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92 라이벨 외전 中
* * *
라이는 버트를 마법사의 탑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 여기서라면 그녀의 상태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버트와 대화를 나누면서 사그라졌다.
‘대체 이 힘은 뭐야?’
버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묘한 힘이 라이를 끌어당겼다. 무엇이든 갈가리 분쇄하려는 힘도 아니고 라이를 배척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건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과도 같았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가슴을 짓누르는 무언가가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도 위압감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라이를 품으려는 듯한 포근함에 하마터면 푹 빠져들 뻔했다.
‘이것이 마신의 힘인가.’
알면 알수록 무서운 힘이었다. 과연 게임 내에서 대처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버트의 심리가 궁금했다.
정말 즐거운가. 마신의 힘을 품은 상태로 재밌는 것일까. 차라리 그렇다면 방해라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 떨쳐내고 싶어 한다면……? 그때를 위해서라도 신의 힘에 대해 조금이라도 해석해둘 생각이었다.
‘일단 누리 그 사람부터 다시 만나야 하나.’
라이는 버트에게 탑 곳곳을 안내해주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드러커스의 미로에 대한 일로 호출이 생겼다.
라이는 빨리 해결하고 누리를 만나자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눈앞의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
라이는 넬하트의 호출을 받고 최상층으로 이동했다. 라이가 전달 받은 건 마나타 요새로 이동하여 드러커스의 미로의 동태를 경계하란 말이었다. 최근 안 좋은 징조가 느껴진다 했으니 그것 때문인 듯 싶었다.
“……그 전에 데마스 교에 대한 정보부터 주시죠.”
“그건 다녀오면 곧장 줄 테니 출발해라. 여유 시간도 필요한가?”
“하아,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라이는 미심쩍은 얼굴로 넬하트를 보았다. 그를 비롯하여 토착민들이 플레이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단 건 알았다. 그런 상태에서 라이가 10성을 받은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반긴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눈빛을 본 라이는 작게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설마 이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넬하트가 자신을 후계자로 노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라이는 마나타 요새로 이동 후 대략적인 상황을 전달 받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혹시 모를 침공에 대비해 판테스 왕국군과 연계하여 요새를 살피고 있었다.
“이거, 이거. 올 클래스 매지션 아냐?”
그는 9성 마법사이자 플래시 슈터라는 이명으로 알려진 마끼야또였다. 그의 등장에 라이는 귀찮음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같은 이모탈이면서 일방적으로 라이벌 의식을 가졌다. 라이로서는 그저 강해지기 위한 과정일 뿐이었는데 귀찮은 파리가 꼬인 것이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이번에야말로 널 꺾고 부탑주의 자리를 차지하겠어. 두고 보라고.”
“저도 그냥 물러나진 않을 겁니다.”
라이에게 소년만화와도 같은 라이벌 의식은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그저 그런 말로 넘어가기로 했다. 과연 이렇게 말하니 마끼야또가 눈을 부라렸고 다른 마법사들은 그들의 기싸움에 감탄했다.
라이는 설마 이때부터 추종자가 생길 줄은 몰랐다. 그저 이번 일을 끝내고 누리와 접촉해서 신의 비밀을 풀어내겠단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버트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정확히는 블랙 남작에 대한 얘기였다.
‘버트도 왔구나.’
라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후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대형 가고일이 나타났을 때도 그녀의 힘을 생각하고 마음을 놓았다. 애초에 칼라 해변에서 보인 힘만 해도 웬만한 랭커 플레이어를 상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고일 사태가 끝나고도 라이는 버트보다는 넬하트와의 약속부터 생각했다.
‘어차피 이번 사태는 크게 터질 일은 없어. 칼라 해변의 이벤트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일단 메두사의 해체 정보와 데마스 교에 대한 정보부터 얻어야 해’
라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먼 곳을 보았다. 그러다 서서히 요새를 향해 날아오는 가고일 무리를 보았다.
‘그래, 별 일 없을 거야.’
라이의 그런 생각은 얼마 못가 무너졌다. 이윽고 거대 가고일이 등장하고 전투마을 메일드로우가 반파되는 대사건이 벌어진다.
*
“역시 굉장하다니까.”
동혁은 모든 일이 끝나고 마탑으로 돌아갔다. 그 후 접속을 종료하고 즉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살폈다. 한창 드러커스의 미로에 대한 공략과 정보로 불타고 있었다. 특히 판테스 왕국에서 귀족들을 소집하는 것으로 모두가 이번 사태를 주목했다.
