필요가 없었다. 정신적인 연결만으로도 후희는 충분했다.

“기분 좋았어……”

오랜 시간의 침묵을 깬 건 버트의 감상이었다.

“저도 좋았습니다.”

“정말……?”

“네. 그릇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목소리를 온전히 독차지 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으히히……”

“지금도 당신을 품고 싶지만 구속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언제든 끌리는 대로 무엇이든 하실 수 있게……”

루하다는 버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버트는 그의 말에 잠시 웃는 것도 멈추고 바라보았다.

“고마워.”

“아닙니다. 당신을 섬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버트는 행복에 겨운 얼굴로 실실 웃었다. 지금 이대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떨쳐내야 할 문제였다.

“이제…… 갈까……?”

“예.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라, 어둠이는?”

“후배 역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으아, 미안해라. 그럼 빨리 나가자.”

버트가 루하다와 함께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슈어드가 니스에게 붙잡힌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으아학……! 그만해라……!”

“이건 이거대로 재밌는데……”

니스의 그림자 분신들이 슈어드를 붙들고 간지럽혔다. 니스는 턱을 괴며 그 모습을 보더니 한 장 한 장 스크린샷을 남겨두었다.

“뭐하고 있어……?”

“아, 나왔어?”

니스는 손을 탈탈 털더니 버트의 볼을 꼬집었다.

“응앙학……!”

“왜 이제 나오는 거야. 아주 하루 종일 거기에 박혀 있지 그랬어, 응?”

“으에으 박혀 있다는 게 동굴이야 아니면……”

“동굴이지 그럼! 거기서 섹드립을 쳤겠냐!”

“으에으어으……!”

니스는 버트의 뺨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니스는 신경질적으로 볼살을 뿌리치고 스크롤을 하나 꺼냈다.

“라이의 전언이야. 스카이 왕국에 있는 세트 아이템의 위치가 특정되지 않고 있대.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린다네?”

“그래……?”

버트의 얼굴에 묘하게 기쁜 감정이 감돌았다. 니스는 그걸 보더니 들리지 않게 한숨을 뱉었다.

“일단 그때까지 일 하나만 도와달래. 스카이 왕국, 베톰 왕국, 판테스 왕국의 국경이 겹치는 자리가 하나 있대. 거기로 가서 정리 좀 해달래.”

“라이가 직접 가면 되지 않아?”

“걔가 얼마나 바쁜데. 그리고 너도 딱히 할 거 없잖아. 뭐, 아예 없는 건 아닌 거 같네.”

니스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한 눈으로 루하다를 보았다. 그러자 버트가 슬쩍 루하다를 자신의 뒤로 잡아당겼다.

“그래서 거기가 어딘데?”

“묘지기 헥실의 무덤. 언데드가 끝없이 나오는 묘지라고 알려진 곳이야.”

“그럼 조금 늦게 가도 되는 거지?”

“3일 내로 출발해.”

“일 주일은 안 돼……?”

“한 대 맞을래?”

“알았어~ 갈게, 갈게.”

*

“축하드립니다.”

슈어드는 헐떡이며 버트에게 인사했다. 땀범벅이 된 그는 옷가짐을 바로 할 새도 없이 버트에게 날아왔다.

“일단 옷부터 제대로 입는 게……”

“죄송합니다. 그릇의 친우분께 모진 꼴을 당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근데 왜 갑자기 말을 높이는 거야?”

“그야 리아주크의 부활에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도 예우를 갖추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좀 어색하니까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해줄래……?”

버트의 부탁에 슈어드는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기다렸단 듯이 말을 바꾸는 구나.”

“어쨌든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육신이 전부 모인 그 순간 마신은 부활한다. 리아주크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테지.”

버트는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그녀의 표정에 슈어드는 손톱만한 손으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네 심정은 이해한다. 육체가 무너지고 신의 몸으로 재구성 된다. 너란 존재가 신의 그릇으로 대처된다는 게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야.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쓸 데 없는 불안감은 만들지 않는 게 나아. 그저 새로 태어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어?”

“위로를 잘 못 하는 구나.”

“최선이라 생각한다.”

“후흐…… 고마워.”

버트는 손가락 하나로 슈어드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슈어드는 애매한 표정으로 루하다를 곁눈질 했다. 루하다는 고개를 저었고 슈어드는 멋쩍게 웃었다.

“그럼 준비하자, 루하다. 그 전에 주변 정리 좀 해줄 수 있어?”

