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93 라이벨 외전 下
* * *
판테스 왕국. 라이는 한 가지 비밀을 풀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다.
“그러니까 여기서……”
라이는 3호를 통해 꿰뚫어 본 공략을 떠올렸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샤만의 해저가 있다고 알려진 바닷가 인근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할 건 해저인과의 만남이었다.
“정말 그 공략이 맞아?”
“제가 꿰뚫어 본 게 맞다면요. 이 근처에서 조개 껍데기가…… 아, 있다.”
누가 봐도 형편없는 쓰레기처럼 보이는 조개 껍데기 하나. 구멍이 송송 뚫려있는 데다 일부가 깨져 있었다. 그저 장식물로 보이는 물건이지만 이건 해저인 한 명이 잃어버린 장신구였다.
“그리고 이제 떡밥을 뿌리고 기다리면 돼요.”
라이는 이 근처에서 잡히는 새우들을 경단으로 만들어 뿌렸다. 그리고 근처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를 따라온 누리는 말없이 옆에 앉았다.
“이러면 정말 샤만의 해저를 공략할 수 있어?”
“네. 실질적인 난이도는 모든 공략불가 지역을 통틀어 가장 낮대요. 다만 호흡이 안 되고 수압이 강한 해저다보니 지형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 공략을 못했을 뿐이구요.”
“흐응, 그래도 1시간에 한 번 잡히는 새우들을 경단으로 만든다니…… 이런 노가다를 할 사람이 어딨다고.”
“덕분에 그 부분은 해결 됐네요. 태공 씨라고 했던가요? 나중에 필요한 게 있다면 말씀 해달라 해주세요.”
“괜찮아. 그 사람은 어려운 사람 도와주는 걸 좋아하니까.”
“그래요? 자선 사업가도 아니고……”
“도움의 연계라고 알면 돼.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그 도움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푼다…… 간단하잖아?”
누리와 라이는 유유자적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잠시 대화가 끊겼고 저 먼 수평선을 보게 되었다.
“라이. 그 애가 그렇게 소중해?”
“예?”
라이는 뜬금없는 질문에 누리를 보았다. 그러다 멋쩍게 웃어보였다.
“소중하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안 하겠죠.”
“너는 친구한테 최선을 다 하는 타입인 거 같아서 물어봤어. 근데 딴 맘도 품고 있나 보네.”
“티가 많이 나요?”
“몇 번 안 본 나도 알겠는데 뭘. 그 애도 알고 있지 않을까?”
“그건 아니에요.”
라이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녀석이 얼마나 바보 같은데요. 머리가 나쁜 건 아니지만 이상한 데서 고지식해요. 그리고 마음은 또 약해서 뭐만 밀어붙이면 그냥 다 받아들인다니까요. 그래서 저나 다른 친구 없었으면 사람들한테 엄청 휘둘리고 다녔을 거예요.”
“그래?”
“네. 그래서”
라이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은근히 바라보는 누리의 시선에 미묘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왜 화나셨어요?”
“화 안났어.”
“아니 뭔가 느낌이……”
“내가 거짓말한다는 거니?”
“아녜요, 죄송해요.”
“알면 됐어.”
“네?”
“저기 반응 온다.”
누리의 손가락질에 라이가 벌떡 일어났다. 보글거리는 거품. 바다에 뿌린 새우 경단을 입에 물고 있는 여인 한 명이 고개를 내밀었다.
*
“진짜 쉽네요.”
“그런 말은 나중에 해. 들리면 어쩌려고.”
해저인. 새우 경단의 맛에 이끌린 그녀는 라이가 내민 조개껍데기를 받고 기뻐했다. 그러더니 두 사람에게 다가오라는 손짓을 하고 방울을 건네주었다. 그것이 바다하피의 깃털처럼 특수한 아이템이란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바다에서 호흡이 가능해진다니! 누리는 반신반의 했지만 라이는 주저없이 바다로 들어섰다.
그렇게 들어서는 데만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샤만의 해저로…… 2명의 남녀가 진입하게 되었다.
*
“예쁘다.”
처음에는 어둠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알알이 박힌 푸른 빛이 보이더니 별이 가득한 밤하늘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곳곳에 기암절벽 같은 바위들과 그 안을 파서 만든 건축물들이 그 빛과 어우러졌다. 특히 건축물들은 옥을 깎아서 만든 건지 반들거려서 푸른빛과 잘 어우러졌다.