어쩌면 리치 귀르디 이상의 대규모 레이드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돌았다.
‘확실히 그렇긴 하지.’
드러커스의 미로가 어떤 곳인가. 3개 공략불가 지역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는 사상 최악의 땅이었다. 특히 운이 아니면 이루어낼 수 없는 공략 난이도는 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 그나마 악몽의 성이나 샤만의 해저가 귀여워 보일 정도였다. 최고 난이도의 지역이라 알려진 만트라 협곡도 공략이 끝난 마당에 이 세 곳은 여전히 공략되지 않았다.
‘물론 그것도 버트가 없을 때의 얘기지.’
악몽의 성 공략은 이미 끝났다. 드러커스의 미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 역시 라이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대강 훑어본 버트의 스테이터스는 괴랄했었다. 거기서 더 성장할 수 있다면 만트라 협곡의 퇴화한 드래곤들도 맨몸으로 때려잡을 것이다.
여기서 걱정해야 하는 건 버트의 상태였다.
‘현실과 동일한 감각. 그건 곧 고통이나 죽음 역시 겪을 확률이 있다는 거야.’
그걸 위해서는 데마스 교에 대한 정보를 알아야 했다. 이 게임에 적용되는 신적인 힘이 무엇인지 분석해야 버트의 상태를 고치거나 호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그때까지 별일 없으면 좋겠는데.’
라이는 우선적으로 드러커스의 미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
“커헉…… 헉…… 헉……”
라이는 12성 마법의 발현 이후 백발의 미녀와 조우했다. 우르간드와의 전투에 힘을 집중하는 바람에 나탈리아라 밝힌 여인에게서 도망칠 수 없었다.
“읏”
라이는 목에서 아찔한 통증을 느꼈다. 이건 판타지아에서 규정한 고통 범위를 넘어섰다. 단순히 목에 담이 오는 수준이 아니라 생살을 가르는 듯한 격통이었다. 라이는 신성 마법으로 목의 아픔을 치유하는 한편 주변을 살폈다.
“여긴……”
“아, 안심해. 내 방이니까.”
목소리의 근원은 조금 먼 곳에서 들렸다. 라이가 고개를 돌리니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나탈리가 보였다. 상당히 이국적인 외모의 미인…… 하지만 도저히 방심할 수 없는 마법사. 이것이 라이가 나탈리에게 내린 결론이었다.
“애완동물이라니. 농담도 심하네.”
라이는 기절하기 직전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 말에 나탈리는 턱을 괴며 바라보더니 싱그럽게 웃었다.
“농담 아닌데. 너 말이야, 제법 신기한 힘을 쓰고 있더라?”
12성 마법, 그건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은 경지였다. 대마법이라 불리는 11성 마법조차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만큼 이건 불가능한 경지란 게 정설이었다.
“신의 힘이야?”
“난 불신론자라서 그런 건 안 믿거든.”
“아하하 너 꽤 재밌네. 역시 널 길들여야겠어. 신을 내 발 밑에 두는 게 소원이었거든.”
나탈리의 미소는 정상이 아니었다. 그녀의 두 눈만 봐도 정상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라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래, 내가 신이라고 쳐. 그러면 네가 그 신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해?”
“물론 아니지. 그래서 굉장한 거 아니겠어?”
“뭐……?”
“자기보다 대단한 존재를 다룬다니…… 얼마나 즐겁겠어? 설사 신이 아니더라도 신의 힘이라고 봐도 되는 굉장한 녀석이야. 그것만으로도 널 길들일 가치는 충분해.”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글쎄…… 죽기 직전까지 두들기면 괜찮으려나.”
라이는 자기 목을 긁적이며 일어났다.
“거절한다면?”
“이런, 농담이었는데 너무 진지하다.”
“누가 자기를 길들인다는데 농담으로 받아들여?”
“그걸 진지하게 듣는 사람도 신기하네.”
“……말장난이나 하자고 잡아온 거야?”
“물론 아니지.”
나탈리는 다리를 꼬며 말했다.
“나와 협력해. 신을 만들어 보자.”
*
“까고 있네.”
라이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다른 지역으로 날아갔다. 혹시라도 그녀가 쫓아올 걸 염려해 주문 방식을 꼬고 꼬았다. 그러면서 여러 곳을 단번에 이동했다.