“물론입니다.”

버트는 루하다에게 뒤를 맡기고 로디아 마을로 향했다. 그녀의 목적지는 마법사의 탑…… 그곳에서 리아를 만날 생각이었다.

*

“할아버지랑 어땠어?”

버트는 단어 선택을 잘못 했다고 생각하고 입맛을 다셨다. 리아는 탑에 등을 기대며 버트를 보았다.

“좋아.”

“그렇구나.”

“내 몸, 찾으러 가는 거야……?”

“응. 그래서 말인데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

“응.”

버트는 입안에서 말을 몇 번이고 굴렸다.

“리아, 네 정체가 뭐야?”

리아는 말없이 버트를 바라보았다. 버트는 돌려서 물어볼까 생각했지만 직설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오히려 그렇게 에둘러 물어보면 실례라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신. 그 전에는…… 사람.”

버트는 그 한 마디를 듣고 잠시 숙연해졌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리아의 정체는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리아를 통해 엿본 기억들…… 정보…… 그 모든 것들을 겪고 유추하지 못할 바보는 아니었다. 여기에 몇 가지 가정과 걱정이 더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덤덤하지 못했다. 막상 리아를 통해 확답을 받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걱정 하지 마. 네가 나처럼 될 일은 없어.”

리아는 버트의 걱정거리 중 하나를 꼬집었다. 버트는 그녀의 말에 선뜻 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걸 알았냐, 아니면 정말 괜찮은 거냐 그런 질문을 하기엔 너무 무례했다.

사람이랜다.

그것도 이전에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대고 어떻게 그런 질문을 던질까. 누가 봐도 상대는 신경 쓰지 않고 자기 혼자만 보는 짓거리인데.

리아는 버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무심한 얼굴이 버트의 눈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사람이라고 해봐야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말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안심시키려고 하는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버트가 리아처럼 될 일은 없다는 소리였다. 그럼 이제 리아의 이전에 대한 게 문제인데……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정련된 인공지능이란 뜻일까? 그게 아니면 불의의 사고로 정신만 깨어있게 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사람의 정신을 복사한 존재인가?

무엇 하나 답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평면 세계로 넘어가서 기억을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썩 좋은 일은 아니었다. 리아의 몸으로 직접 들어갔다 나오는 거 같고 기억을 훔쳐보는 걸 대놓고 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버트가 걱정할 건 단 하나뿐이었다. 리아주크의 육신이 완성되고 일어나게 될 부작용뿐이었다. 리아는 자신처럼 될 일이 없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부작용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녀의 말을 믿되 방비는 해두어야 했다.

“알았어. 그러면 이것만 물어볼게.”

버트는 리아가 잡은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리아, 너는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

리아는 버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대로. 리아주크로서 부활을 원하냐는 질문인가. 아니면 리아주크가 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인가.

……둘 다 일지도 몰랐다.

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뭐든 좋아.”

“그래, 알았어.”

버트는 리아를 안아주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반드시 되살려줄게.”

“고마워. 그래도 무리하지 마. 백신이 있든 없든 결국 외부의 간섭이 올 거야. 버트가 그런 일까지 짊어지는 건 원하지 않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것 역시 내가 바라는 일이야.”

버트는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조금 걸려도 기다려줘.”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어. 잊어버려도 괜찮아.”

리아 역시 버트를 꽉 안아주었다.

*

“이상, 명령 하달은 끝났다. 각자 업무로 나뉘도록.”

고경태 부장. 그는 눈 사이를 주무르며 피곤함을 호소했다. 백신을 소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어느 정도 결과를 뽑을 수 있었다.

우선 3호는 자체적으로 학습하며 일을 하고 있는 듯 했다. 3호와 5호의 인공 지능이 그렇게 나쁘진 않았지만 완벽한 건 아니었다. 그런 3호가 스스로 배운다니 다행이었다. 해킹을 당해 조작당하는 게 아닌 이상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3호가 아니라 듀크 사에서 연락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것.

하지만 일을 이렇게 해놓고 가만히 있을 경태가 아니었다. 수많은 업무와 스트레스가 있었지만 이번 일은 반드시 처리해야 했다.

드러날 일 없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강박이었다.

‘간만에 아바타로 접속해야겠어.’