가라앉은 고대 신전…… 딱 그런 느낌이었다.
“본래 샤만의 해저는 신을 섬기는 신전이 가라앉아서 만들어진 특수 지형이에요. 샤만은 해저인들이 신들과 교류를 하던 주술사를 부르는 말이래요. 그 샤만들이 살던 신전이었으니 샤만의 해저라는 이름이 붙은 거구요.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신을 샤킬가라고 불렀는데 그것 때문에 신전 자체를 샤킬가라고 부르면ㅅ”
“저기 봐. 다른 해저인들이 우리를 보고 있어.”
“……아마 해저인이 지상으로 올라오면 이런 반응이겠죠. 그들이 보기에는 참 특이하게 생겼으니까요.”
해저인은 얼굴 곳곳에 비늘이 박혀 있었다. 사람과 비슷한 부분은 사지가 달렸단 것 정도…… 그것마저도 기형적으로 길게 뻗어나온 다리 때문에 이질감을 주었다. 여기서 발은 지느러미가 달렸고 끝부분이 엄청나게 길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인어의 하반신처럼 보였다.
“말은 통하는 거지?”
“물론이죠. 저 꼬마랑 얘기하는 거 들었잖아요.”
“아무 소리도 안 들려서 물어본 거였어. 텔레파시 그런 거야……?”
“아뇨. 그냥 고주파죠. 따지고 보면 텔레파시와 비슷하지만 전혀 달라요.”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반쯤 무너진 거대한 신전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생물이 무엇인지 보고 화들짝 놀랐다.
“메두사……?”
“칼라 해변에서 본 게 여기서 온 거였나 봐요.”
뱀머리를 달고 있는 문어들이 가득했다. 다행히 해변에서 본 것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수 십 마리가 있었다.
그때 해저인이 뻐끔거리며 신전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서 다 가져가도 된다고? 진짜?”
해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는 누리를 보았다.
“얘가 생각보다 높은 직위인가봐요……?”
“아까 네가 말한 샤만인 거 아니야?”
“듣고 있었어요?”
“그냥 평소 버릇 나오는 거 같아서 끊었을 뿐이야. 그럼 가자.”
거대한 신전은 왠지 모를 공포를 자아냈다. 마치 큰 생물의 입과 같았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서니 깜빡거리는 청록색 빛이 내부를 밝혀주었다.
“예쁘다.”
“저거다.”
누리는 여기저기 훑어보았고 라이는 단 하나를 보았다. 한 주먹으로 쥘 수 있을 거 같은 검은 보석.
「밤 세계의 보석」
그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이 아이템 때문이었다. 나머지는 버트가 자연스럽게 모험으로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가장 귀찮고 어려울 것 같은 이곳으로 먼저 온 것이다. 그래도 3대 공략불가 지역인데 구태여 이런 곳을 올 필요가 있을까.
라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보석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어떤 기억이 스며들었다.
그건…… 리아주크의 기억이었다.
“어”
라이는 단말마를 내며 나자빠졌다. 주변을 구경하던 누리는 화들짝 놀라 그를 잡아 흔들었다.
“라이? 라이?! 왜 그래!”
라이는 보석을 꼭 쥐고 있었다. 그리고 꿈쩍하지 않았다.
*
“허억……!”
동혁은 헬멧을 벗어던졌다. 한순간 느낀 서늘하고도 소름끼치는 감각. 그건 무언가 자신의 몸을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잠깐이지만 너무 기분이 나빠서 자기 몸을 벅벅 긁었다. 무언가 들어오려다 만 거 같았다. 그런데도 그 반동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뭐야 방금 그건…… 그거…… 설마……?”
동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스마트폰에 손을 뻗었다. 그러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고작 해야 게임일 뿐이야. 아직 사망 사건도 없었고……”
동혁은 스스로를 달랬다. 그런데도 불안감이 지워지지 않았다.
동혁이 본 리아주크의 기억…… 그건 설정된 신으로서의 정보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가 가진 기억이었다.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창조하며 즐겁게 웃고 기뻐했다. 혼자만의 세상을 만들어내어 재밌게 놀았다. 여러 규칙을 세우며 스스로 만족하고 뿌듯해했다.
그런데 그런 인격체가…… 백신에게 갈가리 찢겼다.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괴로워했다. 몸이 찢긴 정신은 사방으로 분산되나 싶더니 몸을 찾아 헤맸다. 그렇게 여기저기 흩어진 정신은 누군가 하나로 긁어모았다. 그렇게 모인 정신은 하나로 뭉쳐졌고 물방울의 형태로 변했다.