“미쳤구만 진짜.”
라이는 손부채질을 하며 숨을 골랐다. 회복되자마자 마법을 난사하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서 휴식이라도 할 참이었는데…… 마나 파동이 느껴졌다.
라이는 질린 얼굴로 그곳을 보았다. 나탈리는 방긋 웃으며 나타나 손인사를 건넸다.
“순순히 내 말에 따르는 게 어때? 안 그러면 더 괴로워질 수밖에 없어.”
“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신을 만들겠다고? 미친 거 아니야?”
“그럴만한 근거 자료도 있고 연구 결과도 있어. 그러니 너의 협력만 있으면 될 거야. 신의 힘을 직접 쓰는 너라면 이론에도 정통하겠지?”
“거절할 거야.”
“그럼 널 변이시킬 수밖에 없는 걸?”
“변이?”
라이의 반응에 나탈리가 깔깔 웃었다.
“아하, 모르는 구나? 우리 엠파이어에게 물리면 똑같은 엠파이어가 돼. 다른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뜻이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 인간종보다 훨씬 세지고 마법을 잘 쓰게 되고…… 음, 뭐 좋은 점이 더 많은데?”
“뭐야 그럼 나도 피 빨아먹고 살아야 해? 그리고 내가 피를 마신 녀석은 전염되고?”
“그건 아니지. 그렇게 쉽게 번질 정도로 가벼운 게 아니야. 무엇보다 너는 내가 권속으로 만들기 위해 특별한 조치를 했으니 그냥 평범한 엠파이어와는 엄연히 다른 존재지.”
“그렇구나. 그러면 네 말만 듣게 되는 거네?”
“맞아.”
“그래, 잘 알았어. 저항할 수 없단 거지?”
“그래. 그러니까 협조하는 게 좋아.”
“하, 그래. 알았어. 신을 만든다 쳐. 내가 그걸 어떻게 도와?”
“아주 간단해. 일단 따라 오라고.”
나탈리는 라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짚었다.
“저항하면 알지?”
“그래.”
팟
라이가 열심히 이동한 것이 무색하게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했다. 라이는 좌표를 확인하고 혀를 찼다.
‘스카이 왕국과 멀지 않아. 그렇단 건 블랙 스타와 연결해서 신을 부활시키려는 건가? 분명 리아주크의 수족들이니 당연히 해야 할 행동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탈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마신을 부활시키는 게 아니라 그녀 단독으로 벌이는 짓거리였다. 그걸 확신할 수 있는 건 버트에 대해 모른다는 점이었다. 만일 라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나탈리도 그 자리에서 마신의 기운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간 셀기디어는 버트와 전투를 벌였고 마신의 기운에 노출되어 사망했다. 이 사실을 모르는 나탈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어느 유적지에 도착했다.
“여긴……”
살리마 왕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베즈웍 유적지. 분명 유명한 관광지였지만 모종의 사고로 외면 받는 곳이었다. 이 장소에 의문을 품은 순간 건물 지하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탈리를 따라가서 보게 된 건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
솔란의 탑. 거기서 행하는 실험보다 좀 더 노골적인 실험체들이 많았다. 그것들 하나하나 훑어본 라이를 향해 나탈리가 머리를 불쑥 디밀었다.
“어때?”
“어떠냐니……”
“네가 봤을 때 신이 만들어질 거 같아?”
“조잡해.”
라이는 단언했다. 지금 이곳에서 보고 있는 모든 게 솔란의 탑에서도 충분히 재현할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획기적인 것도 있었지만 진부하고 결과가 뻔한 실험도 있었다.
“생물과 생물을 융합해서 신을 만들어내겠단 시점에서 실험은 글러먹었어.”
“그래? 그럼 다른 방법이 있어?”
“나야 모르지. 신의 근원을 뜯어보지 않는 한 신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길이 없거든.”
라이는 버트의 배에 심어진 마신의 씨앗을 떠올렸다. 그의 말은 반쯤은 진심이었다. 만일 씨앗이 버트의 뱃속에 없었다면 진즉 마법으로 분해했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방법이 없다는 거야?”
“포기 해. 포기하면 편해.”
“나 참, 이러면 널 기껏 데려온 의미가 없잖아~”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야. 직접적으로 신의 일부와 융합하지 않는 한 이런 부산물로는 어림도 없어.”