경태는 머릿속에서 수많은 아바타를 떠올렸다. 운영진들이 간혹 게임 속 순찰을 가기 위해 마련해둔 캐릭터들. 그것들은 하나하나 따로 육성해야 했다. 그들도 백신의 감시에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프로그램을 조작하거나 그럴 수 없었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한도 내에서 강해지게 하는 것 정도 뿐, 나머지는 알아서 해야 했다.

심지어 캐릭터도 양도할 수 없었으니 참으로 불편했다. 그렇다고 백신 가동을 멈추면 무슨 혼란을 불러올지 몰랐다. 지금도 드러커스의 미로가 개국 선포를 하거나 로이첸 왕국과 키런 왕국에 대대적인 사건이 터지기도 했지만 그나마 해결할 수 있는 범주였다.

‘이 참에 샤만의 해저에 들러서 구슬이 잘 있는지 봐야겠구만.’

경태는 묘하게 들뜬 표정으로 부장실을 나섰다.

“부장님.”

“아, 예. 무슨 일이시죠?”

“3팀에서 조금 이상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그래요? 탁상 위에 놔두세요. 잠시 처리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볼게요.”

“아뇨, 이건 지금 보셔야……”

사원은 다급히 서류철을 건넸다. 경태는 의아해하면서도 그걸 받아들었다.

“……명예 백작?”

“예.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키런 왕국에서 판테스 왕국으로 사절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예, 그랬죠. 근데 그건 그냥 이모탈끼리 만나는 게 아니었나요?”

“저희도 그런 줄 알고 3팀에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여기……”

사원은 다른 서류 뭉치를 건넸다. 경태는 처음 받은 걸 옆구리에 끼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군수품 지원……”

“판테스 왕국이 이전부터 내실을 다지고 병력 확충을 하고 있긴 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일개 자작령에 건네주는 선물 치고는 과합니다. 왕국 전체로 본다면 군 확장에 몇 퍼센트 정도 기여하는 수준입니다만……”

“음.”

경태는 심각한 얼굴로 보고서를 넘겼다.

“그리고 라이칸슬로프를 비롯하여 나이트피어의 세력도 확장되고 있습니다.”

사원은 고개를 숙여 나직하게 말했다.

“상상 이상으로 커지고 있다는 뜻이군요.”

경태는 그렇게 말하다 보고서 마지막 장에서 멈칫했다. 그는 옆구리에 끼워둔 서류들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돌겠네 진짜.”

“……죄송합니다. 벌떼의 정보로도 알아차리는 게 늦었습니다.”

“아니, 아, 하, 아니에요. 이건 저희가 알고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대륙 단위로 사라지는 마법사를 어떻게 찾겠어요.”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 거기에는 전 탑주 넬하트와 부탑주 그레노의 행방이 적혀있었다. 로디아 마을이 생각보다 커진다 싶어서 감찰을 보내긴 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행방이 거기서 발견될 줄 몰랐다. 아니, 거기에 있는 데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단 게 어이가 없었다.

무언가 있다. 작정하고 은폐하는 게 아니라 왠지 모르게 운영진을 저격해서 막아선 느낌이었다.

대체 누가? 무엇 때문에?

간혹 듀크 사를 견제하기 위해 스파이가 들어오긴 했다. 회사 내에서 뿐만 아니라 게임 속에 침투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 수준을 넘어섰다. 내통자가 문을 열어준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은밀하게 일을 진행할 수 없었다.

“우선 이 둘의 위치는 은근히 흘려보내세요. 웹사이트로 떡밥을 던져도 좋고 타국에 정보를 풀어도 좋아요. 지금 여기를 견제해야 해요.”

“네.”

“그리고 블랙 남작…… 이 자가 어디로 벗어나지 못하게 철저하게 감시하세요.”

“알겠습니다.”

경태는 고개를 털며 사원에게 보고서를 넘기고 자리를 떴다. 머리 아픈 일이 너무 많았다. 분명 블랙 남작은 영지를 뜬 적이 없는데 사건이 계속 터지고 있었다. 경태도 모르는 변수들이 엄청 쌓인 것 같았다.

‘머리 아프구만.’

반차를 써서 퇴근을 해야 하나 싶었다. 그래도 지금은 근황부터 보고해야 했다.

정영훈 이사. 그가 원하던 백신 한 개체의 검색의 끝내놓았다. 이제 그 코드를 넘기고 접속할 수 있게끔 안내해야 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윤희정과 힘을 합쳐야 했지만 그는 특수한 경우였다. 그러니 경태의 선에서 처리하고 연결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경태는 비서를 통해 연락을 넣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영훈이 그를 불렀고 이사실로 들어섰다.