문제는 그 과정이었다.
정말 끔찍할 정도로 괴로웠다. 아프다 안 아프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불쾌함의 끝.
무자비하게 사냥 당하는 야생 동물을 보는 기분. 애처롭게 죽어가는 생물을 마주하는 느낌. 정말이지 거북하다 못해 속이 뒤집히는 이상한 감각이었다.
“대체……”
동혁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지금까지 즐겁게 한 게임이 점점 이상하게 변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거기에 동혁이 짝사랑하는 여자가 휩쓸렸다는 것이다.
해결해야 한다. 은송은 이런 일에 휩쓸려서 좋을 게 없었다. 어떻게 발을 담갔다고 해도 그걸 모른 채 게임을 하게 해야 했다.
이건 은송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판타지아를 즐기고 있는 인구가 얼마나 되던가. 외국 사람도 있고 노인도 있었다. 필터링을 건다면 청소년도 할 수 있는 게 판타지아였다. 자칫 잘못하면 게임 자체…… 아니, 듀크 사에 큰 문제가 벌어질 것이다.
다행히 동혁에게는 백신 3호가 있었다. 그에 준하는 힘을 가진 리아주크의 수족도 함께였다.
“리아주크는 그럼 사람인 거야……? 아니면 진짜 잘 만들어진 인공지능인 거야?”
그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지금 그가 해야 할 건 호기심을 채우는 게 아니었다.
근원을 지워야 한다.
마신의 일부를 파괴해야 했다.
*
동혁이 로그아웃 된 뒤 스마트폰에 연락이 왔다. 누리…… 임예진 이름의 여성의 연락이었다. 동혁은 차분히 대답을 하고 다시 로그인했다. 들어와보니 정신을 잃고 주저앉은 누리와 안절부절 못하는 해저인이 함께였다. 그리고 얼마 안가 누리도 깨어났다.
“강제 로그아웃 조치라니…… 무슨 일 있었어? 설마 밤새 게임 하느라 건강에 적신호 온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누리의 질문에 라이는 시원찮게 손짓했다. 누리는 입을 삐죽였다.
“정말 나는 안중에도 없지.”
“무슨 소리에요. 게볼라이아에 대한 정보를 받아내려고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데…… 이것도 다 그것의 일환이라구요.”
“내 말은 그게 아닌데 말이야.”
“네……?”
“됐어. 일단 목적은 이룬 거지?”
“일단은요. 이제 남은 건 이걸 분석하는 거 뿐이에요.”
“신에 대한 정보도 받고 목적도 이루었고…… 이제 남은 건 느긋하게 시간 보내는 거 뿐이네?”
“그렇죠. 이제 돌아가서 마음 편히 있으려고요.”
하지만 라이의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가 귀환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넬하트는 은퇴를 발표했고 라이는 탑주가 되어야만 했다.
*
리아주크의 육신…… 「밤」 세트 아이템에 대한 분석은 착실히 이루어졌다. 간간이 백신 3호가 찾아오기도 했으니 그 구조를 꿰뚫고 이해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치겠네.”
그렇게 알아볼수록 나오는 해답은 버트의 죽음 뿐이었다. 다행히 게임 속 버트가 죽을 뿐이었지만 그로 인해 은송에게 어떤 영향이 미칠지까지 알 수 없었다. 즐겁게 게임을 즐기고 있는 녀석한테 강제로 게임을 접게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어떻게든 기회를 살피기로 했다.
그러다 한 가지 일이 터지고 만다.
“기어코 저질렀구나.”
간만에 만난 버트는 ‘융화’되어 있었다. 그것도 판타지아에 정말 잘 적응된 모습이었다. 정말 묻고 싶은 게 잔뜩 있었다. 그러나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지금 버트는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라이에게 비밀로 하고 싶은 눈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라이 역시 수면 중 녹화를 틈틈이 해놓았다. 라피에 초원에서 있던 자위 사건은 모를 수 없었다. 그로 인해 버트가 이 게임에서 뭘 즐기는지까지 알아버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씨앗이 발아했다.
그 말은 즉 언제든 마신이 깨어나도 이상한 상태가 아니란 소리였다.
대체 뭘한 걸까. 아직 완성도 안 된 육체에 정신이 깃들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버트의 몸에 정신이 깃든다면 데이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씨앗이 움튼 걸까.