라이는 혀를 차며 지금까지 만들어진 실험체들을 보았다. 그러면서 ‘주머니’를 가동함과 동시에 약식으로 줄인 순간이동 주문을 읊조렸다.
“그러니 이런 건 하지 마.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튀어나온 거 때문에 지상에서 얼마나 고생한지 알아?”
“아, 혹시 머리 셋 달린 멍멍이 말하는 거야? 내가 아끼던 녀석이긴 했는데 뭐, 어쩔 수 없네.”
“감상이 고작 그거야? 진짜 상종도 하기 싫네.”
“말 참 심하게 하네. 그래서 이런 모방물이 아니라 신의 일부를 쓰면 된다는 거지?”
“……그렇지?”
“뭐, 좋아. 아주 좋은 조언이야. 그러니 그 조언을 바탕으로 뭔가를 만들어 보라고.”
“이야, 안 된다고 말했는데도 하라고 하니 이 무슨 생떼야.”
“그야 나는 내가 원하는 건 가질 거거든.”
나탈리의 미소에는 묘한 광기가 섞여있었다. 라이는 그 웃음을 보고 질색했다.
“그래서…… 신을 가지시겠다?”
“맞아. 가질 거야. 그 어떤 것도 날 만족시키지 못했어. 희대의 합성 생물이란 것도 시시하기 그지없었고 신의 일부로 만든 장비도 재미없었어.”
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넌 그 어떤 걸로도 만족 못해. 신을 만들어? 그러고 그걸 가져? 그걸로 끝날 양반은 아니겠네.”
라이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주변의 마나가 일렁였다.
“뭐야? 도망치려고? 내 권속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그래?”
“해볼 테면 해보라고.”
팟
라이는 사라졌다. 나탈리는 코웃음 치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녀는 라이에게 심어둔 힘을 발현했다. 이제 그는 스스로 자신을 찾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머리를 자근자근 밟아주며 받아주면 되었다.
그때까지 라이가 한 말을 곱씹으며 다음 실험에 대해 생각했다.
‘신의 일부.’
나탈리가 생각한 건 하나였다.
마신의 씨앗을 품은 그릇. 그게 필요했다. 그리고 목표를 한 단계 낮춰야 했다.
신을 만들 수 없다면……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본다. 지금까지 너무 먼 거리를 본 것일지도 몰랐다.
‘좋아, 미리 준비를 해볼까.’
*
라이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오자마자 몸 속의 저주를 제거했다. 상당한 수준의 신성 마법이 아니고서야 벗겨지기는커녕 흠집도 못낼 저주였다. 하나의 존재를 재탄생시키는 일이니 그 정도 수준은 각오했다.
츠르릇
그 후 라이가 꺼낸 건 그들이 가져온 신의 모방물이었다. 라이가 그렇게 말하긴 했어도 그들의 성과는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100퍼센트까지는 아니어도 거의 완벽에 근접해있었다.
“무지막지하구만.”
라이는 혀를 차며 그것을 분석했다. 버트의 몸을 훑어볼 기회가 없었으니 이걸 최대한 잘 활용해야 했다.
스스슷
코드에 근접.
내부의 데이터 확인.
세계의 비밀……
그 순간 라이는 털이 쭈뼛 섰다.
“오류.”
백색의 여인. 그녀는 갑작스레 나타나 라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는 본능적으로 마법을 억제했다. 왠지 모르게 그녀 앞에서 마법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탈리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게 뭐야 대체?’
라이가 꿈쩍하지 않으니 3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버트와 비슷하지만 다른 경우. 아니, 다른 형태의 오류였다. 이번에도 3호는 의아함을 느꼈다.
플레이어가 맞다. 하지만 그가 가진 힘은 토착민보다 강했다. 플레이어가 가져선 안될 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게 비정상적인 형태로 입수한 것도 아니었다.
“분석.”
3호는 라이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라이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3호는 그의 반응에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인식?”
지금 그녀는 이 세계에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토착민도 볼 수 없어야 했다. 그녀를 볼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었다.
플레이어나 토착민도 아니거나.
신이거나.
“확인.”
라이는 미지의 두려움을 억누르며 손을 내렸다.
“잠에서 깨어나는 번개여.”