“이사 님.”

“부탁한 건 잘 됐나 보군?”

“네. 검색 자체는 간단하기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미안하군. 조금 쉬었다 오는 건 어떤가?”

“괜찮습ㄴ…… 아니, 오후 반차 좀 쓰겠습니다.”

“인사부에 말해두게. 내가 처리해두지.”

“감사합니다. 일단 코드에 대해서 말씀 드리면……”

경태는 백신과의 연결에 대해 몇 가지 당부를 했다. 기껏 해야 긴급 호출을 하지 않고 백신의 힘을 무리하게 쓰지 않는다는 게 끝이었다. 그러면서 전용 접속기기는 기존 접속 장치의 개조하면 된다며 그 방식도 전달했다.

“꽤나 간단하군. 이런 식이어서 불법 패치도 성행하는 건가?”

“저희는 단단히 공지했습니다. 제품의 변형을 통한 부작용은 고객의 책임이죠.”

“여론으로 막는 거 조금 힘드니 대처를 해주게.”

“알겠습니다. 개발부, 홍보부와 협업해서 진행하겠습니다.”

“수고했네. 가는 와중에도 일 얘기를 해서 미안하군. 푹 쉬게.”

“감사합니다.”

경태는 회사를 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설 때까지 긴장을 놓지 않던 그가 문밖을 나서자 바람바지는 소리를 냈다.

“후우우……”

경태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보았다. 듀크 사의 본사. 지금 이 곳에 들어서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경태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다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기분 탓인가. 이제 곧 점심시간이니 사람들 시선이 있는 건 당연했다. 경태는 이마를 문지르며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우선 입맛부터 돌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경태를 유심히 살피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그는 노트에 뭔가를 적었다. 그러더니 해가 질 때까지 그 자리에 남아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

“좀비 묘지. 대개 그렇게 부르고 있어. 다른 건 모르겠지만 언데드 대처 능력을 키우기에는 좋은 곳이라 중반 유저들이 연습용으로 쓰기도 해. 이거 말고는 라피에 초원처럼 큰 이득이 없어서 잘 가지 않는 곳이지.”

니스는 간단한 정보를 넘겨주며 떠났다. 버트는 마차에 오르면서 니스가 전해준 얘기를 곱씹었다.

“그럼 여긴 왜 가는 거지……?”

또 다른 모험이라 생각해도 좋고 스카이 왕국으로 가기 전 치르는 행사라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잘 다녀와.”

마차 창문으로 리아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녀의 품에는 버트가 만든 어둠이 안겨있었다.

“응. 너도 잘 있어.”

버트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거기에는 골드로츠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검은색 일색의 병사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루하다와 어둠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그림자 병사들이었다. 희미한 자아를 품고 있고 둠워퍼나 정령도 아닌 존재였기에 소환물 취급을 하는 듯 했다.

골드로츠는 그림자 병사와 함께 귀국 준비를 했고 버트는 헥실의 무덤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고 보니 몇 명 더 친구가 올 거라 했지?’

버트는 니스의 마지막 전언을 떠올렸다. 누가 올지는 그때 가서 알 거라 말했으니…… 우선 떠나기로 했다.

“근데 퍼드롬 할아버지는 왜 바로 안 오신대?”

버트는 마차가 출발하고 퍼뜩 떠오른 의문을 던졌다. 루하다는 가만히 버트를 바라보았다.

퍼드롬이 남는 목적. 그건 로디아 마을에 있는 블랙스타의 분점을 확인하고 리아주크의 수족들을 재정비하기 위함이었다. 겸사겸사 버트에 대한 추종을 다 잡으려 했다. 그래서 지금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버트를 찬양하고 굿즈 양산에 힘쓰고 있었다.

루하다는 그 사실을 말할까 말까 몇 번이고 고민했다. 자신의 모습을 한 여신상이 있다는 사실에도 난리를 칠 게 뻔한데 그걸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로이첸 왕국의 여왕이 라이칸 한 마리를 데려가려 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일이 있으셔서 그렇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루하다가 작정하고 마음을 다잡았기에 생각을 읽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버트는 알겠다고 하면서 슬쩍 루하다의 팔을 끌어 안았다.

“그때 같아.”

“그렇습니다.”

버트는 루하다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키스를 나누었다. 적어도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지루할 일은 없을 거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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