당장 씨앗을 추출하고 분석하고 싶었다. 그러면 비밀을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문제는 버트의 곁에 있는 루하다라는 존재가 그걸 허락할 리 없단 점이었다.
“역시…… 내가 품고 막는 수밖에 없나.”
라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차피 보석을 품고 있는 건 라이였다. 나머지 아이템들도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중 하나는 백신이 갖고 있었으니 찾는데 시간이 상당히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나탈리가 신을 모방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마법 실력을 더 키우고 알아내지 못한 비밀들을 알아낸다!
*
“어떡해요, 누나.”
동혁은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예진은 즐거운 마음으로 통화했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한숨부터 쉬었다.
[ 오늘 못 나오는 거야? ]
“게볼라이아에 대한 거 말씀 드리려 했죠, 네. 근데 생각보다 큰일이 났네요.”
[ 왜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별 거 아니기만 해봐. ]
“그 애가 변했어요.”
[ 변해? ]
예진은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 기분 안 좋으면 고기나 먹어야겠네. 술은 하니? ]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구요.”
[ 문제가 아니긴. 일단 와. ]
그렇게 동혁이 예진을 찾아갔을 때 그녀는 이미 약속 장소에 나와있었다.
정말 예쁜 사람이었다. 은은하게 갈색이 번져있는 긴 생머리. 수수하게 차려 입었지만 깨끗한 피부와 또렷한 이목구비 때문에 화려함을 감출 수 없었다. 오히려 평범한 차림이 그녀의 미모를 한 층 끌어올려 주고 있었다. 그 증거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한 두 번 씩 힐끔댈 정도였다.
“누나.”
“이제 왔어? 가자.”
“고기 굽기에는 별로 안 좋은 차림 같은데요.”
“괜찮아, 괜찮아. 얘기는 가면서 들을게.”
“일단 게볼라이아는 판타지아 내부에 프로그램 되어 있는 인공 인격체 중 하나예요. 굳이 따지자면 APC 계통이구요.”
“……그 얘기부터 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두 사람은 간단하게 잔을 나누었다. 동혁은 술을 쭉 들이키며 한숨을 뱉었다.
“그러니까 너무 안일해요. 물론 저였어도 그랬을 거예요. 고작해야 게임인데. 그래서 위험할 게 없는데 과몰입한다고 뭐라 할 거 같다니까요. 그래서 더 갑갑하다구요.”
“그랬구나.”
예진은 고기를 구우면서 빈 잔을 채웠다.
“근데 너 진짜 술 못 마시는 구나……?”
“저는 누나처럼 경험이 풍부하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일까?”
“그야 예쁜 사람들이 그렇잖아요. 여러 남자 만나고 막. 그러니까 적어도 저보단 경험이 엄청나게 많을 테니까…… 저 엠티 가서도 술게임 별로 못하고 방으로 쫓겨났다구요. 얼굴이 잘 생긴 것도 아니고 할 줄 아는 거 그냥 게임 오타쿠인 거 뿐이고……”
동혁은 흐느적거리며 말했다. 예진은 그를 지긋이 보다가 슬쩍 술 대신 물을 따라주었다. 동혁은 물을 쭉 들이키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게임은 많이 해도 술은 많이 못한다구요……”
“그래, 그래. 한 잔 마셔.”
“어윽, 쏠려……”
“그럼 고기도 한 점 먹고. 옳지.”
“어흑, 맛있어……”
동혁은 고기를 으적으적 씹으면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아세요?”
하나는 은송의 사진, 다른 하나는 버트의 사진이었다.
“네가 짝사랑하는 애 사진 아냐? 온라인, 오프라인 안 가리고 좋아한다는 뜻이고?”
“이제 한 명은 없어요.”
“응?”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대체.
“정신이 몸을 바꾼다.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 있어요?”
“비슷한 건 들어봤어. 전원 안 들어온 냉동창고 얘기지?”
“맞아요. 근데 그게 진짜 적용될 줄 몰랐죠, 전.”
동혁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다 빈 잔을 쭉 들이켰다. 예진은 그의 팔을 잡아 내리고 열기가 오른 뺨을 쓰다듬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지금 은송이 버트의 모습으로 변했다구요. 몇 달 안 본 사이에 그렇게 바뀔 수가 있나……? 진짜 다른 사람이에요. 근데 은송인 건 알겠어요. 하지만 생긴 게 달라요.”
“……그게 가능하다고?”