약식 대마법, {인드라}
라이의 손에서 뿜어진 적색의 번개가 뿜어졌다. 비록 약식으로 시전했다고 해도 11성 마법이었다. 3호는 고개를 틀어 그걸 보더니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았다.
스륵
‘어?’
마법이 약해졌다!
마법에 수준급에 이른 라이조차 캐스팅이 필요했다. 그런데 상대는 그런 전조조차 없었다.
진짜 위험하다.
라이벨은 필사적으로 11성 마법과 12성 마법을 계산했다.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걸 색출하고 준비하기까지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 필사적인 연산이 끝나고 나니 이질감이 들었다.
3호가…… 움직이지 않았다.
“응……?”
3호는 라이를 빤히 보기만 할뿐 다른 대응은 하지 않았다.
“저기, 혹시 무엇 때문에 찾아오신 거죠……?”
그녀는 라이의 질문에도 답하지 않았다. 마치 인형처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이렇게 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임무. 오류. 수정.”
그녀의 단답에 라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간신히 나온 답이 이상한 것들이라니.
“아니, 대체 어떻게 되먹은……”
라이는 말을 하다 말고 대담한 행동을 벌였다. 그녀의 팔을 잡고 마법으로 분석을 시작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왜 그랬는지 모를 정도로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 덕분에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백신 3호.”
그녀는 이 세계에 퍼져있는 여러 백신 중 하나. 그리고 백신은 판타지아를 조율한다.
“그래, 그래서 운영진이 적극적으로 제재하는 게 보이지 않았어.”
아주 잠깐 얻은 정보는 귀했다. 라이가 그걸 알자마자 3호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당신의 임무는 오류를 확인하고 수정하는 역할이군요? 간단히 말하면 조율이지만 너무 광범위해요. 그래서 지금 오류 때문에 고민하고 있고요.”
라이는 관상가라도 된 것처럼 분석의 결과를 냈다. 3호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마신의 씨앗.”
끄덕.
“다른 하나는 저군요?”
끄덕.
라이가 이해한 정보는 백신의 존재와 역할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금 엿본 업적. 그들이 마신을 죽인 걸 알았다.
여기서 이해가 안 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왜 버트를 그냥 뒀어요?”
“마신?”
“예. 당신의 역할은 마신을 저지하는 게 아닌가요? 당신의 존재 자체가 마신을 억제하는 것인데……”
“계산.”
3호는 눈을 감았다. 라이는 그 틈에 다시 그녀의 팔에 손을 얹었다.
마신의 처단. 하지만 부활을 막는 것까지는 그녀의 역할이 아니었다. 그건 다른 백신도 마찬가지인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3호만큼은 마신의 부활을 막을 의지가 없어 보였다. 그녀가 버트를 찾은 것도 그저 오류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버트가 정상적인 경로로 만들어진 결과물이란 걸 알게 되니 그 임무가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그럼 마신의 부활은?
여기서 라이는 몇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었다.
첫 번째, 마신의 부활이 세계의 흐름에서 정당하게 발현되면 막지 않는다.
두 번째, 마신의 사살을 성공한 시점에서 그들의 임무는 끝이 났다.
마지막 세 번째.
마신이 되살아나는 건 막지 않는다.
아직은 전부 알기 어려웠다. 3호가 가진 정보량은 방대했다. 라이가 먼저 손을 뗄 정도로 엄청난 데이터였다.
“후우……”
라이는 3호를 바라보았다. 3호는 계산이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부정. 마신. 억제.”
“당신의 역할은 그저 오류의 수정이군요.”
“수긍.”
“그렇군요. 그럼 제가 그 일을 도와드릴게요. 지금처럼 오류가 일어난다면 혼자 해결하지 못하시잖아요?”
“의문?”
3호는 대답을 하고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 협력. 확인.”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었다. 라이는 어디까지나 던져보았을 뿐이었다. 그녀가 이 제안을 받을 줄도 몰랐고 이렇게 순조롭게 될 줄도 몰랐다.
운이 좋았다. 그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라이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3호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가 보았을 때 라이의 유연한 사고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백신을 인지할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그랬기에 라이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후유, 그럼 이제……”
콰장창
“으읏……!”
“치, 침입자다!”
라이는 밖에서 들리는 소란에 본능적으로 마법을 펼쳤다.
대마법, {호루스}
11성 마법치고는 계산식도 간단했고 빠르게 발휘할 수 있었다. 이건 아이템 코드를 찾으며 만들어낸 마법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3호는 라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라이는 그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연구실을 나섰다. 지금 이곳을 찾은 건 다름 아닌 나탈리였다.
“너, 어떻게 저주를 지운 거야?”
“마신. 수족. 후손.”
나탈리가 마법사들을 제치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라이는 주변 마법사들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들어와.”
“그래. 찬찬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라이는 마법사들을 한 번 보고 천장을 보았다. 넬하트가 반응이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연구실로 들어온 순간…… 라이는 아차 싶었다.
백신 3호. 그녀야말로 나탈리가 원하던 게 아닌가!
그러나 나탈리는 3호를 곁눈질만 하고 라이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푼 건데?”
“그냥 풀었지.”
“정말 비협조적이네.”
“협조하면 뭐가 달라져?”
“흥. 정말 귀여운 구석이 없어.”
나탈리는 3호를 가리켰다.
“그럼 이거 나 줘.”
“싫어.”
“거부.”
대답은 동시에 나왔다. 나탈리는 눈가를 꿈틀거렸다.
“그래? 그럼 나도 방법이 있지.”
라이는 나탈리가 싸울 준비를 하자 대안을 내놓았다.
“그걸 준다고 하면 여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물론이지. 가끔 놀러올게.”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한 거 같은데?”
“누구도 해치지 않고 납치도 안해. 이상한 짓도 안 할게. 됐어? 나 많이 양보했다?”
라이는 머리가 아팠다. 애초에 3호는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존재였다. 지금 이런 말을 한 건 나탈리가 가진 패를 꺼내보기 위함이지 정말 넘겨주려는 건 아니었다.
그때 3호가 말했다.
“협상.”
“예?”
“동행. 협상.”
“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연달아 일어났다. 3호는 갑작스레 나탈리에게 다가섰다. 그 반응에 나탈리는 의기양양해졌다.
“이거 백신 맞지? 설마 마신을 죽인 녀석이 여기에 있을 줄 몰랐어.”
라이는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없었다. 3호의 잇따른 돌발행동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3호 씨. 정말 그걸로 되겠어요?”
“협상. 수긍. 제한.”
“받아들이지만…… 제한적으로 하시겠다는 뜻인가요?”
끄덕
“그렇다는데 어쩔래? 네가 바라는 일부를 채취하는 것도 못할 텐데.”
“엉? 내가 얘를 채취해서 뭐해?”
“응……?”
“난 그저 마신을 죽인 녀석을 품었다는 걸로 만족해. 구태여 이것까지 건드릴 정도로 한가하지 않단 말이지.”
“아아, 그래……?”
나탈리는 방실방실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라이는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야.”
“으응~”
“그릇을 노리는 거냐?”
“엉? 어떻게 알았어?”
나탈리는 라이의 차갑게 식은 두 눈을 보았다. 나탈리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한 번 해보게?”
“너, 나 이길 수 있겠어?”
“그러는 너는? 조달자한테 쩔쩔 맨 주제에 몸도 성치 않잖아?”
두 사람의 기 싸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라이가 입술을 달싹이고 나탈리가 손을 내린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라이의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나다.”
“탑주님?”
문이 열렸다.
마탑주 넬하트. 그는 라이와 나탈리를 한 번씩 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뭘 하고 있는 게냐?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개국 선포하면서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알고 있는 거냐?”
“……예? 무슨 소리세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두 사람이 동시에 의문을 던졌다.
넬하트는 혀를 쯧쯧 찼다.
“여색에 빠져서는…… 안 그래도 그레노를 비롯한 붙잡힌 마법사들에 대해 협상을 하려 한다. 너도 와야 하니 빨리 정리해라.”
“여색이요? 아니, 이 썅년이 지멋대로 온 거라구요! 그리고 개국이라뇨? 드러커스의 미로에서? 왜요? 그리고 왜 제가 그 자리에 가요?”
“뭐 썅년?! 말 조심해! 그리고 미로에서 개국 선포? 아빠가 왕이 된 거야? 그럼 난 공주님이고?”
“거 참. 정리 끝나면 올라 오거라.”
“아니! 대답은 해주고 가야지 영감탱아!!”
넬하트는 혀를 차며 연구실을 나섰다. 라이와 나탈리는 어정쩡한 분위기에서 이도저도 못했다. 그러다 서로 몇 가지 협상을 하게 됐다.
* * *