“한 번 보실래요?”
동혁은 사진 하나를 보여주었다. 언젠가 세영이 은송과 카페에서 만났을 때의 사진이었다. 예진은 세영이 생각보다 귀엽게 생겨서 인상을 찌푸렸다가 은송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얘는……”
“그쵸? 문제는 은송과 자주 보던 사람들은 이상하단 걸 몰랐대요. 심지어 걔 부모님도 그렇다더라구요. 그냥 염색이나 좀 하고 있구나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럼 체형은요? 그것도 운동중이구나 할 수 있겠구나. 그럼 얼굴은요? 운동해서 살 빠져서 그렇다고 할 수 있겠구나. 아씨, 모르겠다. 다 모르겠어.”
동혁은 한숨과 함께 테이블에 엎어졌다. 예진은 그의 스마트폰을 들고 사진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진짜란 걸 확인했을 때는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맘 고생이 심했겠구나.”
“심하죠. 심해. 미칠 거 같아요. 뭔가 일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세트템 완성 안 되게 막는 거만으로도 끝이 안 날 거 같아요.”
“확실히 곤란하겠네. 좋아하는 여자애가 위험해진다니…… 너 같은 애들이 좋아하는 시츄에이션 아니야?”
“네……?”
동혁이 헤롱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좋아하는 여자애를 위험에서 구하고 그 계기로 사귀게 된다…… 보통 그런 거 좋아하잖아.”
“그런가…… 그러려나…… 그런 거 같기도 하고……”
동혁은 킥킥 웃으면서 다시 고개를 박았다.
“잘 모르겠네요.”
“근데 그 옆에 있는 애도 친구야? 생각보다 여자애가 많이 있네.”
“걔는 신경도 안 써요…… 훨씬 이쁜 사람 많은데 뭐하러……”
“그럼 걔가 사귀자고 하면 안 사귈 거야?”
“제가 왜요…… 그런 거랑 사귀면 하루도 못 살아요……”
“그럼 내가 사귀자고 하면?”
동혁이 잠깐 흠칫 떨었다. 그러다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네?”
“뭐가? 얘가 사귀자고 하면 사귈 거냐고.”
“아, 아, 아…… 잘못 들어서…… 안하죠. 안 한다니까요.”
“흐흐후. 진짜 많이 취했구나.”
예진은 술 한 잔 쭉 들이켰다.
“우정이 너무 진해지면 애정이랑 헷갈려. 그 반대도 그렇고. 그러니까 그 부분을 확실히 해.”
“……제가 바보도 아니고 우정이랑 애정을 헷갈릴까요.”
“바보 맞으니까.”
예진은 빈 잔으로 동혁의 머리를 꽁 때렸다. 동혁은 발끈해서 고개를 들었다.
“아! 왜요……!”
“간단하잖아. 이미 변해버린 걸 되돌릴 수 없어. 게임을 그만두게 하기도 어려워. 그나마 네가 할 수 있는 건 세트템을 다 모으지 못하게 하면서 시간을 벌고 그 애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게 한다.”
예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머리를 토닥였다.
“끝이지?”
“……끝이네요.”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한 번 쯤은 그냥 생각을 놔버려. 그게 너의 장점이지만 단점이야. 가끔은 생각 없이 질러버려.”
“……그래도 돼요?”
“나도 모르지.”
“예?”
“경험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말이야.”
예진은 그렇게 말하더니 동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찐따가 보기엔 어른스러워 보여도 속좁은 아가씨란다?”
“흐헉?!”
동혁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예진이 귓속말 끝에 귀를 핥았기 때문이었다. 예진은 눈웃음 치며 돌아섰고 동혁은 술이 깨버린 건지 놀란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
“너희는 뭐야?”
“견해. 불명.”
라이의 질문에 3호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신은 인격체가 맞아. 하지만 너희는 뭔가 달라.”
“마신. 제거. 세상. 조율.”
“목적밖에 모르는 구나.”
라이는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정말 부드러운 하늘이었다. 여기서 최대한 바깥으로 나가버린다면 우주가 아닌 투명한 벽에 가로 막혔다. 이것 덕분에 게임이란 걸 알게 해줬지만 이 안에서의 느낌은 도무지 그 사실을 인지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진짜 세상 같았다.
“이런 곳을 지킨다면 너희도 진짜 같은 가짜란 소리일까.”
“이해. 불가.”
“아니 뭐, 생각해보면 가짜라고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하지?”
라이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3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그의 손을 잡았다.
“이게 나의 세상이야.”
그는 3호에게 자신이 3호를 읽었던 것처럼 반대로 자신의 것을 읽게 해주었다. 3호는 덤덤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조금 있다가 손을 뗐다.
“확인.”
“그렇게 놀라지 않네?”
“가정. 확신. 침착.”
“그렇구나. 어쩌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지적인 사람일지도 모르겠네.”
“감사. 인사.”
라이는 큭큭 웃으며 손을 들었다. 시계의 형상을 만들었다.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기다리셨나요?”
곱슬 머리의 남자가 다가왔다. 그를 확인한 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셔터맨 님?”
“저야말로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벨 씨.”
셔터맨과 라이벨. 두 남자는 판타지아에서 만나게 되었다.
*
라이는 셔터맨을 통해 여러 경위를 듣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큐엘과 연락하여 버트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들었다. 그렇게 하나둘 알아가다 보니 셔터맨에게까지 닿게 되었다. 물론 혼자만 알아낸 게 아니었다.
누리와 니스. 두 사람의 인연도 있었다.
“엄청 놀랐어요. 길드에 초청해도 오지 않던 녀석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저를 부를 줄 몰랐거든요.”
“저도 네임드 길드원이실 줄 상상도 못했어요.”
라이는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 본론을 꺼냈다. 그건 셔터맨에게 안 좋은 제안일 수도 있었다.
“현 상황에 대한 모든 증거를 수집하고 퍼뜨릴 거예요.”
“괜찮으시겠어요? 개인이 회사와 맞붙어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아요. 어쩌면 이미 알고 대처를 할 수도 있고요.”
“그건 걱정 마세요. 법적으로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그러면……?”
“지금 셔터맨 님한테는 보이지 않겠지만 확실히 퍼뜨릴 방법이 있어요. 이건 그들이 게임을 운영하는 수단이기도 하고요. 스스로가 만든 수단이 알린 정보예요. 제가 엮일 일은 없어요.”
“그건 다행이네요.”
“반대로 셔터맨 님이야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이 일이 성공한다면…… 정말 최악의 경우 판타지아가 운영 종료를 할지도 몰라요.”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제 친구도 라이벨 씨와 비슷한 뜻을 갖고 있었거든요.”
셔터맨은 카메라를 내려다보며 옅게 웃었다.
“분명 재밌는 게임이고 잘 만든 게임이에요. 두 번 다시 이런 게임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더 무서웠어요. 위상에 취해 실수가 가려지지 않았는가…… 그걸 라이벨 씨의 친구 분을 통해 생각하게 됐어요.”
셔터맨은 사진을 한 장 내밀었다. 해맑게 웃으며 식사 중인 버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정말 못말릴 정도로 음란해요.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는…… 엄청나게 순수해요. 어디 외딴 시골에서 살다 온 것처럼 깨끗하고 순진한 사람이었어요.”
“맞아요. 버트가 좀 그런 기질이 있죠.”
“그래서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바보는 아니니까요.”
“그건 그래요.”
“누리한테서 들었어요. 그 친구를 너무 걱정한다고요.”
“……누나가 그랬어요?”
“네.”
셔터맨은 흐뭇하게 웃었다.
“믿고 있는 만큼 믿어주세요. 어쩌면 라이벨 씨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 수도 있고, 라이벨 씨가 각오한 것 이상으로 큰 각오를 했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라이벨 씨가 희생한 것보다 더 많은 희생을 했을 수도 있고요.”
“……그렇죠.”
“그러니 이제는 자신을 챙기세요.”
찰칵
셔터맨은 사진을 찍었다. 라이벨의 모습을 찍고 그 사진을 내밀었다.
“물론 당신의 계획에는 참여할 겁니다. 첫 걸음이 운영자 암살이란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 줄 아세요?”
“그래봐야 의심가는 플레이어를 PK하는 거 뿐이에요. 그리 거창할 건 없어요.”
“그것만으로도 군침 돌아할 사람이 몇 명 있을 걸요. 어쨌든 저는 함께 하겠습니다. 아마 뜻이 맞는 사람이 더 있을 테니 그 사람들은 제가 설득할게요.”
“부탁 드려요.”
그렇게 판타지아에서는 차근차근 격변이 벌어지고 있었다. 라이가 마신의 부활을 늦추고 게임에서 벌어지는 이변을 수집하는 동안 버트는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